맨위로가기

아라카와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라카와 사건은 1969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다이요 웨일스에 지명된 아라카와 다카시가 입단을 거부하고, 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아라카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을 희망했지만, 다이요의 지명을 받자 입단을 거부하고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야쿠르트에 입단했지만, 다이요 팬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습격당해 선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드래프트 제도와 선수 권리, 직업 선택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프로 야구 선수 계약 방식과 야구 협약 개정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다이요 웨일스와 와세다 대학과의 관계 단절, 구단 운영 방식 변화 등 일본 프로 야구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70년 1월 - 1969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1969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Z》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고, 코스타 가브라스, 존 보이트, 제인 폰다, 잭 니콜슨, 다이앤 캐넌이 각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 1970년 1월 - 1969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
    1969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제트》가 작품상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훔친 키스》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영화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 다이요 웨일스 - 1960년 일본 시리즈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다이요 웨일스가 아키야마 노보루의 활약과 짜임새 있는 경기 운영으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를 4연승으로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4경기 모두 1점 차 승부 끝에 곤도 아키히토가 MVP를 수상한 시리즈이다.
  • 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심판 집단 폭행 사건
    1982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한신 타이거스 코치진과 선수단이 심판 판정에 불복하여 심판진에게 폭력을 행사, 코치진 구속 및 리그 중징계와 함께 프로 스포츠계 윤리 의식 부재 및 심판 보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건이 요코하마 스타디움 심판 집단 폭행 사건이다.
  • 1969년 11월 - 아폴로 12호
    아폴로 12호는 1969년 11월 인류의 두 번째 달 착륙에 성공하여 과학 실험 장비를 설치하고 달 암석을 채취했으며, 발사 중 낙뢰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완수하고 지구로 귀환했다.
  • 1969년 11월 - 미주인권협약
    미주인권협약은 미주기구 회원국 간 인권 조약으로, 미주 지역 내 개인의 자유와 사회 정의 시스템을 강화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 보호를 목표로 시민적, 정치적 권리 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까지 보장하며, 미주인권재판소 해석 및 의정서를 통해 내용이 확대되어 왔다.
아라카와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아라카와 사건
일본어 표기荒川事件 (あらかわじけん)
발생 시기1977년 ~ 1978년
관련 인물아라카와 히로시
나가시마 시게오
사건 내용
배경1977년 요미우리나가시마 감독이 아라카와를 코치로 초빙
주요 내용아라카와 코치의 지도 방식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 증가
나가시마 감독과 아라카와 코치 간의 갈등 심화
팀 성적 부진과 맞물려 아라카와 코치 해임 요구 발생
결과아라카와 코치 사임, 요미우리 팀 내 갈등 심화, 나가시마 감독의 지도력 약화
사건 영향
팀 내부요미우리 팀 분위기 쇄신 및 코칭 시스템 변화
일본 프로야구지도 방식 및 선수단 운영에 대한 논의 활성화
기타
관련 용어촌(村) 사회
이지메 (집단 괴롭힘)
참고 자료관련 서적 및 다큐멘터리

2. 드래프트 지명

196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와세다 대학의 강타자였던 아라카와 다카시가 지명 후보로 주목을 받았다.

아라카와는 양아버지인 아라카와 히로시가 요미우리의 코치라는 점[4], 또한 도쿄 6대학 야구의 홈 구장인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본거지로 하는 구단이 아톰즈(1970년부터 야쿠르트 아톰즈)라는 점 때문에, 드래프트 회의 전부터 "요미우리, 아톰즈 외에는 거절"이라고 명언했다.

당시 드래프트에서는 예비 추첨에서 상위 추첨을 뽑은 구단부터 순서대로 원하는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으며, 현재와 같은 중복 지명에 따른 추첨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 구단이 지명한 선수는 지명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요미우리는 11번째, 아톰즈는 9번째였으며, 적어도 아톰즈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뜻밖의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다.

1번 지명 구단인 주니치, 2번 지명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는 아라카와를 강행 지명하지 않았지만, 3번 지명 구단인 다이요 웨일스는 아라카와가 제시 금액에 따라 입단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결과적으로는 가짜 정보였다) 지명을 강행했다.

지명 순서가 정해진 시점에서 다이요는, 주니치가 야자와 겐이치, 한신이 오타 고지를 지명할 것으로 예상하여, 그럴 경우 우에다 지로를 지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신이 오타가 아닌 우에다를 지명하면서 다이요는 오타를 지명할지 여부를 선택해야 했다. 다이요의 본거지였던 가와사키 구장은 공장이 많았고, 오타를 획득해도 여성 팬의 방문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구단주 나카베 겐키치는 구단 대표 모리 시게오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력파인 아라카와를 획득하기로 한다. 또한 모리가 와세다 야구부의 전 감독이었다는 점, 아라카와의 은사인 감독 이시이 도키치로가 모리의 제자라는 점도 지명으로 이어진 설도 있다.[1]

다이요의 지명으로 아톰즈나 요미우리는 아라카와를 지명할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아라카와의 야구 인생의 암전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아톰즈는 센다이 상고의 포수인 야에가시 유키오를, 요미우리는 와세다 대학의 투수였던 고사카 도시히코를 각각 1순위 지명했다.

2. 1. 아라카와 다카시의 입장

196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와세다 대학의 아라카와 다카시는 주목받는 선수였다.[4] 아라카와는 양아버지인 아라카와 히로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였고,[4] 도쿄 6대학 리그의 홈 구장인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아톰스(1970년부터 산케이 아톰스)가 있었기 때문에 드래프트 회의 전부터 "요미우리와 아톰스 이외는 거부한다"고 명시했다.[1]

당시 드래프트는 예비 추첨으로 최고 순위를 뽑은 구단부터 차례로 선호하는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고, 중복 지명 추첨 제도는 없었다. 요미우리는 11번째, 아톰스는 9번째로 지명하게 되어, 아라카와가 아톰스에 입단하려면 의중 외의 8개 구단에서 지명되지 않아야 했다. 1번째 지명을 한 주니치와 2번째 지명을 한 한신 타이거스는 아라카와의 지명을 강행하지 않았으나, 3번째인 다이요 웨일스가 아라카와는 제시액에 따라 입단을 결정한다는 (거짓) 정보를 얻어 아라카와의 지명을 강행했다.[1]

다이요 구단주 나카베 겐키치는 가와사키 구장은 공장이 많아 여성 팬의 입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구단 대표 모리 시게오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라카와를 지명했다. 모리가 와세다 야구부의 전 감독이었고, 아라카와의 은사인 이시이 도키치로가 모리의 제자인 것도 지명으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1][6] 결과적으로 아톰스와 요미우리는 아라카와를 지명할 수 없게 되었다.

2. 2. 다이요 웨일스의 지명 강행

196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와세다 대학의 아라카와 다카시가 지명 후보로 주목받았다.[6][1] 아라카와는 양부 아라카와 히로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였고,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아톰스(1970년부터 산케이 아톰스)가 있었기에 "요미우리와 아톰스 이외는 거부한다"고 명시했다.[6][1]

당시 드래프트는 예비 추첨으로 최고 순위를 뽑은 구단부터 선호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고, 중복 지명 시 추첨 제도가 없어서 다른 구단이 지명한 선수는 지명하지 못했다.[6][1] 요미우리는 11번째, 아톰스는 9번째로 지명하게 되어 아톰스에 입단하려면 의중 외 8개 구단에서 지명되지 않아야 했다.[6][1]

1번째 주니치와 2번째 한신 타이거스는 아라카와의 지명을 강행하지 않았으나, 3번째인 다이요 웨일스가 아라카와는 제시액에 따라 입단을 결정한다는 정보(거짓 정보)를 얻어 아라카와의 지명을 강행했다.[6][1]

다이요는 주니치가 야자와 겐이치, 한신이 오타 고지를 지명한다고 예상하여 우에다 지로를 지명하려 했으나, 한신이 우에다를 지명하면서 오타를 지명할지 기로에 섰다.[6][1] 가와사키 구장은 공장이 많아 여성 팬의 입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오너 나카베 겐키치가 모리 시게오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라카와를 획득하게 되었다.[6][1] 모리가 와세다 야구부 전 감독이었고, 아라카와의 은사 이시이 도키치로가 모리의 제자인 것도 지명으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6][1]

결과적으로 아톰스와 요미우리는 아라카와를 지명할 수 없게 되었다.[6][1] 아톰스는 야에가시 유키오, 요미우리는 고사카 도시히코를 각각 1순위로 지명했다.[6][1]

3. 트레이드를 전제로 한 입단

아라카와 다카시는 드래프트 직후 다이요 웨일스 입단을 거부하고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4] 이로 인해 다이요 팬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고, 이는 후술할 상해 사건으로 이어졌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카와는 1970년 2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다음 드래프트를 기다렸다.[4]

그동안 다이요는 현지 법인을 통해 아라카와에게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의 구단도 아라카와를 지명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다이요는 요미우리, 야쿠르트와 극비 협상을 진행하여 아라카와를 일단 다이요에 입단시킨 후 원하는 팀으로 이적시키는 '삼각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요미우리는 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에서 제외되었고, 야쿠르트는 아라카와의 와세다대학 선배인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하여 아라카와 영입을 준비했다. 미하라 오사무는 감독 취임 조건으로 아라카와 영입을 내걸었다.

1970년 10월 7일, 드래프트 지명 선수와의 협상 마감 이틀 전, 아라카와는 다이요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4] 그러나 입단 발표 자리에는 아라카와는 불참했고, 모리 구단 대표와 스카우트 부장만 참석했다.[4] 같은 날 야쿠르트는 다이요에 트레이드를 신청했고, 12월 26일 아라카와의 야쿠르트 이적이 발표되었다.[4] 당초 젊은 투수와의 트레이드가 거론되었으나, 선수 본인의 심정을 고려하여 금전 트레이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4]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은 노골적인 삼각 트레이드에 항의하며 다이요에 아라카와를 연습에 참가시킬 것을 요청했다.[4] 이에 따라 아라카와는 다이요 입단 직후 연습에 참가하여 다이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4][2] 아라카와의 등번호는 다이요와 야쿠르트 모두 '''3'''번이었다.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아라카와가 다이요에 입단하면서, 다이요는 드래프트 사상 그 해에 지명한 모든 선수가 입단한 최초의 구단이 되었다. 아라카와는 염원을 이루었지만, '드래프트 파기'라는 비난을 받았고, 센트럴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1개월간 공식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3. 1. 입단 거부와 야구 유학

아라카와 다카시는 드래프트 직후 다이요 웨일스 입단을 거부하고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4] 이로 인해 다이요 팬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고, 이는 후술할 상해 사건으로 이어졌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카와는 1970년 2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다음 드래프트를 기다렸다.[4]

그동안 다이요는 현지 법인을 통해 아라카와에게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의 구단도 아라카와를 지명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다이요는 요미우리, 야쿠르트와 극비 협상을 진행하여 아라카와를 일단 다이요에 입단시킨 후 원하는 팀으로 이적시키는 '삼각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요미우리는 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에서 제외되었고, 야쿠르트는 아라카와의 와세다 대학 선배인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하여 아라카와 영입을 준비했다. 미하라 오사무는 감독 취임 조건으로 아라카와 영입을 내걸었다.

1969년 10월 7일, 드래프트 지명 선수와의 협상 마감 이틀 전, 아라카와는 다이요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4] 그러나 입단 발표 자리에는 아라카와는 불참했고, 모리 구단 대표와 스카우트 부장만 참석했다.[4] 같은 날 야쿠르트는 다이요에 트레이드를 신청했고, 12월 26일 아라카와의 야쿠르트 이적이 발표되었다.[4] 당초 젊은 투수와의 트레이드가 거론되었으나, 선수 본인의 심정을 고려하여 금전 트레이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4]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은 노골적인 삼각 트레이드에 항의하며 다이요에 아라카와를 연습에 참가시킬 것을 요청했다.[4] 이에 따라 아라카와는 다이요 입단 직후 연습에 참가하여 다이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4][2] 아라카와의 등번호는 다이요와 야쿠르트 모두 '''3'''번이었다.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아라카와가 다이요에 입단하면서, 다이요는 드래프트 사상 그 해에 지명한 모든 선수가 입단한 최초의 구단이 되었다. 아라카와는 염원을 이루었지만, '드래프트 파기'라는 비난을 받았고, 센트럴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1개월간 공식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3. 2. 삼각 트레이드 시도와 야쿠르트 이적

아라카와 히로시는 드래프트 직후 다이요 웨일스 입단을 거부하고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4] 1970년 2월에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다음 드래프트를 기다렸다.[4] 그 사이 다이요는 현지 법인을 통해 아라카와와 계속 접촉을 시도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의 구단도 아라카와를 지명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다이요는 요미우리, 야쿠르트 아톰스와 극비리에 협상을 진행, 일단 다이요에 입단시킨 후 원하는 구단으로 이적시키는 삼각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요미우리와는 조건이 맞지 않아 결렬되었지만, 야쿠르트는 와세다 대학 OB인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하여 아라카와를 설득하려 했다. 미하라 오사무는 감독 취임 조건으로 아라카와의 입단을 내걸었다.[7]

1970년 10월 7일, 드래프트 지명 선수와의 협상 마감 이틀 전, 아라카와는 다이요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4] 그러나 입단 발표 자리에는 아라카와 대신 모리 구단 대표와 스카우트 부장만이 참석했다.[4] 같은 날 야쿠르트는 즉시 트레이드를 신청했고, 12월 26일 아라카와의 야쿠르트 이적이 발표되었다.[4] 당초 젊은 투수와의 트레이드가 검토되었으나, 선수의 심정을 고려해 금전 트레이드로 변경되었다.[4]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은 노골적인 삼각 트레이드에 항의하며 다이요에 아라카와를 연습에 참가시킬 것을 요청했다.[4] 이에 따라 아라카와는 다이요 입단 직후 연습에 참가하여 다이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7][2] 다이요와 야쿠르트에서 모두 등번호 '''3'''번을 달았다.

4. 상해 사건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요로부터 지명을 받은 아라카와 히로시는 입단을 거부했고, 그 후 "기억해둬라", "야구를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라는 협박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4] 피 묻은 편지와 면도날이 든 봉투가 연일 투척되는 등 괴롭힘을 당했다.[4] 하지만 아라카와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이요 구단도 경비를 붙이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드래프트 회의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1970년 1월 5일 밤, 아라카와는 자택 근처에서 개의 산책을 하던 중 열광적인 다이요 팬으로 보이는 2인조 괴한에게 습격당했다.[3][4] 곤봉 모양의 흉기로 구타당한 아라카와는 급히 입원했고, 후두부 및 왼손 중지 골절로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다.[9][10][3][4] 아라카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단 한 방에 정신이 멍해졌다. 마지막에는 여러 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발로 차이기도 했다.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라고 말했다.[4]

경시청은 다이요 입단을 거부한 아라카와를 원망하는 자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고 수사했지만,[4] 상해 실행범은 발견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현재까지도 진범은 불명인 상태이다.

1970년 1월 5일 밤, 아라카와 다카시는 괴한에게 습격당해 후두부와 왼손 중지 골절로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9][10] 이 사건으로 아라카와는 왼쪽 눈의 시력이 저하되었고, 선수 생활을 조기에 은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4]

습격 사건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현재까지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4. 1. 사건 발생 배경과 경과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요로부터 지명을 받은 아라카와 히로시는 입단을 거부했고, 그 후 "기억해둬라", "야구를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라는 협박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4] 피 묻은 편지와 면도날이 든 봉투가 연일 투척되는 등 괴롭힘을 당했다.[4] 하지만 아라카와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이요 구단도 경비를 붙이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드래프트 회의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1970년 1월 5일 밤, 아라카와는 자택 근처에서 개의 산책을 하던 중 열광적인 다이요 팬으로 보이는 2인조 괴한에게 습격당했다.[3][4] 곤봉 모양의 흉기로 구타당한 아라카와는 급히 입원했고, 후두부 및 왼손 중지 골절로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다.[9][10][3][4] 아라카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단 한 방에 정신이 멍해졌다. 마지막에는 여러 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발로 차이기도 했다.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라고 말했다.[4]

경시청은 다이요 입단을 거부한 아라카와를 원망하는 자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고 수사했지만,[4] 상해 실행범은 발견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현재까지도 진범은 불명인 상태이다.

4. 2. 사건의 영향과 미해결

1970년 1월 5일 밤, 아라카와 다카시는 괴한에게 습격당해 후두부와 왼손 중지 골절로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9][10] 이 사건으로 아라카와는 왼쪽 눈의 시력이 저하되었고, 선수 생활을 조기에 은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4]

습격 사건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현재까지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4]

5. 사건의 영향

아라카와는 '드래프트를 찢었다'라는 것으로 세간에서 비난을 받아 센트럴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1개월 간 공식 경기 출장 정지의 처벌을 받았다.

아라카와의 프로 입단을 둘러싼 문제를 계기로 야구 협약이 개정되어 신인 선수의 첫 해 이적이 금지되었다(그러나 이후에 이 규정은 '개막 이전 이적 금지'로 완화되었다. 에가와 사건에가와 스구루가 마지막으로 이 규정에 의해 개막 후 신인이 요미우리로 이적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78년 2월 16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와 직업 선택의 자유의 관계에 대해 당사자로써 참고인으로 출석했다[8].


  •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아라카와가 다이요에 입단한 것으로 인해 다이요는 드래프트 사상 처음으로 당해에 지명한 선수가 모두 입단한 첫 구단이 되었다.
  • 아라카와 사건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꼬리를 끌고 다녀 다이요 웨일스 및 후신 구단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200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마쓰모토 게이지로와 호소야마다 다케시를 지명하지 전까지 40년 간 와세다 대학 출신의 선수를 지명하는 일이 없었다. 요코하마의 드래프트 지명이 가능하게 된 계기는 요코하마의 팀 운영 총괄을 맡은 무라카미 다다노리와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감독이었던 오타케 아쓰요시가 사회인 시절에 친분이 있던 사이로 요코하마와 와세다 사이의 루트가 재확립되었던 것이 크다. 드래프트 회의 이후 구단 사장이었던 사사키 구니아키는 이를 보고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표현했다.
  • 현재는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으며 1995년 긴테쓰 버펄로스후쿠도메 고스케를 1순위로 지명했을 때 입단을 꺼려했던 후쿠도메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내걸어 협상한 긴테쓰가 커미셔너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았다(후쿠도메는 긴테쓰에 입단하지 않고 3년 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다).

아라카와의 프로 입단을 둘러싼 문제로 인해 야구 협약이 개정되어 신인 선수의 첫 해 이적이 금지되었다. 다만 1979년부터 규정이 개정되어 "개막 전 이적 금지"로 완화되었다. 에가와 스구루는 이른바 "에가와 사건" 당시, 최종적으로 이 규정에 따라 개막 후에 신인으로서 요미우리로 이적하는 형태를 취했다.

에가와 사건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된 1978년2월 16일,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와 직업 선택의 자유에 관한 당사자로서, 아라카와는 참의원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불려갔다[5].

아라카와 사건의 영향은 그 후에도 다이요 웨일스, 그리고 후신 구단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해당 구단은 200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마츠모토 케이지로와 호소야마다 타케시를 지명하기까지 40년 동안 와세다 대학교에 재적하는 학생 선수를 지명한 적이 없었다. 요코하마의 와세다대생 드래프트 지명이 드디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요코하마 팀 운영 총괄 무라카미 타다노리와 와세다대 야구부 감독 오타케 아츠요시가 사회인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요코하마와 와세다 사이에 다시 루트가 확립된 것이 크다.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 후 사사키 쿠니아키 구단 사장은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는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으며, 1995년에 긴테츠 버팔로즈가 후쿠도메 코스케를 1위 지명했을 때, 입단을 꺼리는 후쿠도메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라고 교섭한 긴테츠가 커미셔너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후쿠도메는 결국 긴테츠에 입단하지 않고, 3년 후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다만, 금지되어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내 구단에서의 트레이드 이적이다.

미국메이저 리그 (MLB)에서는, 후에 지바 롯데에서도 뛰는 피트 인카빌리아가 1985년에 캐나다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드래프트 지명되었을 때 "추운 곳에서의 플레이는 싫다"라며 입단을 거부했지만, 엑스포스 측으로부터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계약에 합의, 그 후에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이적했다. MLB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드래프트로 획득한 선수는 계약 후 1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트레이드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제정되었다.

5. 1. 야구 협약 개정

아라카와 히로시의 프로 입단을 둘러싼 문제로 인해 야구 협약이 개정되어 신인 선수의 첫 해 이적이 금지되었다.[8][5] 그러나 1979년부터 규정이 개정되어 "개막 전 이적 금지"로 완화되었다.[5] 에가와 스구루는 에가와 사건 당시 이 규정에 따라 개막 후에 신인으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는 형태를 취했다.[8][5]

현재는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 1995년 긴테츠 버팔로즈가 후쿠도메 코스케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교섭한 것이 커미셔너로부터 주의를 받은 사례가 있다. 다만, 금지되는 것은 국내 구단 간의 트레이드 이적이다.

미국메이저 리그(MLB)에서는 피트 인카빌리아가 1985년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드래프트 지명되었을 때 입단을 거부하고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계약에 합의한 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사례가 있다. MLB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드래프트로 획득한 선수는 계약 후 1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트레이드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제정되었다.

5. 2. 드래프트 제도와 직업 선택의 자유 논쟁

아라카와 히로시는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와 직업 선택의 자유 문제와 관련하여 1978년 2월 16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8][5] 이는 아라카와의 프로 입단을 둘러싼 문제로 인해 야구 협약이 개정되어 신인 선수의 첫 해 이적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9년 규정이 "개막 전 이적 금지"로 완화되었고, 에가와 스구루가 이 규정에 따라 개막 후 신인으로서 요미우리로 이적하는 형태를 취했다.

아라카와 사건은 드래프트 제도와 선수 개인의 권리 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직업 선택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현재는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 에는 긴테츠가 후쿠도메 코스케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교섭한 것이 커미셔너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다만, 금지되는 것은 국내 구단 간의 트레이드 이적이다.

5. 3. 다이요 웨일스와 와세다 대학의 관계 단절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아라카와 사다유키가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면서, 다이요는 드래프트 사상 처음으로 당해에 지명한 모든 선수가 입단한 첫 구단이 되었다. 그러나 아라카와 사건의 여파로 다이요 웨일스 및 후신 구단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는 200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마쓰모토 게이지로와 호소야마다 다케시를 지명하기 전까지 40년 동안 와세다 대학 출신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와세다 대학 출신 선수 지명이 재개된 것은 요코하마의 팀 운영 총괄 무라카미 다다노리와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 오타케 아쓰요시의 친분으로 양측의 관계가 회복된 덕분이었다. 2008년 드래프트 회의 이후 구단 사장 사사키 구니아키는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언급했다.

현재는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 1995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후쿠도메 고스케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협상했다가 커미셔너로부터 주의를 받은 사례가 있다. 후쿠도메는 긴테쓰에 입단하지 않고 3년 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5. 4. 선수 계약 방식 변화

아라카와 사건의 영향으로 현재는 트레이드를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5] 1995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가 후쿠도메 고스케를 1순위로 지명했을 때, 입단을 꺼려했던 후쿠도메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내걸어 협상한 긴테쓰가 커미셔너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았다.[5] 후쿠도메는 긴테쓰에 입단하지 않고 3년 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야구 협약 또한 개정되어 신인 선수의 첫 해 이적이 금지되었다. 1979년부터 규정이 개정되어 "개막 전 이적 금지"로 완화되었다. 에가와 스구루에가와 사건 당시 이 규정에 따라 개막 후에 신인으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메이저 리그(MLB)에서는 198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드래프트 지명된 피트 인카빌리아가 "추운 곳에서의 플레이는 싫다"며 입단을 거부했지만, 엑스포스 측으로부터 트레이드 이적을 전제로 계약에 합의, 그 후에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이적했다. MLB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드래프트로 획득한 선수는 계약 후 1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트레이드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제정되었다.

아라카와 사건은 다이요 웨일스 및 후신 구단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마쓰모토 게이지로와 호소야마다 다케시를 지명하기 전까지 40년 간 와세다 대학 출신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드래프트 지명이 가능하게 된 것은 무라카미 다다노리와 오타케 아쓰요시의 친분으로 요코하마와 와세다 사이의 루트가 재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사사키 구니아키 구단 사장은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표현했다.

6. 기타

1969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아라카와가 다이요에 입단하면서, 다이요는 드래프트 사상 처음으로 그 해에 지명한 선수 전원이 입단한 첫 구단이 되었다. 아라카와 사건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 다이요 웨일스 및 후신 구단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200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마쓰모토 게이지로와 호소야마다 다케시를 지명하기 전까지 40년 간 와세다 대학 출신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드래프트 지명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요코하마의 팀 운영 총괄 무라카미 다다노리와 와세다 대학 야구부 감독 오타케 아쓰요시가 사회인 시절 친분이 있어 요코하마와 와세다 사이의 관계가 재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회의 이후 구단 사장 사사키 구니아키는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이적을 전제로 한 선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 1995년 긴테쓰 버펄로스후쿠도메 고스케를 1순위로 지명했을 때, 입단을 꺼려했던 후쿠도메에게 3년 후 이적을 조건으로 협상한 긴테쓰가 커미셔너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았다. 후쿠도메는 긴테쓰에 입단하지 않고 3년 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에 입단했다.

참조

[1] 서적 드래프트1위 9인의 빛과 그림자 河出書房新社 2008
[2] 간행물 일본 프로 야구 트레이드 대감 베이스볼 매거진사
[3] 뉴스 아사히 신문 1970-01-06
[4] 뉴스 일간 프로 야구 1월 [1월 5일] 1970년 (昭45) 원조 낭인 선수 아라카와 요, 폭한에게 맞다 https://web.archive.[...] 스포니치 아넥스
[5] 문서 국회 회의록 제084회 국회 법무위원회 제2호 https://kokkai.ndl.g[...]
[6] 서적 드래프트 1위 9인의 빛과 그림자 가와데쇼보신샤 2008
[7] 간행물 일본 프로 야구 트레이드 대감 https://ja.wikipedia[...] 베이스볼 매거진사
[8] 웹인용 국회 회의록 제084회 국회 법무위원회 제2호 https://web.archive.[...] 2013-12-21
[9] 뉴스 【1월 5일】1970년 (昭45) 원조 낭인 선수 아라카와 요, 폭한에게 맞다 http://www.sponichi.[...] 스포니치
[10] 뉴스 아사히 신문 1970년 1월 6일자 기사 아사히 신문 1970-01-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