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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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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가와 사건은 1970년대 후반 일본 프로 야구에서 투수 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에가와는 1973년과 1977년 두 차례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으나, 1978년 세이부 라이온스의 교섭권이 소멸되자 귀국하여 요미우리와 계약했다. 이 과정에서 '공백의 하루'라는 규정 해석 논란과 드래프트 회의 불참, 한신 타이거스와의 트레이드, 커미셔너의 강력한 요청 등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야구계와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선수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 드래프트 제도, 사와무라상 선정 기준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요미우리 그룹과 세이부 그룹, 미쓰비시 그룹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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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사건
사건 개요
사건 명칭에가와 사건 (江川事件)
관련 인물에가와 스구루
나가시마 시게오
가와카미 데쓰하루
주요 구단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사건 배경
발단에가와 스구루의 드래프트 참가 및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희망
주요 쟁점드래프트 제도의 허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편법 행위, 에가와 스구루의 선수 선택권
사건 진행
1978년 드래프트 전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비밀 협상 및 입단 계약
드래프트 당일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가 에가와 스구루를 1순위 지명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응드래프트 지명 무효 주장 및 에가와 스구루의 입단 강행 시도
'공백의 하루'요미우리 자이언츠, 드래프트 회피를 위한 '공백의 하루' (空白の一日) 활용
논란 및 파장
사회적 비판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특권 의식 및 프로 야구계의 불공정 행위 비판
리그 중단 위기사건 해결을 위한 구단주 회의 및 리그 운영 방안 논의
정치권 개입당시 총리였던 후쿠다 다케오의 사건 해결 지시
사건 해결 과정
'굴욕의 트레이드'에가와 스구루,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가네바야시 다쓰지에가와 스구루와 트레이드된 한신 소속 선수
팬들의 반발요미우리 자이언츠 및 에가와 스구루에 대한 팬들의 비난 여론
사건 결과 및 영향
에가와 스구루의 선수 생활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
드래프트 제도 개선드래프트 제도의 허점 보완 및 공정성 강화 노력
프로 야구계의 교훈공정한 경쟁 및 사회적 책임 의식 강조
관련 용어
공백의 하루 (空白の一日)드래프트 회피를 위한 편법
굴욕의 트레이드 (屈辱のトレード)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을 위한 불공정한 트레이드

2. 과거 두 차례의 드래프트

1973년 에가와 스구루는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 에이스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대학 진학을 희망하여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않았다.[61] 요미우리라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대학 진학 의지가 강했다.[4] 한큐 브레이브스가 지명을 강행했지만, 에가와는 대학 진학을 이유로 입단을 거부했다.[2][3] 게이오기주쿠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호세이 대학에 진학했다.[9][10]

1977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했으나,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62] "규슈는 너무 멀다"는 이유로 입단을 거부했지만,[63][64][65] 사실은 당시 교제 중이던 부인과의 장거리 연애를 피하고 싶었고, 요미우리와 경기할 기회가 많은 수도권 센트럴 리그 구단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66]

1978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야구 유학을 떠났다.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하면 2년간 프로 구단 입단이 금지되기 때문에, 선수 등록을 하지 않고 이듬해 프로 야구 입단이 가능한 야구 유학을 선택한 것이다.[67]

2. 1. 1973년(고등학교 3학년 때) 드래프트

1973년, 에가와 스구루는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의 에이스로서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 봄의 고시엔에서의 대회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일본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프로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에가와의 집을 방문했지만, 에가와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다.[61] 훗날 에가와는 "당시에는 대학 진학을 완전히 결정했기 때문에, 아마 요미우리라도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다.[4]

당시 드래프트 회의는 제비뽑기로 구단의 지명 순위를 정하는 '변칙 웨이버 방식'이었다. 1순위 지명에서 상위 순위였던 다이요 웨일스, 난카이 호크스, 긴테쓰 버펄로스, 닛폰햄 파이터스, 주니치 드래건스는 에가와의 지명을 피하고 다른 선수를 지명했다. 그러나 6번째 순위였던 한큐 브레이브스가 에가와의 지명을 강행했고,[2] 에가와는 대학 진학을 이유로 입단을 거부했다.[3]

에가와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지망했지만 입학 시험에 모두 불합격했고,[9]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10]

2. 2. 1977년(대학 4학년 때) 드래프트

1977년 11월에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 에가와는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했지만,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62] 에가와는 "'''규슈는 너무 멀다'''"는 이유를 들어 크라운라이터 입단을 거부했다.[63][64][65]

하지만 에가와는 이후 인터뷰에서 요미우리가 아니더라도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등 수도권 센트럴 리그 구단이었다면 입단했을 것이라고 밝혔다.[66] 당시 교제 중이던 부인이 도쿄에 살고 있어 장거리 연애를 피하고 싶었고, 요미우리와 경기할 기회가 많은 수도권 센트럴 리그 구단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크라운라이터는 후쿠오카시를 본거지로 하는 퍼시픽 리그 구단이라 에가와의 조건과 맞지 않았다.

2. 3. 미국에서의 야구 유학과 크라운의 양도

1978년, 에가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의 직원 신분으로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야구 유학(청강생)을 갔다. 대학에서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하면 최소 2년간 프로 구단의 입단이 금지되기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 선수 등록을 하지 않고 이듬해 프로 야구 입단이 가능한 야구 유학을 선택한 것이다.[67] 같은 해 10월 12일, 크라운라이터의 운영회사인 후쿠오카 야구 주식회사는 세이부 그룹에 구단을 양도했고, 이듬해인 1979년부터 구단명을 ‘세이부 라이온스’로 변경했다. 신생팀 세이부는 연고지를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로 옮긴다고 발표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에가와가 간토 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을 거부했던 이유를 없애는 셈이 됐다.

3. 1978년 오프 시즌의 선수 계약

1978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가와 스구루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요미우리는 당시 야구 협약의 허점을 이용, 드래프트 회의 전날 에가와가 자유 계약 신분이라는 점을 들어 계약을 강행했다.

당시 야구 협약에 따르면, 드래프트 회의에서 교섭권을 얻은 구단은 다음 해 드래프트 회의 전전날까지 선수와 협상할 수 있었다. 또한, 드래프트 대상은 '일본의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로 제한되었으나, 에가와는 사회인 야구팀에도 속하지 않아 서류상으로는 '드래프트 대상 외' 선수였다.

요미우리는 이러한 점을 근거로, 드래프트 회의 전날인 11월 21일에 에가와와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센트럴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는 이 계약이 야구 협약의 기본 정신에 어긋난다며 요미우리의 선수 등록 신청을 거부했다. 이에 요미우리는 항의 표시로 다음 날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했다.

3. 1. 공백의 하루

1978년 11월 20일, 에가와는 미국 유학을 갑작스럽게 마무리하고 귀국했다.[68] 다음 날인 11월 21일 오전, 후나다 나카 자유민주당 부총재 사무실에서 요미우리는 에가와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요미우리 측은 "'''드래프트 회의 전날은 자유로운 신분이므로, 드래프트 번외 선수로 입단 계약이 가능하다'''"라는 해석을 내리고 드래프트 번외 입단이라는 형태로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야구 협약에 따르면, 드래프트 회의에서 교섭권을 얻은 구단이 해당 선수와 협상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다음 해 드래프트 회의 '''전전날'''까지였다. 이 규정은 전날까지 협상을 계속하면 협상지가 멀리 떨어진 곳일 경우 기상 급변 등으로 인해 구단 관계자가 드래프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드래프트 회의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드래프트 회의 기준 기간(폐쇄일)을 전전날까지로 정한 것이었다.[69] 또한 당시 드래프트 대상 학생은 '일본의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에가와는 사회인 야구팀에도 나가지 않았으므로 야구 협약 문서상으로는 '드래프트 대상 외'였다. 일본 야구 기구는 드래프트 대상 범위를 넓히고자 1978년 7월 31일에 규정을 변경, 드래프트 대상 선수를 '일본의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 개정했다. 그러나 이 새 협약은 '다음 드래프트 회의 당일부터 발효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요미우리는 드래프트 회의 전날인 11월 21일에 세이부의 교섭권이 상실되었고, '일본의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를 드래프트 대상으로 하는 것은 드래프트 회의를 하는 11월 22일 이후라고 해석하여, 11월 21일 시점에 드래프트 대상 외 선수인 에가와와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입단 계약을 했다.[70] 센트럴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는 "요미우리가 주장하는 '공백의 하루'는 어디까지나 절차상에서 발생한 것이며, 이 계약은 야구 협약의 기본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며 요미우리의 선수 등록 신청을 각하했다.[71]

이 결정에 요미우리는 반발하여 항의 표시로 다음 날인 22일에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했다.

에가와는 '공백의 하루'를 이용한 계약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당일(11월 21일) 아침에 듣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미국에서 드래프트 회의 결과를 기다릴 예정이었으나,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드래프트 회의 전전날(11월 20일)에 급히 귀국했다.[72]

3. 2. 세 번째 드래프트 회의

1978년 드래프트 회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불참한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11개 구단만으로 개최되었다.[33] 이 회의부터는 전 구단이 1순위 지명 선수를 입찰하고, 중복될 경우 추첨으로 교섭권을 획득하는 새로운 방식이 채택되었다.[34]

에가와 스구루난카이 호크스, 한신 타이거스, 롯데 오리온스, 긴테쓰 버펄로스 등 4개 구단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추첨 결과 한신이 교섭권을 획득했다.[34] 세이부는 에가와와의 교섭권을 상실한 후 모리 시게카즈를 1순위로 지명하여 독점 교섭권을 얻었다.

드래프트 회의 후, 일본 야구 기구의 가네코 도시 커미셔너는 요미우리의 행태에 대해 "충분히 반성해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35] 반면, 요미우리 오너 쇼리키 도루는 드래프트 회의가 전 구단 참석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는 점을 들어 회의 자체의 무효를 주장하며 커미셔너에게 제소장을 제출했다.[35]

한편, 한신은 에가와와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에가와 측은 "요미우리의 에가와이므로 만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거절했다.[36]

3. 3. 커미셔너의 강한 요구

일본 야구 기구 커미셔너 가네코 도시일본어는 12월 22일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에서 "에가와 스구루에게 일단 한신과 입단 계약을 맺게 한 후, 곧바로 요미우리로 트레이드시키는 형태로 해결하길 바란다"는 '''강력한 요구'''를 제시했다.[80] 이는 에가와 획득의 정당성과 센트럴 리그 탈퇴를 주장하는 요미우리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이후 프로 야구 운영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즉, '에가와의 요미우리 입단'이라는 요미우리의 당초 목적을 달성하여 문제 해결을 꾀하려 한 것이다. 야구 협약에서는 신인 선수의 공식전 개막 직전 이적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가네코는 이를 알고도 트레이드를 통한 해결을 제안했다.

가네코는 이 '강력한 요구'를 발표하면서 "각 구단 실행위원도 거의 동의했다"고 말했지만, 한신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오즈 쇼지로 한신 구단 사장은 "오 사다하루를 준다고 해도 트레이드에 응하지 않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 요미우리는 앞서 언급된 커미셔너의 재정을 받아들여 12월 27일 '공백의 하루'에 맺었던 에가와와의 계약을 해제했다. 이로써 한신은 정식으로 에가와와 교섭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에가와 측은 트레이드 확약을 요구하며 한신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계약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3. 4. 전격 트레이드

한신은 에가와와 계약한 후, 곧바로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발표하여 에가와의 요미우리 입단이 성사되었다.[38] 이는 일본 야구계를 뒤흔든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79년 1월 31일, 요미우리와 한신은 한신이 에가와와 입단 계약을 맺은 당일,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발표했다.[38] 한신은 일본 야구 기구 커미셔너였던 가네코 도시의 요청을 최종적으로 수용하였다.[38] 이 배경에는 요미우리의 구단주 쇼리키 도루가 일본 야구 기구 탈퇴까지 시사하며 압박했고, 최악의 사태를 우려한 닛폰 TV 방송망 사장 고바야시 요지가 한신 다나카 류조 사장과 오즈 마사지로 구단 사장을 설득하여 고바야시와의 트레이드를 제안한 것이 있었다.[39]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지인 미야자키로 이동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 집합해 있던 고바야시는 요미우리 구단 관계자에게 불려가 에가와와의 맞트레이드를 전달받고 설득에 응하여 이날 밤늦게 맞트레이드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이 해결책은 특례로 간주되었으며, 고바야시는 한신 스프링 캠프지로 향하는 공항에서 “외부의 요청에 의해서 한신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받기 싫다”라고 말했다.[81]

이로써 에가와는 염원하던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너무나도 당돌한 전개에 팬들과 언론은 '공백의 하루에 의한 전격 트레이드'라며 일본 야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에가와와 요미우리는 물론 에가와와 교섭 중에 ‘트레이드에는 내놓지 않겠다’라고 발언했으면서도[82] 돌연 트레이드를 발표한 한신의 오즈 구단 사장도 비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그 후 2월 8일에 열린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에서 이 트레이드는 야구 협약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가네코 도시 커미셔너는 이 트레이드가 협약 위반임을 알고도 요구 사항을 제시했지만, 재차 지적을 받자 ‘강한 요구’를 철회하고 양측은 맞트레이드 형식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고바야시 시게루는 현금 트레이드로 한신에 이적(계약상 에가와의 계약금을 요미우리가 지불하는 것으로 상쇄)하고, 에가와는 개막일인 4월 7일에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 에가와가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나 시범 경기에 참가하지 않고 입단 발표가 4월 7일에 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요미우리 스프링 캠프에 참가할 수 없었던 에가와는 요미우리에 입단할 때까지 전직 요미우리 포수였던 야자와 다다시와 연습을 했다.

가네코 도시 커미셔너는 강권 발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다음 커미셔너는 법조계 관계자를 선출하기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후임 커미셔너는 외교관이자 최고재판소 판사를 역임했던 시모다 다케소가 취임했다.

또한 요미우리는 같은 날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에서 일련의 소동에 대해 전면적으로 사과했고, 공식전 개막부터 5월 31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에가와를 자숙시키기로 했다(구단측 요청에 따른 ‘자숙’이며 출장 정지는 아니다). 에가와는 6월 1일에 1군 선수로 등록돼 다음날 6월 2일 한신전에서 첫 등판을 했다. 당시 규정상 경기 출장은 등록 다음날부터 가능했기 때문에 6월 1일 요미우리전에서 등판했던 고바야시와의 대결은 무산됐다(현재는 규정이 개정돼 등록 당일부터 경기 출전 가능). 에가와와 맞트레이드 돼서 한신에 이적한 고바야시는 그 해 요미우리와의 맞대결에서 8승 무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강한 면모를 보였다.[83]

에가와와 고바야시의 직접 대결은 1980년 8월 16일에 성사됐고,[83] 요미우리 대 한신전에서 에가와와 고바야시가 각기 선발로 나섰는데 결과는 5대 3으로 요미우리가 승리했고 에가와는 완투로 승리 투수가 됐다.[83] 한편 고바야시는 5회에 에가와에게 앞서 나가는 결승타를 맞아 4실점을 기록하여 강판돼 패전 투수가 됐다.[83]

4. 야구계·정계에의 영향

에가와 사건은 드래프트 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냈고, 선수 자신이 구단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논의를 촉발시켰다. 이 문제는 요미우리 신문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국회 의제로까지 다뤄졌다. 1978년 2월 16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자, 스즈키 류지, 미하라 오사무, 가와카미 데쓰하루 등 야구계 관계자 5명이 참고인 자격으로 국회에 출석했다.

이 사건은 사와무라 에이지상 선정 기준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와무라 에이지상은 명확한 기준 없이 운동 기자 클럽의 '부장회' 투표로 선정되었다. 에가와는 1980년 시즌 16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수상하지 못했고(수상자 없음), 1981년에는 20승 6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등 투수 부문 5관왕을 달성했음에도 기자단 투표에서 니시모토 다카시가 사와무라 에이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는 에가와 사건의 영향으로 여겨졌으며, 기자회견에서 "에가와는 사와무라상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1982년부터는 선정 기준이 마련되었고, 전직 프로 야구 투수들로 구성된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훗날 선수들의 구단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 야구 기구는 역지명 제도(1993~2007년)와 FA 제도를 도입했다.

2011년에는 요미우리의 수석 코치 인사를 두고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 회장이 오카자키 가오루 당시 수석 코치를 경질하고 에가와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려 했다는 사실이 기요타케 히데토시 구단 대표에 의해 밝혀졌다(기요타케의 난 참조). 에가와는 수석 코치 제안에 대해 "정식 제안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영광이지만 "입단 당시 고바야시 시게루에게 폐를 끼쳤던 것처럼(에가와 사건) 오카자키에게도 폐를 끼칠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고사했다. 하라 다쓰노리 당시 요미우리 감독은 코치 인사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는 중요한 선배이므로 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 기업간 관계


  • 에가와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입학이 무산되어 호세이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 그는 훗날 야구 선수를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게이오 대학에 가고 싶었다고 밝혔다. 에가와에게 '게이오'를 대신할 브랜드는 '요미우리'였다.[94]
  • 197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는 에가와 다음으로 도시바 후추의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지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요미우리가 회의에 불참하면서 무산되었고, 오치아이는 롯데에 3순위로 지명되었다. 오치아이는 훗날 자서전 등에서 이를 증언했다.[95][96]
  • 학생 시절 드래프트 지명을 거부했다가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몇 년간 지명이 불가능해진 선수로는 아라카와 다카시(야쿠르트), 모토키 다이스케(요미우리),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 등이 있다. 이들은 미국 야구 유학을 가거나 대학을 유급했다.[97] 현재 야구 협약에서는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하면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등 일본 독립 리그에서 활동하며 드래프트 지명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명을 거부하면 고졸은 3년, 대졸은 2년까지 지명이 불가능하다.[98][99]
  • 에가와 부인은 요미우리 입단 3년 후인 1981년 일본 시리즈 우승 기념 해외여행에서 요미우리 선수 부인들만 참석하는 회식 자리에서, 다른 주전 선수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에가와)이 선발 등판했을 때 일부러 실책을 하거나 안타를 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고 한다.[102]

5. 1. 요미우리 그룹과 세이부 그룹

1978년 에가와 스구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으로 요미우리와 세이부 간의 구단 간 다툼은, 모회사인 요미우리 그룹과 세이부 철도 그룹(현: 세이부 그룹)의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요미우리 신문, 호치 신문, 니혼 TV는 세이부 철도 그룹 및 세이부 유통 그룹(이후 세이부 세존 그룹→세존 그룹. 2001년에 실질적으로 소멸)의 광고와 CM을 내보내지 않았다. 반대로 세이부 철도 역시 역내 포스터와 광고에서 요미우리 그룹의 광고를 제외했다.

이 갈등은 프로 야구 중계에도 영향을 미쳐, 닛테레는 세이부 구장에서의 중계를 거의 하지 않았다. 테레타마가 독립 UHF 3국(tvk, 치바 TV, 군마 TV)에서 실시하던 닛테레 제작의 고라쿠엔에서의 요미우리 주최 경기 중계도 중단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1년 무다이 미쓰오가 사망한 이후 양 그룹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1996년에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요미우리 이적 과정에서 세이부의 쓰쓰미 요시아키가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쓰네오에게 직접 연락을 하기도 했다. 닛테레도 세이부의 마쓰자카 다이스케 투수 등판 경기를 중계한 적이 있다.

2006년에는 쓰쓰미 요시아키의 이복형이자 세존 그룹 창업자인 쓰쓰미 세이지가 닛테레(현: 니혼 TV 홀딩스)의 사외 이사로 취임하여 2013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53][54]

5. 2. 미쓰비시 그룹과 세이부 그룹

에가와는 미국 유학 시절, 후견인을 맡았던 미쓰비시 상사의 현지 주재원 집에 머물며, 세이부 구단의 스카우트 교섭을 계속 거절했다. 세이부 그룹의 총수 쓰쓰미 요시아키는 세이부 버스, 세이부 택시 등 세이부 그룹에 차량을 납품하던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 경영진을 통해, 주재원에게 협력을 요구하도록 미쓰비시 상사 본사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원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이에 쓰쓰미 요시아키는 미쓰비시 상사에 대해서도 격노했다.[55]

이 때문에, 세이부 버스 등 세이부 철도 그룹 각사에서는 1975년부터 버스 차량을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현: 미쓰비시 후소 트럭・버스)제로 통일하고 있었지만,[56] 1979년 도입분부터 동사제 차량의 구입을 중지하고, 거의 모든 차량을 닛산 디젤 공업(현: UD 트럭스)제로 변경했다.[55] 닛산 디젤이 선택된 이유는 사이타마현 아게오시에 본사를 둔 동사가 라이온즈의 후원 기업이었기 때문이다.[55]

또한, 이미 자본면에서 세이부 철도 그룹으로부터 독립하여 세이부 유통 그룹의 으뜸 기업이 된 세이부 백화점도 이에 동조하여, 미쓰비시 관련 상품을 모두 매장에서 철수했다.[55]

세이부 버스 그룹에서는 그 후, 1998년부터 이스즈 자동차제 차량도 신규 도입했고,[56] 2003년부터는 커뮤니티 버스용으로 미쓰비시 후소제 버스의 도입을 소형 버스로 재개했다.[56]

쓰쓰미 요시아키의 실각 후, 2010년에 UD 트럭스의 버스 제조 사업 종료와 미쓰비시 후소의 다임러 그룹 산하 편입을 계기로, 2011년부터 미쓰비시 후소제 대형 노선차의 도입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57]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이부 철도에서는 차량의 전장품에 미쓰비시 전기의 제품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6. 그 외

에가와 스구루가 요미우리 입단을 강력하게 희망한 것은 게이오 대학 진학 실패에 대한 보상 심리였다는 분석이 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요미우리의 홍보실장을 맡았던 와카바야시 토시오에 따르면, 에가와는 "언젠가는 야구 선수를 그만두고 사회에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게이오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6] 와카바야시는 에가와에게 "게이오"를 대신하는 브랜드가 "요미우리"였다고 설명한다.[46]

에가와 사건 이후, 드래프트 지명을 거부하는 선수들은 몇 년간 드래프트 참가가 불가능해지는 등의 불이익을 겪었다. 1969년 아라카와 타카시(야쿠르트), 1989년 모토키 다이스케(요미우리), 2011년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야구 협약에 따르면, 드래프트 지명을 거부한 경우 고졸은 3년, 대졸은 2년까지 지명될 수 없다.[59][60]

이 사건은 언론의 과도한 취재 경쟁과 팬들의 비난 여론으로 인해 에가와와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에가와는 은퇴 후, 당시 스포츠 신문을 보고 구토할 정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48]

2011년, 요미우리 구단 회장 와타나베 츠네오는 에가와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려 했으나, 에가와는 과거 사건을 이유로 고사했다.[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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