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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마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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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와마루 사건은 1945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 잠수함에 의해 일본 화객선 아와마루가 격침된 사건이다. 1944년 적십자의 중재로 일본과 미국 간 포로 및 구속 민간인 구호 물품 교환 협정에 따라 아와마루는 병원선과 유사한 보호를 받으며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해 사용되었다. 일본은 협정을 위반하여 군수 물자를 적재했고, 귀환 중이던 아와마루는 미 해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건 이후 일본은 미국에 배상을 요구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이후 일본은 위로금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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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마루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아와마루 사건 (阿波丸事件)
발생 일시1945년 4월 1일 23시경
위치동중국해 난세이 제도 (南西諸島) 고도 구미 섬 (姑米島) 서쪽 약 90km 해상
원인미국 해군 잠수함 퀸피시 (USS Queenfish, SS-393)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격침
결과아와마루 침몰
아와마루
선박 종류여객선 겸 화물선
소속일본우선 (日本郵船)
총 톤수11,249톤
길이154.9m
18.9m
속도18.5노트
건조1941년
건조 장소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희생자
총 사망자 수2,000명 이상 (정확한 숫자는 불명)
주요 사망자민간인
군인
외교관
생존자 수1명 (조타수)
퀸피시
소속미국 해군
종류발라오급 잠수함
함장찰스 E. 러프
사건 배경
전시 상황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아와마루의 역할일본군의 군수품 수송
중국 점령 지역으로부터의 일본인 귀환 수송
선박의 면책 특권미일 협정에 따라 안전 보장 약속
병기 수송 금지 조건
논란
격침 원인미국 잠수함의 오인 공격 주장
아와마루의 병기 적재 의혹일본 측의 부인
격침 후 인양 과정에서 병기 발견 주장
전후 배상 문제중화인민공화국의 인양 작업
일본 정부와의 배상 협상
기타
관련 사건침몰선 인양을 둘러싼 국제적 분쟁 가능성

2. 사건의 경과

1944년 10월, 적십자의 중재로 일본과 미국은 포로 및 구속 민간인에게 구호 물품을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1] 이 협정에 따라 미국 측 구호 물품 2,025톤은 화객선 "하쿠산마루"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나홋카에서 일본 측에 전달되었다.

미국 측 물품 중 800톤은 일본군 점령 하의 자바섬과 말레이 반도의 연합군 포로 수용소용으로, 당시 일본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고성능 화객선인 아와마루가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1] 아와마루는 병원선에 준하는 보호(Safe conduct, 안전 통과권)를 약속받았고, 군대 수송선 상태였던 아와마루의 무장은 철거되었다.[1] 식별을 위해 선체를 녹색 위장 도색에서 회백색으로 다시 칠하고, 선측, 굴뚝, 갑판 2곳에 적십자 식별 마크를 그리고 야간에는 굴뚝에 조명을 켰다.[1] 미군은 아와마루의 항로 정보를 각 부대에 통지하고 공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협정을 위반하여 아와마루에 군수 물자를 적재했다. 아와마루의 왕복 항해에는 800톤의 구호 물품 외에도 항공기, 자동차 예비 부품 및 탄약 등 600톤의 군수 물자가 실렸다.[1] 1945년 2월 17일 모지를 출항한 아와마루는 가오슝항에서 22톤, 홍콩에서 41톤, 싱가포르에서 562톤의 구호 물품을 하역했고, 최종 목적지인 자바섬(구호 물품 175톤)에 무사히 도착했다.

3월 28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귀환하는 아와마루에는 격침된 상선원, 상사원, 기술자, 대동아성 차관 이하의 공무원 등 비전투원과 군인 및 군속을 포함하여 2,004~2,130명이 탑승했다.[2] 또한, 주석, 텅스텐, 알루미늄 등의 지금속 5,000톤 이상, 생고무 2,000톤 이상, 중유 및 휘발유 2,500톤이라는 대량의 군수 자원이 선창에 실렸다.[1] 이는 협정 위반이었으나, 일본군은 귀환 과정에서도 군사 수송을 계획하고 선장의 반대를 묵살했다.[2] 미군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 측의 이러한 군수물자 수송을 인지 하고 있었으며, 찰스 A. 록우드 중장은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응답은 없었다.[1]

2. 1. 구호 물품 수송과 군수 물자 적재

1944년 10월, 적십자의 중재로 일본과 미국은 포로 및 구속 민간인에게 구호 물품을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1] 이 협정에 따라 미국 측 구호 물품 2,025톤은 화객선 "하쿠산마루"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나홋카에서 일본 측에 전달되었다.

미국 측 물품 중 800톤은 일본군 점령 하의 자바섬과 말레이 반도의 연합군 포로 수용소용으로, 당시 일본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고성능 화객선인 아와마루가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1] 아와마루는 병원선에 준하는 보호(Safe conduct, 안전 통과권)를 약속받았고, 군대 수송선 상태였던 아와마루의 무장은 철거되었다.[1] 식별을 위해 선체를 녹색 위장 도색에서 회백색으로 다시 칠하고, 선측, 굴뚝, 갑판 2곳에 적십자 식별 마크를 그리고 야간에는 굴뚝에 조명을 켰다.[1] 미군은 아와마루의 항로 정보를 각 부대에 통지하고 공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협정을 위반하여 아와마루에 군수 물자를 적재했다. 아와마루의 왕복 항해에는 800톤의 구호 물품 외에도 항공기, 자동차 예비 부품 및 탄약 등 600톤의 군수 물자가 실렸다.[1] 1945년 2월 17일 모지를 출항한 아와마루는 가오슝항에서 22톤, 홍콩에서 41톤, 싱가포르에서 562톤의 구호 물품을 하역했고, 최종 목적지인 자바섬(구호 물품 175톤)에 무사히 도착했다.

3월 28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귀환하는 아와마루에는 격침된 상선원, 상사원, 기술자, 대동아성 차관 이하의 공무원 등 비전투원과 군인 및 군속을 포함하여 2,004~2,130명이 탑승했다.[2] 또한, 주석, 텅스텐, 알루미늄 등의 지금속 5,000톤 이상, 생고무 2,000톤 이상, 중유 및 휘발유 2,500톤이라는 대량의 군수 자원이 선창에 실렸다.[1] 이는 협정 위반이었으나, 일본군은 귀환 과정에서도 군사 수송을 계획하고 선장의 반대를 묵살했다.[2] 미군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 측의 이러한 군수물자 수송을 인지 하고 있었으며, 찰스 A. 록우드 중장은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응답은 없었다.[1]

2. 2. 미 해군 잠수함의 공격과 침몰

1945년 4월 1일 오후 10시경, 아와마루는 타이완 해협에서 핑탄현의 우산섬/牛山岛중국어 부근을 항해하던 중 미국 해군 잠수함 퀸피시의 레이더에 탐지되었다.[1] 퀸피시는 잠망경으로 육안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레이더 조준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약 50초 후 아와마루에 어뢰 3발(4발이라는 설도 있음)이 명중하여 거의 순식간에 침몰했다.[1]

퀸피시는 약 10분 후 전과 확인을 위해 부상하여 무수한 사람이 표류물에 섞여 헤엄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중 선원 1명을 수용했다.[1] 퀸피시의 보고에 따르면, 다른 표류자는 모두 구조를 거부했다고 한다. 퀸피시에 수용된 1명을 제외한 2,003명(자료에 따라 2,129명) 전원이 사망했다.[1]

퀸피시의 함장 찰스 E. 라플린은 "부주의"로 군법 회의에서 유죄 판결(견책 처분)을 받았다.[1] 공격 금지 명령이 퀸피시에 전달되었지만, 일반 서류에 섞여 함장의 확인이 늦어졌고, 아와마루의 위치 정보를 알리는 전보 전달도 지연되었기 때문이다.[1]

2. 3. 공격의 배경과 원인

아와마루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찰스 록우드 태평양 잠수함대 사령관은 아와마루에 군수 물자가 적재된 것을 확인하고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록우드 소장은 니미츠 대장의 회신이 없었던 것을 묵인으로 받아들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공격 금지 명령은 퀸피시에 전달되었으나, 일반 서류에 섞여 함장 퀸피시의 찰스 E. 라플린의 확인이 늦어졌다. 또한 아와마루의 위치 정보를 알리는 전보 전달도 지연되었다. 통신 지연은 여러 단계를 거쳐 연락이 이루어진 데다가, 암호 해독을 꺼린 미국 해군이 아와마루의 정보를 입수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평문으로 모호한 전보를 보낸 것이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퀸피시 함장은 아와마루를 군함으로 오인하여 공격, 격침시켰다. 퀸피시의 찰스 E. 라플린 함장은 "부주의"로 군법 회의에서 유죄 판결(견책 처분)을 받았다.

3. 보상 과정

일본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을 국제법과 협정 위반으로 항의하였고, 미국 정부는 잠수함장이 식별 확인을 게을리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문제는 전쟁 종료 후까지 연기할 것을 제안하였다.[3] 일본 정부는 2억 2,7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종전 후 아와마루의 대체 선박 제공이나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GHQ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를 거부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3]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유상식량원조차관금액을 18억 달러에서 4억 9천만 달러로 탕감하는 대신 아와마루의 배상 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1949년, 일본의 제5 국회는 미국 정부와 그 국민이 일본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준 막대한 원조에 대해 감사하는 한 방법으로서 정부에 대해 본 건에 기초한 모든 청구권을 자발적, 무조건적으로 포기하고 이 포기를 기초로 본건을 우호적으로 해결할 것과 정부는 국내조치로서 본 건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것 등을 요망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3]

1949년 4월 14일 '아와마루 청구권의 처리를 위한 일본정부 및 미국정부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아와마루의 침몰로 발생한 미국 정부 또는 미국 국민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청구권도 일본 정부 및 모든 관계 일본인을 위해 모두 포기’(1조)하고, '이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이 재해로 사망한 자의 가족 및 전기의 선박의 소유자에 대해 위로금의 지급에 의한 적절한 대우를 위해 노력한다’(3조)고 하였다.

1950년 '아와마루 사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같은 해 8월 1일 시행) 사망자의 유족 및 아와마루의 소유자에 대해 위로금이 지급되었다.[4] 사망자 1명당 7만엔, 2명인 경우 12만엔, 3명인 경우 15만엔, 일본 유센에는 1,7843,000엔이 지급되었다. 당시 점령 당국은 전쟁 희생자에 대한 국가에 의한 구원 조치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 지급은 이례적이었다.

3. 1. 일본 정부의 대응과 국내 조치

일본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을 국제법과 협정 위반으로 항의하였고, 미국 정부는 잠수함장이 식별 확인을 게을리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문제는 전쟁 종료 후까지 연기할 것을 제안하였다.[3] 일본 정부는 2억 2,7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종전 후 아와마루의 대체 선박 제공이나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GHQ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를 거부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3]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유상식량원조차관금액을 18억 달러에서 4억 9천만 달러로 탕감하는 대신 아와마루의 배상 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1949년, 일본의 제5 국회는 미국 정부와 그 국민이 일본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준 막대한 원조에 대해 감사하는 한 방법으로서 정부에 대해 본 건에 기초한 모든 청구권을 자발적, 무조건적으로 포기하고 이 포기를 기초로 본건을 우호적으로 해결할 것과 정부는 국내조치로서 본 건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것 등을 요망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3]

1949년 4월 14일 '아와마루 청구권의 처리를 위한 일본정부 및 미국정부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아와마루의 침몰로 발생한 미국 정부 또는 미국 국민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청구권도 일본 정부 및 모든 관계 일본인을 위해 모두 포기’(1조)하고, '이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이 재해로 사망한 자의 가족 및 전기의 선박의 소유자에 대해 위로금의 지급에 의한 적절한 대우를 위해 노력한다’(3조)고 하였다.

1950년 '아와마루 사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같은 해 8월 1일 시행) 사망자의 유족 및 아와마루의 소유자에 대해 위로금이 지급되었다.[4] 사망자 1명당 7만엔, 2명인 경우 12만엔, 3명인 경우 15만엔, 일본 유센에는 1,7843,000엔이 지급되었다. 당시 점령 당국은 전쟁 희생자에 대한 국가에 의한 구원 조치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 지급은 이례적이었다.

4. 사건의 여파와 논란

4. 1. 국제법 위반 논란

4. 2. 베이징 원인 유골 인양 문제

4. 3. 인양 시도와 금괴 논란

5. 희생자 추모

일본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을 국제법 위반으로 항의했고, 미국은 잠수함장의 과실을 인정하며 손해배상 문제를 যুদ্ধের後まで延期することを提案した[5]。 일본은 배상금으로 2억 2,700만 엔을 요구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거부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유상 식량 원조 차관 금액을 탕감하는 대신 아와마루 배상 청구권 포기를 제안했고, 일본은 이를 수용하는 결의를 채택했다.[5]

1949년 4월 14일, '아와마루 청구권 처리를 위한 일본 정부 및 미국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은 청구권을 포기하고 희생자 위로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5] 1950년에는 '아와마루 사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희생자 유족과 선박 소유주에게 위로금이 지급되었다.[5]

1979년 4월, 중국 정부는 푸젠성 연안에서 아와마루를 발견하고 유골과 유품을 일본에 인도했다.[5] 같은 해 7월 5일, 가스미가세키의 후생성에서 유골 배례식이 거행되었고, 아와마루 유족회 등 약 800명이 참석했다.[5]

도쿄 시바의 조조지 경내에는 "아와마루 사건 순난자비"가 세워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아와마루에는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표본이 있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1977년 중국 정부의 조사에서는 선원의 유골과 주석 덩어리만 발견되었다.[6] 금괴, 백금,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발견되지 않았다.[7]

6. 아와마루 사건으로 사망한 주요 인물


  • 오가와 고타로 - 교토 제국대학 교수를 거쳐 타쿠쇼쿠 대학 학감을 역임한 후 정계에 진출, 철도·상공 대신을 역임하였다. 버마를 점령한 제15군의 군정 고문이었다.
  • 카사마 테루오 - 외교관이자 이와나미 신서 『회교도』의 저자이다. 육군사정 장관 (조사국장)으로 보르네오 수비군 사령부에 부임하여 군정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 타케우치 신페이 - 대장성 관료 출신 대동아 차관이었다.
  • 히가시 미츠타케 - 대동아성 남방 사무국 정무과장이었다.
  • 호시나 미츠마사 - 외무 사무관 출신 대동아성 비서관이었다.
  • 모리 덴조 - 퇴역 해군 소장이었다.
  • 야마다 요시타로 - 외교관 출신 외무성 조사국장이었다.
  • 타카노 효스케 - 프로 야구 선수 (난카이 군에서 선수 활동[8]).

7. 아와마루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 아리마 요리요시의 소설 "생존자의 침묵"이 1966년 문예춘추에서 간행되었다. 아리마는 사건의 희생자, 호시나 미쓰마사의 사촌이다. 2017년에는 『생존자의 침묵: 비극의 녹십자선 아와마루의 조난』이라는 제목으로 코진샤 NF 문고, 시오쇼보 코진신샤에서 출간되었다.
  • 아사다 지로의 소설 세헤라자데를 원작으로 NHK 종전 특집 드라마 「세헤라자데 ~해저에 잠든 영원한 사랑~」이 제작되었다. 이 드라마는 2004년 7월 31일 NHK에서 방송되었으며, 작품에서는 「미로쿠마루(弥勒丸)」라는 배가 등장한다.
  • 사이토 타카오의 만화 고르고13에는 본 사건을 소재로 한 "암흑 해류"가 있다. 작품 중에서는 「아와마루(安房丸)」로 개명되었다.

8. 관련 서적


  • 전일본해원조합 편, 『바다는 더욱 깊어: 태평양 전쟁 선원들의 체험 수기』, 신인물왕래사, 1986년.
  • 마츠이 카쿠신, 『아와마루는 어째서 침몰했는가: 쇼와 20년 봄, 대만 해협의 비극』, 아사히 신문사, 1994년.
  • 세키 에이지 「머나먼 조국 러시아 난민과 두 제독」(PHP 연구소), 1996년
  • 로저 딩먼 저, 카와무라 코지 역, 일본우선 역사자료관 감수, 『아와마루 격침: 태평양 전쟁과 미일 관계』, 세이잔도 서점, 2000년. ISBN 4425946111
  • 『세계의 함선』, 카이진샤, 2007년 8월호.
  • 아리마 요리요시 『생존자의 침묵: 비극의 녹색 십자선 아와마루의 조난』, 코진샤 NF 문고, 쵸쇼보 코진신샤, 2017년.

참조

[1] 문서 英語版「MV Awa Maru (1942)」に掲載の本船の画像を参照
[2] 서적 海なお深く 新人物往来社, 全日本海員組合編
[3] 간행물 阿波丸事件に基く日本国の請求権の放棄に関する決議 https://www.sangiin.[...] 第5回国会 参議院本会議 昭和24年4月6日
[4] 법률 阿波丸事件の見舞金に関する法律 https://www.shugiin.[...] 昭和25年法律第223号
[5] 뉴스 朝日新聞 1979-07-05
[6] 웹사이트 北京原人の骨はどこに…太平洋戦争開戦の日に消えた化石を追う【あなたの特派員】 https://www.nishinip[...] 2021-12-08
[7] 웹사이트 中国・日本 両国人民の友好の絵巻物_中国网 http://japanese.chin[...] 2021-12-08
[8] 뉴스 加藤学園高、12日に甲子園交流試合 加藤校長「全力プレーを」 https://www.at-s.com[...]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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