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밀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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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밀리아누스는 253년에 잠시 로마 황제였다. 그는 아프리카 속주 출신으로, 다뉴브 강 국경에서 고트족을 격파한 후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당시 황제였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인테라나 나하르스 전투에서 물리치고 로마로 진격했으나, 곧 발레리아누스와의 대립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그의 통치는 88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에우트로피우스는 그의 짧은 통치를 "극히 미미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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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밀리아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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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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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Marcus Aemilius Aemilianus |
휘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아에밀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출생 | 기원후 210년경 |
출생지 | 기르바, 아프리카 |
사망일 | 253년 9월 |
사망지 | 이탈리아 스폴레티움 근처 (약 43세) |
배우자 | 코르넬리아 수페라 |
통치 | |
직책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253년 6월 – 9월 |
이전 통치자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 |
다음 통치자 |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
2. 출신과 배경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 민족적 배경(마우리족 혹은 리비아인), 가문의 위상 등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마다 차이를 보인다.[1][2][3][4] 일부 기록은 그가 중요하지 않은 가문 출신이라고 평가하는 반면,[5] 다른 기록은 그가 권력 장악을 위해 자신의 가계를 내세웠다고 전하기도 한다.[6] 이러한 상반된 기록들은 그가 로마 중심부의 전통적인 엘리트층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3세기의 위기로 알려진 혼란기에 군사적 공적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 권력에 도전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추정되는 코르넬리아 수페라와 결혼했다.[7]
2. 1. 출생과 가문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속주였던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4세기 문헌인 ''카이사르 전기''에 따르면, 그는 오늘날 튀니지 해안의 섬인 제르바(당시 기르바)에서 태어났으며 마우리족 출신이었다고 한다.[1] 이 자료는 그가 207년경 태어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 그러나 12세기 역사가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그를 마우리족이 아닌 리비아인으로 기록했으며,[3] 13세기의 한 연대기에서는 그가 253년에 사망할 당시 나이가 40세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명이 전해진다. 에우트로피우스와 그의 번역가 파에아니우스는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방하려는 의도에서 그가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했다.[5] 반면,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아이밀리아누스가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내세웠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아이밀리아누스 측의 정치적 선전 내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6]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이름과 그의 씨족명, 별칭 등을 고려할 때, 그는 제2차 삼두정치 시기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통치하던 때 로마 시민권을 얻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 여성인 코르넬리아 수페라와 결혼했다. 정확한 결혼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 모두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점에서 아이밀리아누스가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7]
2. 2. 결혼
아이밀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인 코르넬리아 수페라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지역 출신이므로, 아이밀리아누스가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7]3. 군 경력
251년 7월,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갈루스 황제 치하에서 아이밀리아누스는 모에시아와 판노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도나우강 국경 방어 임무를 맡았다.[8]
당시 갈루스 황제는 로마를 덮친 역병 대처와 사산 제국의 침공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군대 내에서의 인기도 낮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밀리아누스는 도나우강을 넘어 침입한 고트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 군사적 성공은 그가 휘하 군단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1. 다뉴브 강 방어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가 공동으로 통치하던 시기(251년–253년)에 아이밀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파견되었다.[8] 그의 주요 임무는 다뉴브 강 국경 지대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당시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이끄는 세력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황제 갈루스는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황제가 크니바에게 패배하고 전사한 혼란 속에서 제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후 로마 제국을 휩쓴 흑사병의 발병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없었는데, 이는 주로 251년에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방에서는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가 시리아 속주를 침공하는 등 연이은 군사적 실패와 이로 인해 체결된 굴욕적인 조약 때문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 아이밀리아누스는 모에시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미 갈루스를 질투했고 그를 배신할 음모를 꾸몄다. 또한 그는 로마 원로원과도 대립하는 관계였으며,[7] 제롬과 요르다네스 역시 그의 이러한 반란 계획을 확인시켜 준다.[9]
4. 황제 등극
모에시아 수페리올 및 판노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아이밀리아누스는 253년, 도나우강 국경을 넘어 침입한 고트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3][10] 이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휘하 군단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황제로 추대된 아이밀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당시 황제였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 볼루시아누스는 아이밀리아누스를 막기 위해 출진했으나,[7] 인테라나 나하르스 전투(현대 테르니 근교)에서 패배했다.[12]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북쪽으로 도주하던 중, 253년 8월경 ''포룸 플라미니이''(현대 산 조반니 프로피아마)에서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6][14]
경쟁자를 제거한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로 진군했고, 로마 원로원은 짧은 반대 끝에[15] 그를 새로운 황제로 공식 인정했다.[4][16] 원로원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Pius''(경건한 자), ''Felix''(행복한 자), ''Pater Patriae''(조국의 아버지) 등의 칭호와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을 부여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 지위에 올렸다.[17] 이로써 아이밀리아누스는 군대의 추대와 원로원의 인정을 통해 정식으로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4. 1. 반란과 로마 진격
253년, 고트족은 왕 크니바의 지휘 아래 로마로부터 약속된 공물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국경을 넘어 카파도키아, 페시누스, 에페소스 등을 공격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로마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고트족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시험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7] 이 지역 방어를 맡은 아이밀리아누스는 아브리투스 전투 패배로 사기가 저하된 군대를 로마의 명예를 상기시키고 고트족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공물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격려했다(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 로마군은 고트족을 기습하여 대부분을 섬멸하고, 고트족 영토로 진격해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이 승리 후,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는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3][10] 반면, 요르다네스는 아이밀리아누스 군대가 고트족의 공물을 지키는 대신 로마 영토를 약탈했다고 다르게 기록했다.[11]황제로 추대된 아이밀리아누스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 속주를 방어하게 하고, 즉시 로마로 진격했다. 이는 합법적인 황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증원군을 모으기 전에 그를 상대하려는 의도였다. 아이밀리아누스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하자,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아이밀리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게 한 뒤, 그를 막기 위해 로마를 나섰다. 갈루스 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가 자신들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증원군 없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7]
두 군대는 현대 테르니 근처, 플라미니아 가도의 동쪽 길 남단에 위치한 인테라나 나하르스 전투에서 격돌했고, 아이밀리아누스가 승리했다.[12]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북쪽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증원군을 기다리며 시간을 벌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253년 6월 말 또는 8월 초, 플라미니아 가도의 서쪽 길에 있는 ''포룸 플라미니이''(현대 산 조반니 프로피아마)에서 자신들의 경호병들에게 살해당했다.[6] 경호병들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붙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로 진격을 계속했다. 로마 원로원은 잠시 망설였으나,[15] 결국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아이밀리아누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트라키아와 페르시아에 맞서 제국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하며, 자신은 원로원의 장군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권력을 원로원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다.[4][16] 아이밀리아누스는 ''Pius''(경건한 자), ''Felix''(행복한 자), ''Pater Patriae''(조국의 아버지) 칭호와 함께 호민관 직권(''tribunicia potestas'')을 받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집정관으로는 임명되지 않았다.[17] 그가 발행한 주화들은 그의 선전이 군사적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고트족을 격파했으며, 따라서 로마 제국의 힘을 회복시킬 적임자임을 강조했다.[17]
4. 2. 권력 장악
아이밀리아누스는 황제로 추대된 후,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채 자신의 속주 방어를 포기하고 신속하게 로마로 진격했다. 이는 합법적인 황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가 증원군을 모으기 전에 먼저 제압하기 위한 결정이었다.[7] 아이밀리아누스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하자,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움직여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게 한 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나섰다. 이러한 대응은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음을 시사하며, 갈루스 측은 증원군 도착 전에 수적 우위를 통해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7]
두 군대는 현대 테르니 근처, 플라미니아 가도의 동쪽 지로 남단에 위치한 인테라나 나하르스 전투에서 격돌했다.[12] 이 전투에서 아이밀리아누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는 아마도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시도였을 것이나, 253년 6월 말 또는 8월 초, 플라미니아 가도의 서쪽 지로에 있는 ''포룸 플라미니이''(현대 산 조반니 프로피아마)에서 자신들의 경호원들에게 살해당했다.[6] 경호원들은 새로운 황제가 될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충성함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4]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로 진격을 계속했다. 로마 원로원은 처음에는 잠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나,[15] 결국 그를 황제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아이밀리아누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트라키아와 페르시아에 맞서 제국을 위해 싸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원로원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스스로를 원로원의 장군으로 여긴다는 입장을 표명했다.[4][16]
원로원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Pius''(경건한 자), ''Felix''(행복한 자), 그리고 ''Pater Patriae''(조국의 아버지) 칭호를 부여했으며,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을 인정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 지위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는데, 이는 그의 비(非)원로원 출신 배경 때문일 수 있다.[17] 아이밀리아누스가 발행한 주화들을 보면, 그의 선전 활동이 군사적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전까지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고트족을 격파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이 로마 제국의 힘을 회복시킬 적임자임을 강조하려 했다.[17]
5. 몰락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아이밀리아누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인강 지역 총독이었던 발레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자,[19]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는 내전을 피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스폴레티움 근처에서 살해당하며[20] 약 3개월간의 짧은 통치를 마감했다.[13]
5. 1. 발레리아누스와의 대립
라인강 지역 총독이었던 발레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시무스는 이 군대가 갈루스 황제에 의해 증원군으로 소집되었다고 기록했다.[18]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군대가 동방 원정을 위해 동원되었거나, 갈루스 사망 후 발레리아누스가 권력을 잡기 위해 이동시킨 것으로 본다.[19]황제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는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더 강력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아이밀리아누스를 스폴레티움 또는 오리쿨룸과 나르니 사이의 산귀나리움 다리(스폴레티움과 로마의 중간 지점)에서 살해하고[20] 발레리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했다.
아이밀리아누스가 죽은 뒤, 7월 말에서 9월 중순 사이에 그에 대한 ''사후 명예 훼손''(Damnatio memoriae)이 선언되었다.[7] 4세기에 작성된 354년 연대기에는 아이밀리아누스가 총 88일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플로리아누스와 같은 기간이다). 그의 단독 통치는 갈루스의 죽음과 자신이 살해되기까지 약 한 달 정도로, 로마 역사상 가장 짧은 통치 기간 중 하나였다.[13]
찬탈자 실바나쿠스는 발레리아누스에 맞서기 전, 아이밀리아누스가 로마에 남겨둔 장교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역시 나중에 황제가 되려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21]
로마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짧고 비극적인 통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아이밀리아누스는 극히 미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그의 통치는 더욱 미미했으며, 셋째 달에 살해되었다."[22]
5. 2. 사후 평가
아이밀리아누스의 죽음 이후, 7월 말에서 9월 중순 사이에 그에 대한 ''사후 명예 훼손''이 선언되었다.[7] 4세기의 354년 연대기에는 아이밀리아누스가 총 88일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플로리아누스의 통치 기간과 같다.[13] 아이밀리아누스가 단독으로 통치한 기간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사망하고 자신이 살해되기까지 약 한 달 동안으로, 로마 역사상 가장 짧은 통치 기간 중 하나였다.[13]로마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삶과 통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평가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극히 미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그의 통치는 더욱 미미했으며, 셋째 달에 살해되었다."[22]
6. 유산
아이밀리아누스의 황제 재위 기간은 불과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극과 몰락은 3세기의 위기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제거하고 황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경쟁자인 발레리아누스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당시 로마 군대가 황제의 즉위와 폐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켰던 군인 황제 시대의 단면을 드러낸다.
후대의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치세를 다음과 같이 매우 짧고 의미 없었던 것으로 평가했다.
……아이밀리아누스 황제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치세는 더욱 보잘것없었고 불과 3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이밀리아누스의 짧은 통치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과 군대의 영향력 증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제국의 안정보다는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참조
[1]
문서
Epitome de Caesaribus
[2]
문서
Epitome de Caesaribus
[3]
문서
Epitome Historiarum
[4]
문서
Epitome Historiarum
[5]
문서
Breviariun ab Urbe condita
[6]
문서
John of Antioch
[7]
웹사이트
Marcus Aemilius Aemilianus (ca. July – ca. September, 253)
http://www.roman-emp[...]
[8]
문서
[9]
문서
Chronicon
[10]
문서
New History
[11]
문서
Getica
[12]
문서
[13]
서적
Roman Imperial Titulature and Chronology, A.D. 235–284
https://books.google[...]
Gieben
1990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Anonymous Continuator of Cassius Dio
[17]
웹사이트
Roman Imperial Coins of 249–253 A.D.
http://sonic.net/~rb[...]
2008-07-20
[18]
문서
[19]
서적
Prophecy and History in the Crisis of the Roman Empire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20]
문서
[21]
간행물
"L'empereur Silbannacus. Un second antoninien"
1996
[22]
문서
Brevarium ab Urbe cond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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