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계획
1. 개요
아폴로 계획은 미국이 1960년대에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추진한 유인 달 착륙 프로그램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머큐리 계획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5월 25일 미국 의회 연설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아폴로 계획은 1967년 아폴로 1호 화재 참사 이후 기술적, 안전상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아폴로 7호부터 유인 우주 비행을 시작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적 성취로 평가받으며, 이후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의 유인 달 착륙을 통해 달 암석과 토양을 수집했다. 아폴로 계획은 무선 전동 공구, 내화성 재료, 심장 모니터 등 다양한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1975년 아폴로-소유즈 시험 계획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우주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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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달의 위상
달의 위상은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 변화에 따라 삭, 상현달, 망, 하현달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약 29.5일의 주기로 변화하고 달력, 전통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
달 -
달 궤도
달 궤도는 달을 공전하는 궤도를 의미하며, 소련의 루나 1호 발사 시도로 달 궤도 탐사가 시작되었고, 달의 질량 집중으로 인해 궤도가 불안정하며, 다양한 궤도 전이 방식과 라그랑주점을 이용한 궤도가 사용된다. -
달 탐사선 -
아폴로 13호
아폴로 13호는 달 착륙을 목표로 발사되었으나, 산소 탱크 폭발 사고로 달 착륙이 취소되었지만, 승무원들은 달 착륙선을 이용하여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여 "성공적인 실패"라는 별칭을 얻은 미국의 아폴로 계획 중 세 번째 유인 우주 탐사 임무이다. -
달 탐사선 -
아폴로 15호
아폴로 15호는 1971년 발사된 미국의 아폴로 계획 중 9번째 유인 미션으로, 달 탐사차를 처음 사용하여 해들리 계곡과 아펜니노 산맥 일대를 탐사하고 월석을 채취하는 등 과학적 탐사에 중점을 둔 J-미션이었으나, 승무원들의 우표 소지 논란이 있었다. -
NASA의 계획 -
EPOXI
EPOXI는 NASA의 확장 임무로, 딥 임팩트 탐사선을 활용하여 혜성 탐사(DIXI)와 외계 행성 관측(EPOCh)을 수행했으며, 2010년 하틀리 2 혜성 근접 비행을 통해 혜성 핵을 관측하고 외계 행성들의 분광학적 관측을 진행했다. -
NASA의 계획 -
상업용 궤도 운송 서비스
2. 배경
아폴로 계획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되었던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인 머큐리 계획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머큐리 계획은 한 명의 우주비행사를 지구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이 목표였지만, 아폴로 계획은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폴로라는 이름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에이브 실버스테인이 고대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에서 따온 것이다. 실버스테인은 훗날 "내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처럼 우주선의 이름을 붙였다"고 회상했다.
1960년 11월 존 F.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우주 탐사와 미사일 방어에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공약했지만, 실제로는 우주 탐사보다는 미사일 경쟁에 더 집중하는 정책을 펼쳤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하자 미국은 소련의 기술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 다음 날, 미국은 우주 과학 위원회를 소집하여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1961년 4월 20일, 케네디는 린든 존슨 부통령에게 미국의 우주 계획 현황을 검토하라는 메모를 전달했다. 린든 존슨은 "1966년에서 1967년 사이에 달 착륙을 성공시키는 것이 소련에 대한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안"이라고 답했다.
아폴로 계획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 속에서 탄생했다. 1961년 5월,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목표를 발표했고, 이는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실현되었다. 이후 아폴로 계획은 5번의 달 착륙을 더 성공시켰고, 1972년 모든 달 탐사 계획이 종료되었다.
아폴로 계획은 NASA의 머큐리 계획, 제미니 계획에 이은 세 번째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이었다. 아폴로 우주선과 새턴 로켓은 이후 스카이랩 계획과 아폴로-소유즈 시험 계획에도 사용되어, 이들 계획도 아폴로 계획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폴로 계획은 인간을 달에 보내고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두 번의 큰 사고를 겪었다. 아폴로 1호 화재 사고로 세 명의 우주비행사가 사망했고, 아폴로 13호는 달로 가는 도중 기계선의 산소 탱크 폭발로 달 착륙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과 지상 관제관, 기술자들의 지원 덕분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아폴로 8호는 인류 최초로 지구 외 다른 천체(달)의 궤도를 돌았으며, 아폴로 17호는 현재까지 인류가 다른 천체에 착륙한 마지막 사례이다.
아폴로 계획은 로켓과 유인 우주선 개발, 전자 공학, 원격 통신, 컴퓨터 등 관련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복잡한 장비의 신뢰성을 검사하기 위해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는 기법을 개척하는 등 여러 공학 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유인 우주 비행에 필수적인 장비들은 문명, 기술, 전자 공학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계획에서 사용된 많은 유물들은 미국 국립항공우주박물관 등 세계 각지에 전시되어 있다.
2.1. 미국의 우주 개발 경쟁 참여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머큐리 계획을 기반으로 미항공우주국(NASA)의 에이브 실버스테인이 아폴론의 이름을 따 아폴로 계획이 시작되었다. 1960년 11월,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당선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확보하겠다고 공약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하자, 미국은 소련의 기술력에 위협을 느끼고 우주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61년 5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960년대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목표를 선언하며 아폴로 계획을 공식화했다.
당시 미국은 유인 우주 비행 경험이 부족했고, NASA 내부에서도 케네디의 선언이 실현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2.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
1961년 5월 25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의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아폴로 계획을 선포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이러한 선언을 할 당시, 미국은 단지 한 명의 우주인을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미국항공우주국(NASA) 내에서도 이 선언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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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25일, 케네디는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아폴로 계획에 대한 지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케네디의 이러한 도전은 당시 미국의 기술력으로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1969년 말까지 인간을 달 표면에 착륙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 발전과 막대한 예산(250억 달러)이 필요했다. 아폴로 계획에는 최대 40만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으며, 2만 개 이상의 기업과 대학이 참여했다.
3. 탐사 방안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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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한 목표에 따라, 지구에서 달까지 안전하게 왕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아폴로 계획에서 제시되었다. 검토된 주요 방안은 다음과 같다.
| 방식 | 설명 | 채택 여부 |
|---|---|---|
| 직접 도달 | 하나의 우주선으로 달까지 직접 도달하여 착륙 후 지구로 귀환. 노바 로켓과 같이 매우 강력한 추진체가 필요. | 채택되지 않음 |
| 지구 궤도 랑데뷰 | 여러 로켓을 이용하여 부품을 지구 궤도에 올린 후 조립하여 달로 향하는 방식. | 채택되지 않음 |
| 달 표면 랑데뷰 | 연료를 채운 무인 우주선을 먼저 달에 보내고, 유인 우주선을 뒤따라 보내 달 착륙 후 무인 우주선의 연료를 사용하여 귀환. | 채택되지 않음 |
| 달 궤도 랑데뷰 | 하나의 로켓에 사령선과 착륙선을 모두 실어 발사한 뒤, 달 궤도에서 달 착륙선을 분리하여 달에 착륙시키고, 임무 후 달 궤도에서 사령선과 다시 도킹하여 귀환. | 채택됨 |
1961년 초, NASA 내부에서는 직접 도달 방식이 선호되었다. 많은 기술자들은 지구 궤도에서도 아직 시도되지 않은 랑데부와 도킹을 달 궤도에서 실현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그러나 랭글리 연구소의 존 후볼트 등은 달 궤도 랑데뷰(LOR) 방식이 가져올 수 있는 무게 감소라는 이점을 강조했다. 후볼트는 NASA 부국장 로버트 시먼즈에게 LOR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7월, 시먼즈가 설립한 고롤빈 위원회는 아폴로 계획에 사용될 로켓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달 착륙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처음에 지구 궤도 방식과 달 궤도 방식의 혼합 방안을 추천했지만, 후볼트 등의 노력으로 LOR 방식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1961년 말부터 1962년 초, 휴스턴 유인 우주 센터 내 NASA 우주 임무 그룹도 LOR 방식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마셜 우주비행센터의 기술자들도 달 궤도 랑데뷰 방식의 장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1962년 7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비공식적으로 달 궤도 랑데뷰 방식을 지지한다고 발표했고, NASA는 같은 해 11월 LOR 방식 채택을 공식 발표했다.
우주 개발사 연구가 제임스 핸슨은 "만약 1962년에 NASA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미국은 달에 도착했겠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약속한 '1960년대에 달에 도착시키겠다'는 목표는 거의 확실히 달성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4. 우주선
아폴로 우주선은 사령선과 달 착륙선 두 종류로 구성되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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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선 모듈(CM)은 세 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하여 지구 궤도와 달 궤도를 비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원뿔형 캡슐 형태로, 발사부터 지구 귀환까지 우주비행사들을 수송했다. 대기권 재진입 시 발생하는 열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하기 위해 내열 방패가 장착되었고, 반응 제어 시스템(RCS) 엔진을 통해 자세를 제어했다. 낙하산을 이용하여 해상에 착수했다.
아폴로 달 착륙선(LM)은 두 명의 우주비행사를 달 표면에 착륙시키고 다시 달 궤도로 귀환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지구 대기권 통과나 귀환을 고려하지 않아 매우 가벼운 구조로 설계되었다. 하강 단계와 상승 단계로 구성되었는데, 하강 단계는 착륙과 표면 탐사에 필요한 장비와 소모품을, 상승 단계는 승무원 캡슐, 추진제, RCS를 탑재했다.
달 착륙선은 달 표면에 착륙 후 사령선과 기계선이 대기하는 달 궤도까지 귀환하는 유일한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지구의 중력권에서는 운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내열판은 제한적이며 경량화되었다. 상승단과 하강단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강단에는 아폴로 달 표면 실험 장치군과 달 탐사차 등을 탑재하는 공간이 있었다.
개발은 그루먼(Grumman)사가 담당하였고, 톰 켈리가 계획 전체를 감독했지만, 개발 지연 문제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NASA는 당초 아폴로 8호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던 유인 시험 비행을 아폴로 9호로 연기해야 했다.
5. 추진체
새턴 V 로켓은 아폴로 계획에 추진체로 사용된 로켓이다. 3단 로켓으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제안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새턴 V는 완전히 연료를 채운 사령선/기술선(CSM)과 달착륙선(LM)을 달로 보내도록 설계되었다. 지름은 약 약 10.06m이고, 약 43907.71kg의 달 탑재체를 포함하여 높이는 약 110.64m에 달했다. 후기의 고급 달 착륙 임무에서는 탑재 능력이 약 46992.13kg까지 증가했다. 1단인 S-IC는 RP-1/LOX를 연료로 사용하여 정격 추력 7500000lbf을 발휘했으며, 이후 7610000lbf로 향상되었다. 2단과 3단은 액체 수소를 연료로 사용했다. 3단은 S-IVB의 개조형으로 추력이 230000lbf로 증가했고, 주차 궤도에 도달한 후 달 전이 궤도 진입을 위해 엔진을 재시동할 수 있었다.
6. 단계별 미션
1967년 텍사스 휴스턴의 유인 우주비행 센터는 아폴로 계획의 미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 | 설명 | |
|---|---|
| A | 무인 사령선 시험 비행 |
| B | 무인 달 착륙선 시험 비행 |
| C | 지구 저궤도에서의 유인 사령선 시험 비행 |
| D | 지구 저궤도에서의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 시험 비행 |
| E | 7400km 상공에서의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 지구 궤도 비행 |
| F |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의 달 궤도 비행 |
| G | 달 착륙 |
이후 달 표면 탐사와 월면차를 이용한 탐사를 포함한 H 미션이 추가되었다. 아폴로 18호는 달 표면에 과학 장비 기지를 설치하는 I 미션이 계획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7. 임무 수행
아폴로 계획에는 총 16대의 우주선이 사용되었으며, 유인 우주 비행은 아폴로 7호부터 시작되었다. 각 우주선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 명칭 | 발사일 | 요약 |
|---|---|---|
| 아폴로 4호 | 1967년 11월 9일 | 새턴 V 로켓 시험 목적의 무인 비행 |
| 아폴로 5호 | 1968년 1월 22일-23일 | 달 착륙선 시험 목적의 무인 비행 |
| 아폴로 6호 | 1968년 4월 4일 | 사령선, 달 착륙선 등을 포함한 최종 시험 성격의 무인 비행 |
| 아폴로 7호 | 1968년 10월 11일-22일 | 지구 궤도에서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 궤도 비행, 최초로 우주 비행이 텔레비전에 생방송됨 |
| 아폴로 8호 | 1968년 12월 21일-27일 | 20시간 동안 달 궤도를 10회 선회 비행 |
| 아폴로 9호 | 1969년 3월 3일-13일 | 달 착륙선에 우주인이 탑승하여 지구 궤도 선회 |
| 아폴로 10호 | 1969년 5월 18일-26일 | 달 착륙선을 분리하여 달 궤도 선회 후 다시 사령선과 도킹, 최초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 중계 |
| 아폴로 11호 | 1969년 7월 16일-24일 | 달 착륙 성공 |
| 아폴로 12호 | 1969년 11월 14일-24일 | 달 착륙 후 31시간 이상 표면 활동 |
| 아폴로 13호 | 1970년 4월 11일-17일 | 사령선 고장으로 달 궤도 선회 후 귀환 |
| 아폴로 14호 | 1971년 1월 31일 - 2월 9일 | 월석 채취용 카트 최초 사용 |
| 아폴로 15호 | 1971년 7월 26일 - 8월 7일 | 최초로 월면차 사용 |
| 아폴로 16호 | 1972년 4월 16일-27일 | 최초로 달 고지대 착륙, 두 번째 월면차 사용, 71시간 동안 달 표면 임무 수행 |
| 아폴로 17호 | 1972년 12월 7일-19일 | 75시간 동안 달 표면 임무 수행, 월면차로 30.5km 이동, 아폴로 계획의 마지막 달 탐사 |
| 아폴로 18호 | 1975년 7월 15일-24일 |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의 일환으로 발사, 소유즈 19호와 도킹, NASA 일부 문서에 아폴로 18호로 기재됨 |
7.1. 아폴로 1호 화재 참사
1967년 1월 27일, 첫 유인 사령선 테스트를 위한 훈련 도중 화재가 발생하여 거스 그리섬, 에드 화이트, 로저 채피 세 우주비행사가 사망했다. 이들은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비행 명칭을 아폴로 1호로 결정했다.
훈련은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진행되었으며, 1월에는 발사 카운트다운을 시뮬레이션하는 "플러그 아웃"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스트는 시작부터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우주복에서 이상한 냄새가 감지되었고, 통신 문제로 인해 모의 카운트다운이 중단되었다. 이 중단 기간 동안 캡슐 내부에서 전기 화재가 발생했고, 고압의 100% 산소 환경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캡슐 내벽이 파열되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에 우주비행사들은 질식사했다.
NASA는 즉시 사고 조사위원회를 소집했고, 조사위원회는 "명령 모듈 설계, 제작 및 품질 관리에 결함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NASA 국장 웨브의 주장에 따라 노스 아메리칸은 해리슨 스톰스를 명령 모듈 프로그램 매니저직에서 해임했다. 웨브는 또한 아폴로 우주선 프로그램 사무소(ASPO) 매니저 조셉 프랜시스 셰이를 조지 로우로 교체했다.
화재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블록 II 우주선과 운영 절차에 변경이 가해졌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발사 전후에 순수 산소 대신 질소/산소 혼합물을 사용하고 가연성 물질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한 블록 II 설계는 블록 I 플러그형 해치 커버를 신속하게 분리할 수 있는 바깥쪽으로 열리는 도어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7.2. 유인 달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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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Apollo manned development missions insignia.png|thumb|right|upright=1.15|아폴로 유인 개발 임무 패치. 패치를 클릭하여 해당 임무에 대한 주요 문서를 읽으십시오.|alt=아폴로 1호부터 아폴로 11호까지 6개의 유인 아폴로 개발 임무 패치의 합성 이미지입니다.
rect 0 0 595 600 아폴로 1호(CSM 시험 비행 실패)
rect 596 0 1376 600 아폴로 7호(최초 유인 CSM 시험 비행)
rect 1377 0 2076 600 아폴로 8호(최초 유인 달 궤도 비행)
rect 0 601 595 1200 아폴로 9호(유인 지구 궤도 LM 시험)
rect 596 601 1376 1200 아폴로 10호(유인 달 궤도 LM 시험)
rect 1377 601 2076 1200 아폴로 11호(최초 유인 달 착륙)
파일:Apollo lunar landing missions insignia.png|섬네일|오른쪽|upright=1.15|아폴로 유인 달 착륙 임무 패치. 패치를 클릭하여 해당 임무에 대한 주요 문서를 읽어보세요.|alt=아폴로 12호부터 아폴로 17호까지 여섯 번의 유인 아폴로 달 착륙 임무 패치를 합성한 이미지.
rect 0 0 602 600 아폴로 12호 두 번째 유인 달 착륙
rect 603 0 1205 600 아폴로 13호 달 착륙 시도 실패
rect 1206 0 1885 600 아폴로 14호 세 번째 유인 달 착륙
rect 0 601 602 1200 아폴로 15호 네 번째 유인 달 착륙
rect 603 601 1205 1200 아폴로 16호 다섯 번째 유인 달 착륙
rect 1206 601 1885 1200 아폴로 17호 여섯 번째 유인 달 착륙
아폴로 계획의 유인 달 탐사는 1968년 아폴로 8호의 달 궤도 비행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1969년 5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아폴로 10호는 달 착륙선을 분리하여 달 궤도를 선회한 후 다시 사령선과 도킹하는 예행연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69년 7월 16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아폴로 11호는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디디며 "이는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아폴로 12호는 1969년 11월 14일부터 24일까지 달에 착륙하여 31시간 이상 표면에서 활동하였다. 아폴로 13호는 1970년 4월 11일부터 17일까지 달로 향하던 중 사령선 고장으로 달 궤도를 선회하여 귀환하였다. 아폴로 14호는 1971년 1월 31일부터 2월 9일까지 월석 채취를 위한 카트를 최초로 사용했다. 아폴로 15호는 1971년 7월 26일부터 8월 7일까지 최초로 월면차를 사용했다. 아폴로 16호는 1972년 4월 16일부터 27일까지 처음으로 달의 고지대에 착륙했으며, 두 번째로 월면차를 사용하여 달 표면에서 71시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아폴로 17호는 1972년 12월 7일부터 19일까지 아폴로 계획의 마지막 달 탐사였다. 75시간 동안 달 표면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월면차를 이용하여 30.5km를 이동했다. 선장 유진 서넌은 2020년 현재, 마지막으로 달을 떠난 인간이다.
7.3. 아폴로-소유즈 도킹
아폴로 18호는 1975년 7월 15일부터 24일까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의 일환으로 발사되어 소유즈 19호와 도킹하였다. NASA의 일부 공식 문서에서는 아폴로 18호로 기재되는 등 사실상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지만, 정식으로는 번호가 붙지 않는 '아폴로 호'이다. 이 미션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우주 협력 가능성을 확인하고,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8. 달에서 가져온 샘플
아폴로 계획을 통해 총 381.7kg의 암석 및 기타 물질이 달 표면에서 채취되었으며, 대부분은 현재 휴스턴에 있는 달 자료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달 표면에서 채취된 암석은 지구상의 것과 비교하여 전반적으로 매우 오래되었다. 그 범위는 약 32억 년 전(달의 바다 부분에서 채취된 현무암)부터 46억 년 전(고지에서 채취된 지각 샘플)까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현재 지구상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태양계 탄생 초기의 샘플로 여겨진다.
아폴로 계획 전체를 통해 채취된 암석 중 중요한 것 중 하나로, 15호에서 제임스 어윈 우주비행사와 데이비드 스콧 우주비행사가 가져온 "제네시스 록(Genesis Rock = 창세기의 돌)"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사장암으로 분류되는 이 암석은 칼슘이 풍부한 사장석(회장석)으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으며, 달 표면 고지의 지각 샘플로 여겨진다. 이 안에서는 지구화학에서 KREEP영어라고 불리는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암종이 발견되었다. 크리프와 사장암 등의 샘플은 달의 외각 표면이 과거 대규모로 용융된 상태(마그마 오션)였다는 가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채취된 암석의 대부분은 충돌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많은 샘플의 표면에는 미세 운석이 충돌한 것에 의한 극소의 크레이터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두꺼운 대기층에 의해 막힌 지구상의 암석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많은 것에는 운석이 충돌할 때 발생한 고압의 충격파에 노출된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중에는 impact melt영어(크레이터 주변에서 충격에 의해 용융된 물질)로 구성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달 표면에서 가져온 모든 샘플은 반복적인 충돌의 충격에 노출됨으로써 각력암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달 암석의 분석 결과는 달의 기원을 지구에 화성 정도 크기의 천체가 충돌한 것으로 보는 "거대 충돌설"의 논리와 일치한다.
9. 아폴로 계획의 유산
아폴로 계획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적 성취 중 하나로 여겨지며, 많은 기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폴로 유도 컴퓨터는 미니트맨 미사일 개발과 함께 초기 집적 회로(IC) 연구를 이끌었으며, 연료전지의 실용화, CNC(컴퓨터 수치 제어) 기계 가공 기술 발전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63년까지 아폴로 계획은 미국 집적 회로 생산량의 60%를 사용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폴로 계획은 또한 우주비행사들이 촬영한 사진들을 통해 1970년대 환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폴로 8호의 윌리엄 앤더스가 촬영한 지구돋이와 아폴로 17호 우주비행사들이 촬영한 푸른 구슬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지구의 연약함, 취약성, 고립을 보여주며 환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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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계획의 성공 이후, NASA는 아폴로 하드웨어를 활용한 다양한 후속 응용 프로그램을 검토했다. 스카이랩 계획(1973년 5월~1974년 2월)과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계획(1975년 7월)이 실제로 실행되었다.
2009년, NASA의 달 궤도 탐사선(LRO)은 달 표면에 남겨진 아폴로 계획의 잔해와 유인 아폴로 우주선 착륙 지점을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