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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9세 다키텐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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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욤 9세 다키텐 공작은 1071년에 태어나 1126년에 사망한 아키텐 공작이자 트루바두르이다. 그는 15세에 공작위를 계승하여 프랑스 국왕을 능가하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며, 1101년 십자군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욤 9세는 두 번의 결혼과 툴루즈 백작령 상속 분쟁, 교회와의 갈등을 겪었으며, 트루바두르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을 남긴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솔직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서정시 전통 확립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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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9세 다키텐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욤 9세의 세밀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 중인 13세기 샹송집에 실려있는 기욤 9세의 세밀화
작위
작위아키텐 공작
포와티에 백작
가스코뉴 공작
재임 기간1086년 – 1126년
이전기욤 8세
이후기욤 10세
생애
출생일1071년 10월 22일
사망일1126년 2월 10일 (54세)
매장지포와티에・
가족
배우자앙주의 에르망가르드
필리파 드 툴루즈
자녀기욤 10세
레이몽, 안티오크 공
아녜스, 아라곤 왕비
가문포와티에 가문
아버지기욤 8세
어머니힐데가르드 드 부르고뉴
기타 정보
별칭젊은 공
시인 공

2. 생애

기욤 9세는 1071년 푸아티에 가의 기욤 8세와 힐데가르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8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아키텐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는 리무주에서 라틴어를 공부해 시인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2]

15세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젊은 공'이라는 뜻의 '기욤 르 즈느'로 불렸다. 연대기 작가 오르드릭 비탈리스에 따르면, 기욤 9세는 매우 방탕한 성격이었다. 1088년 어머니의 사촌인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딸 에르망가르드와 결혼했으나, 3년 후인 1091년 이혼했다. 1094년에는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딸 필리파와 재혼했다.[3]

1096년 필리파의 삼촌 레몽 4세가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면서 툴루즈를 비우자, 기욤 9세는 필리파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1098년 툴루즈를 점령했다. 그러나 1100년 교황파스칼 2세의 압력을 받아 레몽 4세의 아들 베르트랑에게 반환해야 했다. 이후 기욤 9세는 1101년 십자군에 참가하여 시리아로 원정했으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간신히 안티오키아 공국에 의탁했다. 1102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귀환 과정에서 배가 폭풍을 만나는 등 여러 경험을 거쳐 10월 29일 푸아티에로 돌아왔다.[3]

베르트랑이 1112년 트리폴리 백국에서 사망하자, 기욤 9세는 다시 툴루즈를 침공하여 1114년 점령했다. 그러나 1119년 툴루즈에 남겨둔 대리가 민중 반란으로 추방되고, 1123년에는 나르본마저 함락당하면서 툴루즈에 대한 야망은 좌절되었다. 그는 아키텐 영내 가신들의 반란과 다리 부상 등 어려움을 겪는 한편, 레콩키스타에 참가하여 1120년 아라곤 왕국 왕 알폰소 1세를 지원, 쿠탄다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5]

1126년 2월 10일, 기욤 9세는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푸아티에의 생 장 드 몽티에르뇌프 수도원에 묻혔다.[6]

2. 1. 초기 생애와 상속 (1071년 ~ 1088년)

기욤 9세는 기욤 8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부르고뉴의 힐데가르데 사이에서 1071년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아키텐 궁정에서 큰 축하를 받았지만, 교회는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의 이전 이혼과 부모의 근친혼 때문에 그를 사생아로 여겼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 로마로 순례를 떠나 교황의 승인을 받아 그의 세 번째 결혼과 어린 기욤의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당시 푸아티에 가문은 푸아티에, 가스코뉴 외에도 리무쟁, 앙굴렘 등을 포함하여 루아르 강에서 피레네 산맥, 툴루즈 백작령의 국경 부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국왕을 능가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귀족으로, 프랑스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108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를 상속한 기욤 9세는 툴루즈 백작령 병합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는 한편, 리모주에서 공부하며 익힌 라틴어 교양이 시인으로서의 토대를 형성했다.[2]

15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기 때문에, 통치 초반에는 '''기욤 르 즈느'''(''Guillaume le Jeune,''' 젊은 공)라고 불렸다.[3] 1088년에 어머니의 사촌 앙주백작풀크 4세의 딸 에르망가르드와 결혼했다.[3]

2. 2. 두 번의 결혼과 툴루즈 상속 분쟁 (1088년 ~ 1102년)

기욤 9세는 아버지 기욤 8세가 사망하자 15세의 나이로 공작위를 계승했다. 1088년, 16세의 나이로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딸 에르망가르드와 첫 결혼을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으나, 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잦은 잔소리와 감정 기복으로 기욤 9세를 힘들게 했고, 결국 1091년에 이혼하였다.[3]

1094년 기욤 9세는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필리파와 재혼했다. 필리파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둘과 딸 다섯이 태어났는데, 그중 장남은 훗날 기욤 10세로 아키텐 공작위를 계승했고, 차남 레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기욤 9세의 궁정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며 십자군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기욤 9세는 성지 탈환보다 필리파의 삼촌 레몽 4세가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툴루즈를 차지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필리파는 아버지 기욤 4세의 영지를 상속받아야 했으나, 레몽 4세가 권력을 가로챘기 때문에 툴루즈 백작위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1098년 기욤 9세 부부는 툴루즈를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이로 인해 파문당할 위기에 처했다.

파문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1101년의 십자군에 참전하였다. 이 십자군은 1099년 제1차 십자군예루살렘 함락 성공에 고무된 사람들이 조직한 원정대였다. 기욤 9세는 원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툴루즈 영지를 레몽 4세의 아들 베르트랑에게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1101년 성지에 도착하여 이듬해인 1102년까지 머물렀다. 십자군에서 군사적 업적은 미미했는데, 대부분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했고, 헤라클레아에서는 셀주크 투르크 군대에 의해 전멸당하기도 했다.

2. 3. 1101년 십자군 참여와 귀환 (1101년 ~ 1102년)

기욤 9세는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성공에 자극받아 1101년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툴루즈 영지를 베르트랑에게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렸다.[3]

1101년 성지에 도착한 기욤 9세는 이듬해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십자군에서 그의 군사적 기록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주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자주 패배했다. 그의 무모함은 여러 차례 매복 기습으로 이어져 그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1101년 9월, 그의 군대는 헤라클레아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 의해 궤멸되었고, 기욤 9세는 간신히 탈출했다. 중세 연대기 작가 오데리크 비탈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욤 9세가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그의 곁에는 단지 6명의 동료만 있었다고 한다.

2. 4. 교회와의 갈등과 두 번째 파문 (1102년 ~ 1118년)

기욤 9세는 당시 많은 귀족들처럼 교회와 갈등을 겪었으며, 일생 동안 두 번이나 파문을 당했다.[4] 첫 번째 파문은 1114년 교회 세금 특권을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기욤은 푸아티에 주교 피에르에게 사면을 강요하며, 파문을 철회하지 않으면 칼로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피에르 주교가 거짓으로 복종하자 기욤은 그를 풀어주었지만, 주교는 다시 파문 문서를 낭독하고 순교할 각오로 목을 내밀었다. 기욤은 잠시 망설이다 "천국에 보낼 만큼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라며 칼을 거두었다.[4]

두 번째 파문은 봉신인 샤틀르로 자작 에므리 드 로슈푸코의 부인 당제로사 드 릴 부샤르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제로사 역시 기욤의 구애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으로 보인다. 기욤은 그녀에게 푸아티에 성의 모베르죈 탑을 거처로 제공했고, 이후 '라 모베르죈'이 그녀의 별칭이 되었다. 맘즈베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기욤은 방패에 그녀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5]

툴루즈에서 돌아온 필리파는 궁에 있는 연적의 존재에 분노하여 도움을 청했지만, 기욤의 권력 때문에 누구도 돕지 못했다. 교황특사 지로는 기욤에게 당제로사를 남편에게 돌려보내라고 항의했지만, 기욤은 대머리였던 지로를 조롱하며 "당신 빈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자라면 자작부인과 헤어지겠소"라고 답했다.[4] 필리파는 모욕감을 느껴 1116년 퐁트브로 수녀원으로 은둔했고, 그곳에서 기욤의 첫 부인 에르망가르드와 교류했다. 필리파는 1118년 11월 28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2. 5. 툴루즈 재침공과 레콘키스타 참여 (1112년 ~ 1123년)

1120년부터 1123년까지 기욤 9세는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 군과 연합하여 레콘키스타에 참여, 코르도바 함락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과 함께 싸웠다.[5] 이 기간 동안 무슬림 동맹에게서 수정 꽃병을 선물받았는데, 이는 훗날 그의 손녀 엘레오노르에게 전해졌다. 이 꽃병은 7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5]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수정 꽃병


1122년, 기욤 9세는 툴루즈 백작 알폰세 쥬르뎅에게 툴루즈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겼고, 이후 이 영토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6]

2. 6. 만년과 죽음 (1118년 ~ 1126년)

기욤 9세와 당제로사의 불륜으로 인해 장자인 기욤 10세와의 부자 관계는 악화되었다.[5] 성직자 랄프 디세토는 기욤 10세가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을 복수하기 위해 7년 동안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랄프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랄프가 주장한 반란 시작 연도는 1113년인데, 이때 기욤 10세는 겨우 13세 소년이었고, 아직 기욤 9세와 당제로사와의 불륜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5] 부자 간의 관계는 1121년 당제로사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샤틀르로의 에노르와 결혼하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기욤 9세는 1120년 무렵 그동안 반목하던 교회에 양보함으로써 다시 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는데, 바로 필리파가 죽자 첫 부인이었던 에르망가르드의 복귀 문제였다. 1118년 필리파가 사망하자마자 퐁트브로 수녀원에서 푸아티에 궁으로 달려와 아키텐 공작 부인 자리로 복귀시켜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필리파를 홀대한 기욤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짙어 보였다. 1119년 10월 그녀는 교황 갈리스토 2세랭스에서 주최한 종교회의에 나타나 교황에게 기욤을 다시 파문시키고 당제로사를 공작의 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이후에도 그녀는 몇 년 동안 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 결과 교회와의 관계 개선에 신경 쓰던 기욤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레콘키스타에 참가하게 되었다.

1120년에서 1123년 동안 기욤은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 군에 합류해 카스티야 군과 함께 코르도바 함락 전투에서 싸웠다. 기욤이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한 무슬림 동맹자에게 수정 꽃병을 받았는데, 이는 나중에 손녀딸인 엘레오노르에게 전해졌다. 이 꽃병은 7세기 무렵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1122년 기욤은 필리파 덕분에 얻었던 툴루즈에 대한 지배권을 레몽 4세의 상속자인 알폰세 쥬르뎅에게 빼앗겼으나, 더 이상 이 영지를 되찾을 마음도 기력도 없었다.[6] 1126년, 병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2월 10일에 55세의 나이로 교회의 파문을 받은 채로 사망했다.[6]

3. 트루바두르로서의 업적

기욤 9세가 중세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전사가 아닌 트루바두르로서의 작품이다. 트루바두르는 오크어라는 로망스 지방의 토착 언어로 서정시를 창작한 시인들을 말한다.[7] 기욤 9세는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을 쓴 작가로, 총 11편의 작품이 전해진다.[7] 다만, 작품 번호 8번 ''Farai chansoneta nueva''는 언어와 스타일이 달라 그의 작품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8][9] 작품 번호 5번 ''Farai un vers, pos mi sonelh''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하며, 각 버전 간 차이가 크고 필사본도 남아 있다. 그의 작품들은 푸아티에 백작 (''lo coms de Peitieus'')의 이름을 걸고 있으며, 성적인 내용, 사랑, 여성, 자신의 문학적 업적이나 연애 편력, 봉건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의 시에 나타난 솔직함, 재치, 장난기는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중세 시대 초기 서정 시인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이후 단테, 페트라르카, 프랑수아 비용까지 이어지는 서정시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시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에즈라 파운드는 ''Canto VIII''에서 기욤을 언급했고, ''Spirit of Romance''에서는 그를 "트루바두르들 중에서 가장 '모던'한 시인"이라고 평가했다.[10]

기욤은 스캔들을 즐겼고, 청중을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교회에 막대한 기부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교황의 호감을 사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세워진 푸아티에 궁을 증축했으며, 이 궁은 훗날 그의 손녀 엘레오노르에 의해 추가로 증축되어 오늘날까지 푸아티에에 남아 있다.

그의 시 중 하나인 ''Pos de chantar m'es pres talenz''는 그가 처음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했을 무렵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에서 그는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점을 언급하며,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노래한다.

4. 가족 관계

기욤 9세는 두 번째 부인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2남 6녀를 두었다고 한다.

이름생몰년비고
기욤 10세1099년 - 1137년아키텐 공작
레이몽1099년? - 1149년안티오키아 공. 단주르즈를 생모로 한다는 설이 있음.
아녜스1103년 - 1159년투아르 자작 에메리 5세와 결혼, 아라곤 왕 라미로 2세와 재혼
오데알드수녀



그 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4명이 있었다. 그 중 1명은 페리고르 백작 엘리의 아내 필리파이고, 1명은 샤텔로 부백 에메리 1세와 단주르즈의 차남 페이=라=비누즈 영주 라울 드 페이의 두 번째 아내 아델라이드로 보는 설이 있다.

기욤 9세는 애첩 단주르즈와의 사이에서 다음의 세 자녀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생몰년비고
앙리? - 1132년 이후클뤼니 수도원 부원장
아델라이드
시빌상트 수도원 수녀원장



신뢰도가 높지 않은 트루바두르의 전기 모음집 비다스 (vida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푸아티에 백작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인물이었으며, 여성을 유혹하는 데 뛰어났다. 그는 기사로서의 재능과 용맹함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는 법을 알았으며,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에게는 노르망디 공작의 딸과 결혼한 아들과 잉글랜드의 헨리에게 시집간 손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젊은 왕 리처드와 브리타니아 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손녀는 북프랑스에 트루베르를 탄생시킨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가리킨다. 엘레오노르는 1137년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잉글랜드의 헨리는 1152년 엘레오노르와 재혼한 잉글랜드 왕 겸 노르망디 공 겸 앙주 백작 헨리 2세이다. 엘레오노르의 두 아들 리처드 1세와 존은 각각 잉글랜드, 노르망디, 앙주를 포함한 앙주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기욤 9세의 두 번째 아내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기욤 10세와 불륜 상대 단주르즈가 샤텔로에 남겨둔 남편과의 딸 아에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따라서 비다스의 "노르망디 공작의 딸과 결혼한 아들"이라는 기술은 명백한 오류이다.

5. 평가와 일화

기욤 9세는 군사적으로는 툴루즈 점령 실패와 1101년 십자군 실패에서 보이듯 유능하지 못했지만, 통치하기 어려운 광대한 영토를 40년 동안 질서 있게 다스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연대기 작가들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용감함에 대한 칭찬과 여색을 밝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쾌활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미워할 수 없는 성격으로 사랑받았지만, 쾌락주의자, 광대, 냉소주의자, 모독자, 배덕한 자 등으로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7]

그는 스캔들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청중들을 놀래키는 것을 즐겼다. 교황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막대한 기부를 교회에 하기도 했다. 또한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세워져 전해 내려온 푸아티에 궁을 증축했는데, 이 궁은 나중에 손녀인 엘레오노르에 의해 추가로 증축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푸아티에에 남아 있다.

두 번째 부인 필리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많은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1112년경부터 아모베르주(별명 당제뢰즈)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1115년에는 당제뢰즈를 푸아티에의 거성 부지 내 모베르종 탑에 살게 하며 공공연하게 드나들어, 필리파는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 부인 에르망가르드도 이 수도원에 들어갔고, 기욤 9세는 그녀들을 거둔 로베르 달브리셀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러한 행실 때문에 지역 주교로부터 두 번이나 파문을 당했는데, 한 번은 주교를 죽이려 할 정도의 소동이 벌어졌다. 1114년 기욤 9세는 교회의 징세 특권 침해로 첫 번째 파문을 받았는데, 푸아티에 주교가 파문서를 읽는 도중에 주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칼을 휘두르며 "나를 사면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리겠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맞선 주교는 침착하게 파문서를 다 읽은 후 목을 내밀었지만, 마음을 바꾼 기욤 9세는 "너 같은 놈은 천국에 못 간다"라며 칼을 칼집에 넣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같은 해, 필리파에 의해 당제뢰즈와의 관계가 고발되어 다시 파문당했을 때, 선고한 앙굴렘 주교에게도 달려들었지만, "내가 부백 부인을 포기하기 전에 너의 그 다루기 힘든 머리를 빗으로 컬 해봐라!"라며 머리카락이 없는 주교에게 통렬한 조롱을 퍼부었고, 파문도 무시한 채 당제뢰즈와의 관계를 계속했다.

기욤 9세는 가사 시인으로서 역사에 큰 유산을 남겼는데, 오크어를 사용하는 서정 시인인 트루바두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작품의 작가이다. 현재 총 11수의 작품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7] 그의 시에서 나타난 솔직함과 위트, 장난기는 일대 파문을 일으키는 동시에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중세시대 초창기 서정 시인의 하나였으며, 이후 그들이 확립한 서정시의 전통은 단테, 페트라르카프랑수아 비용까지 이어진다. 에즈라 파운드는 ''Spirit of Romance''에서 기욤을 "트루바두르들 중에서 가장 '모던'한 시인"이라고 표현했다.[10]

1101년 십자군에서 살아남아 안티오키아 궁정에 머물렀을 때, 아랍의 음유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기욤 9세가 시를 짓는 데 몰두하여 트루바두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십자군에서 돌아온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그의 시에,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아랍의 베르베르인을 언급하며 자신을 표현한 구절이 있어,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만년에는 젊은 시절의 행실을 뉘우쳤는지 수도원에 들어가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한 편의 경건한 시가 남아 있다.

참조

[1] 서적 Bond
[2]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3]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4]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5]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6]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7] 서적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Alfred A. Knopf 2002
[8] 서적 Guglielmo IX d'Aquitania, Poesie 1973
[9] 서적 The Poetry of William VII, Count of Poitier, IX Duke of Aquitaine Garland Publishing Co. 1982
[10] 서적 The Poetry of William VII, Count of Poitier, IX Duke of Aquitaine Garland Publishing Co.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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