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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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악 3호분은 현무암과 석회암 판석으로 축조된 돌방무덤으로, 널길, 연실, 앞방, 뒷방, 옆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화는 널길, 앞방, 옆방, 뒷방, 회랑 등 고분 내부 곳곳에 그려져 있으며, 특히 회랑의 대행렬도, 앞방의 묘주 초상화, 부엌 등 생활 모습을 묘사한 동쪽 옆방 벽화가 유명하다. 묘지명에는 357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이름, 관직, 출신지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학계에서는 묘주가 동수인지 고구원왕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안악 3호분은 4세기 중반 고구려와 중국계 유이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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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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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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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안악 3호 무덤 |
한자 표기 | 安岳三號墳 |
로마자 표기 | Anak-samho-mudeom |
위치 | |
소재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면 유설리 |
정보 | |
종류 | 고구려 벽화 무덤 |
피장자 | 동수 |
특징 | 묘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음 |
보존 상태 | 비교적 양호 |
지정 번호 | 국보 67호 |
세계유산 등록 | 2004년 |
참고 문헌 |
2. 구조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돌방무덤이다. 무덤 구조는 남쪽에서부터 널길, 연실, 앞방, 뒷방 순서로 이어진다. 앞방은 좌우에 작은 옆방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넓다. 앞방과 뒷방 사이는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통한다. 주실인 뒷방은 동쪽 벽과 뒤쪽 벽 안쪽에 판석 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었다. 각 방의 천장은 네 귀퉁이에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두 번 좁힌 뒤, 그 위에 뚜껑돌을 덮는 방식의 모줄임천장 구조이다. 이는 한국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모줄임천장이다.[12]
안악 3호분 벽화는 널길, 앞방, 옆방, 뒷방, 회랑 등 고분 내부 여러 공간의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다. 벽화가 그려진 벽의 총 면적은 81m2, 천장의 면적은 58m2에 달하며, 잘 다듬은 석회암 판석 위에 직접 채색하는 기법(직채)으로 그려졌다.[12] 이 벽화들은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사회 계층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4]
이 고분에서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은 중국의 영향을 보여준다. 큰 판석으로 묘실을 만드는 방식은 랴오둥반도의 한대 무덤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특징 중 하나인 모줄임천장 역시 산둥성 기남 지역의 후한 시대 돌무덤에서도 나타난다. 팔각형 돌기둥 또한 기남 지역 무덤에서 발견되며,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 돌을 받치게 한 점까지 동일하다. 모줄임천장 기법은 원래 근동 지역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경 중국 본토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나라 시대에 유행했으며, 특히 안악 3호분과 같은 고구려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 주인이 휘장을 친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랴오둥 지방 고분들과 유사하다.[12]
3. 벽화
전체적으로 안악 3호분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무악대와 의장대, 하인들이 있는 부엌과 마구간 등을 배치하고 입구는 위병이 지키는 구조로, 왕이나 귀족의 생전 주택과 생활 모습을 무덤 안에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12] 벽화의 양식은 중국 한나라 및 육조 시대 벽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인물 표현 등에서 고구려 초기 회화의 특징을 보여준다.[3]
3. 1. 묘주 초상화
서쪽 곁방의 앞벽과 남쪽 벽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를 그린 초상화가 있다.[4] 이 그림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즉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다. 무덤에 새겨진 글(묘지명)을 근거로 전연에서 망명 온 인물인 동수(冬壽)와 그의 아내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림 속 인물이 고구려의 왕인 고국원왕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4][5]
남자 초상화는 서쪽 곁방 앞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속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며 똑바로 앉아 있고, 주변에는 그보다 작게 그려진 인물들이 시중드는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5] 그는 검은색 관(內冠) 위에 흰색 관(덧관, 羅冠)을 쓰고 붉은색 비단 옷을 입고 있으며, 표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4][6][5]
여자 초상화는 남쪽 벽에 그려져 있으며, 남자를 향해 몸을 약간 돌린 채 앉아 있다.[4] 여자 역시 무표정한 모습이지만, 얼굴 모습이 독특하다. 그녀와 주변 시녀들의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인데, 이는 길고 갸름한 얼굴형이 특징인 일반적인 고구려인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5] 여자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중국식 예복인 귀의(袿衣)를 입고 있다.[7][8] 이는 당시 중국 육조 시대에 유행했던 복식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안악 3호분에 나타나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3] 또한, 여자의 머리 모양은 북위(北魏) 시대의 양식과 유사하다.[8]
4. 묘지명 및 의의
안악 3호분에서는 '영화(永和) 13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357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12][1] 이 명문은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12]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이 묘지명은 총 7행 68자로 이루어져 있으며[10],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이름, 관직, 출신지, 그리고 향년 69세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1][10]
이 묘지명의 발견으로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 동수묘 설: 묘지명에 이름이 적힌 동수를 무덤 주인으로 보는 견해이다.[1][2] 동수는 중국 역사서 《진서》와 《자치통감》에도 등장하는 인물로[2], 요동(현재 랴오닝 성)의 선비족 국가 전연 출신 장군이었다. 그는 336년 전연의 침략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하여 낙랑군의 옛 땅에서 활동했으며[3][2], 357년 음력 10월 26일(11월 24일)에 사망했다.[10] 묘지명에는 동수가 "낙랑 대신", "창려, 현도 및 대방 태수" 등의 직함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동진에서 받은 것인지 스스로 칭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10] 일부 학자들은 동수의 직함 중 하나인 "낙랑 대신"이 354년 전연의 모용준이 고국원왕에게 내린 "낙랑공" 칭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 학계와 일부 일본 학자들은 묘지명과 중국식 묘제 양식 등을 근거로 동수묘 설을 지지한다.[13][10]
- 고구려 왕릉 설: 무덤의 거대한 규모, 250명이 넘는 대규모 행렬도와 '성상번(城上幡)' 깃발 등 벽화 내용을 근거로 고구려의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이다.[3][12] 특히, 동수의 이름과 정보가 기록된 묵서는 무덤 주인이 그려진 서쪽 곁방 정면 벽이 아니라, 주인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쓰여 있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다.[13] 동수는 왼쪽 장하독 그림 위에 기록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도 다른 장하독의 묵서 흔적이 남아있다.[13] 이는 동수가 무덤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던 인물 중 하나였음을 시사한다.[13] 또한,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에서는 고구려인들도 중국식 묘제를 사용했으며, 안악 3호분 이후 이 지역에서 중국식 묘제가 사라지고 고구려식 무덤만 발견된다는 점도 왕릉설을 뒷받침한다.[13] 북한 학계를 비롯한 다수의 한국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한다.[3][2]
안악 3호분은 묘지명을 통해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구려 고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1] 또한, 묘지명과 벽화 내용은 4세기 중반 고구려와 전연, 동진 등 주변국과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낙랑군·대방군 함락 이후 해당 지역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0] 북한에서는 국보 문화유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12]
5. 묘주에 대한 논란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러 의견이 존재하며, 크게 고구려의 왕릉이라는 설과 중국계 망명인인 동수(冬壽, 289년~357년)의 무덤이라는 설로 나뉜다.[13]
무덤 주인공의 초상은 서쪽 곁방 정면 벽에 그려져 있으며, 평상 위에 정좌한 모습으로 검은 내관 위에 하얀 덧관을 쓰고 있다.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의 호위무관으로 보이는 장하독(帳下督)이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 중 왼쪽(남쪽) 장하독 그림 위에는 비교적 선명한 묵서(墨書)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영화(永和) 13년(357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한 '동수'라는 인물의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13][1] 오른쪽(북쪽) 장하독 위에도 묵서 흔적이 있지만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13]
동수묘설은 이 묵서명을 주요 근거로 삼는다.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이 묘지명은 총 7행 68자로, 동수의 이름, 직함, 출생지, 사망 당시 나이(69세), 사망 연도(357년 11월 24일(음력 10월 26일)) 등을 담고 있다.[1][10] 묘지명에 따르면 동수는 요동(현대 랴오닝 성) 출신으로, 선비족 국가인 전연(前燕)의 장군이었으나 336년 고구려로 망명하여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3] 중국 학자 예백(Yeh Pai)은 1951년 이 묵서를 해독하고, 동수가 중국 역사서인 《진서》(晉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으며,[2] 중국 학계와 일부 재일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13][10] 특히 묘지명에 기록된 동수의 직함("낙랑 대신", "창려, 현도, 대방 태수")은 당시 고구려와 중국계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0] 이 직함들이 동진(東晉)에서 받은 것인지 자칭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낙랑 대신"이라는 직함을 354년 전연의 모용준이 고국원왕에게 내린 "낙랑공" 칭호와 연관 짓기도 한다.
고구려 왕릉설은 무덤의 거대한 규모, 256명 이상의 완전 의장을 갖춘 고구려군 대행렬도, 성상번(城像幡) 깃발 등 벽화의 내용이 왕릉급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13][3] 북한 학계와 일부 남한 학자들은 이 무덤을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의 능으로 주장한다.[2][3] 이들은 동수 묵서의 위치에 주목한다. 동수의 정보가 묘주가 위치한 곳이 아닌, 묘주를 보좌하는 역할인 장하독 그림 위에 기록되어 있으며, 반대편에도 다른 장하독의 묵서 흔적이 있다는 점은 동수가 묘주가 아니라 묘주를 섬기던 인물 중 하나였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13]
또한, 동수묘설의 근거 중 하나인 중국식 묘제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전통의 적석총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당시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해당 지역에서는 고구려인들도 중국식 묘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악 3호분 이후 이 지역에서는 중국식 무덤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식 무덤만 나타나는데, 이는 한족(漢族)들이 고구려에 정복된 후 초기에는 무덤 축조 등에 동원되었으나 점차 피지배층으로 흡수되면서 그들의 문화적 흔적이 사라졌음을 보여줄 수 있다.[13]
이처럼 안악 3호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13]
6. 4세기 고구려와 중국계 유민
안악 3호분과 1976년 평안남도 남포특별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은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와 중국계 유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를 제공한다.[10]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에서는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무장 동수(冬壽)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7행 68자로 된 이 기록에는 동수가 357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생전 관직들이 나열되어 있다.[1][10]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이 관직들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여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수는 요동(현재의 랴오닝성) 출신으로, 336년 선비족 국가 전연의 혼란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로 여겨진다.[3][2] 그의 묘지명에는 "낙랑 대신", "창려, 현도 및 대방 태수" 등의 직함이 언급되는데, 이것이 동진과 같은 외부 세력에게서 정식으로 받은 것인지 스스로 칭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안악 3호분은 그 규모와 벽화 등으로 인해 피장자가 동수 본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10] 이는 4세기 중반 고구려 내 옛 낙랑군 지역에 여전히 중국계 유민들이 상당한 자립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근거로 여겨져 왔다.[10]
반면, 408년에 사망한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14행 154자)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11] 진 역시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 귀족이었지만, 그의 묘지명에는 중국 왕조의 연호가 아닌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가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관직에는 "건위장군(建位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讓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고구려 고유의 관등인 국소대형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11]
357년에 사망한 동수와 408년에 사망한 진의 묘지명을 비교하면, 약 반세기 동안 고구려 왕권과 중국계 유민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 동수의 묘지명이 중국계 연호 사용 가능성을 보이고 중국계 직함을 주로 내세운 반면, 진의 묘지명은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하고 고구려 관직을 포함시켰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구려 왕권이 강화되고, 망명해 온 중국계 유력자들이 점차 고구려의 정치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성시는 "동수와 진 사이에는 고구려가 망명 중국인들을 정치적으로 포섭하는 과정이 더욱 진전되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른 역사적 변화가 보인다"고 평가했다.[10] 이는 고구려가 점차 독자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고 내부 체제를 공고히 해 나갔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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