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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순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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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순교왕은 975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으나 978년에 암살된 잉글랜드의 왕이다. 1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이복 동생 에설레드 2세를 옹립하려는 계모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숭배로 이어져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유해를 중심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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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순교왕
기본 정보
에드워드 순교왕의 초상화
14세기 초반에 그려진 에드워드 순교왕의 초상화
칭호잉글랜드인의 왕
통치 기간975년 7월 8일 ~ 978년 3월 18일
이전에드거 평화왕
이후에젤레드 무책왕
출생 추정962년경
사망일978년 3월 18일 (약 16세)
사망 장소잉글랜드, 도싯 지방, 코프 성
왕가웨식스 가
아버지에드거 평화왕
어머니에셀프리다 또는 에디스
매장 장소웨어햄(이장), 샤프츠베리(이장), 워킹
영어 이름
영어Edward the Martyr
고대 영어 이름
고대 영어Ēadweard se Martyr

2. 즉위 이전의 배경

에드워드 순교왕의 아버지인 에드거는 그의 형 에드위가 사망한 959년부터 잉글랜드 전체를 다스렸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9세기 이래 지속된 바이킹의 대규모 침입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시기 잉글리시 베네딕토회 개혁 운동이 던스턴, 요크 대주교 오스왈드, 윈체스터의 애설월드 등의 주도로 절정에 달했으며, 에드거 왕은 이를 강력하게 후원했다. 그는 수도원의 부를 늘리기 위해 귀족이나 세속 성직자들의 토지를 수도원에 넘기도록 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에드거는 앨프히어를 머시아의 로 임명하는 등 주요 인사를 단행했는데, 이는 기존 세력가였던 애설스탠 하프-킹 가문과의 경쟁 구도를 형성하며 에드워드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에드거는 975년, 31세 또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2. 1.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 바이킹의 침입

9세기에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증가하는 바이킹의 습격에 시달렸으며, 이는 865년 바이킹 대 이교도 군대의 침략으로 절정에 달했다. 878년까지 바이킹은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 왕국, 머시아 왕국을 장악하고 웨섹스마저 거의 정복할 뻔했으나, 그해 웨섹스인들은 알프레드 대왕 (재위 871–899)의 지휘 아래 에딩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약 50년 동안 웨섹스인과 머시아인들은 점진적으로 바이킹 지배 지역을 되찾았다. 927년, 알프레드의 손자인 애설스탠 (재위 924–939)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며 최초로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복동생이자 에드워드 순교왕의 할아버지인 에드먼드 1세 (재위 939-946)는 즉위 직후 북부 지역을 바이킹에게 다시 빼앗겼으나, 944년에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는 946년 무법자와 싸우다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인 에드위와 에드거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들의 삼촌인 에드레드 (재위 946–955)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레드 역시 잉글랜드 전체의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곧 요크 (남부 노섬브리아)가 바이킹 왕을 받아들이면서 통제권을 잃었다. 하지만 954년 요크의 유력자들이 에리크 블러드액스 왕을 추방하면서 다시 회복했다.

에드레드의 주요 조언자 중에는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자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던스턴이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에드레드는 955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고, 약 15세였던 에드위가 왕위를 이었다. 에드위는 9세기 초 이후 처음으로 외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지 않은 왕이었으며, 에드워드 순교왕 사후인 980년까지 잉글랜드는 바이킹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에드위는 즉위 초부터 삼촌 에드레드의 고문들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특히 던스턴과 충돌하여 그를 추방했다. 957년, 왕국은 분열되어 에드위는 웨섹스를, 그의 동생이자 에드워드의 아버지인 에드거는 템스강 북쪽의 머시아와 다른 지역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지, 아니면 에드위의 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반란의 결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에드위는 959년에 사망했고, 에드거가 분열되었던 왕국을 다시 통합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에드거는 앨프히어를 머시아의 (ealdorman, 왕 아래의 고위 귀족)로 임명했는데, 그는 983년 사망할 때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등장은 애설스탠 하프-킹 가문의 영향력 약화를 동반했으며, 이는 에드워드 순교왕 통치 기간 동안 국가적 분열을 야기한 가문 간 경쟁의 배경이 되었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리시 베네딕토회 개혁 운동이 던스턴, 요크 대주교 오스왈드, 윈체스터의 애설월드의 주도로 절정에 달했다. 에드거는 이 운동을 강력하게 지원하여 수도원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나, 그 과정에서 귀족이나 세속 성직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수도원에 넘기도록 강요하는 등 다소 강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애설월드는 수도원을 위한 토지 확보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때로는 기존의 세속 성직자들을 몰아내고 수도사들을 들여놓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에드거는 975년, 31세 또는 3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 2. 에드거 평화왕의 치세와 베네딕토회 개혁

에드위는 959년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 에드거가 왕국 전체의 통치를 계승했다. 에드위는 앨프히어를 머시아의 로 임명했으며, 앨프히어는 983년 사망할 때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평신도 귀족으로 남았다. 그의 부상은 애설스탠 하프-킹 가문의 세력 약화를 동반했으며, 이는 에드워드 통치 시기 국가적 혼란으로 이어진 가문 간 경쟁의 배경이 되었다.

에드거의 치세 동안 잉글리시 베네딕토회 개혁 운동은 던스턴, 요크 대주교 오스왈드, 윈체스터의 애설월드와 같은 인물들의 주도하에 절정을 맞이했다. 이 개혁 운동은 에드거 왕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잉글랜드 교회의 주류가 되었고, 당시 및 후대의 수도원 연대기 작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에드거는 강력한 통치자였으나 때로는 지나치게 강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귀족이나 세속 성직자들이 관리하던 토지를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넘기도록 하여 수도원의 부를 증대시켰다. 특히 애설월드는 수도원을 위한 토지 확보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때로는 기존의 세속 성직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수도사들을 배치하는 등 무자비한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에드거는 975년, 31세 혹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 3. 에드워드의 출생과 가족

에드워드는 대략 962년에 태어났으며, 에드거 왕의 알려진 네 자녀 중 장남이었다. 동시대 자료에는 에드워드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복 이후의 자료들은 서로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가장 초기의 기록 중 하나는 약 1090년에 쓰여진 캔터베리의 오스번의 던스턴 전기이다. 오스번은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윌튼 수도원의 수녀였으며, 왕이 그녀를 유혹했고, 이로 인해 던스턴이 에드거에게 7년의 참회를 부과하여 그의 대관식을 늦추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후대의 연대기 편찬자들과 현대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2세기 초 에드머가 던스턴의 일대기를 쓸 때, 그는 친구 우스터의 니콜라스에게서 얻은 에드워드의 부모에 대한 설명을 포함시켰는데, 니콜라스는 고대 연대기를 참고했다고 한다. 니콜라스는 에드워드가 에드거의 적법한 아내인 에델플레드 candida (백색)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에델플레드는 앨더만 오드마르의 딸이었다. 그 이름의 앨더만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에델플레드의 부모를 오드마르라는 vir potens|비르 포텐스lat (강력한 남자)와 그의 아내 에알데로 보는데, 그들은 허트퍼드셔의 헤트필드를 애설스탄 하프-킹에게 데본 땅과 교환하여 주었다. 12세기 초에 글을 쓴 우스터의 존 또한 에드워드가 에델플레드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eneda|에네다ang (오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앨프윈에 의해 길러진 에드거는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와 양아버지 사이의 관계의 결과로 에델플레드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의 부모에 대해 논의한 거의 모든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어머니가 에델플레드라고 말하며, 대부분 그녀가 에드거의 첫 번째 아내였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니콜라스 브룩스는 던스턴이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기 때문에 에드거가 에델플레드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는 사생아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을 부적절한 관계에 강력한 반대자였다. 그러나 역사가 시릴 하트는 에드워드를 "의심스러운 적통"이라고 묘사한다. 에델플레드는 아마도 그가 태어난 직후에 사망했을 것이다. 에드워드의 종교 스승은 크레디턴 주교였던 시드먼이었다.

에드거 왕은 자신의 유일한 알려진 딸인 에디스를 자신의 두 번째 알려진 배우자인 울프스리드에게서 낳았으며,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와 함께 윌튼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964년에 에드거는 앨프스리드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애설스탄 하프-킹의 장남 에설월드의 미망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드거, 그해에 앨더만으로 임명된 데본셔의 선도적인 세인이었다. 그녀는 두 아들, 971년에 사망한 에드먼드와 미래의 왕인 에설레드, 968년경에 태어난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대관식을 치른 에드거의 유일한 아내였으며, 특히 아들의 통치 기간 동안 강력한 정치적 인물이 되었다.

3. 왕위 계승 분쟁과 즉위

975년 에드거 평화왕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두 아들인 에드워드와 에설레드를 두고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 에드워드는 13세였고, 에설레드는 10세 미만이었기에, 이 분쟁은 실질적으로 귀족 세력 간의 대립 양상을 띠었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자격과 성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귀족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 파벌을 형성했다. 에드워드의 주요 지지자는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이었으며, 반면 계모인 앨프스리드 등은 에설레드를 지지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비교적 신속하게 마무리되었고, 결국 던스턴 대주교의 지지를 받은 에드워드가 킹스턴어폰템스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3. 1. 에드거 왕의 죽음과 후계 구도

에드거 평화왕이 975년 7월 8일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에드워드는 13세였고, 그의 이복동생인 에설레드는 6세에서 9세 사이로 추정되어, 두 왕자 모두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따라서 이들의 지지자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정당성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는 966년 윈체스터 뉴 민스터 헌장에 증인으로 처음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이 문서에서는 에드거의 왕비 앨프스리드와 그녀의 아들 에드먼드를 "적법한(legitimate)" 아내와 아들로 명시한 반면,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단지 "같은 국왕에게서 태어났다(begotten by the same king)"고만 기술했다. 이것이 에드거 왕의 직접적인 지시였는지, 아니면 앨프스리드의 동맹이었던 에델월드 주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왕의 의도였다면 에드워드를 계승권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이었을 수 있다. 역사가 바바라 요크는 이를 에델월드의 "기회주의적 특별 변론"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969년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과 관련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계보에서는 에드워드를 에드먼드와 에델레드보다 우선 순위에 두었다. 후대의 기록인 캔터베리의 에드머의 글에는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왕비로 축성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부 귀족들이 그의 즉위를 반대했다고 나오지만,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10세기 당시 왕비의 축성 여부가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12세기 초 에드머가 글을 쓸 당시의 논쟁(헨리 1세 관련)이 기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 주장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또한 에드머의 논리대로라면 에드거 왕 자신도 사망 2년 전에야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에델레드 역시 같은 문제가 적용될 수 있었다.

계승 분쟁의 핵심은 가문의 이해관계와 동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에드워드 지지 세력을 수도원 개혁파로, 에델레드 지지 세력을 반개혁파로 단순화하여 보기도 했으나, 양측 모두 다양한 배경의 지지자들이 있었기에 현재 이 견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에드워드의 주요 지지자는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과 요크 대주교 오스왈드였다. 특히 오스왈드는 에델레드를 지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앨프헤르 옹(ealdorman)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앨프헤르의 정적인 에델와인 옹은 에드워드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에드워드의 계모인 앨프스리드와 그녀의 동맹 에델월드 주교는 당연히 앨프스리드의 아들인 에델레드를 지지했다.

에드워드의 개인적인 성품 또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버트퍼스가 쓴 오스왈드 전기에는 에드워드가 다소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젊은이로 묘사된다. "왕국의 일부 귀족들은 에드거 왕의 장남 에드워드를 왕으로 선출하려 했으나, 다른 일부는 차남(에델레드)을 원했다. 차남이 말과 행동에서 더 온화했기 때문이다. 장남(에드워드)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주었으며, 거친 말뿐 아니라 잔혹한 구타로 사람들을 괴롭혔다. 특히 자신의 집안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했다." 저명한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 역시 그의 저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에드워드가 성인으로 추대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격렬한 분노를 기억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에델레드를 지지하게 되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귀족들 사이의 분쟁은 비교적 빠르게 해결되었다. 10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에 제작된 성인 달력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에드거 사망 후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7월 19일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999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헌장에는 에드워드가 모든 계층 지도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에델레드에게는 전통적으로 왕의 아들이 소유하던 영지가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에드거가 애빙던 수도원에 기증했던 땅도 포함되었다. 이 땅은 귀족들의 결정에 따라 수도원으로부터 회수되어 에델레드에게 넘어갔다. 훗날 에델레드는 이 헌장에서 "그들이 이 일을 정의롭게 했는지 부당하게 했는지는 그들 스스로 알 것(let them know themselves how justly or unjustly they did this)"이라며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보상으로 다른 땅을 애빙던 수도원에 기증했다. 이는 에델레드 지지자들이 영토 보상을 대가로 에드워드의 계승에 동의했음을 시사한다. 에드워드는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에 의해 킹스턴어폰템스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며, 이는 왕으로 선출된 당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복 이후 작성된 ''파시오(Passio)'' 문헌은 던스턴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즉위를 강행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에드워드]의 축성 때 일부 지도자들이 반대하려 하자, 성 던스턴은 그의 선출을 굳건히 지지하며 거룩한 십자가 깃발을 잡고 중앙에 세운 뒤, 다른 경건한 주교들과 함께 그를 왕으로 축성했다." 이는 던스턴이 에드워드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기록이다.

3. 2. 던스턴의 지지와 에드워드의 즉위

975년 7월 8일 에드거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에드워드는 13세였고, 그의 이복동생 에설레드는 6세에서 9세 사이였으므로, 이들은 능동적인 참여자라기보다는 각 세력의 상징적 인물에 가까웠다.

주요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 세력이 나뉘었는데,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과 요크 대주교 오스왈드는 에드워드를 지지했다. 에델와인 역시 에드워드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에드워드의 계모 Ælfthryth|앨프스리드ang와 그녀의 동맹인 에델월드 주교는 에설레드를 지지했다. 앨프헤레 옹 또한 에설레드 측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이 분열을 수도원 개혁 지지 여부로 설명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가문 간의 동맹 관계가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본다.

에드워드의 성격 또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버트퍼스가 쓴 오스왈드 전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말이 거칠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 역시 에드워드의 격렬한 성격 때문에 일부 귀족들이 에설레드를 지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에드워드의 정통성 문제도 제기되었다. 캔터베리의 에드머는 던스턴의 성인전에서 일부 귀족들이 에드워드의 즉위에 반대한 이유로 그의 거친 성격과 더불어, 그의 어머니가 에드거와 법적으로 결혼했지만 왕비로 축성받지 않은 상태에서 에드워드를 낳았다는 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10세기 당시 왕비의 축성 여부가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에 회의적이며, 12세기에 글을 쓴 에드머가 당시 헨리 1세와 관련된 논쟁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에드머의 논리대로라면 에드거가 사망 2년 전에야 대관식을 치렀기 때문에 에설레드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 분쟁은 비교적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10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의 성인 달력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에드거 사망 후 2주가 채 안 된 975년 7월 19일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999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헌장(Charter S 937)에서는 에드워드가 모든 계층의 지도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선택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헌장은 또한 에설레드에게 전통적으로 왕의 아들이 소유했던 땅이 주어졌음을 기록하며, 이는 에설레드 지지자들이 토지 보상을 대가로 에드워드의 즉위에 동의했음을 시사한다.

에드워드는 킹스턴어폰템스에서 던스턴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으며, 이는 선출된 날과 같은 날(7월 19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노르만 정복 이후 기록된 Passio Sancti Eadwardi|파시오 상크티 에아드와르디la는 던스턴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즉위를 강행했다고 다르게 묘사하기도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던스턴은 반대하는 귀족들 앞에서 십자가 깃발을 들고 에드워드의 선출을 지지하며 대관식을 집전했다고 한다.

4. 에드워드 순교왕의 통치 (975년 ~ 978년)

975년 아버지 에드거가 사망하자 궁정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의 중재로 당시 13세였던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978년 이복동생 에설레드를 왕으로 만들려는 계모 Ælfthryth, wife of Edgar|에르프리다eng에 의해 암살당했다. 에드워드는 생전에 "선한 기독교도"로 평가받았으며, 사후에는 "그의 유해를 중심으로 몇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1001년 6월 21일성인으로 추대되었다.

4. 1. "반(反) 수도원주의 반동"과 귀족 간 갈등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이후, 역사가들이 종종 "반(反)수도원주의 반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머시아의 유력 귀족인 엘프헤레와 다른 많은 귀족들은 수도원을 공격했으며, 연대기 D 사본에서는 이들을 "신의 적"으로 묘사했다. 반면, 엘프헤레의 경쟁자였던 동앵글리아의 애설와인은 램지의 비르트퍼스에 의해 amicus Dei|아미쿠스 데이la(신의 친구)로 불리며 수도사들의 주요 옹호자로 그려졌다. 비르트퍼스는 에드워드 치세 동안 다음과 같은 혼란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 영토의 공동체가 흔들렸고, 주교들은 당황했으며, 잉글랜드의 영주들은 분노했고, 수도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백성들은 공포에 질렸고, 세속 성직자들은 그들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기뻐했다. 수도원장들은 이제 그들의 수도사들과 함께 추방되었고, 성직자들은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왔으며, '마지막 오류가 처음보다 더 나빴다'... 이전에 덮개를 씌운 말에 타서 동료들과 함께 다윗 왕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수도사들은 이제 짐을 운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고대 족장처럼 마차에 실려 이집트로 가거나, '지갑도, 신발도 없이'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시기의 갈등을 단순히 수도원주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대립으로 보기보다는, 귀족들 사이의 개인적인 경쟁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특히 에드거 평화왕 시절 수도원에 넘겨졌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거나 보상을 얻으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혼란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설와인은 비르트퍼스가 속한 램지 수도원의 설립자였지만, 동시에 엘리 수도원의 여러 영지를 빼앗은 인물로도 기록되어 있다. 엘프헤레 역시 애설월드 주교가 설립한 일부 수도원을 해산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설월드가 세운 엘리 수도원을 애설와인으로부터 보호했으며, 던스턴 대주교의 글래스톤베리와 애설월드의 애빙던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수도원 토지 점령에는 반수도원주의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개혁된 수도원을 위해 토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혹한 관행이 문제시되었으며, (상당한 압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판매자나 그들의 상속인들은 실제 시장 가치에 더 가까운 가격을 얻으려고 했다."라고 지적했다.

에드워드 치세 동안 실제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남아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판단하기 어렵다. 어떤 시점에서는 엘프헤레와 애설와인 사이의 갈등이 거의 공개적인 전쟁 직전까지 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레오프시게라는 한 테인(thegn, 종사)은 피터버러, 운들(Oundle), 케터링(Kettering) 지역의 영지를 점령하여 2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레오프시게는 나중에 애설와인의 형제인 엘프월드에게 살해당했으며, 엘프월드는 이 살인에 대해 애설월드 주교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역사가 조지 몰리뉴는 실제 전투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에드워드 치세를 격렬한 갈등의 시기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4. 2. 통치와 행정

위탄(왕의 자문회)은 에드워드의 대관식 때였을 수도 있는 템스강의 킹스턴에서, 977년 부활절 이후 옥스퍼드셔의 커틀링턴에서, 그리고 같은 해 윌트셔의 칼른에서 열렸다.[1] 칼른에서 열린 회의는 2층 건물에서 진행되었는데, 회의 도중 바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많은 주요 고문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지만, 던스탄은 다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 동안 발행된 모든 칙서에서 앨프히어가 족장들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애설와인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두 사람이 이전 에드거 통치 시기의 주요 평신도 유력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에드워드의 첫 번째 칙서에는 거의 모든 주요 유력자들이 증인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그의 통치가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한다. 이 칙서는 연대기 작가 애설워드를 족장으로 기록한 첫 번째 문서이기도 하며, 그가 에드워드에 의해 족장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70년대 초에는 잉글랜드 남부를 관할하는 족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에드거의 권위가 강하여 직접 통치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에드워드가 즉위한 후, 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세 명의 족장이 임명되었다. 서부 웨섹스에는 애설워드, 햄프셔에는 애설마, 서식스켄트에는 에드윈이 임명되었다. 에드거 개인의 권위에 의존했던 안정성은 그의 사후 권력자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을 수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오슬라크 족장이 추방된 사건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록된 다른 주요 사건으로는 976년의 심각한 기근과 977년 시드먼 주교의 사망이 있다. 978년에는 던스탄이 에드워드로부터 미들섹스의 헨든 근처 토지를 매입했다.

역사가 사이먼 케인스는 에드거 통치 말기부터 애설레드 초기까지 이어진 외교 문서 작성 전통이 에드워드의 "다소 이례적인" 칙서를 제외하고는 존재한다고 본다. 에드워드의 3년 9개월 통치 기간 동안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칙서는 5개만 남아있는데, 이는 당시 연평균 4~5개였던 것에 비해 적은 수치이다. 칙서 S 828과 S 829의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다. 케인스는 이들이 위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도, 증인 목록은 진본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칙서들을 편집한 수잔 켈리는 이들을 "매우 어려운 문서"라고 평가하며 진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두 칙서는 에드워드 통치 기간 중 또는 그 무렵에 동일한 필경사가 부주의하게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S 828은 에드워드 왕이 버크셔의 킹스턴 배그푸이즈에 있는 토지 13에이커(약 5.3ha)를 당시 램즈버리 주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엘프스탄 주교에게 하사하는 내용이다. S 829는 같은 마을의 토지 7에이커(약 2.8ha)를 애빙던 수도원에 하사하는 내용이다. 두 칙서의 경계 조항이 동일한데, 이는 주교와 수도원이 해당 토지 내에 흩어져 있는 서로 다른 구획을 소유했기 때문일 수 있다.

윈체스터의 올드 민스터에서 나온 칙서 S 831은 진본일 가능성이 높으며, 941년 칙서를 기반으로 한다. 이 칙서는 에드워드가 그의 신하 엘프릭에게 윌트셔의 와일리에 있는 토지를 하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칙서 S 832는 에드워드가 콘월의 넓은 토지를 족장 애설웨아드에게 하사하는 내용이다. 이 칙서는 에드워드가 데번의 체리턴 비숍 토지를 그의 "충실한 봉신"(fideli vasallola) 엘프시게에게 하사하는 칙서 S 830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두 칙서 모두 엑서터 문서 보관소에서 나왔지만, 크레디톤에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현재 형태로 전해지는 문서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4. 3. 주화 정책

앞면과 에드워드 순교왕의 스탬퍼드에서 주조된 페니의 뒷면, 주조자 울프가르


말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통용된 유일한 동전은 은화인 페니였다. 아버지 에드거 통치 말기까지 여러 도시의 조폐국에서 생산된 페니는 디자인, 무게, 품위(은 함량)가 서로 달랐다. 970년대 초, 에드거는 단일 디자인과 훨씬 더 균일한 무게와 품위를 가진 개혁 동전을 도입했다. '소형 십자' 유형으로 불리는 이 디자인의 동전은 앞면에 왕의 왼쪽을 향한 흉상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왕의 이름(+EADGAR REX ANGLOR[UM])이 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뒷면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주조자의 이름과 조폐국이 새겨졌다. 에드거의 개혁 디자인은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생산된 유일한 동전 유형이었으며, 그의 이복동생 애설레드 통치 초기에 다른 디자인으로 대체되었다.

에드워드의 동전은 평균적으로 에드거의 동전보다 약간 가벼웠고, 애설레드의 동전보다는 무거웠다. 품위는 에드거의 개혁에 따라 96%로 높고 균일하게 유지되었으며, 이는 링컨과 요크에서 생산된 약간 덜 정교한 동전을 제외하고는 에드워드 통치 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의 사망 후에는 품위가 더욱 다양해졌다. 에드거 통치 기간 동안 동전 제작에 사용되는 다이(die, 금형)는 거의 모두 하나의 중심지, 아마도 윈체스터에서 만들어져 왕국 전역의 다른 조폐국으로 배포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치세에는 이 중심지가 훨씬 적은 수의 조폐국에만 다이를 공급했으며, 지역 다이 커팅 센터가 이를 보완했다.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 때문일 수 있다.

5. 에드워드 순교왕의 암살 (978년)

에드워드는 978년 3월 18일 저녁, 도싯의 코르프 성 근처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그는 사냥을 마치고 근처에 머물던 이복동생 애설레드와 계모 애설프리드를 방문하던 중이었다. 에드워드는 애설프리드의 영지에서 그녀의 가신들에게 갑작스럽게 공격받아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에드워드의 죽음으로 인해 직접적인 이득을 얻은 계모 애설프리드와 그녀의 아들 애설레드 측의 연루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초기 기록들은 암살의 배후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지만, 후대의 기록들은 애설프리드를 주모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현대 역사가들 역시 애설프리드의 직접적인 개입, 당시 귀족 세력 간의 갈등, 혹은 우발적인 충돌 등 다양한 가능성을 놓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에드워드의 암살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1. 코르프 성에서의 죽음



에드워드는 978년 3월 18일 저녁 도싯의 퍼벡 언덕에 있는 코르프 갭 근처, 그의 계모 애설프리드의 영지에서 살해되었다. 일부 역사가는 979년 3월 18일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978년을 지지하며, 978년이 옳다는 데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진다. 당시 에드워드는 사냥을 마치고 근처에 머물던 이복동생 애설레드를 방문하던 길이었다.

정복 이전의 유일한 상세한 기록인 Byrhtferth의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가 도착했을 때 애설프리드의 신하들이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무장한 채 에드워드를 에워쌌다. 에드워드는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있었으며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 위에 앉아 있을 때, 한 명이 마치 키스하려는 듯 다가와 그를 끌어당겼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왼쪽 옆구리를 찔러 치명상을 입혔다. 에드워드는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내 오른손을 부러뜨리고!"라고 외치며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식 없이 근처 소작농의 집으로 옮겨졌고, 값싼 담요로 덮인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Byrhtferth의 기록이 그리스도의 배신에 대한 성경적 묘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창작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뢰할 만하다고 본다.

Byrhtferth는 에드워드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앵글로-색슨 연대기 판본('ASC A') 역시 978년에 살해되었다고만 간략히 기록한다. 에드워드가 성인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후인 1040년대에 쓰인 'ASC C'는 그가 순교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정복 이후 작성된 북부 판본('ASC D'와 'ASC E')에 나타나는데, 이 기록들은 그의 사망 날짜와 장소를 명시하고 그의 죽음을 복수하지 못한 친척들을 비난한다. 1000년경에 쓰인 에드워드의 죽음에 관한 시 역시 "그가 시기심으로, 자신의 친족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언급한다.

정복 이전의 기록들은 살인자를 명시하지 않지만, 정복 이후의 연대기 작가들과 성인전 작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계모 애설프리드를 책임자로 지목한다. '패시오'와 우스터의 존은 그녀가 살인을 명령했다고 주장하고, 맬므스베리의 윌리엄은 그녀가 음료를 건네 정신을 팔게 한 뒤 하인이 찌르게 했다고 하며, 헌팅던의 헨리는 그녀가 직접 에드워드를 죽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패시오'와 같은 기록들은 애설프리드에게 매우 편향되어 있어, 그녀에게 긍정적인 정보를 담은 '레귤라리스 콘코르디아' 같은 출처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살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부는 애설프리드나 그녀의 추종자들을 비난하며 그녀가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반면, 동시대 기록에는 애설프리드를 비난하는 내용이 없다는 점을 중시하며, 후대의 기록들이 성인전의 전형적인 악역(사악한 계모) 설정에 따라 애설프리드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다른 이론은 당시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던 귀족 애설피어와 애설와인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애설피어 측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다른 후보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에드워드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Byrhtferth나 동시대의 시가 애설피어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 이론에 대한 반론도 제기된다. 애설레드의 가신들이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에드워드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이 귀족들과의 갈등을 유발했을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대립하던 파벌 간의 타협을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에드워드 사후 궁정의 인적 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일부 학자는 에드워드의 죽음이 계획된 암살이 아니라,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을 수 있는 젊은 왕과 그의 형제(애설레드)를 수행하던 귀족들 사이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왜 범인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한편, 에드워드의 죽음과 관련하여 기적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가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이 옮겨진 오두막에 살던 맹인 여성이 밤사이 신비한 빛을 보고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후 시신은 웨어럼의 습지에 매장되었는데, 1년 뒤 그 자리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라 시신이 발견되었고, 그 자리에서는 샘물이 솟아나 많은 추모객이 찾았다고 전해진다.

5. 2. 암살 배후에 대한 여러 주장



에드워드의 암살 배후에 대해서 정복 이전 시기의 기록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Byrhtferth의 기록은 에드워드가 계모 애설프리드의 영지인 코르프 갭에서 살해되었다고 상세히 묘사하지만, 직접적인 가해자나 배후를 지목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앵글로-색슨 연대기 판본 역시 그가 978년에 살해되었다고만 기록할 뿐이다. 에드워드가 성인으로 추대된 후인 1040년대에 작성된 연대기 판본('ASC C')은 그가 순교했다고 기술하며, 정복 이후 작성된 북부 판본('ASC D', 'ASC E')은 그의 죽음의 날짜와 장소를 명시하고 그의 죽음을 복수하지 못한 친척들을 비난한다. 1000년경에 쓰인 에드워드의 죽음에 관한 시 역시 "그가 시기심으로, 자신의 친족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언급하여 가족 내부의 소행 가능성을 암시한다.

반면, 노르만 정복 이후의 연대기 작가들과 성인전 작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애설프리드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한다. Passio Sancti Eadwardi|패시오 산크티 에아드와르디la와 우스터의 존은 그녀가 살해를 명령했다고 주장했고, 맬므스베리의 윌리엄과 헌팅던의 헨리 등은 그녀가 직접 또는 하인을 통해 살해에 가담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Passio Sancti Eadwardi|패시오la는 애설프리드에게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녀에게 우호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Regularis Concordia|레귤라리스 콘코르디아la와 같은 출처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왜곡했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Regularis Concordia|레귤라리스 콘코르디아la는 애설프리드에게 수녀원의 보호자 역할을 부여했지만, Passio Sancti Eadwardi|패시오la는 이 역할을 에드워드의 어머니(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로 바꾸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살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일부는 여전히 애설프리드나 그녀의 추종자들이 암살을 주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특히 크누트의 전기 작가 마이클 로슨은 살인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점이 의심스럽다며 애설프리드의 죄를 지적한다. 반면, 레비 로치는 동시대 사람들이 애설프리드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음모론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틴 펠은 Passio Sancti Eadwardi|패시오la에서 묘사된 애설프리드의 역할이 성 켄엘름이나 성 애설버트 살해 이야기처럼 앵글로색슨 왕족 살해 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사악한 여성 친족'이라는 성인전적 문학 장치에 따른 희생양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버라 요크 역시 이러한 이야기들이 "계모가 의붓자녀에게 품는 적대감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으로 양념된 성인전적 관습"을 따를 뿐, 실제 사건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다른 이론으로는 당시 유력 귀족이었던 애설피어와 애설와인 사이의 갈등 속에서, 애설피어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지하는 후보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에드워드를 살해했다는 주장이 있다. 앨런 태커는 애설피어가 에드워드의 재매장을 주도한 것을 속죄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치는 Byrhtferth가 애설피어에게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을 칭찬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만약 그가 범죄에 연루되었다면 비난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에드워드의 죽음에 대한 동시대 시 역시 애설피어의 역할을 칭찬하며 그를 "가장 가치 있는 지도자"라고 묘사한다. 숀 밀러는 애설레드의 가신들이 개인적인 승진을 바라며 독자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앤 윌리엄스는 에드워드의 죽음이 계획된 음모의 결과라는 일반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죽음이, Byrhtferth가 묘사한 것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을 수 있는 젊은 왕과 그를 수행하던 귀족들 사이의 도발적인 대립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할아버지인 에드먼드 1세 왕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살해되었지만 "레오파가 퍼클처치에서 그를 찔러 죽였다"고 가해자가 명확히 기록된 것과 달리, 에드워드의 경우는 범인이 명시되지 않은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며, 여러 세력이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젊은 왕의 제거를 은밀히 안도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바버라 요크는 에드워드 자신의 성격 또한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본다. 암살 이후 궁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애설프리드와 애설월드 주교의 영향력이 커지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관리들은 대부분 자리를 유지했다.

6. 유산과 성인 추대

에드워드의 죽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중세 시대에 왕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아 성유를 부어 임명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왕의 살해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중죄로 간주되었다.[1] 영국에는 살해된 왕을 성인으로 존경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며, 에드워드의 죽음 역시 그가 순교자로 여겨지는 배경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사후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러한 숭배는 그의 이복 형제인 에델레드 2세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이 왕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숭배를 장려했으나, 점차 바이킹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에드워드의 죽음이 신성 모독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에델레드 2세가 에드워드 숭배를 장려한 데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에드워드 숭배는 그의 유해가 안치된 샤프츠베리 수도원의 위상과 부를 크게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중세 후기까지 이어졌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성 게오르기우스 등 다른 성인에게 국민 성인의 지위를 내주었지만, 에드워드는 영국 종교 개혁 이후에도 잉글랜드 성공회 등에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6. 1. 매장과 이장

에드워드의 죽음은 동시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중세 시대 왕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하느님에게 선택받고 주교처럼 성유를 부어 임명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왕의 축성은 확고한 전통이었고, 개혁가들은 왕의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더욱 강조했다. 따라서 왕을 살해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를 넘어 신성 모독에 준하는 최악의 죄로 간주되었다. 영국에는 살해된 왕을 성인으로 존경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고, 에드워드의 죽음은 그가 순교자로 여겨질 가능성을 높였으나,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생전에 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신이 왕실 장례를 치르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는데, 이는 시신 처리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점차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D와 E 판본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왕실 예우 없이 웨어햄에 묻혔다. 램지의 비르트페르스는 1년 후 "유명한 앨더먼 앨프헤레가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앨프헤레는 에드워드의 시신을 꺼내도록 명령했고,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기적적인 징조로 여겨졌다. 시신은 성대한 의식을 치르며 샤프츠베리 수도원으로 옮겨져 수녀원에 안치되었다. 수석 앨더먼이었던 앨프헤레는 애설레드의 대관식(5월 4일)을 준비하기 위해 에드워드의 시신을 웨어햄에서 샤프츠베리로 옮겨 적절한 장례를 치르는 책임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1세기 초 요크 대주교였던 울프스탄은 에드워드의 시신이 불에 탔다고 기록했다. 역사가 사이먼 케인스(Simon Keynes)는 울프스탄 기록의 신빙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정치적 상황상 에드워드를 정중하게 매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앨프헤레가 다른 시신을 찾아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노르만 정복 이후의 기록, 예를 들어 《파시오 에드워디》(Passio S. Eadwardila)는 더 복잡하고 성인전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파시오》에 따르면, 에드워드의 계모 엘프리다가 그의 시신을 늪지에 숨겼으나, 979년 2월 밤하늘에 나타난 불기둥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놀란 지역 주민들이 시신을 파내어 웨어햄의 교회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시신이 처음 옮겨진 곳은 맹인 여성이 살던 오두막이었는데, 그날 밤 오두막이 신비한 빛에 휩싸이고 맹인 여성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시신이 웨어럼의 습지대에 묻혔고, 1년 뒤 불기둥이 솟아올라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그 자리에서는 샘물이 솟아났다고도 전해진다.) 앨프헤레는 시신 발견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더 격식 있는 장례를 위해 샤프츠베리로 시신을 옮겼다.

《파시오》는 1001년에 에드워드가 한 수도자에게 나타나 자신의 유해를 수도원 묘지에서 수도원 내부의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는 소원을 밝혔다고 기록한다. 이 정보는 수도원장 수녀를 통해 애설레드 왕에게 전달되었고, 왕은 기뻐하며 유해를 다시 이장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셔본 주교인 울프시지 3세와 다른 성직자들(아마도 윈체스터 뉴 민스터의 수도원장 앨프시지(Ælfsige))에게 6월 20일에 의식을 거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왕은 데인인의 침략 때문에 바빠서 이장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역사학자 폴 헤이워드(Paul Hayward)는 이 두 번째 이장이 동시대 자료에는 언급되지 않으며, 6월 20일을 축일로 지정한 정복 이전 달력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이야기가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6. 2. 초기 숭배와 정치적 의미

에드워드는 사망 직후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숭배는 이복 형제인 에델레드 2세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이 왕의 신성함을 과시하기 위해 이를 장려했지만, 바이킹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에드워드의 죽음을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살해한 끔찍한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로 여기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90년부터 994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시게릭은 에델레드에게 에드워드를 기리기 위해 촐시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설득했고, 왕은 게르마누스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에드워드의 숭배는 캔터베리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울프스탄에 의해 장려되었다. 1001년, 에델레드는 윌트셔의 브래드포드온에이번에 있던 옛 민스터 교회와 토지를 하느님과 "그의 성도인 나의 형제 에드워드, 주님께서 그의 피로 흠뻑 적셔진 그를 우리 시대에 많은 기적으로 숭배할 만큼 합당하게 여기셨다"에게 기증했다. 이는 바이킹의 공격으로부터 수녀들과 에드워드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역사가 사라 풋은 샤프츠베리 수녀원이 요새화된 버러에 있었던 반면 브래드포드는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증이 "다소 기이하다"고 평가했다. 비르트페르트는 에드워드의 무덤에서 첫 번째 기적이 그의 죽음 후 11년 뒤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에드워드의 살해 직후 일어난 기적 이야기는 초기 숭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78년 3월 18일 에드워드가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엘프리다의 자비로 살아가던 맹인 여성이 있는 근처 오두막으로 옮겨졌다. 그날 밤 오두막이 신비로운 빛에 휩싸였고, 맹인 여성은 시력을 회복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시신은 웨어햄의 습지대에 매장되었는데, 1년 뒤 그곳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라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이 발견된 자리에서는 샘물이 솟아났고,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곳을 찾았다.

울프스탄은 1014년경 작성한 "영국인을 위한 늑대의 설교"(Sermo Lupi ad Anglos|세르모 루피 아드 앙글로스ang)에서 에드워드의 살해와 에델레드가 1013년 스베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망명하게 된 것을 영국인들의 군주 배신의 예로 들었다. 1100년 이전에 제작된 25개의 달력 중 18개에 에드워드의 사망일인 3월 18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매우 높은 빈도였다. 5개의 달력에는 유해가 웨어햄에서 샤프츠베리로 옮겨진 2월 13일을 기념하는 축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델레드의 장남인 에델스탄은 1014년 임종 시 작성한 유언장에서 "샤프츠베리의 성 십자가와 성 에드워드에게" 6GBP를 남겼다. 크누트 역시 에드워드의 숭배를 후원했으며, 1008년의 법전 V 에델레드에는 아마도 크누트가 1018년경 삽입한 조항으로 보이는, 에드워드의 순교 축일을 3월 18일에 잉글랜드 전역에서 기념하도록 명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가 데이비드 롤라슨은 에델레드와 크누트가 그들의 전임자인 에드워드의 신성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숭배를 장려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의 살해는 오스왈드와 그의 수도원들, 특히 램지 및 윈치컴에 의해 살해된 다른 왕실 성인들에 대한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에델레드의 왕으로서의 실패는 정복 이후의 작가들과 일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에드워드 살해의 결과로 여겨져 왔다. 고셀린은 에디스의 생애에서 에델레드가 "그의 형제의 피로 왕위를 얻었기" 때문에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썼다. 스텐턴은 에델레드가 "의혹의 분위기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고, 이는 왕관의 위신을 파괴했다. 이는 그의 생전에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무능한 통치는 "그의 백성이 영국에 처음 온 이후 가장 최악의 범죄로 여겼던 일로 인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을 인식한 나약한 왕의 반응"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에델레드가 그의 형제의 숭배를 지지한 것은 그를 둘러싼 의혹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한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후반부터 동시대인들이 에델레드나 그의 어머니 엘프리다를 살해 혐의로 비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케인스는 왕가가 에드워드의 죽음에 대해 비난받았다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오히려 범죄에 주목하게 하여 에델레드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누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종교 공동체가 에드워드의 신체 일부를 획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에드워드의 신체 절반은 레오민스터로, 나머지 절반은 애빙던으로 옮겨졌으나 모두 부서졌으며, 폐만 샤프츠베리에 남아 그곳에서 전시되어 계속해서 맥박이 뛰었다고 기록했다.

6. 3. 성인 추대와 이후의 숭배

에드워드는 사망 직후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러한 숭배는 그의 형제인 에델레드 2세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이 왕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숭배를 장려했지만, 점차 바이킹의 침략이 심해지자 사람들은 이를 에드워드 살해, 즉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살해한 끔찍한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여기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90년부터 994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시게릭은 에델레드 2세를 설득하여 에드워드를 기리기 위해 촐시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했고, 왕은 게르마누스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에드워드에 대한 숭배는 캔터베리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울프스탄에 의해 더욱 장려되었다. 1001년, 에델레드 2세는 윌트셔의 브래드포드온에이번에 있던 옛 민스터 교회와 토지를 하느님과 "그의 성도인 나의 형제 에드워드, 주님께서 그의 피로 흠뻑 적셔진 그를 우리 시대에 많은 기적으로 숭배할 만큼 합당하게 여기셨다"에게 기증했다. 이는 바이킹의 공격으로부터 수녀들과 에드워드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역사가 사라 풋은 샤프츠베리 수녀원이 요새화된 버러에 있었던 반면 브래드포드는 보호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이 기증이 "다소 기이하다"고 평가했다. 비르트페르트는 에드워드의 무덤에서 첫 번째 기적이 그의 죽음 후 11년 만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1014년경 울프스탄은 "영국인을 위한 늑대의 설교"에서 에드워드의 살해와 에델레드 2세가 1013년 스베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망명하게 된 것을 영국인들이 군주를 배신한 사례로 들었다. 1100년 이전에 만들어진 25개의 달력 중 18개에 에드워드의 사망일인 3월 18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매우 중요한 성인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5개의 달력에는 유물이 웨어햄에서 샤프츠베리로 옮겨진 것을 기념하는 2월 13일 축일도 기록되어 있다. 에델레드 2세의 장남인 에델스탄은 1014년 임종 시 작성한 유언장에서 "샤프츠베리의 성 십자가와 성 에드워드에게" 6파운드를 남겼다. 크누트 역시 에드워드 숭배를 후원했으며, 1018년경에는 에드워드의 순교 축일인 3월 18일을 잉글랜드 전역에서 기념하도록 명령하는 조항을 법전에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데이비드 롤라슨은 에델레드 2세와 크누트가 전임자의 신성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에드워드 숭배를 장려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의 살해는 오스왈드와 그의 수도원들, 특히 램지 및 윈치컴에서 살해된 다른 왕실 성인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들과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에델레드 2세의 왕으로서의 실패를 에드워드 살해의 결과로 보기도 했다. 고셀린은 에디스의 생애에 관한 글에서 에델레드 2세가 "그의 형제의 피로 왕위를 얻었기 때문에"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썼다. 스텐턴은 에델레드 2세가 "의혹의 분위기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고, 이는 왕권의 위신을 파괴했다"고 지적하며, 그의 무능한 통치가 "그의 백성이 영국에 처음 온 이후 가장 최악의 범죄로 여겼던 일로 인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을 인식한 나약한 왕의 반응"일 수 있다고 보았다. 에델레드 2세가 형의 숭배를 지지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동시대 사람들이 에델레드 2세나 그의 어머니를 살해 혐의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견해에 도전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케인스는 왕가가 에드워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오히려 범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에델레드 2세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누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종교 공동체가 에드워드의 유물 일부를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에드워드 신체의 절반은 레오민스터로, 나머지 절반은 애빙던으로 옮겨졌으나 모두 훼손되었고, 오직 폐만이 샤프츠베리에 남아 전시되었으며 계속해서 맥박이 뛰었다고 기록했다.

에드워드는 10세기에 수녀원에 묻힌 유일한 왕이었다. 앨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딸을 위해 세운 샤프츠베리 수녀원은 강력한 왕실과의 연계를 가지고 있었고, 에드워드에 대한 숭배는 웨섹스 수도원들 사이에서 샤프츠베리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앵글로색슨 시대 말기에 샤프츠베리는 가장 부유한 베네딕토회 수녀원 중 하나였으며, 글래스톤베리 수도원 다음으로 부유했다. 중세 후기에는 "만약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장이 샤프츠베리의 원장 수녀와 결혼한다면, 그들의 상속자는 잉글랜드의 왕보다 더 많은 땅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에드워드 숭배는 중세 후기 샤프츠베리 수녀원과 마을의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부 중세 문서에서는 이 마을을 "에드워드의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의 Edwardsstowe|에드워즈스토우eng라고 불렀다.

노르만 정복 이후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랜프랑은 많은 앵글로색슨 성인들의 성스러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숭배는 살아남았지만 "소박한" 것으로 여겨져 샤프츠베리와 같이 특별히 그를 존경할 이유가 있는 기관에서만 존경받는 낮은 지위로 격하되었다. 그의 숭배는 중세 후기에 다시 부활했지만 주로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그는 한때 잉글랜드의 국민 성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나, 군사적인 이미지를 선호했던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 게오르기우스를 더 중요시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에드워드는 영국 종교 개혁 이후에도 살아남았지만, 축일에만 기억되는 낮은 지위의 인물로 남았다. 그의 축일인 3월 18일은 여전히 잉글랜드 성공회의 ''공동 기도문'' 축일 달력에 등재되어 있다. 역사가 프랭크 바로우는 대중들이 그의 살해 범죄를 혐오하여 불쾌한 청년을 왕실 순교자로 변모시켰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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