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
1. 개요
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는 브라질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브라질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가정에서 태어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경력을 쌓아 1961년에 장군이 되었으며, 1964년 쿠데타에 가담하여 군사 정권의 요직을 맡았다. 1969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그는 강압적인 통치를 펼치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미국과 협력하여 콘도르 작전에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메디시 정권은 '브라질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빈부 격차 심화와 인권 침해라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1974년 퇴임 후에도 군부 내 극우파를 대표하며 정치에 관여하다가 1985년에 사망했다.
| 존칭 | 그의 각하 |
|---|---|
| 이름 | 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905년 12월 4일 |
|---|---|
| 출생지 | 히우그란지두술주바제 |
| 사망일 | 1985년 10월 9일 (향년 79세) |
| 사망지 | 히우지자네이루 |
| 안장지 | 상주앙바티스타 공동묘지, 히우지자네이루 |
| 배우자 | 실라 노게이라 |
| 자녀 | 2명 |
| 직업 | 군인 |
| 소속 정당 | ARENA |
| 계급 | 육군 대장 |
| 복무 기간 | 1927년–1969년 |
| 참전 전투 | 1930년 혁명 1964년 쿠데타 |
| {"caption":"\"제1회 국민 시민 회의\"에서의 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 연설, 브라질 독립 150주년 기념식 시작 (1972년 4월 21일 녹음)","sound_file":"Discurso_no_I_encontro_cívico_nacional,_no_início_das_comemorações_do_150º_ano_da_independência_do_brasil.mp3"} | |
| 직위 | 브라질 대통령 |
|---|---|
| 대수 | 28대 |
| 임기 시작 | 1969년 10월 30일 |
| 임기 종료 | 1974년 3월 15일 |
| 이전 대통령 | 군사 정부 (대행) |
| 다음 대통령 | 에르네스투 게이젤 |
| 부통령 | 아우구스투 하데마케르 |
| 정보 기관 수장 | 국가 정보 서비스 국장 |
| 임기 시작 | 1967년 3월 17일 |
| 임기 종료 | 1969년 3월 28일 |
| 대통령 |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실바 |
| 이전 국장 | 골베리 두 코투 이 실바 |
| 다음 국장 | 카를루스 알베르투 다 폰투라 |
| 지휘 | 제3기병사단 참모 제3군관구 참모 제2과 (작전) 예비역 장교 준비 센터 제3군관구 참모 제4기병사단 검은 바늘 군사 아카데미 제3군 |
|---|
| 모교 | 헤알렝구 군사 학교 |
|---|
-
브라질의 장군 -
주앙 피게이레두
주앙 피게이레두는 브라질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군사 정권 하에서 요직을 거쳐 간선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임 기간 동안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했으나 경제 위기와 건강 문제에 직면했다. -
브라질의 장군 -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에르네스투 가이제우는 브라질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경제 성장과 정치적 개방을 추진했으나, 인권 탄압 등의 비판도 받은 인물이다. -
분류 값 없이 쓰인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분류 값 없이 쓰인 위키공용분류 -
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2. 어린 시절과 군 경력
메디시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에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이 되었다. 1950년대에 예비군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1964년 브라질 쿠데타 이후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브라질의 미국 주재 무관을 역임했고, 1967년 브라질 국가정보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2.1. 가계와 출생
메디시는 히우그란데두술 주 바제에서 태어났다. 부친 쪽으로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손자였으며, 이들은 우루과이로 이주했다가 브라질로 이주했다. 모친 쪽으로는 바스크의 후손이다.
2.2. 군 입문
메디시는 히우그란데두술 주 바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탈리아 이민자의 손자였으며, 이들은 우루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이주했다. 모친은 바스크의 후손이다. 그는 1920년대에 포르투알레그리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육군에 복무했으며, 1961년 장군으로 진급했다.
2.3. 초기 군 경력
메디시는 히우그란데두술주 바제에서 태어났다. 부친 쪽으로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손자였으며, 이들은 우루과이로 이주했다가 브라질로 이주했다. 모친 쪽으로는 바스크의 후손이다. 1920년대에 그는 포르투알레그리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육군에 들어가 꾸준히 진급하여 1961년에는 장군이 되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예비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브라질 쿠데타 이후 메디시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브라질의 미국 주재 무관이 되었다. 1967년 메디시는 브라질 국가정보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3. 군사 쿠데타와 집권
메디시는 1964년 브라질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여 군사정권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69년 간질로 쓰러진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에게 직무정지령을 내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군사정권의 지명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전임자보다 더욱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 반대파를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도 빈번했다. 미국의 콘도르 작전에 참여하여 1973년 칠레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라틴아메리카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74년 에르네스투 가이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3.1. 1964년 쿠데타 가담
메디시는 1964년 브라질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여 극우 군사정권의 주요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는 1969년 간질로 쓰러진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에게 직무정지령을 내리고 권력을 쥐었다.
3.2. 대통령 취임
1969년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1969년 브라질 군사 정부는 메디시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브라질 의회는 군부 정당인 국가 혁신 동맹당(ARENA)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디시의 선출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었다. 1969년 10월 30일, 메디시는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74년 3월 15일까지 재임했다.
4. 대통령 재임 (1969–1974)
1967년 헌법에 따라 통치한 메디시는 고문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엄격한 언론 검열을 실시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시했다. 그는 브라질의 국력을 증강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부 내 강경파를 대표했다. 그의 임기 동안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이 나타났으며,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기도 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메디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전복하기 위한 노력을 조율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메디시 군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에 참여하여 1973년 칠레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라틴아메리카를 위기에 몰아넣어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4.1. 국내 정책
메디시는 1967년 헌법에 따라 통치했는데, 이 헌법은 이전 헌법보다 더욱 권위주의적으로 개정된 것이었다. 그는 고문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엄격한 언론 검열을 실시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시했다. 그는 브라질의 국력을 증강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부 내 강경파를 대표했다. 또한 원주민 영토를 만들었다.
메디시 대통령의 임기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큰 경제 성장을 기록한 시기였다. 브라질의 기적이 펼쳐졌고,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기도 했다.
4.1.1. 권위주의 통치 강화
메디시 정권은 1967년 헌법과 제5차 제도법(AI-5)에 기반하여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했다. AI-5는 정부에 언론 검열 및 시민의 권리 제한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헌법과 AI-5는 군부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의 법적 근거를 형성했다.
메디시는 고문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엄격한 언론 검열을 실시했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루이와 같은 남성 잡지와 서독의 뉴스 잡지 데어 슈피겔의 수입은 "도덕과 적절한 행동"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의 정권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시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강제 실종되었다.
국가 해방 행동의 지도자 카를루스 마리겔라와 카를루스 라마르카가 이끈 게릴라 운동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마리겔라와 라마르카는 살해되었다. 10월 8일 혁명 운동은 진압되었고, 아라과이 게릴라 전쟁에서 승리했다.
1980년대에 상파울루 가톨릭 교구와 개신교 목사들은 메디시 정권 기간 동안 고문 사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수천 개의 기밀 문서를 입수했다. 이러한 폭로는 광범위한 고문 사용에 대해 알지 못했던 일반 브라질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4.1.2. 경제 정책: '브라질의 기적'
메디시 대통령의 임기 동안 브라질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브라질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호베르투 캄푸스와 델핀 네투 등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각료들이 주도했다. 1971년, 메디시는 경제 성장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제1차 국가 개발 계획을 발표했는데, 특히 외딴 북동부와 아마존 분지 지역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브라질 경제는 연 10%의 빠른 성장률을 보였고, 군사 정권 수립 이전 시기에 비해 인플레이션은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다. 트란스 아마조니아 고속도로, 이타이푸 댐, 리우-니테로이 다리와 같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의 혜택은 주로 부유층에게 돌아갔다. 1970년 말, 공식 최저 임금은 월 40USD로 하락했고, 브라질 노동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주세리누 쿠비체크 행정부 말기인 1960년에 비해 구매력이 약 50% 감소했다.
4.2. 대외 정책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메디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전복하기 위한 노력을 조율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헨리 키신저 국가 안보 보좌관이 작성한 1971년 12월 9일 메디시의 백악관 방문 기록은 기밀로 분류되었다가 2008년 9월 4일 기밀 해제되었으며,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미국 외교 정책 관련 출판물의 일부로 공개되었다.
키신저의 메모에 따르면, 회담에서 닉슨은 칠레에 대한 메디시의 견해를 물었고, 메디시는 아옌데가 전복될 것이라고 답했다. 브라질은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닉슨과 메디시는 쿠바의 미주 기구(OAS) 재가입 여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메디시는 페루가 OAS에 쿠바 재가입을 고려하도록 설득하려 하고 있으며, 닉슨에게 그 움직임에 어떻게 협력하여 반대해야 하는지 물었다. 닉슨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메디시에게 "비공개적으로"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OAS는 1974년 쿠바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로 투표했다.
4.2.1. 미국의 콘도르 작전 참여
메디시 군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에 참여하여 1973년 칠레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라틴아메리카를 위기에 몰아넣어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메디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전복하기 위한 노력을 조율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헨리 키신저의 메모에 따르면, 회담에서 닉슨은 칠레에 대한 메디시의 견해를 물었고, 메디시는 아옌데가 전복될 것이라고 답했다. 닉슨은 칠레 군대가 아옌데를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메디시는 브라질이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4.2.2. 닉슨 행정부와의 협력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메디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전복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헨리 키신저 국가 안보 보좌관이 작성한 1971년 12월 9일 메디시의 백악관 방문 기록은 기밀로 분류되었다가 2008년 9월 4일 기밀 해제되었고,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미국 외교 정책 관련 출판물의 일부로 공개되었다.
키신저의 메모에 따르면, 회담에서 아옌데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닉슨이었으며, 칠레에 대한 메디시의 견해를 물었다. 메디시는 아옌데가 전복될 것이라고 답했고, 칠레 군대가 아옌데를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닉슨의 질문에 "그럴 수 있다"고 답하며 브라질이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메모는 또한 닉슨과 메디시가 쿠바의 미주 기구(OAS) 재가입 여부에 대해서도 논의했음을 보여준다. 메디시는 페루가 OAS에 쿠바 재가입을 고려하도록 설득하려 하고 있으며, 닉슨에게 어떻게 협력하여 이에 반대해야 하는지 물었다. 닉슨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메디시에게 "비공개적으로"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OAS는 1974년 쿠바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로 투표했다.
5. 퇴임 이후와 죽음
메디시는 1974년 3월 15일 에르네스투 가이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공적인 삶에서 은퇴했다. 이후 뇌졸중을 앓다가 1985년 10월 9일 신부전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상 주앙 바티스타 묘지에 매장되었다.
5.1. 퇴임 이후 정치 관여
메디시는 1974년 3월 15일 에르네스투 가이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물러났으나, 군사정권의 정치에 계속 관여했다. 그는 여전히 군사정권의 실질적 수장으로 인식되었으며, 군사정권 내 극우파를 대표했다. 1979년 8월 주앙 피게이레두 행정부 시절 시행된 정치적 사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5.2. 죽음
메디시는 뇌졸중을 앓은 후 1985년 10월 9일 신부전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상 주앙 바티스타 묘지에 매장되었다.
6.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1969년 선거 | 브라질의 대통령 | 28대 | 국민개조동맹당 | 100.00% | 293표 | 1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