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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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수게이는 1130년 카마그 몽골 키야트부에서 태어났으며,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의 아버지이다. 그는 카불 칸의 손자이자, 몽골 부족의 지도자였으며, 케레이트 부족의 토오릴 칸을 지원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또한 메르키트족의 호엘룬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1171년 타타르족에게 독살되어 사망했다. 1266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열조신원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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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게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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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예수게이 바투르 |
로마자 표기 | Yesügei Ba'atur |
한자 표기 | 也速該 |
출생 | 1134년경, 몽골 고원 |
사망 | 1171년경 (36-37세), 몽골 고원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종교 | 텡그리 신앙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바르탄 바가투르 |
어머니 | 아이치겔 |
배우자 | 호엘룬, 소치겔 |
자녀 (적자) | 테무진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
자녀 (서자) | 벡테르 벨구테이 |
친척 | 타르구타이 쿠릴투크(10촌) |
통치 정보 | |
직위 | 보르지긴 키야트 가문 추장 |
재위 기간 | 1160년경 – 1171년 |
이전 통치자 | 호툴라 칸 |
이후 통치자 | 칭기즈 칸 |
사후 정보 | |
묘호 | 열조(烈祖) |
시호 | 신원황제(神元皇帝) |
2. 생애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둘째 아들인 바르탄 바가투르의 아들이었다. 카불 칸은 금나라에 의해 카간으로 인정받았으며, 몽골족을 통일하려 했던 최초의 인물인 몽골 족장 카이두의 증손자였다. 예수게이는 형인 네군 타이시와 동생 다리다이 오치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족의 칠레두로부터 그의 본처인 호엘룬을 신부 납치했다.[1] 예수게이는 호엘룬의 아름다움과 다산의 징후 때문에 그녀를 납치했다.[2]
하마그 몽골 연맹 칸 호툴라가 죽은 후, 연맹에는 선출된 왕이 없었지만, 사실상 예수게이가 연맹을 통치했다. 예수게이는 혈맹인 안다 관계인 토그릴 칸(후에 왕 칸 및 옹 칸으로 알려짐)을 두었다. 예수게이는 토그릴이 그의 삼촌 구르칸을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1171년,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이 아홉 살이었을 때 사망했다. ''몽골비사''에는 그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3] 테무진을 콩기라트 부족의 귀족인 데이 세첸의 집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결혼식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게이와 다이 세첸은 그들의 자녀인 테무진과 보르테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3]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보르테의 가족과 함께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타르족이 잔치를 벌이는 야영지를 발견했다. ''비사''에 따르면, 그는 잔치에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8년 전에 전투에서 타타르족의 친척(테무진 우게)을 죽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4] 예수게이는 운을 시험했지만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환대의 명목으로 독이 든 음식을 제공했다. 병이 났지만 예수게이는 가족의 캠프로 간신히 탈출했다.[4] 예수게이는 사흘 후에 집에서 죽었다.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차남 바르탄 바아르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몽게투 키얀[8], 네쿤 타이시[9], 동생 다리다이 오치긴[10]이 있다.
예스게이의 종조부이자 온 몽골의 군주 암바가이 칸(카불 칸의 사촌)이 타타르 부족에게 계략에 빠져 금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예스게이는 오논강가에서 매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메르키트 부족의 예케 치레두가 오르크누트[12] 사람들에게서 딸을 데려오는 것을 보았다. 용모가 뛰어난 딸이었기에 예스게이는 형 네쿤 타이시와 동생 다리다이 오치긴을 불렀다. 예케 치레두가 겁에 질려 도망가자 세 사람은 뒤쫓았다. 예케 치레두가 데리고 있던 여성 호엘룬은 "저 세 사람은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당신은 살아 있다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지 말고 저를 두고 가십시오"라고 말하며 예케 치레두를 도망가게 했다. 이렇게 빼앗긴 호엘룬은 예스게이의 아내가 되었다[13].
예스게이의 숙부 쿠툴라 칸과 종부 카다안 타이시[14]에 의해 암바가이 칸의 복수가 시작되자, 예스게이도 타타르 부족을 침공하여 그 영수인 테무진 우게[15]와 코리 부카[16]를 붙잡았다. 마침 그 무렵, 아내 호엘룬은 임신 중이었고, 오논강의 데리운 산[17]에 있을 때 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호엘룬은 예스게이가 붙잡아 온 타타르족 용장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이름을 "테무진"이라 지었다(이 아이가 후에 칭기즈 칸이 된다). 후에 예스게이와 호엘룬 사이에는 조치 카사르, 카치운 엘치, 테무게 오치긴 등 총 4명이 태어났다.[18].
테무진이 9살 때, 예스게이는 테무진에게 여자를 맞이하게 하기 위해 어머니 쪽 오르크누트 사람들의 거처로 데려가기로 했다. 도중에 체크체르, 치쿠르구라는 두 산 사이에서 옹기라트 씨족의 족장 데이 세첸[19]을 만났다. 데이 세첸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자신의 딸 보르테를 소개했다. 보르테는 테무진보다 1살 연상이었지만, 예스게이는 그 딸을 마음에 들어 하여 아들에게 장가보내기로 결정했다. 데이 세첸은 조건으로 테무진을 사위로 두고 가기를 원했으므로, 예스게이는 테무진을 맡기고 데이 세첸의 집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도중, 체크체르 산 기슭의 시라 케에르라는 곳에서 타타르족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만났다. 목이 말랐던 예스게이는 말에서 내려 음료수를 얻어 마셨지만, 이전의 패배에 대한 원한이 있었던 타타르족은 그 음료에 몰래 독을 섞어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예스게이는 몸이 안 좋아져 3박 4일 만에 자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예스게이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가까이에 있던 콩고탄 씨의 차라카 옹(에브겐)의 아들 몽리크를 불러 "테무진을 데려오고, 남은 사람들을 부탁한다"고 말하고 그대로 절명했다[20].
2. 1. 가계 배경과 초기 활동
예수게이는 1130년경 카마그 몽골 키야트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131년, 1133년, 1134년생 설 등이 있다. 아버지는 바르탄 칸, 어머니는 수니굴 카툰이다. 수니굴 카툰의 출신에 대해서는 바가 몽골 혹은 바가르부 출신이라는 설[23]과 타르쿠트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손자이자 암바가이 칸의 종손자였고, 쿠툴라 칸의 조카였다. 아버지 바르탄으로부터 키야트 가문의 추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종조부 안바가이 칸의 후예들은 타이치우드 가문을 형성하여 예수게이의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형인 네군 타이시와 동생 다리타이 오치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족의 칠레두로부터 그의 본처인 호엘룬을 납치했다.[1] 신부 납치를 감행한 이유는 호엘룬의 아름다움과 다산의 징후 때문이었다.[2]
호툴라 칸 사후, 하마그 몽골 연맹에는 선출된 왕이 없었지만, 사실상 예수게이가 연맹을 통치했다. 예수게이는 혈맹인 안다 관계인 토그릴 칸(후에 왕 칸 및 옹 칸으로 알려짐)을 두었다.
2. 2. 키야트부의 지도자
1130년경 카마그 몽골 키야트부 출신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손자이자 암바카이 칸의 종손자였다. 아버지 바르탄 칸으로부터 키야트 가문의 추장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타이치우드 가문은 그의 주요 경쟁 상대였다. 하마그 몽골 연맹 칸 호툴라가 죽은 후, 연맹에는 선출된 왕이 없었지만, 사실상 예수게이가 연맹을 통치했다.안바가이 칸이 금나라에 체포되어 살해될 무렵, 예수게이는 메르키트족의 칠레두에게서 호엘룬을 빼앗아 아내로 삼았다. 이 일로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와 그의 자손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1160년경 혹은 1162년 예수게이는 삼촌 쿠툴라 칸, 종숙 카다안 타이시 등과 함께 암바가이 칸을 금나라로 넘겨버린 타타르족을 공격하여 타타르족 족장 테무친 우게와 코리 부카를 잡아 죽였다. 얼마 뒤 태어난 아들 테무진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원사》에는 그의 행적이 간략하게 나오는데, 제 부족을 병합하고 몽골의 세력을 더 키웠다고만 기술되었다.
2. 2. 1. 옹 칸의 케레이트부 대권 지원
케레이트족의 토오릴 칸은 아버지 사후 이복 동생을 살해하고 삼촌 구르 칸과 후계 다툼을 벌이다 패주했다. 예수게이는 토오릴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토오릴은 예수게이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예수게이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토오릴 칸과 함께 케레이트를 공략, 토오릴은 삼촌 구르 칸을 격파하고 케레이트족의 칸이 되었다. 토오릴은 예수게이에게 감사하며 이때부터 의형제(안다) 맹세를 맺었다.[1] 이 인연으로 예수게이 사후 테무친이 고난을 겪었을 때 토오릴은 예수게이와의 안다 약속을 이어 테무진을 양아들로 대우하고, 스스로는 의부라 칭하며 테무진을 도왔다.호툴라은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토오릴을 돕지 말라고 만류했다. 호툴라는 토오릴의 사람됨됨이로 보아 도와주면 안되며,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그 피로 깃발과 창을 더럽혔고, 그는 화살에 맞은 들소이고 올가미에 걸린 야생 당나귀와 같은 음흉하고 야비한 인간이니 돕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게이는 타이치우드부의 코난, 바르가치 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토오릴 칸을 지원했다.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둘째 아들인 바르탄 바가투르의 아들이었다. 카불은 금나라에 의해 카간으로 인정받았다. 카불 칸은 몽골족을 통일하려 했던 최초의 인물인 몽골 족장 카이두의 증손자였다.
2. 2. 2. 호엘룬 납치
예수게이는 메르키트족의 칠레두에게 시집가던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을 발견했다. 호엘룬은 뛰어난 미모와 더불어 옹기라트부 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1] 예수게이는 형 네쿤 타이시, 동생 다리타이 옷치긴과 함께 칠레두를 쫓아냈다. 호엘룬은 칠레두에게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고, 칠레두는 도망쳤다.[13] 이후 호엘룬은 예수게이의 아내가 되었다.[1] 일각에서는 예수게이가 칠레두를 죽이고 호엘룬을 빼앗았다는 설도 있다.이 사건으로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와 그 후손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13]
2. 3. 카마크 몽골 분열과 최후
쿠툴라 칸이 죽고 칸을 선출하지 못하면서 카마크 몽골은 분열되었고, 예수게이는 보르지긴 씨 중 키야트 가문의 지도자로 남았다.[22] 그는 카마크 몽골의 통일을 위해 친척 타이치우트 가문과 연대하려 하였으나, 이 일로 보르지긴 키야트 가문의 다른 친족들이 후일 예수게이 사후 호엘룬과 그 자녀들을 외면하는 원인의 하나가 된다.[22]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이 9세 되던 해에 옹기라트족 유력 부족인 올크누트 부족의 족장 데이 세첸을 만났다. 곧 데이 세첸의 집을 직접 찾아가, 테무진보다 연상인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아내로 정혼해주었다.[19]
1171년,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과 보르테를 약혼시키고 오던 중, 타타르족의 숙소에서 손님으로 머물게 되었다.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의 족장 중 한 명인 메구진 세울투가 준 술을 먹고 독살당한다.[3]
메구진 세울투가 준 음료수에 독이 든 것을 안 예수게이는 타타르족 막사를 떠났다. 몸에 독이 퍼져 상황이 악화되었고, 3박 4일에 걸쳐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예수게이는 자신의 임종을 직감하고 근처에 있던 콘고탄씨의 챠라카 옹(에부겐)의 아들 몽릭을 불러 "테무진의 미래와 남은 자들을 부탁한다"고 말하고, 3일 뒤 절명했다.[20]
3. 칭기즈 칸과의 관계
예수게이는 칭기즈 칸의 아버지로, 몽골 키야트부의 지도자였다. 그는 칭기즈 칸에게 용맹함과 결단력, 부족 운영 경험을 전수하여 훗날 몽골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을 닦게 했다.
예수게이는 케레이트 부족의 토오릴과 맹우(안다) 관계를 맺었다.[1] 옹 칸은 예수게이의 도움으로 숙부를 물리치고 케레이트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훗날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진(칭기즈 칸)을 지원했다.[1] 옹 칸과의 동맹은 칭기즈 칸의 초기 세력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수게이는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로부터 그의 아내 호엘룬을 납치했다.[1] 이 사건은 훗날 칭기즈 칸이 메르키트족과 원한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으며, 몽골 부족 통일에 영향을 미쳤다.
1171년,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이 9살 때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다.[3]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칭기즈 칸은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몽골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4. 업적과 평가
예수게이는 키야트부의 수장으로서 부족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카불 칸의 손자이자 바르탄 바가투르의 아들로, 몽골 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 그는 호엘룬을 납치하여 결혼하고, 테무진을 비롯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1][2] 또한, 토그릴 칸과 '안다'(의형제) 관계를 맺어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 (칭기즈 칸)에게 훌륭한 롤 모델이자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테무진이 보르테와 결혼하는 것을 주선하고, 초기 부족 통일 과정에서 토그릴 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3] 그러나 예수게이는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해 일찍 사망하면서 몽골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3][4] 그의 죽음은 부족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5. 추존
1266년 10월, 쿠빌라이 칸이 태묘를 건립하면서 '''열조'''(烈祖)라는 묘호와 신원황제(神元皇帝)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5] 몽골어 존호로는 텡게르크 예즈구륵 카안(Тэнгэрлэг язгуурт хаан, 하늘처럼 밝은 칸)이 추존되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제5대 카안인 쿠빌라이 칸은 1266년에 중국의 관습에 따라 증조부인 예수게이에게 "열조신원황제"라는 추존 시호를 올렸다.
6. 가계도
참조
[1]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And Other Piec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5-13
[2]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07-18
[3]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Translation
https://books.google[...]
Harvard-Yenching Institute
1982
[4]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Crown Publishing Group
[5]
간행물
Six Pre-Chinggisid Genealogies in the Mongol Empire
https://www.academia[...]
2012
[6]
문서
「イェスゲイ」はイェスン(yesün)すなわち、モンゴルの聖数である「9」の男性形容詞。これに対して、女性形容詞のyesülünは、女性の名前に用いられた。≪村上 1970,p63≫
[7]
문서
「武人」、「勇士」、「英雄」を意味し、初めは戦功をたてた遊牧騎士たちに与えられた栄誉ある称号であったが、後にカアンによって授与される一定の称号となり、やがて一般化して「決死隊」の名のもととなった。[[元 (王朝)|元朝]]の抜都魯軍というのがそれである。≪村上 1970,p48≫
[8]
문서
モンゲトゥ・キヤン(Mönggetü Qiyan)、「モンゲ」(Möngge~Mengge<turc.meng)は、「ほくろ」のことで、つまりその名は「黒子のあるキヤン」の意。[[ラシードゥッディーン]]によれば、彼の子の名はチャンシウダイ(Čangši'udai)で、彼が名祖となって、キヤト・チャンシウトという氏族をつくった。≪村上 1970,p63≫
[9]
문서
ネクン・タイシ(Nekün Taiši,Nekün Tāīšī)、「ネクン」は「家人」という訳があるが、nekün bōl(<boγol)と熟字して、「女奴隷」の意となる([[満州語]]のnehuと同じ語源:[[ポール・ペリオ]])。また、「タイシ」は[[西遼]]国を建てた[[耶律大石]]の「大石」と同じく、中国語の「[[太師]]」のモンゴル語化したもの。『[[集史]]』によると、彼および子のクチャルの子孫はキヤト・サヤール(Qiyad Saār)という氏族をつくったという。≪村上 1970,p63≫
[10]
문서
ダリダイ・オッチギン(Daridai<Da'aridai Otčigin)、「ダアリ(da'ari<daγari)」は「瘡(かさ)」で「瘡を持つ者」の意となる。また、[[テュルク語]]と解すれば、ダール(dār)すなわち「黍(きび)」を持てる者の意となるが、たぶん前者の意味に採るべきであろう。「オッチギン」すなわち「炉の主」という名をとったのは、彼が末子だからである。チンギス・カンの勃興当初、彼は生存していた唯一の叔父としてチンギス・カンに協力したが、後には去就常なかったため、チンギス・カンの不興を招き、ついに独自の氏族をたて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模様。≪村上 1970,p64≫
[11]
문서
『[[元朝秘史]]』には「主因亦児堅」という文字で書かれる。この「主」ǰü~ǰuが、『[[遼史]]』『[[金史]]』あるいは『[[元史]]』に「乣」という特殊な文字で写されたものの原音と見られるが、『[[黒韃事略]]』の説明によると、五十人を一隊として編成された、国境防備のための外人傭兵部隊を指すものであった。おそらくは[[契丹語]]に由来する語であって、最初は[[遼]]朝下で保有を許された王侯貴族の私属の軍隊を名指したが、次の[[金 (王朝)|金朝]]にはいると、この語は自国の覇絆の下に置かれた北方遊牧民から編成した国境守備隊を意味するように使用して、[[奚]]族から出た「咩乣」、[[タングート]]族から出た「唐古乣」、モンゴル族から出た「萌骨乣」などの多くの乣軍の名が輩出するようになったらしい。ここに見える「タタル乣」もその一つであろう。≪村上 1970,p69≫
[12]
문서
オルクヌウト(Olqunu'ud,Olqunūt,斡勒忽納兀惕)、『集史』によれば、モンゴル部族の通婚部族であるオンギラト集団を構成する6つの重要な氏族集団のひとつ。
[13]
문서
村上 1970,p69-72
[14]
문서
アンバガイ・カンの子
[15]
문서
テムジン・ウゲ(TemüJ̌in Üge,TemüJ̌in Öke)、「テムジン」とはtemürčiすなわち「鉄を作る人」とか「鍛冶屋」の意がある。中世モンゴル語では、nomen agentisのčiを付する場合、hüker→hükečiのように、中間のrを落とすことが普通である。なお、この場合のügeとは「言葉」の意味ではなくて、オゴデイ・カアンのögö~ökeなどと同じ語源のもので、ポール・ペリオによれば、古代アヴァール語における「賢者」の意であろうという。≪村上 1970,p79≫
[16]
문서
コリ・ブカ(Qori Buqa,Qūrū Būqā)、『元朝秘史』の写し方によれば、「コリ族の牡牛」あるいは「二十匹の牡牛」の意となろう。≪村上 1970,p79≫
[17]
문서
「デリウン(deli'ün<deligün~deligüü)」は「脾臓」の意。budaγは「峰・岳」の意があり、「脾臓の形をした山」の意となる。モンゴル人学者のドルジスレンの説によると、この山の位置はモン골部族発祥の聖地ブルカン岳に近く、オノン河源の地で、オノン河がバルジ河と合流する地点にあり、現在ではモンゴルのヘンテイ・アイマクのダダル・ソムのほぼ中央に当たるという。≪村上 1970,p79≫
[18]
문서
村上 1970,p78
[19]
문서
デイ・セチェン(Dei Sečen,Deī Sēčēn,特薛禅,徳薛禅)、「デイ」とは漢語の「大」の発音の口蓋化された形。つまり、口蓋化現象の多かった契丹語を介してモン골語に移入した語か。ちなみに、モン골時代では「大」という漢字は、明らかに「dai」と発音されていた。たとえば、大元帝国をDai Ön Ulusというように。なお、「セチェン」はテュルク語の「ビルゲ」に当たる言葉で「賢者」の意。つまり全体で、「大賢者」を意味する。『集史』では「Deī Nōyōn(大諾顔)」とも呼ばれていたという。≪村上 1970,p86≫
[20]
문서
村上 1970,p78-95
[21]
문서
村上 1970,p99-102
[22]
문서
Рашид аддин. Судрын чуулган. Нэгдүгээр боть. Орос хэлнээс орчуулсан Ц.Сүрэнхорлоо. УБ., 2002. т. 188. 190.
[23]
문서
Рашид аддин. Судрын чуулган. Нэгдүгээр боть. Орос хэлнээс орчуулсан Ц.Сүрэнхорлоо. УБ., 2002. т.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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