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키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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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라사키 료는 1841년 교토에서 태어난 여성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체포와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1866년 테라다야 사건에서 료마의 목숨을 구하는 활약을 펼쳤으며, 료마 사후에는 과부로 생활하며 재혼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았으며, 1906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료마와 함께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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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키 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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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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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
출생일 | 1841년 7월 23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일 | 1906년 1월 15일 |
국적 | 일본인 |
묘지 | 요코스카시오쓰신라쿠지 |
활동 | |
알려진 이유 | 1866년 데라다야 사건 중 남편 사카모토 료마와 그의 경호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관을 반나체로 달려 그의 방으로 가서 자객들의 도착을 알림 |
가족 | |
배우자 | |
어머니 | 시게노 사다 |
아버지 | 나라사키 쇼사쿠 |
친척 | 나카자와 미쓰에 (자매) 스게노 기미 (자매) 나라사키 다이치로 (형제) 나라사키 겐키치 (형제) |
2. 생애
1841년 7월 23일 교토에서 의사 나라사키 쇼사쿠와 그의 아내 시게노 사다의 장녀로 태어났다. 두 명의 여동생(미츠에, 키미)과 두 명의 남동생(타이치로, 켄키치)이 있었다. 아버지 쇼사쿠는 안세이 대옥 때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오료가 21세 되던 해에 석방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1864년에 사카모토 료마와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테라다야 여관 습격 사건 이후인 1866년에 결혼했다는 설도 있어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료마 사후에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고마쓰의 여주인이었던 야마모토 나오에는 오료의 말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오료 씨는 저보다 열 살 정도 연상이셨습니다. 메이지 시대 중년에 몰락하여 요코스카로 흘러와 가난한 생활을 하셨지만, 러일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68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몰락했지만, 역시 품격이 좋고, 꼿꼿한 용모를 가진 분이셨어요. 지금에서야 사카모토 료마라고 하면, 해군의 창시자이며, 막부 말의 준걸로서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는 돌아보는 사람도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기량이 좋은 사람이었고, 교육도 받은 분이어서, 여기저기서 재혼을 권유받아 해군 공창 어용 상인 니시무라 분페이라는 사람과 동거를 몇 년 했지만, 료마 씨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절개를 지켰기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되었고, 다시 혼자가 되어 여자 머리 손질 일을 돕는 등 술에 잠겨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이기도 하고, 그 반생이 안타까웠습니다.[57]
1906년 1월 15일,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요코스카시 오쓰의 신라쿠사에 묻혔다. 오랫동안 묘비가 없었으나, 다나카 미쓰아키와 가가와 게이조 등의 도움으로 사망 8년 후인 다이쇼 3년(1914년) 8월, 여동생 나카자와 미쓰에가 시주하고 니시무라 마쓰베에 등이 찬조하여 묘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증 정사위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 료코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남편 료마가 잠든 교토 료젠고쿠 신사에도 유골 일부가 안치되었다. 2010년 1월 15일에는 신라쿠사에서 료마 사망 143년 만에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2. 1. 어린 시절
덴포 12년(1841년) 7월 23일, 교토의 토미코지 로쿠카쿠 부근에서 의사인 나라사키 쇼사쿠와 그의 아내 시게노 사다(혹은 테이, 나츠)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동생으로는 미츠에와 키미(키미에)가 있었고, 남동생으로는 타이치로와 켄키치가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친아버지는 니시진 직물 상인이고 쇼사쿠의 양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7]나라사키 가문은 본래 조슈번의 무사 집안이었으나, 오료의 증조부 대에 주군의 노여움을 사 낭인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 쇼사쿠는 쇼렌인노미야의 시의를 지낼 정도로 명망 있는 의사였기에, 오료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며 꽃꽂이, 향도, 다도 등을 배웠다. 다만 요리에는 서툴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막부의 탄압 정책인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투옥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면되어 풀려났으나 분큐 2년(186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8], 남겨진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가구나 옷가지를 팔아야 할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이 무렵 어머니가 악인에게 속아 여동생 키미가 시마바라의 마이코로, 미츠에가 오사카시의 유녀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료는 옷을 팔아 돈을 마련한 뒤, 칼을 품고 오사카로 가 동생들을 팔아넘긴 남자들에게 "죽여라, 죽여라, 죽으려고 멀리 오사카까지 왔다. 이건 재미있네, 죽여라"[9]라고 외치며 담판을 벌여 여동생들을 구해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0][11]
2. 2. 사카모토 료마와의 만남과 결혼
겐지 원년(1864년)경, 오료는 훗날 남편이 되는 사카모토 료마와 만났다.[13][14] 당시 오료는 시치조 신치의 여관 "센간"에서 일하고 있었고[12], 어머니 사다는 호코지 대불전(교토의 대불) 근처에서 덴추구미 잔당을 포함한 도사번 출신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은신처 식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오료의 회고에 따르면, 료마와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묻자 종이에 적어 보여주니 자신과 같은 이름이라며 웃었다고 한다.[15] 오료에게 반한 료마는 어머니 사다에게 오료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했고, 사다도 이를 승낙했다.[16][15]같은 해 6월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하자, 아이즈번 병사들이 대불전 근처 은신처까지 수색하여 가재도구를 몰수당하는 등 (대불 소동) 오료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해졌다. 료마는 당시 상황에 대해 "매일 먹을 것도 제대로 없어, 정말 처량한 생활이었다"고 술회했다.[10] 료마는 게이오 원년 9월 9일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료의 이러한 딱한 사정을 자세히 전하며, 그녀를 "정말로 재미있는 여자"라고 평했다.[10] 오료의 후년 회상에 따르면, 두 사람은 같은 해 8월 1일에 혼례를 올렸다.[17]
오료는 1866년 3월 9일 교토의 테라다야(寺田屋)에서 료마가 막부 관리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기지를 발휘하여 그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 그날 저녁, 목욕을 하던 오료는 밖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를 듣고 암살자들이 접근했음을 직감했다. 암살자 중 한 명이 창으로 욕실 창문을 찔렀을 때, 오료는 한 손으로 창을 잡고 큰 소리로 맞섰다. 그리고 즉시 욕조에서 뛰쳐나와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채 정원을 가로질러 여관 2층으로 달려가, 호위 무사 미요시 신조와 함께 있던 료마에게 위험을 알렸다.[2] 료마와 미요시는 곧바로 격렬한 싸움 끝에 약간의 부상만 입고 탈출에 성공했다.

테라다야 사건으로 양손에 중상을 입은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권유로 상처 치료를 위해 사쓰마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 3월 4일, 료마와 오료는 사쓰마 번의 배 '미쿠니마루(三邦丸)'를 타고 오사카를 출발했다. 배 위에서 료마가 "천하가 안정되면 기선을 만들어 일본을 순회하자"고 말하자, 오료는 "집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배만 있으면 충분해요. 외국까지 돌아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고, 료마는 "엉뚱한 여자군"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엉뚱한 여자라서 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크게 웃었다고 오료는 회상했다.[25]
3월 10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료마와 오료는 사쓰마 번사 요시이 코스케의 안내를 받으며 온천 요양을 시작했다. 일행은 힛토야마 온천, 시오비타시 온천 등을 방문하고, 이누카이 폭포를 구경하거나 산에서 권총으로 새를 잡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기리시마산 정상의 아마노사카호코를 보기 위해 타카치호노미네에 올랐을 때는, 동행했던 다나카 키치베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료마와 함께 역호코(逆鉾)를 뽑아보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료마는 이 사쓰마 여행의 모습을 게이오 2년 12월 4일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했으며[26], 훗날 오료 역시 이 여행에 대한 회고담을 남겼다.[27]
료마를 세상에 처음 소개한 사카자키 시란의 저서 『한혈천리구』에서는 이 여행을 서양의 '허니문(신혼여행)'에 빗대어 설명했으며[28], 오늘날 이 여행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6]
2. 3. 료마 사후
1867년 12월 10일 오미야 사건으로 남편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되면서 오료는 과부가 되었다. 료마의 부고는 게이오 3년 12월 2일(양력 1867년 12월 27일) 시모노세키에 있던 오료에게 전해졌다. 비보를 접한 오료는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머리카락을 잘라 불상 앞에 놓고 크게 통곡했다고 전해진다.[33] 료마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훗날 오료는 료마가 죽은 날 밤, 피투성이가 된 료마가 꿈에 나타났다고 회고했다.[34]료마 사후, 한동안은 데라다야 사건 때 료마와 함께했던 미요시 신조가 오료를 보살폈다. 또한, 료마의 생전 뜻에 따라 오료의 여동생 기미(君)가 해원대 대원이었던 스게노 가쿠베에(菅野覚兵衛, 지야 도라노스케(千屋寅之助))와 결혼했다.
1868년 3월(게이오 4년), 오료는 료마의 미망인 자격으로 도사의 사카모토 가문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3개월 남짓으로 짧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료마의 누나 오토메(乙女)와의 불화설이 있으나[35], 오료 자신은 훗날 "오토메 씨는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고 말했다.[36] 오료는 오히려 료마의 의붓형인 곤페이(権平) 부부가 료마에게 내려질 포상금을 탐내 자신을 괴롭혀 내쫓았다고 회고하며 원망했다.[37]
사카모토 가문을 나온 오료는 여동생 기미가 시집간 고치현 아키군 와쇼쿠 마을(현 게이세이촌 와쇼쿠)의 센야 가문(스게노 가쿠베의 본가)에 잠시 의탁했다. 하지만 가쿠베가 해군성 관료가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그곳에도 오래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869년(메이지 2년) 중순 무렵 도사를 떠났다. 도사를 떠날 때, 오료는 료마에게 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둘만의 소중한 것이라며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문에 오료가 받은 료마의 편지는 단 한 통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38] 오료가 한때 머물렀던 게이세이촌에는 이를 기려 "오료와 기미 자매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도사를 떠난 오료는 교토로 가서 데라다야의 오토세(お登勢)에게 의지하며 료마의 묘소 근처에 작은 암자를 짓고 묘지기로 살았다. 하지만 교토 생활도 순탄치 않아[39]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서는 가쓰 가이슈, 사이고 다카모리 등 지인들에게 의탁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20엔을 지원해주며 정한론 문제로 하야한 뒤 고향에 돌아가면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39]
이후 오료는 전 사쓰마 번사였던 요시이 도모자네와 전 해원대사 하시모토 큐타유(橋本久太夫)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나 료마의 가계를 이은 사카모토 나오(坂本直, 다카마쓰 타로(高松太郎))는 찾아온 오료를 냉대했다.[40] 옛 해원대 동료들 사이에서도 오료의 평판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출세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오료를 돕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41] 훗날 궁내대신까지 오른 다나카 미쓰아키(전 육원대 대원)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치 즈이잔 등 도사 출신 순국지사들을 기리는 즈이잔회(瑞山会) 모임에서 오료의 처우가 논의되었을 때, 매형인 스게노 가쿠베조차 "품행이 좋지 않고, 충고해도 듣지 않으니 돌볼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42] 오료는 훗날 진심으로 친절했던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 가쓰 가이슈, 그리고 데라다야의 오토세뿐이었다고 술회했다.[43]
1875년, 오료는 상인 西村松兵衛|니시무라 마츠베일본어와 재혼하여 西村 ツル|니시무라 츠루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요절한 여동생의 아이를 양자로 들였다.[4]
말년의 오료는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으며[5], 첫 남편 료마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살다가 1906년 1월 15일,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오쓰(大津)의 시라기지(信楽寺)에 묻혔다. 오료가 사망한 지 8년 후인 1914년 8월, 다나카 미쓰아키, 가가와 게이조(香川敬三), 그리고 오료의 여동생 나카자와 미쓰에(中澤光枝) 등의 도움으로 남편 니시무라 마츠베와 그의 동료들이 오료의 묘비를 세웠다.
2. 4. 재혼과 만년
1867년 12월 10일 오미야 사건으로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된 후 오료는 과부가 되었다. 메이지 7년(1874년), 가쓰 가이슈 또는 간노 가쿠베에의 소개로 가나가와주쿠의 요정 다나카야에서 여급으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44],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이듬해인 메이지 8년(1875년), 상인 西村松兵衛|니시무라 마쓰베에일본어와 재혼하여 '''西村 ツル|니시무라 쓰루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요코스카에서 살았다.[4] 야스오카 슈호 등의 증언에 따르면, 니시무라 마쓰베에는 원래 옷감 상인의 아들로 데라다야 시절 오료와 아는 사이였으나 유신 동란으로 가세가 기울어 요코스카에서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간노 가쿠베의 주선으로 오료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46] 다나카야에서 일할 때 마쓰베에와 알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진위는 불명이다.[47][44] (스즈키 가호루의 『사료가 말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 오료』에서는 이 이야기의 출처가 된 전전의 신문 기사에 사실 관계 오류가 많아(오료보다 5세 연하인 마쓰베에를 "마쓰베에 노인"이라고 하거나, 조선업 실업가였다고 기록하는 등)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재혼 후 오료는 어머니 사다를 모셨고, 일찍 세상을 떠난 여동생 미쓰에의 아들 마쓰노스케를 양자로 삼았다.[4] (마쓰베에의 제적부 사본에는 "나라사키 데이(사다)의 손자 입적/양자 마쓰노스케/메이지 7년 8월 15일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6]) 하지만 메이지 24년(1891년)에 어머니 사다와 양자 마쓰노스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1883년(메이지 16년), 도요 신문에 연재된 사카자키 시란의 『한혈천리구』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동안 잊혔던 료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8] 그러나 이 책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나 창작된 부분이 많아 오료는 "오류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49] 이 때문에 야스오카 슈호나 가와다 셋잔 등이 오료를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글을 썼다. 야스오카는 1899년(메이지 32년)부터 잡지 『분코』에 『반혼향』 등을 발표했고, 가와다는 같은 해 도요 신문에 『천리구후일담』 등을 게재했다. 오료는 『천리구후일담』 말미에서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라고 회고했다. (원문: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또, 뭔가 재미있는 일도 있었을 텐데」[50])
1897년(메이지 30년) 야스오카 슈호가 방문했을 때 오료는 요코스카의 허름한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51] 만년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통받았으며[5], 술에 취하면 "나는 료마의 아내다"라며 남편 마쓰베에에게 푸념했다고 전해진다.[52] 설상가상으로 남편 마쓰베에가 오료의 여동생 미쓰에와 내연 관계가 되어 두 사람이 오료의 곁을 떠나 별거하게 되면서[53][54], 오료는 퇴역 군인 구도 가이타로의 도움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55]
러일 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메이지 37년), 쇼켄 황후의 꿈에 사카모토 료마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료마가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오료의 존재 또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56] 1906년(메이지 39년) 1월 오료가 위독해지자, 황후의 측근인 가가와 게이조가 문병 전보를 보내고 이노우에 요시카 대장이 구호 기금을 모금하는 등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같은 해 1월 15일, 오료는 66세의 나이로 가난 속에서 사망했다.[5]
오료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오쓰의 신라쿠지(信楽寺, 시라기지)에 묻혔다. 사후 8년 뒤인 1914년 8월, 다나카 미츠아키, 가가와 게이조, 여동생 나카자와 미쓰에, 남편 니시무라 마쓰베에 등의 도움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증 정사위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 료코의 묘(贈正四位坂本龍馬妻龍子之墓일본어)"라고 새겨져 있다.
3. 테라다야 사건
오료는 훗날 남편이 되는 사카모토 료마를 테라다야 사건 당시 암살 시도에서 구해낸 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 각지를 돌아다니던 료마는 친하게 지내던 후시미 테라다야의 여주인 오토세에게 오료를 맡겼고, 오료는 "'''오하루'''"라는 가명으로 오토세의 딸처럼 지내며 여관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대해 오료는 료마와 함께 걷다가 신선조와 마주쳐 료마가 당황하여 숨었던 일화[18]나, 기리노 도시아키에게 잠자리를 습격당할 뻔한 이야기[19] 등을 훗날 회고했다. 또한,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가 오료에게 호감을 느껴 빗이나 비녀를 사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0]
게이오 2년(1866년) 1월 22일, 료마의 중재로 삿초 동맹이 성립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1월 23일(양력 3월 9일) 밤, 료마는 자신의 호위역인 초슈번 무사 미요시 신조와 함께 테라다야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밤, 목욕 중이던 오료는 창밖에서 다수의 막부 관리들이 포진한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암살자 중 한 명이 욕실 창문을 통해 창을 찔러 넣었으나, 오료는 한 손으로 창을 잡고 소리쳐 맞섰다.[2] 위급함을 느낀 오료는 즉시 욕조에서 뛰쳐나와 홑옷 한 장만 걸친 채[21] 2층으로 달려가 료마와 미요시에게 위험을 알렸다.[2]
오료의 기지 덕분에 료마와 미요시는 기습을 피하고 격렬하게 응전하여 약간의 부상만 입고 탈출할 수 있었다.(테라다야 난) 오료는 료마 일행을 가옥 뒷문으로 도망치도록 도왔는데, 뒷문 앞에는 큰 돌을 올려놓은 절임통이 길을 막고 있었다. 오료는 급박한 상황에서 이 무거운 장애물들을 치워 길을 만들었다. 훗날 오료가 다시 확인했을 때, 그 통과 돌은 도저히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고 한다.[22]
료마는 이 사건의 전말을 게이오 2년 12월 4일 자 편지에서 형 곤페이에게 자세히 보고하며, 오료를 "이름은 료, 지금은 아내입니다"라고 처음으로 아내로 소개했다.[23] 또한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 오료가 있었기에 료마의 목숨은 구원받았습니다"라며 오료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했다.[24]
이 습격으로 료마가 부상을 입자, 치료를 위해 가고시마현의 여러 온천을 방문했는데, 이 여행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
4. 오료에 대한 평가
사카모토 료마 사후 오료의 삶은 순탄치 않았으며, 주변 인물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료마의 옛 동지들 사이에서는 오료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신 이후 출세한 해원대 출신 인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료를 적극적으로 돕는 이는 거의 없었다.[41]
다나카 미쓰아키(전 륙원대사, 후일 궁내대신)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치 즈이잔 등 토사 출신 순국지사들을 기리는 모임인 즈이잔회(瑞山会)에서 오료의 처우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조차, 오료의 매형인 칸노 카쿠베마저 "품행이 좋지 않고, 충고해도 듣지 않으니 돌볼 수 없다"며 지원을 거절했다고 한다.[42] 료마의 가문을 이은 사카모토 나오(다카마츠 타로) 역시 찾아온 오료를 냉담하게 대하며 외면했다.[40]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외면받았지만, 오료는 사이고 다카모리, 가쓰 가이슈, 그리고 교토 데라다야의 오토세만큼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친절했던 인물들이었다고 회고했다.[43]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문제로 실각하여 하야하던 어려운 시기에도 오료에게 20JPY을 지원하며 동정심을 표하기도 했다.[39]
5. 오료 관련 사진 논란
현재 남아있는 오료의 사진은 메이지 37년(1904년) 12월 15일자 "도쿄 26신문"에 실린 만년의 모습이 유일하다. 이 사진은 오료의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야스오카 슈호가 촬영한 것이다.[58] 야스오카는 메이지 33년(1900년) 잡지 '문고'에 실린 『속 반혼향』 마지막 부분에서 "현재의 오료 부인은 이번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으니, 이는 아마 천하의 절품일 것이다"[58]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료의 젊은 시절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된다.
그러나 쇼와 54년(1979년)에 한 사진 앨범(나카이 히로시 구장 사진 앨범)에서 발견된 서 있는 여성의 사진이 공개되었고[59], 2000년에는 『세피아 색의 초상 막부 말기 메이지 명함 사진 컬렉션』이라는 책에 실린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사진도 오료의 젊은 시절 사진으로 여겨졌다. 두 사진은 우치다 구이치 사진관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며, 언뜻 보기에도 같은 인물로 추정되었다.
새롭게 발견된 사진들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60][61] 헤이세이 20년(2008년),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의 의뢰로 경찰청 과학 경찰 연구소가 감정을 진행했다. 연구소는 앉아 있는 사진과 만년의 사진을 슈퍼임포즈 기법으로 비교하여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감정 방법은 이미 헤이세이 8년(1996년) "소니 사카모토 료마 연구회"에서 사용했던 방식과 동일했으며, 당시에도 이미지 처리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연구가 미야지 사에이치로에게 제공된 바 있다. 과학 경찰 연구소는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 배치가 유사하며 동일 인물의 젊은 시절과 만년 모습이라 해도 모순이 없다고 보아 "동일 인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으나, 이 감정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전 게이오기주쿠 대학 이공학부 준교수 다카하시 신이치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62][63][64][65] 과학 경찰 연구소의 감정서 원문은 "다른 인물이라고 판단할 만한 형태학적 차이점은 인정되지 않는다", "동일 인물로 판단하는 데 유효한 형태학적 유사 소견이 보인다"는 내용으로, 최종 결론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수준이었다.
결국 과학 경찰 연구소의 감정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66] 한때 '젊은 날의 오료 사진'으로 여겨졌던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은 오료가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이 사진 속 인물이 기도 다카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의 애인이었던 에라 가요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67]
헤이세이 25년(2013년), 일본 군장 연구회의 히라야마 신이 도쿄의 고서점에서 문제의 사진 속 여성과 동일 인물이 찍힌 다른 명함판 사진을 발견했다. 이 사진은 앉아 있는 사진과 같은 인물이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한쪽 손의 위치만 다른 사진이었다. 또한, 서 있는 모습의 사진 역시 다른 여러 여성과 함께 콜라주된 명함판 사진으로 발견되었는데, 사진 뒷면에 "도이 부인"이라고 적혀 있어, 이 여성이 훗날 도이 자작가의 첩이 된 인물임이 밝혀졌다. 이 외에도 동일 인물의 사진이 여러 점 더 발견되면서, 젊은 시절 오료의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들은 모두 다른 인물의 사진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68]
6. 대중문화 속 오료
오료는 남편인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일본의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소설,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무대 등 여러 장르에서 그녀의 삶과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특히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여러 차례 오료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으로 2010년 방영된 료마전에서는 배우 마키 요코가 오료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배우들이 오료를 연기했으며,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도 주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6. 1. 영화
- 해원대 (1939년) - 이치카와 하루요
- 유신의 곡 (1942년) - 이치카와 하루요
- 막말 (1970년) - 요시나가 사유리
- 막말 청춘 그래피티 Ronin 사카모토 료마 (1986년) - 하라다 미에코
- 료마를 벤 남자 (1987년) - 쿠니 료코
- 골프 새벽 전 (1987년) - 다카하시 케이코
- 료마의 아내와 그 남편과 애인 (2002년) - 스즈키 쿄카
6. 2. 드라마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1965년, 마이니치 방송, 연기: 야마다 히로코 山田浩子일본어)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1968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아사오카 루리코 浅丘ルリ子일본어)
- 가쓰 가이슈 勝海舟일본어 (1974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가와구치 아키 川口晶일본어)
- 화신 花神일본어 (1977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시마모토 스미 島本須美일본어)
- 나뭇잎 그늘의 이슬 葉蔭の露일본어 (1979년, 아사히 방송, 연기: 기시 케이코 岸恵子일본어)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1982년, TV 도쿄, 연기: 오타니 나오코 大谷直子일본어)
- 막말 청춘 그래피티 사카모토 료마 幕末青春グラフィティ 坂本竜馬일본어 (1982년, 니혼 TV, 연기: 나츠메 마사코 夏目雅子일본어)
- 그림자 군단·막말 편 影の軍団・幕末編일본어 (1985년, 간사이 TV, 연기: 아사노 유코 浅野ゆう子일본어)
-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일본어 (1989년, TBS, 연기: 나토리 유코 名取裕子일본어)
- 날아오르다 翔ぶが如く일본어 (1990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도구치 요리코 洞口依子일본어)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1997년, TBS, 연기: 사와구치 야스코 沢口靖子일본어)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2004년, TV 도쿄, 연기: 우치야마 리나 内山理名일본어)
- 신센구미! (2004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아소 쿠미코 麻生久美子일본어)
- 아츠히메 篤姫일본어 (2008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이치카와 미카코 市川実日子일본어)
- 료마전 龍馬伝일본어 (2010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마키 요코 真木よう子일본어)
- JIN-진- 완결편 JIN-仁-完結編일본어 (2011년, TBS, 연기: 토카제 마키코 東風万智子일본어)
- 시대극 법정 스페셜 피고인은 사카모토 료마 時代劇法廷スペシャル 被告人は坂本龍馬일본어 (2015년, 시대극 전문 채널, 연기: 오카모토 레이 岡本玲일본어)
- FNS27시간 텔레비전 일본의 역사 FNS27時間テレビ にほんのれきし일본어 (2017년, 후지 TV, 연기: 고리키 아야메 剛力彩芽일본어)
- 세고돈 西郷どん일본어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미즈카와 아사미 水川あさみ일본어)
6. 3. 게임
- 용과 같이 유신! (2015년, 세가, 연기: 사쿠라바 나나미)
- 용과 같이 유신! 극 (2023년, 세가, 목소리: 스기히라 마나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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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and romance at Teradaya, Ky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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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龍:異論あった若い写真「別人の根拠なし」
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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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き日の龍馬の妻と「同一人の可能性」科警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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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写真探偵 龍馬が愛したおりょう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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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最初の新婚旅行は小松幾多加? 定説「竜馬」に異論登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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