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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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자이후는 고대 일본에서 지방 행정 장관을 의미하는 '다자이'가 설치된 곳으로, 규슈의 다자이후를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민정과 군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중앙에서 좌천된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야요이 시대부터 현해탄 연안의 대륙과의 교류 창구 역할을 했으며, 덴지 천황 시대에 당나라 침공에 대비해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권한이 강화되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쇼니 씨가 규슈를 지배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가 장악했으며, 이후 다자이후 덴만구를 중심으로 몬젠마치가 번성했다. 1982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다자이후 유적과 다자이후 덴만구가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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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다자이후 (大宰府) |
로마자 표기 | Dazaifu |
위치 | 규슈 |
시대 | 8세기 ~ 12세기 |
개요 | |
유형 | 지방 행정 기관 |
역할 | 규슈 통치 외교 담당 군사 담당 |
역사 | |
설치 시기 | 7세기 후반 |
폐지 시기 | 12세기 |
주요 사건 | 하쿠스쿠에 전투 이후 설치 겐페이 전쟁 이후 쇠퇴 |
구조 | |
조직 | 다자이노소치 (장관) 다자이노다이니 (차관) 여러 관료 |
관리 지역 | 규슈 전체 |
특징 | |
중요성 | 일본의 서쪽 관문 외교,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 |
영향 | 규슈의 정치, 경제, 문화에 큰 영향 |
참고 자료 | |
관련 문서 | 다자이후 천만궁 다자이후시 |
2. 명칭
'다자이(大宰)'는 고대 일본에서 지방 행정상의 요지에 설치되어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지방 행정 장관을 의미한다.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시행 이후 규슈의 다자이노소치(大宰帥)만이 정부 기관으로 확립되면서, 일반적으로 '다자이후'는 규슈의 다자이후를 가리키게 되었다.[16] 역사적 용어로는 기관명인 '大宰府'를 사용하며,[17] 현존하는 도시명이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신사인 다자이후 천만궁에서는 '太宰府'를 사용한다.[17] '도후로 아토(都府楼跡)' 또는 '도토쿠후 고시(都督府古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17]
3. 역사
일본 열도의 역사에서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를 통틀어 현해탄(대한해협) 연안은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과 일본 열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기나이에 자리잡은 야마토 왕권은 한반도 및 중국 왕조와의 외교와 군사 행동을 위해 이곳을 주목했다. 중국의 역사서인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일대솔은 훗날 다자이후와 비슷한 체계로 운영되었다는 견해도 있다.[25]
스이코 천황 17년(609년, 536년 센카 천황 때의 기사에도 보인다)에 후쿠오카현 하카타에 미야케(官家)를 설치했다는 기록에서 '다자이(大宰)'라는 문자가 처음 등장하며, 이를 통해 다자이후의 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견수사로 파견된 오노노 이모코가 수나라의 답사(答使) 배세청과 함께 나쓰에 도착했을 때, 미야케는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쓰쿠시다자이는 규슈 전체를 통치하고 외교 사절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다자이후로 이어진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던 왜군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궤멸되자, 덴지 천황은 당나라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여 664년 쓰쿠시에 대규모 방죽인 미즈키(水城)와 오미즈키(小水城)를 쌓았다. 665년에는 다자이후 북쪽에 오노성(大野城), 남쪽에 기이성(基肄城) 등의 성채를 축조했다.
다이카 5년(649년) 기록에 '쓰쿠시다자이노소치(筑紫大宰帥)'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덴지 천황에서 덴무 천황 시기에는 '쓰쿠시 소쓰(筑紫率)', '쓰쿠시 소료(筑紫総領)' 등의 용어도 확인된다. 이는 중앙에서 왕족이나 유력 귀족이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덴지 천황 6년(667년) '쓰쿠시 도독부(筑紫都督府)'라 불리던 기관은 덴지 천황 10년(671년)에 '쓰쿠시 다자이후(筑紫大宰府)'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야마토국[43]에서 실각한 귀족들이 주로 다자이후로 좌천되는 사례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이고 천황 시대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다. 쇼무 천황 시대 다자이후로 전임되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쓰구는 740년 반란을 일으켰고, 745년 6월까지 다자이후가 폐지되기도 했다. 다자이후 폐지 기간 동안 기존 다자이후의 행정기능은 지쿠젠(筑前)에서, 군사기능은 743년 12월에 새로 설치한 진제이부(鎮西府)에서 맡았다.
헤이안 시대에 다자이후의 권한이 강화되어 806년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의 관위 등급이 종4위하로 격상되었고, 810년에는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가 처음 설치되었다. 941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공격을 받았으나, 다치바나노 기미요리가 다자이노곤노소치로써 맞섰다. 11세기 도이의 입구 때에는 다자이후 관인과 현지 무사들이 활약했다.
헤이안 후기에는 '다이후(大府)', '사이후(宰府)'[17]로 불렸다. 12세기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다자이노다이니를 맡아 송(宋)과의 무역을 진흥하면서, 기타큐슈의 정치적 중심지는 다자이후에서 하카타로 옮겨졌다.
가마쿠라 시대에 다자이후의 기능은 정지되었지만,[44] 무토 스케요리가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에 임명되어 쇼니 씨(少弐氏)로 칭하며 규슈를 지배했다. 다자이노곤노소치나 다자이노다이니 소유의 다자이후령(大宰府領)과 대외 교역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은 상당했다. 원구 3년 전인 1271년 다자이노곤노소치 지위를 놓고 고사가 천황의 측근이었던 요시다 쓰네토시(吉田経俊)가 이 지위를 맡게 되었다.
남보쿠초 시대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가네요시 친왕이 정서장군으로 파견되어 1359년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씨[46]를 격파하고 다자이후를 점령했다. 무로마치 막부에서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쇼니 씨는 다자이후를 회복하지만, 센고쿠 시대 오우치 씨가 다자이후를 장악하고, 오우치 요시타카는 다자이노쇼니(大宰大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센고쿠 시대 말기 다카하시 쇼운이 이와야 성(岩屋城)에서 자결한 뒤, 다자이후는 조용한 농촌으로 변모했고, 에도 시대 이후로 줄곧 그러했다. 다자이후 덴만구는 참배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인근 엔주오인(延寿王院)은 1754년 모모조노 천황으로부터 원호(院号)를 하사받았다. 막부 말기 산조 사네토미 등 다섯 구교들이 1867년 교토로 돌아오기까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47]
1889년 다자이후 촌과 미즈키 촌이 설치되었고, 1892년 다자이후 정이 되었다. 1955년 다자이후 정과 미즈키 정이 합병되었고, 1982년 시제(市制)가 시행되어 다자이후시가 되었다.[48]
3. 1. 고대
헤이조쿄(平城京) 및 나가오카쿄(長岡京) 유적에서 발굴된 목간에는 '''쓰쿠시(筑紫)대재''', '''대재부'''라는 표기가 확인되고 있으며, 역사적 용어로서는 기관명인 「대재부」라는 표기를 자주 쓴다. 현존하는 도시명이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신사(다자이후 텐만궁)에서는 중세 이후에 등장한 「태재부」라는 표기를 이용한다. 앞글자만 떼고 '재부'로 쓰기도 한다.[17]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나 고분 시대(古墳時代)를 통틀어 현해탄(玄界灘) 연안은 대륙(특히 한반도)과 열도를 잇는 창구로써 교통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기나이(畿内)에 터를 잡고 있던 야마토 왕권(ヤマト政権)은 한반도 및 중국 왕조와의 외교 및 군사 행동의 요충지로써 일찍이 이곳을 주목했다. 중국의 기록인 위지 왜인전(魏志倭人伝)에 등장하는 일대솔(一大率)이 훗날의 다자이후와 흡사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는 지적도 존재하고 있다.[25]
「다자이」(大宰)라는 문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17년(609년, 536년의 센카 천황(宣化天皇) 때의 기사에도 보인다)에 후쿠오카현(福岡県) 하카타(博多)에 미야케(官家)를 세웠다는 기사 등으로 이를 통해 볼 때 다자이후의 기원은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에는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되었던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수나라의 답사(答使) 배세청(裴世清)과 함께 나쓰(那津)에 도착했을 때 미야케는 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의 접대 등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쓰쿠시다자이(筑紫大宰)는 규슈 전체의 통치와 외교사절 접대 등을 맡으며 이후 다자이후로 이어진다.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 6년(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사이메이 천황에 이어 덴지 천황(天智天皇)도 재위 2년(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덴지 천황은 당나라가 왜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이듬해 8월에 쓰쿠시(筑紫)에 대규모 방죽을 겸한 방어시설인 미즈키(水城) ・ 오미즈키(小水城)를 쌓았고, 또한 그 이듬해인 665년에 다자이후 북쪽에 오노성(大野城), 남쪽에 기이성(基肄城) 등의 성채를 축조했다.
「쓰쿠시다자이노소치(筑紫大宰帥)」라는 이름도 다이카(大化) 5년(649년)의 기록에 등장하는데, 덴지 천황에서 덴무 천황(天武天皇)에 걸치는 시기에 「쓰쿠시 소쓰(筑紫率)」, 「쓰쿠시 소료(筑紫総領)」 등의 용어도 확인되며, 중앙에서 왕족이나 유력귀족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관으로써 다자이후는 덴지 천황 6년(667년)에 「쓰쿠시 도독부(筑紫都督府)」라 하던 것이 덴지 천황 10년(671년)에 처음 「쓰쿠시 다자이후(筑紫大宰府)」라는 기관명이 등장한다.
3. 2. 중세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시행으로 다른 지역의 다자이(大宰)는 폐지되고 규슈의 다자이노소치(大宰帥)만 정부 기관으로 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일반적으로 '다자이후'라고 하면 규슈의 다자이후를 의미하게 되었다. 다자이후는 사이카이도(西海道) 9개 구니(지쿠젠 · 지쿠고 · 부젠 · 분고 · 히젠 · 히고 · 사쓰마 · 휴가 · 오스미)와 3개 섬(이키·쓰시마·다네[38])에 대한 행정, 사법, 군사, 외교 권한을 가지며, 그 권한이 막강하여 '먼 조정(都)'[3]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야마토국(大和国)[43]에서 실각한 귀족들이 다자이후로 좌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시대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이다. 쇼무 천황(聖武天皇) 시대에 다자이후로 전임되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쓰구(藤原広嗣)는 740년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7] 이로 인해 745년까지 다자이후가 잠시 폐지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다자이후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어, 806년에는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의 관위 등급이 종4위하로 격상되었고, 810년에는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가 처음 설치되었다. 941년에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반란을 일으켜 다자이후를 공격했으나, 다자이노곤노소치였던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頼)가 맞섰다고 한다. 11세기 도이의 입구 때에는 다자이후 관인과 현지 무사들이 활약했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다이후(大府)', '사이후(宰府)'[17]로 불리기도 했다. 12세기에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를 맡아 송(宋)과의 무역을 진흥하면서, 기타큐슈(北九州)의 정치적 중심지는 다자이후에서 하카타(博多)로 옮겨갔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가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에 임명되어 쇼니 씨(少弐氏)로 칭하며 규슈를 지배했다. 다자이노곤노소치나 다자이노다이니 소유의 다자이후령(大宰府領)과 대외 교역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은 상당했다.
3. 3. 근세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 이 지역의 정치 중심지는 하카타로 옮겨졌다.[5] 남북조 시대 건무기의 혼란에 하카타·다자이후(대자부) 주변을 포함한 규슈 일원이 휘말렸다. 아시카가(足利) 측·탄다이(探題)와 히고(肥後)국의 남조 측 정서부(征西府)의 기쿠치 씨(菊池氏)와의 싸움이 되어, 중앙이나 아시카가 씨, 또 소니(少弐) 씨 자신의 내분 등으로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워졌지만, 소니 씨도 가세하여 다자이후를 둘러싸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우라조(浦城)의 싸움, 바리사하라(針摺原)의 싸움 등). 이윽고 무로마치 막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료슈(了俊))를 규슈 평정에 파견하자, 소니 후유스케(少弐冬資)가 모살되고, 남조 측이 연패하여 축출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이윽고 남북조 통일이 이루어지고, 오에이(応永) 2년(1395년)에 료슈가 탄다이 직을 해임되자, 일시적으로 소니 씨는 다자이후를 회복했지만,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大内氏)에게 쫓겨 소니 씨는 멸망한다. 덴몬 5년(1536년)에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다자이 다이니(大宰大弐)에 취임하지만, 오우치 씨 자신이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에 의해 멸망한다.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당시에는 안라쿠지 텐만구(安楽寺天満宮))의 본전이 재건되는 것은, 시대가 내려와 안토쿠토산 시대의 덴쇼(天正) 19년(1591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의해서이다.
막말(幕末)의 정변에서, 공가(公家) 5경이 안라쿠지 엔주오인(延寿王院)에 일시 체류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에 의해 교토로 돌아왔다.
4. 직원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 불렸으며, 종3위에 해당하는 다이나곤(大納言)·주나곤(中納言)급의 정부 고관이 겸임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친왕(親王)이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부임하지 않아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가 실무를 맡았다. 소치(帥) 및 곤노소치(権帥)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관직이 있었다.[41][42]
직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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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貳) | 다이니(大貳)·쇼니(少貳)가 있었다. |
죠(監) | 다이겐(大監)·쇼겐(少監)이 있었다. |
사칸(典) | 다이텐(大典)·쇼텐(少典)이 있었다. |
이 외에도 주신(主神), 대판사(大判事), 대령사(大令史), 대공(大工), 사생(史生), 의사(醫師), 산사(算師) 등 50여 명의 관인이 배치되어 실무를 맡았다.
5. 구조 및 유적
다자이후의 중심 치소였던 관청의 총면적은 약 25만 4000평방미터이다. 주요 건물로는 정청(政庁), 학교, 세금을 보관하는 장사(藏司)와 세사(稅司), 의료를 담당하는 약사(藥司), 장인들이 모인 장사(匠司)와 수리기장소(修理器仗所), 손님 접대를 담당하는 객관(客館), 군사를 담당하는 병마소(兵馬所), 주주사(主厨司), 선박을 담당하는 주선소(主船所), 치안을 담당하는 경고소(警固所), 다자이후 방어를 담당하는 오노(大野) 성 관리를 담당하는 대야성사(大野城司), 직물 염색을 담당하는 공상염물소(貢上染物所), 종이를 만드는 작지(作紙)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확인된 유적은 많지 않다.[18]
1921년 3월 3일, "다자이후 유적(大宰府跡)"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53년 3월 31일에는 특별 사적으로 승격되었다.[19] 이후 여러 차례 추가 지정이 이루어져, 2015년 기준 지정 면적은 320,235.91㎡이다. 정청(도후로) 지역 외에도 약 1km 떨어진 객관 유적(서일본 철도 후타카이치 차량기지 옛터)도 특별사적 다자이후 유적에 포함된다.[20]
1968년부터 학술 조사가 시작되었다. 정청 지구에서는 3시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 제1기: 7세기 후반 ~ 8세기 초. 다자이후 정청 창건 시기 (고단계와 신단계로 세분). 굴립주(掘立柱) 건물군.
- 제2기: 8세기 초 ~ 10세기 중엽. 조도인(朝堂院) 형식 창건 시기 (주춧돌과 기와를 사용한 건물군). 정청 규모는 동서 111.6m, 남북 188.4m, 회랑 규모는 동서 111.1m, 남북 113.8m.
- 제3기: 10세기 중엽 ~ 12세기. 조도인 형식 정비 확충기 (주춧돌과 기와를 사용한 건물군).
제1기에서 제2기로의 개축은 율령 제도에 의해 정부 기관으로 확립된 것에 대응한다. 제3기는 율령 제도가 이완되던 시기임에도 제2기보다 대규모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 정청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았던 재청관인층의 확대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다자이후에는 교토와 같은 조방제(条坊制)에 의한 도로 정비가 존재했다. 1937년 가가미야마 타케시가 처음으로 조방제의 존재를 상정했고,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 7세기 (정청 제1기): 조방 관련 유구 확인되지 않음.
- 8세기 (정청 제2기): 남북 중앙 대로(주작대로) 주변을 중심으로 조방 관련 유구 존재. 남북 방향 유구가 현저하고 동서 방향 유구는 적어, 정연한 조방 영역이 정비되지 않았을 가능성 존재.
- 10세기 (정청 제3기): 가가미야마의 추정안에 가까운 범위에 조방 유구 존재. 1개 구획은 면적 8반을 기준으로 추정. 11세기 후반 ~ 12세기 전반에 걸쳐 구획 도랑 등 유구 매몰, 조방제에 의한 도로 구획 황폐화.
이는 정치적 중심지 주변에 점차 도시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자이후 갓코인 유적(大宰府学校院跡)은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다자이후의 관인을 양성하는 기관과 관련된 유적으로, 1969년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덴오(天応) 원년(781년) 태정관에서 발부한 태정관부(太政官符)에 "부(府) 학교(学校)에 6국[52]의 학생(学生) ・ 의생(医生) ・ 산생(算生)[53]은 2백여 인이라"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6. 관련 인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다이고 천황 시대에 다자이후로 좌천되었으며,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에 학문의 신으로 모셔져 있다.[43] 후지와라노 히로쓰구(藤原広嗣)는 쇼무 천황 시대에 다자이후로 전임되었다가 74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43]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는 헤이안 시대 말기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를 맡아 송과의 무역을 진흥시켰다.[44] 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는 가마쿠라 시대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에 임명되어 쇼니 씨(少弐氏)의 시조가 되었다.[44]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는 막부 말기 존왕파 구교로, 다자이후의 엔주오인(延寿王院)에 머물렀다.[47]
7. 현대의 다자이후
1982년 시제 시행으로 다자이후 시(太宰府市)가 되었다.[9] 다자이후 유적은 일본의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다자이후 덴만구는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로, 매년 많은 참배객이 찾는다.
다자이후에서는 다자이후 시민 정청 축제(매년 10월) 등 다양한 축제가 개최된다. 부정기적으로 다마시비(薪能), 베토벤 교향곡 9번(第九) 연주회 등이 개최되기도 한다.[37]
교통은 다음과 같다.
교통 | 내용 |
---|---|
철도 | 서일본철도 덴진오무타선 토후로마에역에서 도보 11분(900m) |
버스 | |
승용차 |
8. 이설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説)에서는 다자이후가 고대 북규슈 왕조의 수도(倭京)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술지에 규슈왕조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은 거의 없으며, 일반적으로 규슈왕조설 및 관련 주장은 과학적인 학설로 인정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Heian Japan, Centers and Peripheries
UjB8yiiGDykC
Google Books
2007
[2]
웹사이트
Dazaifu
http://www.japan-gui[...]
2013-03-05
[3]
서적
Dazaifu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005
[4]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5]
웹사이트
Dazi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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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5
[6]
간행물
The Two Paths of Writing and Warring in Medieval Japan
http://www.eastasia.[...]
2011-06
[7]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8]
서적
[9]
서적
The Mongol Invasions of Japan 1274 and 1281
https://books.googl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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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https://books.google[...]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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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Voegelinian Readings of Modern Literature
https://books.googl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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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overnment Office Ruins
http://www.japan-gui[...]
2013-03-05
[13]
웹사이트
Kanzeonji
http://www.japan-gui[...]
2013-03-05
[14]
문서
8세기 대화정부 내부에서 만들어진 사서에 "대재부"라고 기록되어 있다.
[15]
문서
대재부에 대해 기록된 총 25개 문서 중 "대"만 사용한 예 8개, "태", "대"를 함께 사용한 예 4개, "태"만 사용한 예 13개. 8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문서에서 "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들.
[16]
문서
『속일본기』문무천황 4년(700년) 10월 조에 "직대일석상아손마로를 축자총령으로, 직광삼오노게노를 대이(차관)으로 삼고, 직광삼파다무고후문을 주방총령으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17]
웹사이트
『대재부』와 『태재부』의 차이에 대해 알려주세요.
https://www.city.daz[...]
[18]
문서
대재부 유적은 대노산 남쪽 기슭 일대 평야에 동서 24방, 남북 23조 규모이며, 북쪽은 대노성, 남쪽은 기이성, 평야부 출입구는 수성으로 막아 방어한 성곽 유적이다.
[19]
문서
1921년(다이쇼 10년) 3월 3일 정청 중심부만 사적 지정, 1953년(쇼와 28년) 3월 31일 특별사적 지정, 1970년(쇼와 45년) 9월 21일・1974년(쇼와 49년) 6월 25일 창사(쿠라노츠카사) 서쪽의 목간과 축지가 발견된 지역이 추가 지정.
[20]
웹사이트
客館跡の国史跡指定について
https://www.city.daz[...]
太宰府市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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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特別史跡大宰府跡保存活用計画
http://www.city.da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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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大宰府関連史跡に関する保存活用方針について
http://www.city.da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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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文化庁ホームページ政策分野
https://www.bunka.go[...]
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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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日本の「西の都」〜東アジアとの交流拠点〜
http://www.bunk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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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岡市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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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城跡-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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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州歴史資料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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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古代の交通・流通・情報 1 制度と実態
吉川弘文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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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古代の交通・流通・情報 1 制度と実態
吉川弘文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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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平安時代以降の大宰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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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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鎌倉時代の政治と経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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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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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続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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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太宰府の都市
太宰府市
199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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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大宰府条坊の成立
2009
[35]
웹사이트
「大宰府の条坊」新説紹介 九歴で史跡発掘50年特別展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20-10-20
[36]
논문
大宰府の街区割りと街区成立についての予察
[37]
웹사이트
「水城・大野城築造 竈門神社創建1350年 九州国立博物館 開館10周年 日本遺産認定記念 ももクロ男祭り2015 in 太宰府」の様子
http://natalie.mu/mu[...]
音楽ナタリー
2020-10-20
[38]
문서
[39]
서적
《엔기시키》민부(民部) 하(下)
[40]
서적
《속일본기》와도 2년(709년) 2월 무자조
[41]
문서
[42]
문서
[43]
문서
[44]
웹사이트
太宰府の歴史 3.平安時代以降の大宰府
http://www.city.daza[...]
2018-10-08
[45]
서적
《길속기》(吉続記) 분에이(文永) 8년 2월 2일조 기사.
[46]
문서
[47]
웹인용
太宰府の歴史 5. 近代の太宰府(일본어)
http://www.city.daza[...]
2019-05-10
[48]
웹인용
太宰府の歴史 5. 近代の太宰府(일본어)
http://www.city.daza[...]
2019-05-10
[49]
논문
太宰府の都市
太宰府市
[50]
뉴스
「大宰府の条坊」新説紹介 九歴で史跡発掘50年特別展(福岡県) (일본어)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18-05-03
[51]
문서
[5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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