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리 게이스케
1. 개요
오토리 게이스케는 1833년 효고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무사, 군인, 외교관, 교육자이다. 난학, 서양 의학 등을 배우고, 막부 시대에는 군사 기술과 서양 학문을 습득하여 군제 개혁에 참여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신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기술 관료와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청나라와 조선에서 공사로 활동하며 청일 전쟁 발발에 관여했다. 그는 군사 기술 도입, 교육,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통해 서양 학문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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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표기 | 大鳥 圭介 |
|---|---|
| 출생 | 1833년 4월 14일 (덴포 4년 2월 25일) |
| 출생지 | 하리마 국 호소네 촌 |
| 사망 | 1911년 6월 15일 |
| 사망지 | 가나가와 현 아시가라시모 군 고즈 촌 별장 '瀧の家(다키노야)' |
| 묘소 | 도쿄도 분쿄구 혼묘지 |
| 최종 계급 | 정2위 |
| 훈장 | 훈1등 |
| 작위 | 남작 |
| 출신 학교 | 시즈타니 학교 데키주쿠 에가와 주쿠 존 만지로 |
|---|
| 자녀 | 오토리 후지타로 |
|---|
| 주요 경력 | 원로원 의관 추밀고문관 청국 주차특명전권공사 조선국 주차특명전권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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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내각 | 구로다 내각 산조 잠정 내각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제1차 마쓰카타 내각 제2차 이토 내각 |
|---|---|
| 원로원 의관 임명일 | 1882년 10월 13일 |
| 원로원 의관 퇴임일 | 1889년 6월 3일 |
| 추밀고문관 임명일 | 1894년 11월 10일 |
| 추밀고문관 퇴임일 | 1911년 6월 15일 |
| 청 주차특명전권공사 임명일 | 1889년 |
| 청 주차특명전권공사 퇴임일 | 1894년 |
| 조선 주차특명전권공사 임명일 | 1893년 |
| 조선 주차특명전권공사 퇴임일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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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사학자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일본의 군사학자 -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해군병학교 수석 졸업 후 미국 유학을 통해 해양 전략을 연구하고 연합함대 참모로서 뤼순항 봉쇄 작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
막부육군 관련자 -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 근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실업가이자 사상가로,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 및 경영에 참여하며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했고 사회 및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다. -
막부육군 관련자 -
히지카타 도시조
히지카타 도시조는 막말과 메이지 유신 시대의 신센구미 부장으로, 엄격한 규율과 뛰어난 지휘력으로 조직을 다졌으며 보신 전쟁과 하코다테 전쟁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
에도 시대의 의사 -
가이바라 에키켄
가이바라 에키켄은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본초학자로서, 주자학을 강의하고 조선 통신사 대응 등 중책을 맡았으며, 《징비록》 등을 일본에 소개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60부 2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에도 시대의 의사 -
사토 노부히로
사토 노부히로는 에도 시대 후기의 실학자이자 의사로, 농업 중심 경제 정책과 교육 개혁을 주장하며 자주화선 등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국수주의적 성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2. 생애
오토리 게이스케는 1833년 4월 14일 하리마국 아코군 아카마쓰 촌(지금의 효고현 아코군 가미고리정)에서 태어나 1911년 식도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인, 관료, 교육자, 외교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어린 시절 시즈타니 학교에서 한학, 유학, 한의학 등을 수학하고, 오가타 고안의 데키주쿠에서 난학과 서양 의학을 배우는 등 폭넓은 학문을 접했다. 이후 에도로 건너가 서양식 병학과 사진술을 배우고, 존 만지로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859년 반쇼시라베쇼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1865년 막신(幕臣)이 되었다. 1867년 막부 육군 육성과 훈련을 맡았으며, 1868년 보병두(歩兵頭)로 진급하여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다. 에도 성 함락 이후 전수대를 이끌고 각지를 전전하며 신정부군에 저항했고,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후 투옥되었다.
1872년 사면 후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하여 홋카이도 개척사 5등직을 시작으로 기술 관료로서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했다. 공부성에서 관영 공장을 총괄하며 시멘트, 유리, 조선, 방적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고, 1877년 공부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886년 가쿠슈인 원장 겸 가조쿠 여학교 교장이 되어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1889년 주청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893년 조선 공사를 겸임하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가 청일 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 1894년 공사에서 해임된 후 귀국하여 추밀고문관이 되었고, 1900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양식 병법을 연구하고 프랑스식 병제를 막부에 도입했으며, 일본 최초로 금속활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사진술을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전수하고, 증기선 모형, 온도계, 기구를 제작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진화론을 해설하기도 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오토리의 용병술을 낮게 평가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의 용병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무라 마스지로는 오토리의 재능을 아껴 감형에 힘썼다고 한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1833년 4월 14일 하리마국 아코군 아카마쓰 촌 (지금의 효고현 아코군 가미고리정)에서 의사 고바야시 나오스케(小林直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2년 비젠국의 시즈타니 학교에서 한학, 유학, 한의학 등을 수학했다. 1849년 가미고리에 돌아와 난방의(蘭方醫) 나카지마 이안(中島意庵)의 조수로 일했다. 1852년 오사카로 가 오가타 고안의 데키주쿠에서 난학과 서양 의학을 배웠고, 1854년 에도로 가 사쓰마번에서 번역 등을 도왔다. 쓰보이주쿠의 주쿠토(塾頭)가 되어 군사학, 공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 시기에 서양식 병학과 사진술을 배웠고, 가쓰 가이슈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1857년 조부칸(에가와주쿠)에서 병학 교수로 초빙되었고, 존 만지로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1858년 핫토리 모토아키(服部元彰)의 소개로 아마가사키번에서 일하게 되었고, 도쿠시마번을 거쳐 1859년 반쇼시라베쇼에서 일하게 되었다.
2.2. 막부 시대
1859년 반쇼시라베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60년 합금제 금속 활판으로 《포료신편》을 번역 출판했다. 1861년 에가와 히데토시의 추천으로 막부 관리가 되었다. 1863년 가이세이쇼 교수로 일하면서 이원제 의회 채용을 막부에 건의했다. 1865년 육군소로 출사하여 막신(幕臣)이 되었다. 1867년 막부 육군의 육성과 훈련을 맡았다. 1868년 보병두(歩兵頭)로 진급,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에도 성 평정에서 오구리 다다마사, 미즈노 다다노리,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과 함께 교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에도 함락 후 전수대를 이끌고 탈출, 각지를 전전하며 신정부군과 교전했다. 하코다테 정권에서 육군 봉행(陸軍奉行)이 되었으나,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했다.
2.3. 메이지 시대
1872년 사면 후 신정부에 출사하여 홋카이도 개척사 5등직 등을 역임했다. 미국,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개척 기계 시찰과 공채 발행 교섭을 담당했다. 귀국 후 공부성(工部省) 4등직이 되어 기술 관료로서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했다. 관영 공장을 총괄하고, 시멘트, 유리, 조선, 방적 등 각종 사업을 추진했다. 1877년 공부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881년 공부 기감(工部技監)으로 승진하여 기술자로서 최고 직위에 올랐다. 1885년 원로원 의관에 취임했다. 1886년 가쿠슈인 원장 겸 가조쿠 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1889년 주청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었다. 1893년 조선 공사를 겸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가 청일 전쟁의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894년 공사에서 해임, 귀국 후 추밀고문관이 되었다. 1900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3. 업적 및 평가
오토리 게이스케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군사, 기술, 교육,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마쓰모토 요준과 교류하며 콜레라 치료법을 연구했고, 프랑스식 병제를 막부에 도입하여 전습대를 결성했다. 금속활자(오토리 활자)를 제작하고, 『축성전형』, 『포화신론』 등 서양 서적 번역서를 출판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사진술을 전수하고, 증기선 모형, 일본 최초의 온도계와 기구도 제작했다. 한시와 와카에도 능하여, 보신 전쟁 전후 기록으로 『남가기행』을 남겼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진화론』을 해설했다.
보신 전쟁 이후 구로다 기요타카 덕분에 사면되어 메이지 정부에 참여했다. 대장성, 공부성에서 근무하며 외채 모집, 제1회 내국관업박람회 개최 등에 기여했다. 공부대학교(도쿄대학 공학부 전신) 초대 교장, 학습원장, 화족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외교관으로서는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악화된 위안스카이와 교섭했다.
오토리는 안세이 대지진 때도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며 태연했고, 용병에는 능통했지만 실제 전투 지휘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러나 "장기"는 있어 연패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육각성 전투 패배 후 "지금은 항복으로 멋을 부려보자"라며 항복을 결정했다.
혼다 토시사부로에 따르면, 오토리는 하코다테 항복 당시 "항복했다고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오토리를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평가했지만, 자유당 소속 이타가키와 오토리는 대립 관계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토리의 용병을 두려워했고, 오무라 마스지로는 그의 재능을 아껴 감형에 노력했다.
효고현 아카호군 가미고리정에 오토리 동상이 있고, 생가 터는 자료관이다. 가미고리정 이시토 지역은 매년 5월 4일 "케이스케 축제"를 개최하고, 2015년 제1회 오토리 케이스케 검정이 실시되었다. 묘는 아오야마 령원에서 입체 매장 시설로 이전되었다.
오토리 게이스케의 훈장 및 작위는 다음과 같다.
3.1. 군사 및 기술 분야
오토리 게이스케는 서양식 병학과 군사 기술 도입에 앞장선 인물이다. 도쿠가와 막부군에 입대하여 보병 전술의 고급 강사가 되었고, 요코하마에서 쥘 브뤼네(Jules Brunet)에게 프랑스 보병 전술을 배우기도 했다. 이후, 막부 군제 개혁에 참여하여 1867~1868년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조언을 바탕으로 정예 부대인 덴슈타이(Denshūtai)를 창설하여 훈련시켰다. 덴슈타이는 출신 배경이 아닌 능력에 따라 선발된 800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오토리는 금속 활자 인쇄술을 일본에 처음으로 도입하고, 1860년대에 『축성전형』, 『포화신론』 등 서양 서적을 번역 출판했다.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Artillerie네덜란드어 번역, 전4권
*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versterkings-kunst, ten dienst van onderofficieren네덜란드어 (하급 사관을 위한 축성술) 번역, 전5권(전편 2책, 후편 3책).
* 野戦要務일본어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에는 공부성에서 근무하며 댐 건설 기술 등 토목 기술 도입에 기여했고, 『연제축법신안』을 번역하여 민간에 수리·댐 기술을 소개했다.
3.2. 교육 및 외교 분야
메이지 정부에 들어가 1886년 가쿠슈인 귀족학교 교장이 되었다. 1889년에는 청나라와 조선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제1차 청일 전쟁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이지 19년(1886년) 4월 10일, 학습원 원장 겸 화족여학교 교장을 맡는 등 기술·교육 관련 직책을 역임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메이지 22년(1889년) 6월 3일 주청국 특명 전권 공사를 맡아 11월에 부임했다. 메이지 26년(1893년) 7월에는 조선 공사를 겸임하고, 이듬해 6월 조선에 부임했다.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출병하자 일본도 자국민 보호와 천진조약을 명분으로 출병했다. 사태가 진정되어도 일본은 철병하지 않고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일본은 근대화라는 구실로 조선의 개혁을 주장하며 흥선대원군을 신정부 수반으로 추대했다. 일본군이 조선 왕궁 근처를 행군하던 중 조선 반일파로부터 발포를 받았다는 이유로 왕궁을 공격, 난입하여 사실상 점령했다. 일본군은 고종을 잡아 대원군을 신정부 수반으로 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대원군에게서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키라는 문서를 얻어 청나라 군대와 교전할 명분을 얻어 개전하게 된다. 이 때문에 경복궁 점거가 청일전쟁 발발의 계기로 여겨진다. 일본군이 발포를 받았다는 이유로 한 왕궁 공격은 실제로는 일본 측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음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3.3. 기타
오토리 게이스케는 제1회 내국관업박람회 심사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공업신보》, 《언제축법신안》 등을 저술, 번역하여 기술 보급에 힘썼다. 양서를 참고하여 은판과 렌즈를 만들어 사진을 소개했고,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사진술을 전수했다. 증기선 모형을 설계·제작했으며, 일본 최초의 온도계와 기구도 제작했다. 한시와 와카에도 능통하여 보신전쟁 전후의 기록으로 《남가기행》을 남겼고, 영국을 시찰했을 때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진화론》을 해설했다.
4. 저술 및 번역
오토리 게이스케는 에도 시대에 마쓰모토 요준과 교류하며 콜레라 치료법을 연구했고, 양식 병법을 연구하여 프랑스식 병제를 막부에 도입하고 전습대를 결성했다. 금속활자 기술을 일본에 도입하여 ‘오토리 활자’를 제작하고, 『축성전형』, 『포과신론』 등의 번역서를 출판했다. 『축성전형』은 호평을 받아 장주에서 참고하여 축성하기도 했다. 또한 양서를 참고하여 은판과 렌즈를 만들어 사진을 소개하고,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사진술을 전수했다. 증기선 모형을 설계·제작하고, 일본 최초의 온도계와 기구를 제작했다. 한편, 한시와 와카에도 능통하여 보신 전쟁 전후의 기록인 『남가기행』을 남겼으며, 영국 시찰 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진화론』을 해설했다.
1860년대에는 주무관과 육군소에서 인쇄에 사용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기술서를 참고하여 명조체 해서체 활자를 주조하여 『축성전형』, 『포과신론』 등 수십 종을 출판했다. 활자는 보신 전쟁 때 행방불명되었고, 극소수 인쇄된 책만이 남아있다.
선진 기술 보급에 힘쓰며 막말에 『야전요무』와 요새 건축 안내서인 『축성전형』을 번역했다. 막말 막부군과의 싸움 기록으로 고료카쿠 함락부터 센주로 호송될 때까지의 일기를 썼고, 만년에는 과거 회상 기록을 남겼다.
* 『포과신론』(번역): 전4권. 네덜란드어 원저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Artillerie" 번역.
* 『축성전형』(번역): 전5권(전편 2책, 후편 3책).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versterkings-kunst, ten dienst van onderofficieren" (하급 사관을 위한 축성술) 번역.
* 『야전요무』(번역)
* 『유락일기』: 고료카쿠 함락부터 센주에 도착할 때까지의 호송 기록.
* 『공업신보서언』
* 『언제축법신안』(번역): 댐·치수에 관한 일반서
* 『조선기문』(교열)
* 『장성유기』: 중국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