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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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한흠은 1938년 거제도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빈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2003년까지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2004년부터 원로목사로 활동했으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제자훈련을 강조하며 《평신도를 깨운다》를 저술했고, CAL세미나를 개최하여 제자훈련을 확산시켰다. 2009년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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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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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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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회장 형태 | 대표회장 |
호 | 은보 (恩步) |
교회 정보 | |
당교회 | 사랑의교회 |
노회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동서울노회 |
직책 |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
후임자 | 오정현 |
목회 정보 | |
목사 안수 | 총회 신학교(現 총신대학교) |
사목 표어 | '한없이 흠이 많은 옥' |
인물 정보 | |
출생 이름 | 옥한흠 |
출생일 | 1938년 12월 5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군(현 거제시) |
사망일 | 2010년 9월 2일(73세) |
사망 장소 | 서울특별시 |
종교 | 장로교(합동) |
거주지 | 서울특별시 |
부모 | 아버지 옥약실, 어머니 이희순 |
배우자 | 김영순 사모 |
자녀 | 아들 옥성호, 옥승훈, 옥성수 |
경력 | |
전직 | 前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1978년 ~ 2003년) |
학력 | |
학력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명예박사 |
2. 생애와 사역
옥한흠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및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2003년까지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2004년부터는 원로목사로 섬겼다. 1998년부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았다.
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당시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사과했다[1]。 2009년 1월 25일, 사랑의교회는 변재창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2]。 2010년 9월 2일,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
옥한흠은 1938년 12월 5일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아버지 옥약실과 어머니 이희순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옥주래부터 시작하여 4대째 개신교를 믿는 가정이었다. 옥한흠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일운국민학교 1학년 시절에 잠시 일본에 갔다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사경회는 모두 쫓아다녔고, 다른 집사들의 모습을 흉내내며 기도를 하였다.[6] 일운국민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7] 이후 거제 지세포 대광중학교 3학년인 1954년 1월 5일부터 13일까지 부산 남교회 학생신앙운동 제8회 수련회에서 본격적으로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거듭난다.[8][9][10]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경남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이후 고려신학교에 재학 중인 작은아버지 옥치상을 따라 고신 재단에서 운영하는 평화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집으로부터 재정 지원이 중단되자 지세포로 돌아오고, 1956년에 평화고등학교 이력을 인정받아 장승포 거제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다.[11]
옥한흠은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하지만,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으로 판정되어 시험도 보기 전에 자격을 박탈당한다. 재수를 준비하며, 교인들의 부탁으로 증조부 옥진현이 설립한 삼거리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지도한다.[12] 그러나 재수도 실패하자 옥한흠은 교회의 마룻바닥에서 "요나와 같은 심정"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고신의 부산 칼빈신학교 종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7][13]
2. 2. 청소년기와 신학 입문
성균관대학교 문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캘빈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와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3. 대학 시절과 군 복무
옥한흠은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대학 입시를 두 달 앞둔 1961년 12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후반기 교육 병참학교에서 수석을 하고 6관구사령부 보급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목사의 아들을 직속상관으로 배치받아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입시 준비를 하여 3개월간 예비고사를 준비, 1962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야간 대학에 입학했다.[15] 그러나 군 복무 중 발병한 폐결핵이 재발했고,[16] 2년간 투병 끝에 완치되었다. 군 시절 진영읍에서 만나 교제하던 김영순과 1965년 4월 8일, 28세의 나이에 결혼했다.1968년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아내와 5년간 별거 생활을 했다. 총신 신대원 재학 시절에는 총신대학교 뒷산에 작은 토굴을 만들어 양초를 켜놓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간첩으로 오해를 사기도 해 결국 토굴에서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7]
2. 4. 신학대학원과 목회 시작
1968년 6월,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90여 명이었던 주일학교를 450명까지 성장시켰으나 장로와의 갈등으로 교회를 나오게 된다.[7] 옥한흠은 이 사건을 통해 준비된 제직들이 없다면 교회가 발전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17] 1970년 4월, 총신대에서 소선지서를 강의하던 성도교회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주일학교 사역자로 부임하였고, 6개월 후에는 대학부를 담당한다.[7]
옥한흠 목사는 성도교회에서 전통목회를 추구하던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 1970년대 초 당시 영락교회나 새문안교회 등 대형교회들까지도 대학부가 상당히 쇠퇴한 상황이었다. 성도교회 역시 옥한흠의 부임 당시 고려대학교 3학년이던 대학부 회장 한 명만 출석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졸업학년이 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 방선기만 출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대학생들이 교회를 떠나 선교단체로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차, 방선기가 먼저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들어가 훈련 및 교육과정을 알아봐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옥한흠은 이를 부탁한다. 이후 옥한흠은 방선기의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의 경험을 듣고 선교단체에는 있고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 즉 복음, 훈련, 비전에 주목하게 된다.[18] 그는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방선기에게 도움을 받아 다른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2년 동안 12명이었던 대학부를 350명까지 확장시킨다.[13]
옥한흠은 3M (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주문했다. 대학부 학생들은 방선기(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박성수, 한정국, 박성남, 한인권, 이인호, 황태연, 정세열, 한병혁, 김강태(포항공과대학교), 정문렬(서강대), 김신, 손인문, 김복만, 안명준(평택대), 고문규(건양대), 장경(단국대), 홍원표(한밭대), 권영식(동국대), 안덕수, 백상조, 권상철 등 수백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곳에서 박사와 교수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옥한흠은 1972년 2월 35세의 나이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수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다.[7]
2. 5. 유학과 사랑의교회 설립
1975년, 옥한흠은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체계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미국 미시간주의 칼빈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신학 부문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떠날 수는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을 진영의 처가로 보내고, 그랜드래피즈 한인교회에서 잠시 목회하였다.[19]
1977년 5월, 칼빈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 중 한스 큉의 《교회론''The Church''》을 접하고 제자훈련의 중요성과 평신도 대상 제자훈련의 필요성에 대한 신학적 답을 얻었다. 그는 이 경험을 "신학생으로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20] 이후 귀국을 결심하고, 귀국 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네비게이토 선교회 본부를 방문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교회 개척을 고민하던 중, 은평교회 담임목사 배기주로부터 강남에 은평교회 지부를 개척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78년 6월 귀국 후, 7월 23일 서초동의 한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강남은평교회는 1981년 9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7] 옥한흠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말씀에 담긴 십자가의 의미를 좋아하여 ‘사랑’에 소유격 ‘의’를 붙여 자신만의 목회철학을 담아냈다.[21][22]
2. 6. 사랑의교회 목회와 제자훈련 확산
사랑의교회에서 시작한 첫 제자반은 모두 중도 포기하여 실패했지만, 이후 여자 제자반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9년에는 남자 제자반도 시작되었다. 옥한흠 목사는 구역장을 순장, 구역예배를 다락방으로 바꾸고,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마친 사람들을 순장으로 세웠다. 또한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복음을 체험하도록 주기도문송, 세례자 간증 등을 활용했다. 1982년 10월에는 '대각성전도집회'를 열어 기존 신자와 새신자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순장들의 전도로 교인이 500여 명으로 늘자, 1985년 1월 새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예배실은 소음을 줄이기 위해 지하에 배치되었고, 건축비 절약을 위해 불량 적벽돌로 지어졌지만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받았다. 강대상 앞에는 십자가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붙였다.
1984년 6월, 옥한흠 목사는 5년간의 제자훈련 경험을 담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벵골어, 에스토니아어 등 8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책 발간 후 제자훈련 세미나(CAL세미나) 요청을 받아 1986년 3월, 국제제자훈련원의 전신인 세미나실을 설립하고 사랑의교회에서 제1기 CAL세미나를 개최했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반, 사역반, 순장반, 교역자 훈련, 주일설교, CAL세미나 인도 등 과중한 일정으로 탈진하여 1989년에 1년간 안식년을 가졌다. 안식년 동안 로마서 강해설교를 계획하고 사진 촬영을 취미로 시작했으며, 이후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2. 7. 교단 활동과 사회 참여
옥한흠은 1979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으로 교단이 분열될 때 개혁 교단에 참여했다. 그는 남서울교회에서 설립 예배를 드린 합동신학교(이후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쳤다. 초기에는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학생들로부터 신학적 견해 차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그의 제자화 신학이 인정을 받았다. 이후 옥한흠은 분열된 합동 교단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했고, 1985년에는 합신 교단으로 이동했다.1989년부터 16년간 한국오엠국제선교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청년들을 훈련하고 선교사로 파송하는 데 힘썼다. 1992년 9월에는 소망교회와 함께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설립했다. 1996년 3월에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를 창립하여 합동 교단 내의 금권 선거를 없애고 총회 제비뽑기 선거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98년 11월에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창립하여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2002년에는 총회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에는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설립이사장이 되었다.
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당시에는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사과했다[1]。 2009년 1월 25일, 사랑의교회는 변재창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2]。
2. 8. 은퇴와 사망
옥한흠은 2006년 청년 시절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한 흉터가 폐암으로 발전되어 강남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23]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2010년 9월 2일 아침, 항암 치료 중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73세에 별세하였다.[24]3. 신학 및 사회관
옥한흠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지 않았고,[25] 동성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반대했다.[26] 여성 안수를 검토할 때는 "폐쇄된 전통"을 고수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27][28]
한국 개신교계가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목사 자격이 너무나 쉽게 주어지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25] 또한 평신도들에게는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가 되지 말 것을 촉구했다.[29]
기복신앙에는 반대했지만, 가난과 파괴로 힘들어하던 전후 한국에 개신교가 뿌리내리는 데 기복신앙이 큰 기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조용기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3. 1.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지 않았고,[25] 동성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반대했다.[26] 여성 안수를 검토할 때는 "폐쇄된 전통"을 고수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27][28]옥한흠은 한국 개신교계가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목사 자격이 너무나 쉽게 주어지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으며,[25] 평신도들에게는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가 되지 말 것을 촉구했다.[29]
기복신앙에는 반대했지만, 가난과 파괴로 힘들어하던 전후 한국에 개신교가 뿌리내리는 데 기복신앙이 큰 기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조용기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3. 2. 기복 신앙에 대한 입장
옥한흠은 기복신앙에 반대했지만, 가난과 파괴로 인해 힘들어하던 전후 한국에 개신교가 뿌리내리는 데 기복신앙이 큰 기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조용기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4. 저서
제목 | 출판사 | 출판연도 |
---|---|---|
《광인 : 옥한흠을 말하다》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10 |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9 |
《제자훈련 열정 40년》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9 |
《안아주심》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7 |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 국제제자훈련원 | 2004 |
《길 :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입문》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3 |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개정판)》 |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2 |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 국제제자훈련원 | 2001 |
《평신도를 깨운다》 | 국제제자훈련원 | 1984 |
《미니스트리 훈련》 | 국제 제자 훈련원 | |
《신도를 깨우자》 | 소목자출판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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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Japanese JoongAngIlbo 2007.09.07 16:48:26
https://japanese.joi[...]
Japanese JoongAngIlbo
2007-09-07
[2]
뉴스
クリスチャン新聞ダイジェスト=0902150204
http://jpnews.org/pc[...]
JP NEWS
[3]
뉴스
e-NEWS사랑
http://news.sarang.o[...]
[4]
웹인용
한국 개신교 ‘큰 별’ 지다...옥한흠 목사 소천
http://biz.heraldcor[...]
2021-02-01
[5]
뉴스
<"큰별 졌다" 옥한흠 목사 애도물결>(종합)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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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무엇을 기도할까
https://www.worldcat[...]
[7]
웹인용
옥한흠 목사의 글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https://www.christia[...]
2020-11-0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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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 ‘광인 목회’로 평신도 일으켜 교회를 개혁하다"
http://news.kmib.co.[...]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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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의 목회와 교회 갱신운동
고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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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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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옥한흠(1938~1970)
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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競爭率 41對 1 (成大二部合格者)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6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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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옥한흠(1938~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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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개강 수련회 설교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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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제자훈련 열정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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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제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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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광인: 옥한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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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제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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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의 거장 옥한흠목사 폐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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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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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사역> 한없이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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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의 산상수훈 강해 제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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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국제제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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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 "여성안수 문제 진지하게 연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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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 진지한 검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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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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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대회 옥한흠 목사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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