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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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병 전쟁은 기원전 241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와 용병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 주둔했던 용병들에게 임금 체불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반란으로 번져 카르타고의 존립을 위협했다. 폴리비우스의 기록을 통해 전쟁의 전개 과정을 알 수 있으며, 하밀카르 바르카의 활약과 반란군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카르타고의 국내 정치와 군사적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점령으로 인해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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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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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용병 전쟁 |
다른 명칭 | (무자비한 전쟁) |
원인 | 봉급 관련 카르타고와 군인 간의 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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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241년–238년 또는 237년 |
장소 | 현재의 튀니지에 위치한 카르타고 영토 |
결과 | 카르타고의 아프리카에서의 승리 |
로마의 개입 | 로마 공화국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합병 |
교전 세력 | |
교전 1 | 카르타고 |
교전 2 | 카르타고의 반란군 반란을 일으킨 아프리카 도시 |
지휘관 및 지도자 | |
카르타고 | 한노 2세 대왕 하밀카르 바르카 |
반란군 | |
전력 | |
카르타고 | 알 수 없음 |
반란군 | 9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카르타고 | 알 수 없음 |
반란군 | 높음 |
2. 주요 출처
포에니 전쟁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한 주요 자료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기원전 200년경 ~ 기원전 118년경)의 저서 《역사》이다.[2][3] 폴리비우스는 기원전 167년에 인질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그의 저서에는 현재는 분실된 군사 전술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오늘날 그는 기원전 146년경, 즉 이 전쟁 이후 약 1세기 후에 쓰여진 《역사》로 알려져 있다.[2][5] 폴리비우스의 저작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관점에서 광범위하게 객관적이고 대체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6][7]
카르타고의 기록은 기원전 146년에 수도와 함께 파괴되었으므로, 용병 전쟁에 대한 폴리비우스의 기록은 현재는 분실된 여러 그리스어 및 라틴어 자료를 기반으로 한다.[8] 폴리비우스는 분석적인 역사가였으며 가능한 모든 경우에 그가 쓴 사건의 참가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9][10] 그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제3차 포에니 전쟁 중에 로마 군대를 이끌고 용병 전쟁의 활동이 있었던 많은 장소를 통해 작전을 수행할 때 그의 참모였다.[11] 《역사》를 구성하는 40권 중 첫 번째 책의 일부만이 이 전쟁을 다룬다.[12]
폴리비우스의 기록의 정확성은 지난 150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대의 합의는 그것을 대체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현대 자료에서 전쟁의 세부 사항은 거의 전적으로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12][13][14] 현대 역사가 앤드류 커리는 "폴리비우스는 꽤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반면,[15] 크레이그 챔피언은 그를 "매우 박식하고, 근면하며, 통찰력 있는 역사가"라고 묘사한다.[16] 이 전쟁에 대한 다른, 후대의 역사들이 존재하지만 단편적이거나 요약된 형태이다.[3][17] 현대 역사가들은 또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후대 역사 기록도 고려하지만, 고전학자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폴리비우스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기록과도 상이할 때 중점을 둔다"고 했다.[10] 다른 자료에는 비문, 동전 및 고고학적 증거가 포함된다.[19]
3. 배경
용병 전쟁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는 폴리비우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폴리비우스는 기원전 167년에 인질로 로마에 파견된 고대 그리스인으로, 그의 저서 ''역사''는 기원전 146년경, 즉 이 전쟁 이후 약 1세기 후에 쓰여졌다. 폴리비우스의 저서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관점에서 대체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카르타고의 기록은 기원전 146년에 수도 카르타고와 함께 파괴되었으므로, 용병 전쟁에 대한 폴리비우스의 기록은 현재는 분실된 여러 그리스어 및 라틴어 자료를 기반으로 한다. 폴리비우스는 분석적인 역사가였으며 가능한 모든 경우에 그가 쓴 사건의 참가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제3차 포에니 전쟁 중에 로마 군대를 이끌고 용병 전쟁의 활동이 있었던 많은 장소를 통해 작전을 수행할 때 그의 참모였다. ''역사''를 구성하는 40권 중 첫 번째 책의 일부만이 이 전쟁을 다룬다. 폴리비우스의 기록의 정확성은 지난 150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대의 합의는 대체로 그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현대 자료에서 전쟁의 세부 사항은 거의 전적으로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현대 역사가 앤드류 커리는 "폴리비우스는 꽤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크레이그 챔피언은 그를 "매우 박식하고, 근면하며, 통찰력 있는 역사가"라고 묘사한다. 이 전쟁에 대한 다른, 후대의 역사들이 존재하지만 단편적이거나 요약된 형태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도 참고하지만, 고전학자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폴리비우스의 기록은 다른 어떤 기록과 다르다면 대개 선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자료에는 비문, 동전 및 고고학적 증거가 포함된다.
스페인과 골 출신 병사들은 숙련된 보병을 제공했다. 이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맹렬하게 돌격했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무너지는 경향이 있었다.[32][34] 리비아 밀집 보병과 시민 민병대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33]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 투석병 2,000명이 카르타고 군에 합류했다.[32][35] 시칠리아인과 이탈리아인도 전쟁 중에 카르타고 군에 합류했다.[36] 카르타고는 전쟁 코끼리를 자주 사용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토착 아프리카 숲 코끼리가 서식하고 있었다.[34] 로마 자료는 이러한 외국인 병사들을 경멸적으로 "용병"이라고 불렀지만, 골즈워시는 이를 "심각한 단순화"라고 묘사한다.[37] 이들은 동맹 도시나 왕국에서 공식적인 협정의 일환으로 파견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카르타고 군에 복무했다.[37]
3. 1.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과 카르타고의 상황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3세기 서지중해의 주요 강국이었던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23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고대 시대의 가장 길고 지속적인 분쟁이자 가장 큰 해상전이었다. 양측 모두 막대한 물자와 인적 자원을 잃은 후 카르타고는 패배했다.[22][23] 카르타고 원로원은 시칠리아 주둔군 사령관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평화 조약을 협상하도록 명령했고, 그는 부관 기스코에게 위임했다.[22][23][24] 루타티우스 조약이 체결되어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종식되었다. 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하고, 전쟁 중 포로로 잡힌 모든 사람을 넘겨주었으며, 3,200 탤런트의 배상금을 지불했다.[25] 이 중 1,000 탤런트는 즉시 지불해야 했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지불해야 했다.[26]
로마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카르타고 장군 하노는 카르타고가 통제하는 아프리카 지역을 크게 확장하는 일련의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수도에서 남서쪽으로 300km 떨어진 테베스테 (현대 테베사, 알제리)까지 통제 범위를 넓혔다.[27][28] 하노는 로마와의 전쟁과 그의 원정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엄격하게 세금을 징수했다.[28] 농업 생산량의 절반이 전쟁세로 징수되었고, 이전 도시들에서 징수되던 조공은 두 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강제 징수는 가혹하게 시행되어 많은 지역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야기했다.[29][30]
카르타고 군대는 거의 항상 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은 카르타고 도시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 군대에 복무했다. 이 외국인들의 대다수는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31] 리비아인들은 큰 방패, 투구, 짧은 칼, 긴 찌르기 창으로 무장한 밀집 대형 보병과 창을 든 충격 기병을 제공했다.[32][33] 누미디아인들은 멀리서 투창을 던지고 근접전을 피하는 경무장 기병과 창으로 무장한 경보병 산병을 제공했다.[32][33]
3. 2. 카르타고 군대의 구성과 용병
카르타고 군대는 대부분 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 시민은 도시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을 때만 군대에 복무했다. 이들 외국인 부대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31]
리비아인은 크고 둥근 방패, 투구, 짧은 칼, 그리고 긴 찌르기용 창으로 무장한 밀집 대형 보병과, 창으로 무장한 충격 기병을 제공했다. 이들은 훈련과 지구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누미디아인은 멀리서 투창을 던져 근접전을 피하는 경무장 기병과, 창으로 무장한 경보병 산병을 제공했다.[32][33]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출신 병사들은 숙련된 보병을 제공했다. 이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맹렬하게 돌격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무너지는 경향이 있었다.[32][34] 밀집 대형으로 싸우는 리비아 보병과 시민 민병대는 팔랑크스 대형을 사용했다.[33] 발레아레스 제도에서는 2,000명의 투석병이 모집되었다.[32][35]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시칠리아인과 이탈리아인도 카르타고 군에 합류했다.[36]
카르타고는 종종 전쟁 코끼리를 사용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토착 아프리카 숲 코끼리가 서식하고 있었다.[34] 로마 자료에서는 이러한 외국인 병사들을 경멸적으로 "용병"이라고 불렀지만, 골즈워시는 이를 "심각한 단순화"라고 평가한다.[37]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카르타고 군에 복무했는데, 예를 들어 일부는 공식적인 협정의 일환으로 카르타고에 파견된 동맹 도시 또는 왕국의 정규군이었다.[37]
4. 용병들의 반란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평화 협정을 맺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항복은 불필요하다고 확신한 하밀카르는 분노하며 시칠리아를 떠났다. 2만 명의 카르타고 군을 시칠리아에서 철수시키는 임무는 기스코에게 맡겨졌다. 기스코는 병사들이 뭉치는 것을 원치 않아, 군대를 출신 지역별로 소규모 분견대로 나누어 카르타고로 보냈다. 그들은 수년치 체불 임금을 즉시 지급받고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38]
카르타고 당국은 즉시 전액을 지불하는 대신, 모든 병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 더 낮은 금액으로 합의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각 부대는 카르타고 시내에 숙소를 배정받았고, 8년에 걸친 포위 공격 이후 문명의 이점을 누렸다. 이러한 "소란스러운 방종"은 도시 당국을 불안하게 하여, 2만 명이 모두 도착하기 전에 체불 임금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고 180km 떨어진 시카 베네리아(현재의 엘 케프)로 이주시켰다.[39]
이후 용병들의 불만과 반란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반란의 발단"과 "반란의 확산" 하위 섹션에 상세히 나와있다.
4. 1. 반란의 발단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하밀카르는 평화 협상에는 동의했지만 항복은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며 분노하며 시칠리아를 떠났다. 이후 2만 명의 카르타고 군을 시칠리아에서 철수시키는 임무는 기스코에게 맡겨졌다. 기스코는 병사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아, 군대를 출신 지역별로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카르타고로 보냈다. 그는 병사들이 체불 임금을 즉시 지급받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38] 그러나 카르타고 당국은 모든 병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낮은 급여로 합의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각 부대는 카르타고 시내에 숙소를 배정받았고, 최대 8년 동안 포위된 후 문명의 이점을 누렸다. 이러한 "소란스러운 방종"은 도시 당국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2만 명이 모두 도착하기 전에 체불 임금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고 시카 베네리아(현대 엘 케프)로 180km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켰다.[39]오랜 군사 훈련에서 벗어나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은 서로 불만을 제기하며, 카르타고가 제시한 급여 삭감 시도를 모두 거부했다. 카르타고 협상가들의 흥정에 좌절한 2만 명의 병사들은 카르타고에서 16km 떨어진 튀니스까지 행진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원로원은 전액 지불에 동의했고, 반란군은 더 많은 요구를 했다. 군대에서 평판이 좋았던 기스코는 기원전 241년 말 시칠리아에서 소환되어 체불된 급여를 지불할 충분한 돈을 가지고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돈을 분배하기 시작했고, 잔액은 돈을 모으는 즉시 지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불만이 가라앉은 듯 보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규율이 무너졌다. 몇몇 병사들은 카르타고와의 어떤 합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폭동이 일어나 반대자들은 돌에 맞아 죽었다. 기스코와 그의 참모들은 포로로 잡히고, 재무부는 압수되었다. 재포획되면 고문으로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도망친 로마 노예 스펜디우스와,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한노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베르베르인 마토스가 장군으로 선포되었다. 카르타고 영토 중심부에 경험 많은 반카르타고 군대가 형성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많은 도시와 마을이 반란을 일으켰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식량, 돈, 증원군이 쏟아져 들어왔고, 7만 명의 병력이 추가되었다.[40][41][42] 이로 인해 임금 분쟁은 카르타고의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전면적인 반란으로 번졌다.[31][43]
4. 2. 반란의 확산
오랜 군사 훈련에서 벗어나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은 서로 불평하며 카르타고인들이 지급해야 할 전체 금액보다 적은 금액을 지급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했다. 카르타고 협상가들의 흥정에 좌절한 2만 명의 병사들은 튀니스로 행진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원로원은 전액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반란군은 그 이상의 요구로 대응했다. 군대에서 평판이 좋았던 기스코는 기원전 241년 말에 시칠리아에서 소환되어 지급해야 할 대부분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 돈을 분배하기 시작했고, 잔액은 돈을 모을 수 있는 즉시 지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불만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규율이 무너졌다. 몇몇 병사들은 카르타고와의 어떤 합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폭동이 일어나 반대자들이 돌에 맞아 죽고, 기스코와 그의 참모들은 포로로 잡히고, 그의 재무부는 압수되었다.[40][41][42]재포획될 경우 고문으로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도망친 로마 노예 스펜디우스와,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한노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베르베르인 마토스가 장군으로 선포되었다. 카르타고 영토의 심장부에 형성된 경험 많은 반카르타고 군대의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많은 도시와 마을이 반란을 일으켰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식량, 돈, 증원군이 쏟아져 들어왔고, 7만 명의 병력이 추가되었다. 임금 분쟁은 카르타고의 국가로서의 존립을 위협하는 전면적인 반란으로 번졌다.[31][43]
5. 전쟁의 전개
기원전 240년 초, 한노는 100마리의 코끼리와 공성 병기를 갖춘 군대를 이끌고 우티카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46][47] 우티카 전투에서 반란군의 야영지를 기습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었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한 시칠리아 주둔군 베테랑들이 반격하여 카르타고 군은 많은 병력을 잃고 군수품과 공성 병기를 빼앗긴 채 도망쳤다.[30][48] 그 후 한노는 반란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지만, 전장 지휘관으로서의 무능함을 드러냈다.[30][48]
로마는 카르타고의 어려움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르타고 군 포로를 석방하고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이 카르타고에 식량을 공급하도록 허용했다.[49][50][51] 기원전 240년 말 또는 239년 초, 사르데냐의 카르타고 수비대가 반란에 가담했지만, 로마는 이들의 보호 요청을 거절했다.[49][52][53]
기원전 240년, 하밀카르 바르카가 반란군 진압을 맡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위장 후퇴 전술로 반란군을 격파했다.[31][54][55] 이후 하밀카르는 한노와 함께 카르타고 군 공동 사령관이 되었으나, 둘 사이에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56] 하밀카르는 반란군보다 규모가 컸지만, 자신의 기병대와 코끼리를 두려워하여 험한 지형에 머물며 식량 조달병과 정찰병을 괴롭히는 반란군을 추격했다.[57][58] 우티카 남서쪽 산악 지대에서 하밀카르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려다 포위당했지만, 누미디아 지도자 Naravas|나라바스영어가 기병 2,000명을 이끌고 투항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59][60] 이어진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은 대승을 거두었다.[61]
하밀카르는 포로로 잡은 반란군을 온화하게 대했지만, 반란군 지도자들은 기스코를 포함한 700명의 카르타고 포로를 고문 끝에 죽였다.[62][59][63] 하밀카르도 자신이 잡은 포로를 죽이면서 양측은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이를 "휴전 없는 전쟁"이라 불렀다.[59][63]
기원전 238년 초, 보급 부족으로 반란군은 카르타고 포위를 풀고 튀니스로 후퇴했다. 스펜디우스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밀카르와 대결했으나, '톱산'으로 알려진 산길 또는 산맥에 갇히게 되었다.[70][71] 식량이 고갈되자 반란군은 쏘우 전투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모두 학살당했다.[70][71]
하밀카르는 기원전 238년 말 튀니스를 포위했고, 톱산에서 포로로 잡힌 반란군 지도자들을 도시에서 잘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했다.[72] 이에 마토스는 야습을 명령하여 카르타고 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한니발을 포함한 카르타고 명사들을 포로로 잡아 고문하고 십자가형에 처했다. 하밀카르는 포위를 단념하고 북쪽으로 물러났다.[72][73]
이후 마토스와 그의 군대는 튀니스를 떠나 남쪽의 렙티스 파르바로 진군했다.[72] 한노와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가 그 뒤를 따랐고, 반란군은 카르타고 군과 열린 곳에서 회전을 벌였다.[74] 그 결과, 남은 반란군 3만 명이 전멸했고 마토스는 포로로 잡혔다. 다른 포로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마토스는 카르타고 시의 거리를 끌려 다니며 주민들에게 고통받아 죽었다.[51][76]
5. 1. 한노의 초기 대응과 실패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 한노는 반란 진압을 맡아 전장에 나섰다.[36] 한노 군대의 아프리카인 병사 대부분은 동족 아프리카인들과 싸우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충성을 유지했다.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카르타고 군대에 속해 있던 비아프리카인 부대 역시 충성을 유지했다. 시칠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의 병력은 급여를 제때 받았고 한노와 함께 재배치되었으며, 새로운 병력을 고용하기 위한 자금도 모였다. 알려지지 않은 수의 카르타고 시민도 한노의 군대에 합류했다.[44] 한노가 군대를 소집했을 무렵, 반란군은 이미 우티카와 히포(오늘날의 비제르트)를 봉쇄하고 있었다.[45]
기원전 240년 초, 한노는 우티카를 구원하기 위해 100마리의 코끼리와 공성 병기를 갖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46][47] 우티카 전투에서 한노는 반란군의 야영지를 기습 공격했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포위망을 뚫었다. 한노의 군대는 야영지를 장악했고, 한노는 개선장군처럼 도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시칠리아 주둔군 베테랑들은 인근 언덕에서 재집결하여 추격받지 않고 우티카로 돌아갔다. 누미디아 도시 민병대와의 전투에 익숙했던 카르타고 군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는데, 이때 반란군이 반격해 왔다. 카르타고 군은 많은 병력을 잃고 군수품과 공성 병기를 빼앗긴 채 도망쳤다.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한노는 반란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지만, 전투를 이끌거나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할 기회를 반복적으로 놓쳤다. 군사사가 는 한노의 "전장 지휘관으로서의 무능함"을 지적한다.[30][48]
로마는 카르타고의 어려움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인들은 반군과의 교역을 금지하고 카르타고와의 교역을 장려했다. 로마에 억류되어 있던 2,743명의 카르타고 군 포로는 몸값 없이 석방되어 즉시 카르타고 군에 편입되었다.[49]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은 카르타고가 배후지에서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많은 양의 식량을 카르타고에 공급하도록 허용했다.[50][51] 기원전 240년 말 또는 239년 초, 사르데냐의 카르타고 수비대가 반란에 가담하여 장교와 섬의 총독을 살해했다. 카르타고는 섬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으나, 도착한 병력 역시 반란을 일으켜 이전 반란군에 합류했고, 섬에 있던 모든 카르타고인을 살해했다. 이후 반란군은 로마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49][52] 고전학자 는 "로마는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상황이 아니었고" 반란을 지원하는 평판을 얻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3]
5. 2. 하밀카르 바르카의 등장과 활약
기원전 240년,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시칠리아 주둔군을 지휘했던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반란군 진압을 맡겼다. 하밀카르는 반란군에서 전향한 병사, 기병 2,000명, 코끼리 70마리 등 약 1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48]
하밀카르는 바그라다스 강을 건너 기동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개활지로 진출하려 했다. 그는 계략을 써서 강을 건넜고, Spendius|스펜디우스영어가 이끄는 반란군은 우티카 포위군에서 차출한 15,000명의 증원군을 받아 25,000명이 되었다.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하밀카르는 위장 후퇴 전술을 펼쳐 반란군을 격파하고 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31][54][55]
이후 하밀카르는 한노와 함께 카르타고 군 공동 사령관이 되었으나, 둘 사이에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56] 하밀카르는 반란에 가담한 도시들을 상대로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사용하여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반란군보다 규모가 컸지만, 자신의 기병대와 코끼리를 두려워하여 험한 지형에 머물며 식량 조달병과 정찰병을 괴롭히는 반란군을 추격했다.[57][58]
우티카 남서쪽 산악 지대에서 하밀카르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려다 포위당했지만, 시칠리아에서 하밀카르를 섬기며 그를 존경했던 누미디아 지도자 Naravas|나라바스영어가 기병 2,000명을 이끌고 투항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59][60] 이어진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은 10,000명을 죽이고 4,000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61]
5. 3. 휴전 없는 전쟁
하밀카르는 포로로 잡은 반란군을 온화하게 대하고 자군에 합류하거나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를 제안했다. 최근 전투에서 얻은 4,000명의 포로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61]。반란군 지도자들은 이러한 관대한 처우를 나라바스의 변절 뒤에 숨겨진 동기로 여기고 자군의 붕괴를 두려워했다. 이러한 관대한 조건은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다. 양측 간의 호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스펜디우스는 동료 지도자 갈리아인 아우타리투스의 격려를 받아[62], 기스코를 포함한 700명의 카르타고 포로를 고문 끝에 죽였다. 그들은 손이 잘리고, 거세되고, 다리가 부러지고, 구덩이에 던져져 산 채로 묻혔다[59][63]。용병 지도자이자 여러 언어에 능통한 웅변가였던 아우타리투스는 이 학살의 주된 선동자로 폴리비오스에게 언급되었다. 이번에는 하밀카르가 자신이 잡은 포로를 죽였다. 이로부터 어느 진영도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폴리비오스는 이례적인 전투의 격렬함에 "휴전 없는 전쟁"이라고 명명했다[59][63]。카르타고인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그 이후 모두 코끼리에게 짓밟혀 죽임을 당했다[64][65]。5. 4. 쏘우 전투와 반란군의 패배
기원전 238년 초, 보급 부족으로 반란군은 카르타고 포위를 풀고 튀니스로 후퇴했다. 스펜디우스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밀카르와 대결했으나, '톱산'으로 알려진 산길 또는 산맥에 갇히게 되었다.[70][71] 식량이 고갈되자 반란군은 말, 포로, 노예를 먹으며 버텼다. 결국 포위된 군대는 지도부에 하밀카르와의 협상을 강요했지만, 하밀카르는 약한 구실로 스펜디우스와 그의 부관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반란군은 쏘우 전투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모두 학살당했다.[70][71]
5. 5. 튀니스 포위전과 마토스의 최후
하밀카르는 기원전 238년 말 튀니스를 포위했다. 튀니스는 동서 양쪽에서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남쪽에 위치했고, 부관인 한니발은 나머지 절반과 함께 북쪽에 위치했다. 톱산에서 포로로 잡힌 반란군 지도자들은 도시에서 잘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72]이에 마토스는 대규모 야습을 명령했고, 카르타고 군대의 허를 찔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카르타고 군 진영 중 하나가 궤멸되었고, 휴대 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또한 한니발과 군을 방문 중이던 카르타고 명사 30명으로 구성된 파견단이 포로로 잡혔다. 그들은 고문을 당한 뒤, 스펜디우스와 그의 동료들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곳에 매달렸다. 하밀카르는 포위를 단념하고 북쪽으로 물러났다.[72][73]
이후 마토스와 그의 군대는 튀니스를 떠나 160킬로미터(100마일) 남쪽에 있는 렙티스 파르바로 진군했다.[72] 한노와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반란군은 카르타고 군과 열린 곳에서 회전했다.[74] 그 결과, 남은 반란군 3만 명이 전멸했고 마토스는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 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51] 다른 포로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마토스는 카르타고 시의 거리를 끌려 다니며 주민들에게 고통받아 죽었다.[76]
6.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상실
기원전 237년경, 사르데냐 섬의 원주민들이 봉기하여 반란군 주둔 병력을 몰아내자, 이들은 이탈리아로 피신했다.[67]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이 종결되자, 그들은 다시 로마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번에 로마인들은 동의하여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모두 빼앗기 위한 원정대를 준비했다.[22] 로마인들이 3년 전과는 다르게 행동한 이유는 문헌상으로는 불분명하다.[49][78] 폴리비오스는 이러한 로마의 행동을 옹호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79] 카르타고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루타티우스 조약을 언급하며, 300년 동안 소유해 온 섬을 되찾기 위해 자신들의 원정대를 준비 중이라고 주장했다. 로마 원로원은 비웃으며, 그 부대의 준비를 전쟁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 로마가 내건 강화 조건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할양하고, 1,200탈렌트(에 해당하는 은)의 추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79][80][25] 30년 간의 전쟁으로 약화된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분쟁에 다시 돌입하기보다는 로마의 요구에 합의했다.[81]
7. 전쟁의 결과 및 영향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현지 주민을 진압하기 위해 최소 7년 동안 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83][84]
7. 1. 카르타고에 미친 영향
로마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점령, 추가 배상금 부과는 카르타고에 큰 원한을 불러일으켰다.[83][84]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이러한 불성실한 행위가 19년 후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다시 발발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았다.[81]하밀카르 바르카가 용병 전쟁 승리에 기여하면서 바르카 가문의 위신과 권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전쟁 직후 하밀카르는 많은 참전 용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남부의 카르타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원정을 떠났으며, 이곳은 반(半)자치적인 바르카 가문의 봉토가 되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는 이베리아 동부에 있는 로마 보호 도시인 사군툼을 포위했고,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85][86]
역사가 덱스터 호요스는 "무자비한 전쟁은 ... 카르타고의 국내 운명과 군사적 방향에 완전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라고 썼다.[24] 리처드 마일스 또한 "심오한 정치적 변화의 시기"가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87] 카르타고는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결코 되찾지 못했고, 장군들은 하밀카르처럼 계속해서 군대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히스파니아의 병력은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사병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바르카 가문과 민회 모두의 의견이 기존의 원로원과 재판소에 점점 더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88]
7. 2. 로마의 부상과 제2차 포에니 전쟁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지역 주민들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최소 7년 동안 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로마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점령, 그리고 추가 배상금은 카르타고의 분노를 일으켰다.[83][84]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이러한 부정한 행위가 19년 후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다시 발발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았다.[81] 하밀카르 바르카는 승리에 기여하여 바르카 가문의 명성과 권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전쟁 직후, 하밀카르는 많은 참전 용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남부의 카르타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원정을 떠났고, 이곳은 반(半)자치적인 바르키드 봉토가 되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는 이베리아 동부에 있는 로마 보호 도시인 사군툼을 포위하였고,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85][86]역사가 덱스터 호요스는 "무자비한 전쟁은 ... 카르타고의 국내 운명과 군사적 방향에 완전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라고 썼다.[24] 는 "심오한 정치적 변화의 시기"가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87] 카르타고는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결코 되찾지 못했고, 장군들은 하밀카르처럼 계속해서 군대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히스파니아의 병력은 사실상 바르키드의 사병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바르키드와 민회 모두의 의견이 기존의 원로원과 재판소에 점점 더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88]
8. 문화 예술에 미친 영향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62년 이 사건을 배경으로 소설 《살람보》를 썼다. 소설은 이 시기 카르타고를 배경으로 하며, 하밀카르 바르카의 가공의 딸 살람보와 반란군 지도자 마토스(Mathos영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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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govie les Arverniales
https://arverni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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