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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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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쓰노미야 사부로는 일본 제국의 화학자, 기술자, 군사학자이다. 오와리 번의 번사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슈류 군사학과 서양 포술을 익혔다. 막부 말기에는 에도 막부의 대포 제작을 지도하고, '화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 채택하는 데 기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공부성 기사로 철도 및 항만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국산화에 힘썼고, 일본 최초의 포틀랜드 시멘트 제조에 성공했다. 또한, 화학 공업의 선구자로서 시멘트 외에도 탄산 나트륨, 내화 벽돌의 국산화에 기여했으며, 말년에는 고슈류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01년 욱일장을 받았으며, 190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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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 사부로
기본 정보
우쓰노미야 사부로
씨명우쓰노미야 사부로
후리가나우쓰노미야 사부로
출생명알 수 없음
출생일1834년 11월 15일
출생지오와리국나고야 (현재 아이치현나고야시)
세례명알 수 없음
실종일알 수 없음
실종지알 수 없음
현황알 수 없음
사망일1902년 7월 23일 (67세)
사망지알 수 없음
사인알 수 없음
유해 발견알 수 없음
묘지아이치현도요타시 행복사
기념비알 수 없음
거주지알 수 없음
국적알 수 없음
민족알 수 없음
시민권알 수 없음
학력 및 경력
교육메이린도
출신교알 수 없음
직업알 수 없음
활동 기간알 수 없음
시대알 수 없음
고용주알 수 없음
단체알 수 없음
대리인알 수 없음
주요 업적알 수 없음
대표작알 수 없음
유파알 수 없음
영향을 받은 것알 수 없음
영향을 준 것알 수 없음
활동 거점알 수 없음
급여알 수 없음
순자산알 수 없음
신장알 수 없음
체중알 수 없음
텔레비전 프로그램알 수 없음
직함알 수 없음
임기알 수 없음
전임자알 수 없음
후임자알 수 없음
정치 활동
정당알 수 없음
정치 운동알 수 없음
적대자알 수 없음
이사회알 수 없음
종교 및 범죄
종교알 수 없음
종파알 수 없음
죄명알 수 없음
형벌알 수 없음
범죄자 현황알 수 없음
가족 관계
배우자알 수 없음
비혼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부모알 수 없음
친척의제: 오사와 산노스케
가족알 수 없음
기타 정보
콜사인알 수 없음
수상훈4등 욱일소수장(1901년)
공식 웹사이트알 수 없음
서명알 수 없음
서명 크기알 수 없음
보충알 수 없음

2. 약력

오와리번 번사 가미야 한에몬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로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아버지의 은거로 형이 가문을 상속받자 본래 성인 우쓰노미야로 돌아갔다. 고슈류 군사학과 전통 포술을 배우다 서양 포술에 관심을 갖고 우에다 나카토시의 제자가 되어 난학자들과 교류했으며, 야나가와 슌조와 함께 공부했다.

1853년 페리 내항 후 에도로 불려가 오와리 번저에 포대를 쌓고 착발탄 개발을 담당했다. 1857년 번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탈번했다. 1858년에는 막부의 대포 제작을 지도했다. 1861년 가쓰 가이슈의 추천으로 반쇼시라베쇼에서 일하며 대포, 총, 화약 제조를 지도했다.[15]

1865년 제련소와 정련방을 화학소, 화학방으로 개칭할 것을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이는 '화학'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다. 1860년 가와모토 고민의 역서 「화학신서」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네덜란드어 :nds:Chemie와 영어 :en:Chemistry를 번역한 '사밀' 대신 화학이라는 번역어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제2차 조슈 정벌 때 척추를 다쳐 요양하던 중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이시구로 다다노리에게 사후 해부용으로 써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였으나, 1869년 회복하여 가이세이 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오사와 사다와 결혼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개로 교준사에 들어갔다. 1872년 공부성 기사가 되었다. 철도 및 항만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의 국산화에 노력해 관영 시멘트 제조소를 건설했고 포틀랜드 시멘트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1879년 긴자에 있던 집과 토지를 기부했다.[16] 1882년 공부성 기사장이 되었고 두 차례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1884년 폐병 치료를 위해 공직을 사임하고 민간에서 일했다. 공부성 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표를 냈을 때 이토가 몇 달만 쉬면 연금이 나온다고 했는데도 바로 사직을 요구했다.[17]

1881년 일본 최초로 생명보험에 가입하여 메이지 야스다 생명 보험에 1호 보험증서가 보관되어 있다.[18] 우쓰노미야는 곧 폐병에 걸려 자신이 죽으면 보험사가 2000JPY의 손실을 볼 것 같아 할부금을 지불하지 않고 계약을 파기하려 했다. 친척이 할부금을 계속 지불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이 30년치 보험료를 선납했다.[19]

일본 화학공업의 선구자로 시멘트 외에 탄산 나트륨, 내화벽돌의 국산화 등에 기여했다. 양조법 특허를 내어 1895년 가미야 덴베와 함께 주류양조연구소를 세웠다.

만년에 아키야마 사네유키에게 고슈류 군사학을 가르쳤다. 1901년 욱일장을 받았다.[20] 1902년 사망했고 묘소는 현 도요타시에 있다. 스스로 관에 시신 부패 방지 처리를 한 뒤 그 관에 들어가 행복사에 묻혔다.

아명은 가미야 덴베, 15세경엔 우쓰노미야 고킨지, 탈번 후엔 우쓰노미야 고노신(속명), 요시쓰나(본명)를 썼고 우쓰노미야 사부로라는 이름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사용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1834년 11월 15일(덴포 5년 10월 15일), 오와리번 번사 가미야 한에몬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로 나고야 성하 마을의 쿠루마미치(현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 신사카에 3초메)에서 태어났다.[1] 어릴 적 이름은 가미야 긴지로 시게유키였다.[1] 가미야 가문은 미카와국헤키카이군을 기원으로 하며, 아버지 가미야 한에몬 요시시게는 시조인 가미야 쇼조로부터 7대손에 해당한다.[1]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 당시, 가미야 쇼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랐다.[1]

소년기에는 오와리번의 번교인 메이린도에서 효경논어 등을 배웠다. 15세 무렵인 1849년(가에이 2년)에는 아버지가 은거하고 형인 가미야 사다에몬이 가문을 상속받은 것을 계기로 성을 본래 성씨인 우쓰노미야로, 이름을 코킨지로, 즉 우쓰노미야 코킨지로 고쳤다.[1] 무술을 좋아하여 고슈류 군학과 전통적인 포술을 배웠지만, 이윽고 서양 포술가인 우에다 나카토시(우에다 타이가)의 문인이 되었다.[1] 같은 우에다 문하에는 2살 연상의 야나가와 슌조가 있었다.[1] 이 무렵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우다가와 요안이 저술한 화학 서적 세미카이소를 독학했다.[1]

2. 2. 막부 말기 활동

오와리번 카미야 한에몬 요시시게의 셋째 아들로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아버지의 은거로 형이 가문을 상속받자 본래 성인 우쓰노미야로 돌아갔다. 고슈류 군사학(甲州流軍学)과 전통 포술을 배우다 서양 포술에 관심을 갖고 우에다 다이토의 제자가 되어 난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야나가와 슌조와 함께 공부했다.

가에이 6년(1853년) 페리 내항 후 에도에 불려가 하마고텐 옆 오와리 번저에 포대를 쌓고 착발탄(着発弾) 개발을 담당했다.[1] 안세이 4년(1857년) 번의 귀국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탈번했다. 탈번할 때 통칭을 '''우쓰노미야 코노신''', 실명을 '''우쓰노미야 요시쓰나'''로 개명했다.[1] 안세이 5년(1858년)에는 에도 막부의 대포 제작을 지도했다. 만엔 2년(1861년) 가쓰 가이슈의 추천으로 막부의 번서조소(후에 양서조소)에서 일했다. 강무소에서도 대포, 총, 화약 제조를 지도했다.[2]

게이오 원년(1865년) 제련소, 정련방을 화학소, 화학방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화학'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다. 네덜란드어 :nds:Chemie 영어 :en:Chemistry는 원래 '사밀'(사밀학)로 번역된 상태였지만 이후에는 화학이라는 번역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이전에는 만엔 원년(1860년)에 가와모토 고민의 번역서 『화학신서』에서도 사용되었다.

에도에서는 서양 학자인 야나가와 슌조, 난학자인 가쓰라가와 구니오키,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친분이 있었다.[3] 막말기에는 난의(蘭医) 가쓰라가와 가문에 자주 드나들었고, 결국 저택 내에 서양관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4]

게이오 원년(1865년)부터 게이오 3년(1867년)의 제2차 조슈 정벌 때 척수를 다쳐 요양 중에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우쓰노미야 사부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72년(메이지 5년) 공부성기사가 되었다. 철도와 항만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의 국산화에 힘썼고, 관영후카가와 시멘트 제조소를 건설하여 일본 최초의 포틀랜드 시멘트 제조에 성공했다. 1882년(메이지 15년) 6월, 공부대기장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두 차례 구미 출장을 다녀왔다. 1884년(메이지 17년) 6월, 폐병을 이유로 공부대기장을 사임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민간 공업의 육성에 힘썼다. 공부경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그대로 요양하면 몇 달 지나면 은급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건 큰일입니다. 즉시 사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5]

동갑인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친구 관계였지만[6], 꼼꼼한 후쿠자와와 달리 우쓰노미야의 성격은 대범했다[7]。 후쿠자와의 장남인 후쿠자와 이치타로는, "돌아가신 아버지는 식사 시간을 매우 엄수하셨지만, 선생님은 이와 달리 식사 시간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간식을 드시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이와 정반대로 담화가 무르익으면 과자 등을 젊은이들이 놀랄 정도로 드셨다"고 말했다[11]。 후쿠자와의 소개로 교준사에 들어가, 1879년(메이지 12년)에는 긴자 벽돌 거리에 소유하고 있던 사택과 토지를 기부했다[8]

친구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1881년(메이지 14년)에는 일본 최초로 생명 보험에 가입했다. 메이지 야스다 생명 보험에는 제1호 보험 증서가 보관되어 있다[9]。 우쓰노미야는 곧 폐병에 걸렸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회사가 2000JPY의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험료를 지불하지 않고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수년 후, 친척이 몰래 보험료를 계속 지불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쓰노미야는 30년 치의 보험료를 선불하고, 친척에게 보험료를 반환했다고 한다[10]

2. 4. 화학자로서의 활동

페리 내항 이후 에도에 불려가 오와리 번 저택에 포대를 쌓고 착발탄(着発弾) 개발을 담당했다. 1857년 번의 귀국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탈번했다. 1858년에는 막부의 대포 제작을 지도했다. 1861년 가쓰 가이슈의 추천으로 반쇼시라베쇼에서 일하며 대포, 총, 화약 제조를 지도했다.[15]

1865년 제련소와 정련방을 화학소, 화학방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이는 '화학'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다. 당시 네덜란드어 :nds:Chemie와 영어 :en:Chemistry는 사밀(舎密)로 번역되었으나, 카와모토 코민의 역서 「화학신서」(1860)를 통해 처음 사용된 화학이라는 번역어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개로 交詢社에 들어갔다. 1872년 공부성 기사가 되었다. 철도 및 항만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의 국산화에 노력해 관영 시멘트 제조소를 건설했고 포틀랜드 시멘트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1879년 긴자煉瓦街에 있던 집과 토지를 기부했다.[16] 1882년 6월 공부성 기사장이 되었고 두 차례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1884년 폐병 치료를 위해 공직을 사임하고 민간에서 일했다. 공부성 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표를 냈을 때 이토가 몇 달만 쉬면 연금이 나온다고 했는데도 바로 사직을 요구했다.[17]

시멘트 외에도 탄산 나트륨, 내화벽돌의 국산화 등에 기여하며 일본 화학공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양조법 특허를 내어 1895년 가미야 덴베와 함께 주류양조연구소를 세웠다.

2. 5. 말년

만년에 아키야마 사네유키에게 고슈류 군학을 가르쳤다. 1901년 11월 11일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다.[12] 1902년 7월 23일에 사망했다. 선조와 관련된 땅인 아이치현 헤키카이군 우네베 촌(현 도요타시)의 행복사에[13], 스스로 고안한 부패 방지 장치가 달린 관에 안치되어 장례를 치렀다.

행복사에 있는 묘

3. 평가 및 영향

우쓰노미야 사부로는 일본 화학공업의 선구자로, 시멘트, 탄산 나트륨, 내화벽돌의 국산화에 기여하여 일본 근대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특히 포틀랜드 시멘트 국산화 성공은 철도 및 항만 건설에 필수적인 재료의 자급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가이세이 학교 교사, 공부성 기사 등을 역임하며 학문 및 기술 발전에 힘썼으며, 1895년 가미야 덴베와 함께 주류 양조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만년에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에게 고슈류 군사학을 가르쳤다. 1901년 11월 11일 이러한 공로로 욱일장을 받았다.[20]

와타나베 준이치는 소설 《하얀 출발(白き旅立ち)》에서 일본 최초의 사체 기증자 여성인 미키(美幾)와 우쓰노미야 사부로를 묘사했다.

3. 1. 일화


  • 1881년 일본 최초로 생명보험에 가입하여 메이지 생명에 1호 보험증서가 보관되어있다.[18] 우쓰노미야는 곧 폐병에 걸려 자신이 죽으면 보험사가 2000JPY의 손실을 입을 것 같아 할부금을 지불하지 않고 계약을 파기하려 했다. 친척이 할부금을 계속 지불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이 30년치 보험료를 선납했다.[19]
  • 1884년 폐병 치료를 위해 공직을 사임하고 민간에서 일했다. 공부성 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표를 냈을 때 이토가 몇 달만 쉬면 연금이 나온다고 했는데도 바로 사직을 요구했다.[17]
  • 1865년 제련소, 정련방을 화학소, 화학방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하여 채택되었을 때 '화학'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네덜란드어 :nds:Chemie, 영어 :en:Chemistry는 사밀(舎密)로 번역된 상태였지만 화학이라는 번역어가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화학이라는 말은 카와모토 코민의 역서「화학신서」(1860)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참조

[1] 서적 宇都宮氏経歴談 交詢社 1902
[2]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豊田市郷土資料館 2003
[3] 논문 幕末・明治初期の化学技術者 宇都宮三郎ゆかりの地を訪ねて 1991
[4] 서적 名ごりの夢 平凡社 1963
[5]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豊田市郷土資料館 2003
[6] 서적 保険思想と経営理念 千倉書房 2005
[7] 서적 宇都宮氏経歴談 交詢社 1902
[8] 서적 交詢社百年史 財団法人交詢社 1983
[9]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豊田市郷土資料館 2003
[10] 뉴스 宇都宮三郎氏の奇癖 読売新聞 1893-04-12
[11] 서적 神谷傳兵衛 1921
[1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1-12
[13] 논문 化学技術者の先駆け 宇都宮三郎資料 http://www.chemistry[...] 2014-07
[14] 웹사이트 第5回化学遺産認定 https://www.chemistr[...]
[15]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16] 서적 交詢社百年史 財団法人交詢社 1983
[17]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18] 서적 舎密から科学技術へ
[19] 뉴스 宇都宮三郎氏の奇癖 読売新聞 1893-04-12
[2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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