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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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인원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과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가 협력하여 나치 고위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하이드리히의 등장, 그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1942년 5월,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가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게슈타포에 의해 암살자들이 은신한 성 치릴로와 메토디우스 정교회 대성당이 발각되어, 암살자들은 최후의 저항 끝에 사망했다. 이 작전은 뮌헨 협정 파기를 이끌어냈으며, 나치 패망 후 수데텐 지방을 체코슬로바키아로 반환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추방에 대한 동의를 얻는 등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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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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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엔스라포이드 작전 |
영문 명칭 | Operation Anthropoid |
종류 | 사건·사고 |
발생 위치 | 프라하,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
발생 날짜 | 1942년 5월 27일 |
요약 | 대영제국 정부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에 의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
원인 | 불명 |
수단 | 불명 |
사용 무기 | 수류탄 |
공격 인원 | 2명 |
표적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사망자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부상자 | 불명 |
실종자 | 불명 |
피해자 | 불명 |
손해 | 불명 |
범인 | 요제프 가프치크, 외 |
혐의 | 불명 |
동기 | 불명 |
관여 | 불명 |
방어 | 불명 |
대처 | 불명 |
사과 | 불명 |
배상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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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수립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에밀 하하 대통령을 압박하여 체코 지역을 독일에 강제 병합하도록 했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이 총독으로, 카를 헤르만 프랑크가 부차관으로 임명되어 통치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의 주요 군수 공업 지대 중 하나로, 독일군 전차의 3분의 1, 경기관총의 40%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융화 정책으로 생산력이 감소하자, 히틀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부총독으로 임명하여 강경 통치를 시작했다.
하이드리히는 친위대(SS) 내에서 하인리히 힘러 다음가는 실력자였으며, 게슈타포 등을 통괄하는 국가 보안 본부(RSHA)의 장관이었다. 그는 나치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유대인 학살 계획을 실행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이드리히는 '당근과 채찍' 정책을 통해 체코를 통치했다. 즉결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체제파를 처형하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식량 배급과 연금을 늘리는 등 회유책을 폈다.
1941년 당시 보헤미아는 독일 군수 산업의 중심지였고, 체코슬로바키아 주영 망명 정부는 저항 운동이 거의 없어 영국 정보부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망명 정부는 체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연합국에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체코 정보부 장교 프란티셰크 모라베츠 중령은 특수 작전 집행부(SOE)와 협력하여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첩보 요원으로 훈련시키고 특별 임무에 파견했다.
1941년 10월, 런던에서 열린 작전 회의에서 모라베츠 대령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을 입안했다. 요제프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실행 요원으로 지명되어 훈련을 받았고, "앤스로포이드(ANTHROPOID)" 작전명으로 하이드리히 암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2. 1.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9년 3월 14일부터 15일까지, 독일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밀 하하 대통령을 베를린으로 불러 슬로바키아 공화국을 독립시키고 체코 지역을 독일에 강제 병합하도록 압박했다. 하하는 저항할 힘이 없어 병합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3월 16일 이 지역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명명되었다. 4월 5일,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이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으로, 카를 헤르만 프랑크가 부차관(경찰 업무 담당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으로 파견되어 이들이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통치했다.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보헤미아는 루르 지방과 함께 나치 독일의 최대 군수 공업 지대였다. 알베르트 슈페어에 따르면 독일군 전차의 3분의 1, 경기관총의 40%가 보헤미아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융화 정책으로 파업과 저항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이 지역의 병기 생산력이 20% 가까이 감소했다.
이에 분노한 히틀러는 1941년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노이라트와 프랑크를 자신의 본영 "늑대의 둥지"로 불러 체코인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질책하고, 노이라트에게 장기 휴가를 명령했다. 히틀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부총독으로 임명할 것을 통보했다. 노이라트는 사임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고, 형식적으로 총독직을 유지한 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41년 9월 27일, 하이드리히를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부총독으로 임명하는 히틀러의 정식 명령이 내려졌고, 하이드리히는 다음 날 28일 프라하에 부임했다.
2. 2.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등장
1941년 9월, 아돌프 히틀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부총독으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기존 총독이었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정책이 융화적이라고 판단하여, 강경파인 하이드리히를 통해 체코를 강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하이드리히는 친위대(SS)에서 하인리히 힘러 다음가는 실력자였으며,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부(SD), 형사 경찰을 통괄하는 국가 보안 본부(RSHA)의 장관이었다. 그는 나치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유대인 학살 계획의 주요 실행자 중 한 명이었다.
하이드리히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통치하며 '당근과 채찍' 정책을 사용했다. 그는 도착 즉시 체코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즉결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체제파 지도층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알로이스 엘리아시 총리도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강압 통치로 인해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반면,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는 회유 정책을 펼쳤다. 식량 배급과 연금 지급액을 늘리고, 체코 역사상 최초로 고용 보험을 만들었다. 또한 카를스바트의 리조트 호텔 등을 접수하여 노동자 휴양지로 제공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 계급은 저항 운동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체코의 저항 운동은 약화되었다.
2. 3. 영국-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의 협력
1941년 당시 보헤미아 지방은 독일 국방군 전차의 3분의 1, 경기관총의 40%를 생산하는 중요한 군수 산업 지역이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영 망명 정부는 1939년 3월 독일 점령 이후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저항이 거의 없었던 것에 대해 영국 정보부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는 체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임을 보여주는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체코 정보부 장교 프란티셰크 모라베츠 중령은 특수 작전 집행부(SOE)와 협력하여 체코인·슬로바키아인을 첩보 요원으로 육성하고 특별 임무와 작전에 파견했다. 영국은 체코 첩보망으로부터 독일 정보를 필요로 했고, 주영 체코 망명 정부는 독일 점령 하 체코슬로바키아 국내에서의 지하 활동·저항 운동을 강화·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2. 4. 작전명 '앤스로포이드'
1941년 10월 3일 런던에서 열린 작전 회의에서 모라베츠 대령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또는 카를 헤르만 프랑크를 표적으로 한 암살 계획을 입안하고 지시했다.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기념일을 암살 실행일로 정하고, 요제프 가브치크와 카렐 스보보다 두 명의 하사가 실행 요원으로 지명되어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스보보다가 훈련 중 부상을 당해 쿠비시로 교체되었다. "앤스로포이드(ANTHROPOID)"라는 작전명으로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체코에 침투할 준비를 했고, 최종적으로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작전 실행
1941년 12월 28일,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는 실버 A, 실버 B라는 암호명을 가진 다른 두 그룹과 함께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폭격기를 타고 웨스트 서섹스의 RAF Tangmere|탱미어 공군 기지영어에서 22시에 이륙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세 지점에 낙하할 예정이었으나, 예정된 지점에 착륙하지 못하고 프라하 동쪽 약 19.31km 떨어진 Nehvizdy|네흐비즈디영어 근처에 착륙했다. 그들은 지역 주민과 현지 저항 운동 그룹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의 은신처에 들어갔으며, 2월에는 실버 A의 요세프 발치크(Josef Valcik)와 연락이 닿았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하이드리히 암살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며, 베를린 방문 열차를 대전차 라이플로 저격하거나 철도를 폭파하는 등 여러 실행 계획을 검토했으나 보류했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 교외 북쪽 약 24k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매일 아침 운전기사가 딸린 메르세데스-벤츠 320 전용차를 타고 프라하로 출근했다. 하이드리히의 거주지와 집무 장소는 엄중하게 경비되었지만, 이동 시에는 오픈카 상태로 전용차 앞자리에 앉아 있어 습격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프라하 북부 교외의 Holešovice영어를 습격 후보 지점으로 정했다. 이곳은 키르히마이어 거리에서 클라인 호레쇼비츠 거리로 우회전하는 지점으로, 내리막길에 헤어핀 모양의 우회전 코너에서 차가 시속 20km 이하로 감속해야 했고, 근처에 트램 정류장이 있어 습격 대기 중에도 의심받을 가능성이 낮았다. 또한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했을 때 차량 통행을 우측 통행으로 변경하면서, 차량이 우회전할 때 안쪽 보도 쪽을 주행하게 되어 이상적인 습격 지점으로 판단했다.
1942년 5월 27일,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하이드리히의 차량을 공격했다. 가브치크가 스텐 Mk.II 기관단총으로 암살을 시도했으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고, 하이드리히는 운전병에게 정차를 명령하고 반격하려 했다. 쿠비시는 No.73 수류탄을 개조한 폭탄을 던졌고, 수류탄은 차 오른쪽 뒷바퀴 부근에서 폭발하여 하이드리히에게 중상을 입혔다.
3. 1. 체코슬로바키아 잠입
1941년 12월 28일,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는 다른 두 그룹(암호명 실버 A, 실버 B)과 함께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에 탑승하여 웨스트 서섹스의 RAF Tangmere|탱미어 공군 기지영어에서 22시에 이륙했다. 실버 A는 알프레트 바르토시(Alfred Bartos) 소위, 요세프 발치크(Josef Valcik) 하사, 이리 포투체크(Jiri Potucek) 통신병 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체코 저항 운동 조직과의 접촉을 확립하고 런던과의 연락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실버 B는 얀 제메크(Jan Zemek)와 블라디미르 슈카하(Vladimir Skacha) 2명으로 송신기를 휴대하고 통신 연락을 하는 임무를 받았다. 세 그룹은 체코 내부의 세 지점에 낙하할 예정이었으나, 어떤 그룹도 예정된 지점에 착지하지 못했다. 실행 부대는 필젠 근처가 아닌, 프라하 동쪽 약 19.31km 떨어진 Nehvizdy|네흐비즈디영어 근처에 착지했다. 다행히 그들은 그 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현지 저항 운동 그룹과 연락을 취했고, 1월까지 프라하의 은신처에 들어갈 수 있었다. 2월에는 필젠에 정착해 있던 실버 A의 발치크와 연락이 닿았다.3. 2. 암살 준비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하이드리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몇 가지 검토했다. 베를린 방문 열차 탑승 시 대전차 라이플로 저격하거나, 철도 또는 열차를 폭파하는 등의 계획은 실행이 보류되었고, 다른 습격 계획을 모색했다.하이드리히는 프라하 교외 북쪽 약 24km 떨어진 파넨스케 프제지아니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운전기사가 딸린 전용차 (메르세데스-벤츠 320)가 하이드리히의 집까지 마중을 나가 그를 프라하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이드리히의 거주지 및 프라하에서의 집무 장소는 엄중하게 경비되었지만, 매일 아침 이동 시 하이드리히는 오픈카 상태로 전용차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습격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듯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하이드리히의 이동 경로를 조사하는 중에 프라하 북부 교외의 Holešovice영어를 습격 후보 지점으로 찾았다. 그곳은 키르히마이어 거리에서 클라인 호레쇼비츠 거리로 우회전하는 지점으로, 도로는 넓고 2개의 트램 노선이 중앙을 달리고 있었지만, 내리막길에 헤어핀 모양의 우회전 코너 지점에서 차는 시속 20km 이하로 감속해야 했으며, 근처에 트램 정류장이 있어서, 모퉁이 근처에서 습격 대기하고 있어도 의심받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했을 때 차량 교통을 좌측 통행에서 우측 통행으로 변경하면서, 차량이 우회전할 때 안쪽 보도 쪽을 주행하는 장소가 되었고, 이곳을 이상적인 습격 지점으로 하여 두 사람은 상세한 계획 입안을 추진했다.
3. 3. 암살
1942년 5월 27일,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하이드리히의 차량을 공격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헤어핀 커브 안쪽 보도에 매복하고 있었고, 하이드리히가 탄 차량이 커브에 들어섰을 때 가브치크가 스텐 Mk.II 기관단총으로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텐 기관단총의 구조적인 문제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하이드리히는 운전병에게 정차를 명령하고 가브치크에게 반격하려 했다. 이를 본 쿠비시는 No.73 수류탄을 개조한 폭탄을 던졌고, 수류탄은 차 오른쪽 뒷바퀴 부근에서 폭발하여 하이드리히에게 중상을 입혔다.4. 하이드리히의 죽음과 나치의 보복
히틀러는 친위대와 게슈타포에 하이드리히를 살해한 자를 찾아내 "피의 보복"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히틀러가 광범위한 체코인 살해를 지시했지만, 체코가 독일군에게 중요한 공업 지역이었고 무분별한 체코인 살해는 생산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 책임을 수천 명으로 한정했다. 결국 1만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리디체와 레자키 두 마을 주민이 학살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4. 1. 하이드리히의 사망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병원에 도착한 후 즉시 체코인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의 상처는 표면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X선 검사 결과 갈비뼈 골절, 횡격막 파열, 췌장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등 중상으로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체코인 의사의 수술을 거부하고 베를린에서 독일인 전문의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후 프라하에 거주하는 독일인 의사의 수술을 받기로 동의했고, 정오가 지나 수술이 시작되어 이물질이 체내에서 제거되었다. 5월 31일 하인리히 힘러가 프라하 병원에 하이드리히를 문병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틀 후 위강에서 감염이 발생해 체온이 상승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습격 8일 후인 6월 4일 이른 아침, 패혈증으로 사망했다.힘러는 자신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했고, 그가 파견한 개인 의사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체코 의사나 군의관은 하이드리히를 치료할 수 없었다. 6월 4일 하이드리히는 사망했지만, 힘러가 보낸 의사들은 하이드리히의 차 내장에 사용된 말의 털이 수류탄 폭발로 파편과 함께 그의 몸에 들어가 자신들의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전신 감염을 일으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힘러는 하이드리히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면도 있었기에, 이러한 진단 내용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억측을 하기도 했다. 하이드리히는 냉철한 일 처리로 친위대 내부에서도 적이 많았고, 무장친위대 장관 요제프 디트리히는 "저 암퇘지도 드디어 죽었군!"이라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류탄에 영국이 개발한 생물학 무기인 보툴리누스균이 몰래 숨겨져 있었고, 이것의 신경독에 의해 사망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증은 없다.
4. 2. 나치의 보복
히틀러는 친위대와 게슈타포에게 하이드리히를 살해한 자를 찾아내 "피의 보복"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히틀러가 광범위한 체코인을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협의 결과, 그는 그 책임을 수천 명으로 한정했다. 체코는 이미 독일군에게 중요한 공업 지역이었고, 무분별한 체코인의 살해는 생산성을 감소시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1만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유명한 사건으로는 리디체와 레자키의 두 마을 주민이 학살된 것이 있다.5. 암살자 체포와 처형
암살 실행자들은 프라하의 두 가족에게 은신했다가, 나중에 프라하에 있는 정교회 대성당인 성 치릴로와 메토디우스 정교회 대성당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게슈타포는 "아웃디스턴스"라는 그룹의 일원이었던 카렐 추르다(en)가 의 보상금을 받기 위해 현지 연락책을 밀고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추르다는 지슈코프에 있는 모라베크 가족을 포함하여, 인드라 그룹에게 제공된 은신처를 밀고했다. 1942년 6월 17일 오전 5시, 게슈타포는 모라베크 가족의 집을 수색했다. 가족들은 복도에 서 있어야 했지만, 모라베크 부인은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받고 숨겨두었던 청산가리 캡슐을 이용해 자살했다. 남편은 가족이 저항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아들 아타와 함께 페케크 팔라크로 끌려갔다. 아타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고문을 당했다. 그는 브랜디에 취하게 되었고, 수조에 담긴 어머니의 잘린 머리를 보게 되었다. 결국 아타는 게슈타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친위대는 교회를 포위했지만, 700명 이상의 나치 부대가 작전에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살자들을 생포하지는 못했다. 쿠비시를 포함한 3명은 총격전 끝에 대성당에서 사망했고, 가프치크를 포함한 4명은 지하 벙커로 피했지만, 물고문을 당해 궁지에 몰려 자살했다.
추르다는 독일식 가명과 독일인 아내를 얻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나치 협력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5. 1. 배신과 은신처 발각
암살 실행자들은 프라하의 두 가족에게 숨겨졌고, 이후 프라하의 정교회 대성당인 성 치릴로와 메토디우스 정교회 대성당에 숨었다. 게슈타포는 사보타주를 목표로 한 그룹 "아웃디스턴스"의 멤버였던 카렐 추르다(en)가 의 보상금을 노리고 팀의 현지 연락처를 밀고할 때까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추르다는 지슈코프의 모라베크 가족을 포함하여 인드라 그룹에 제공된 은신처를 밀고했다. 6월 17일 오전 5시, 모라베크 가족의 집이 게슈타포의 수색을 받았다. 가족은 게슈타포가 아파트를 수색하는 동안 복도에 서 있었지만, 모라베크 부인은 화장실에 갈 허락을 받고 틈을 타 숨겨둔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남편은 가족의 저항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지만, 아들 아타와 함께 페케크 팔라크로 끌려갔다. 여기서 아타는 하루 종일 고문을 받았다. 그는 브랜디에 취해졌고, 수조에 담긴 어머니의 절단된 목을 보았다. 결국, 아타는 게슈타포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자백했다. 친위대는 교회를 포위했지만, 700명 이상의 나치 부대가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실행자들을 생포하지 못했다. 쿠비시를 포함한 3명은 총격전 끝에 대성당에서 사망했다. 가프치크를 포함한 4명은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하 벙커로 도망쳤지만, 물고문을 당해 궁지에 몰렸고, 모두 자살했다.
추르다는 독일 가명과 독일인 아내를 얻었지만, 전후 1947년에 자살에 실패하고 나치 협력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5. 2. 최후의 저항
암살 실행자들은 프라하의 두 가족에게 숨겨졌고, 이후 프라하의 정교회 대성당인 성 치릴로와 메토디우스 정교회 대성당에 숨었다. 게슈타포는 사보타주를 목표로 한 그룹 "아웃디스턴스"의 멤버였던 카렐 추르다(en)가 의 보상금을 노리고 팀의 현지 연락처를 밀고할 때까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추르다는 지슈코프의 모라베크 가족을 포함하여 인드라 그룹에 제공된 은신처를 밀고했다. 6월 17일 오전 5시, 게슈타포는 모라베크 가족의 집을 수색했다. 가족은 게슈타포가 아파트를 수색하는 동안 복도에 서 있었지만, 모라베크 부인은 화장실에 갈 허락을 받고 틈을 타 숨겨둔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남편은 가족의 저항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지만, 아들 아타와 함께 페케크 팔라크로 끌려갔다. 아타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고문을 받았다. 그는 브랜디에 취해졌고, 수조에 담긴 어머니의 절단된 목을 보았다. 결국, 아타는 게슈타포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자백했다. 친위대는 교회를 포위했지만, 700명 이상의 나치 부대가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실행자들을 생포하지 못했다. 쿠비시를 포함한 3명은 총격전 끝에 대성당에서 사망했다. 가프치크를 포함한 4명은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하 벙커로 도망쳤지만, 물고문을 당해 궁지에 몰렸고, 모두 자살했다.
6. 작전의 결과와 영향
유인원 작전의 성공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나치 패배 후 수데텐란트를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영내의 독일인을 추방하는 데 동의했다.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나치의 보복은 매우 잔혹했다. 리디체와 레자키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하이드리히는 나치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프라하와 베를린에서 두 번의 큰 장례식이 열렸다. 프라하에서는 수천 명의 친위대원이 횃불을 들고 프라하 성까지 줄지어 섰고, 베를린에서는 히틀러가 참석했다.
하이드리히는 친위대(SS)에서 하인리히 힘러 다음가는 권력자였으며, 유대인 학살 계획의 주요 실행자였다. "금발의 야수", "교수형 집행자", "프라하의 학살자"와 같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잔혹했다.
그는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통치하며, 체코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즉결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체제 인사들을 처형했다. 체코 총리 알로이스 엘리아시도 이때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반면, 노동자 계급에게는 식량 배급과 연금 지급액을 늘리고 고용 보험을 만들어주는 등 회유책을 써서 체코의 저항 운동을 약화시켰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에서 "인간적인 총독"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며, 가족과 함께 있는 사진을 자주 찍게 하고, 오픈카 형태의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호위 차량도 거의 붙이지 않아 하인리히 힘러와 히틀러는 그의 경호에 대해 여러 번 경고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는 유인원 작전이 성공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인원 작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 특히 의열단, 한인애국단 등과 같은 의열 투쟁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해외에서 훈련받은 요원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 했던 활동과 비교할 수 있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저항 운동은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지만, 억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1. 정치적 영향
유인원 작전의 성공은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을 파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나치를 패배시킨 후 수데텐란트를 체코슬로바키아로 반환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의미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영내의 독일인을 추방한다는 생각에도 동의했다.하이드리히는 나치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두 번의 큰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 번은 프라하에서 열렸으며, 수천 명의 친위대원이 횃불을 들고 프라하 성까지 줄지어 섰다. 두 번째는 베를린에서 거행되었으며, 히틀러는 하이드리히의 베개 곁에 독일 훈장과 피의 훈장 메달을 놓았다.
6. 2. 역사적 평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친위대(SS)에서 하인리히 힘러 다음가는 실력자였으며, 유대인 학살 계획의 주요 수행자였다. 그 잔혹성으로 인해 "금발의 야수", "교수형 집행자", "프라하의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하이드리히는 당근과 채찍 통치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지배했다. 체코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즉결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체제파 지도층을 잇따라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으며, 체코 총리 알로이스 엘리아시도 이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한편,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는 식량 배급과 연금 지급액을 증가시키고, 고용 보험을 창출하는 등 회유 정책을 펼쳐 체코의 저항 운동은 쇠퇴해 갔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에서 "인간적인 총독"으로 보이려 노력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사진을 자주 찍게 했으며, 오픈카 상태의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했다. 호위 차량도 거의 붙이지 않았다. 하인리히 힘러와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경호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하이드리히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것은 유인원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6. 3. 한국 독립운동과의 비교
앤스로포이드 작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 특히 의열 투쟁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해외에서 훈련받은 요원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 했던 의열단, 한인애국단 등의 활동과 비교할 수 있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저항 운동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지만, 억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 민족 자결과 독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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