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1818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의사로, 산욕열의 원인이 의료진의 손 위생 불량에 있음을 밝혀낸 선구자이다. 그는 빈 종합병원에서 산욕열 사망률이 높은 원인을 연구하여, 부검 후 손을 씻는 염소 소독법을 도입하여 사망률을 크게 감소시켰다. 그러나 그의 획기적인 발견은 당시 의학계의 보수적인 태도와 권위에 의해 거부당했고, 정신 질환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에 그의 업적은 재평가되어 현대 의학의 중요한 발전에 기여했으며, 손 씻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젬멜바이스 반사'라는 용어로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헝가리의 로마 가톨릭교도 - 존 폰 노이만
    헝가리 출신의 존 폰 노이만은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폰 노이만 아키텍처는 현대 컴퓨터 설계의 기초가 되었고 게임 이론의 창시자로도 알려진 20세기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헝가리의 로마 가톨릭교도 - 살러시 페렌츠
    살러시 페렌츠는 헝가리의 파시스트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 국민단결정부의 국민 지도자 겸 총리로 권력을 잡고 반유대주의 정책을 추진,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전쟁 범죄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출생 이름셈멜바이스 이그나츠 퓈뢰프
출생일1818년 7월 1일
출생지부다, 헝가리 왕국 (1526년~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 (현재의 부다페스트, 헝가리)
사망일1865년 8월 13일
사망지오버되블링, 오스트리아 제국 (현재의 , 오스트리아)
국적헝가리 왕국
결혼마리아 바이덴호퍼(1857년)
자녀5명
분야산부인과, 외과
학력 및 경력
모교빈 대학교
근무 기관빈 종합병원
센트 로쿠스 코르하자
업적
주요 업적1847년부터 산부인과 병원에서 손 소독 표준 도입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Semmelweis Ignác Fülöp
일본어 표기センメルヴェイス・イグナーツ
한국어 표기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참고독일계 성을 가졌으나 독일인은 아니므로 Semmelweiß 또는 Semmelweiss로 표기하지 않음.
당시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동군연합이었으므로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으며, 오스트리아에 귀화한 것은 아님.

2. 생애

젬멜바이스 이그나츠는 1818년 7월 1일 부다(현재 부다페스트) 근교 타반(현재 부다페스트의 일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 젬멜바이스는 키슈말톤(현재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당시 헝가리 왕국) 출신의 독일인으로, 1806년 부다에서 상점을 열 권리를 얻었다. 그는 타반의 마인돌 하우스(아프로드 거리 1-3, 현재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에 "zum Weißen Elefanten"(백상점)이라는 상점을 열고 향신료와 일반 소비재 도매업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1810년, 요제프는 마차 제작공 뮐러 퓌레프의 딸 테레제 뮐러와 결혼했으며, 이그나츠는 이 부부의 10명의 자녀 중 다섯째였다.

젬멜바이스는 1837년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 의학으로 전향했다.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44년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내과 직책을 얻지 못해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선택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카를 폰 로키탄스키, 요제프 슈코다, 페르디난트 폰 헤브라 등이 있다.

2. 1. 출생과 가족

왼쪽, 검은색 드레스에 프릴이 달린 후드와 퍼프 칼라를 착용한 여성의 초상화. 오른쪽, 넥타이를 맨 검은 코트를 입은 남성의 초상화.
이그나츠 젬멜바이스의 부모, 테레지아 뮐러와 요제프 젬멜바이스


1830년 젬멜바이스의 어린 시절 초상화


이그나츠 젬멜바이스는 1818년 7월 1일 헝가리 왕국 부다(Buda)의 타반(Tabán) 지역에서 태어났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1] 그는 부유한 식료품점 주인 요제프 젬멜바이스(József Semmelweis)와 테레지아 뮐러(Teréz Müller)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다섯째였다.

그의 가족은 헝가리 독일인 혈통으로, 아버지는 헝가리 왕국 키슈마르톤(Kismarton, 현재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출신의 민족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부다 출신의 민족 독일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06년 부다 시민권을 얻었고, 같은 해 향신료와 일반 소비재 도매업을 시작했다.[2] 회사 이름은 "Zum weißen Elefanten"(흰 코끼리)이었으며, 오늘날 부다페스트 아프로드 거리(Apród Street) 1~3번지에 위치한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이 있는 메인들 하우스(Meindl House)에 있었다.[3] 1810년, 그는 부유해져 마차 제작업자 휠러프 뮐러(Fülöp Müller)의 딸 테레지아 뮐러와 결혼했다.[4]

2. 2. 초기 생애와 교육


이그나츠 젬멜바이스는 1818년 7월 1일 헝가리 왕국 부다의 타반 지역(현재 부다페스트의 일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식료품점 주인 요제프 젬멜바이스와 테레지아 뮐러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다섯째였다. 그의 가계는 헝가리 독일인 혈통으로, 아버지는 키슈마르톤(현재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출신의 독일계였고, 어머니는 부다 출신의 독일계였다.

아버지 요제프는 1806년 부다 시민권을 얻었고, 같은 해 "Zum weißen Elefanten"(흰 코끼리)이라는 이름으로 향신료와 일반 소비재 도매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오늘날 부다페스트 아프로드 거리 1~3번지에 위치한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이 있는 메인들 하우스에 있었다. 1810년, 요제프는 부유해져 마차 제작업자 휠러프 뮐러의 딸 테레지아 뮐러와 결혼했다.

이그나츠는 1837년 가을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844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과 진료소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젬멜바이스는 산부인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4] 그의 스승으로는 카를 폰 로키탄스키, 요제프 슈코다, 페르디난트 폰 헤브라가 있었다.

3. 산욕열 연구와 염소 소독법 도입

1844년 7월 1일, 제멜바이스는 빈 산부인과 병원의 수련의 조수가 되었고, 1846년 7월 1일에는 빈 종합병원 제1산부인과의 요한 클라인 교수의 조수가 되었다.[1] 당시 빈 병원에는 두 개의 산부인과가 있었는데, 제1산부인과에서는 산모의 10%가 산욕열 등으로 사망했다. 반면 제2산부인과의 사망률은 4% 미만으로, 이 차이는 병원 밖에도 알려져 있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이 속한 제1산부인과가 제2산부인과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당시 산부인과 제도는 영아살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도입되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의 여성도 무료로 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산모들은 의사와 조산사의 훈련 대상이 되었다. 제멜바이스는 병원 밖에서 출산하는 경우가 산욕열에 걸리는 예가 적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1847년, 제멜바이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야코프 콜레치카가 산욕열로 사망한 환자의 시체 해부를 하던 중 실수로 메스에 손가락을 다쳐 사망했다. 그는 이후 산욕열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제멜바이스는 시체의 "오염"과 산욕열의 관계를 발견하고, "손에 묻은 미립자"가 제1산부인과에서 해부실에서 환자로 옮겨졌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빈에서는 세균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제멜바이스는 미지의 "시체 입자"가 산욕열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제멜바이스는 해부실 작업과 환자 검진 사이에 표백분(차아염소산칼슘)을 사용해 손을 소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산욕열 시체를 취급한 후 해부대의 냄새를 없애는 데 염소 소독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차아염소산칼슘을 선택했다.

제멜바이스의 손 씻기 소독이 도입된 후, 제1산부인과의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1847년 4월 18.3%였던 사망률은 5월 중순 도입 이후 6월에는 2.2%, 7월에는 1.2%, 8월에는 1.9%로 감소했다. 이듬해에는 월간 사망률 0%를 두 번 달성하기도 했다.

3. 1. 빈 종합병원에서의 초기 관찰

1846년 7월 1일, 제멜바이스는 빈 종합병원(Vienna General Hospital) 산부인과 제1병동의 요한 클라인 교수의 조수로 임명되었다.[1] 당시 빈 병원에는 두 개의 산부인과 병동이 있었는데, 제1병동은 산욕열로 인한 모성 사망률이 평균 약 10%였던 반면, 제2병동의 사망률은 4% 미만이었다.[2] 제1병동의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여성들은 제2병동에 입원하기 위해 애원할 정도였다.[3] 제멜바이스는 제1병동에 입원하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절박한 여성들을 묘사하기도 했다.[4]

일부 여성들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출산한 것처럼 가장하여 길거리에서 의도적으로 출산하기도 했는데, 이는 감염, 출산 합병증 및 사망 위험이 훨씬 더 높은 병동에 입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제멜바이스는 길거리에서 출산한 여성들에게 산욕열이 드물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병원 밖에서 출산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5]

제멜바이스는 자신이 속한 제1산부인과가 제2산부인과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외견상 두 산부인과의 기술에는 큰 차이가 없었기에, 그는 종교적인 부분까지 포함하여 세세한 차이를 찾으려 했다. 결국, 큰 차이는 일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제1산부인과는 의학생 교육을 위한 병원인 반면, 제2산부인과에서는 1841년에 선발된 조산사만이 근무하고 있었다.

빈 대학교 제1산부인과·제2산부인과의 1841년부터 1846년까지 환자 사망률 추이. 전반적으로 제1산부인과의 사망률이 제2산부인과를 상회하고 있다.


제1산부인과와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로 인한 사망자 수 (1841년-1846년)
연도제1산부인과제2산부인과
출생수사망수사망률 (%)출생수사망수사망률 (%)
18413,0362377.82,442863.5
18423,28751815.82,6592027.6
18433,0602749.02,7391646.0
18443,1572608.22,956682.3
18453,4922416.93,241662.0
18464,01045911.43,7541052.8



제멜바이스는 인구 밀도의 차이를 제외했다. 항상 제2산부인과가 더 붐볐는데도 사망률은 낮았기 때문이다. 또 기후 조건도 두 산부인과가 같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3. 2. 산욕열 원인 규명

제멜바이스는 두 병원의 사망률 차이에 의문을 품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제2병원이 항상 더 혼잡했기에 과밀은 원인에서 제외되었고, 두 병원이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기후도 원인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산모의 출산 자세를 바꾸거나, 병원에서 사제들이 임종 예식을 집행하는 것이 산모들에게 공포를 유발하여 산욕열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제1산부인과와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로 인한 사망자 수 (1841년-1846년)
년도제1산부인과제2산부인과
출생수사망수사망률 (%)출생수사망수사망률 (%)
18413,0362377.82,442863.5
18423,28751815.82,6592027.6
18433,0602749.02,7391646.0
18443,1572608.22,956682.3
18453,4922416.93,241662.0
18464,01045911.43,7541052.8



제멜바이스는 제1산부인과가 제2산부인과보다 훨씬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는 종교적인 부분까지 포함하여 아주 세세한 차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큰 차이는 일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제1산부인과는 의대생 교육을 위한 병원이었고, 제2산부인과에서는 1841년에 선발된 조산사만이 근무하고 있었다.

1847년, 제멜바이스의 친구이자 동료 의사인 야코프 콜레츠카(Jakob Kolletschka)가 부검 중 학생의 메스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콜레츠카의 부검 결과는 산욕열로 사망한 여성들과 유사한 병리 현상을 보였다. 제멜바이스는 즉시 사체(cadaver) 오염과 산욕열 사이의 연관성을 제기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과 의대생들이 부검실에서 환자를 진찰할 때 손에 "사체 입자(cadaverous particles)"를 묻혀 옮긴다고 생각했다. 제2산과 클리닉의 조산사들은 부검에 참여하지 않아 사망률이 훨씬 낮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에는 세균 감염설(germ theory of disease)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멜바이스는 알 수 없는 "사체 물질(cadaverous material)"이 산욕열을 일으킨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부검 작업과 환자 진찰 사이에 염소석회(calcium hypochlorite) 용액을 사용하여 손을 씻는 방법을 도입했다. 염소 용액이 감염된 부검 조직의 부패한 냄새를 제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 물질을 통해 전염되는 원인이 되는 "유독한(poisonous)" 또는 오염시키는 "사체(cadaveric)" 작용물질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제1산과 클리닉의 사망률은 90% 감소하여 제2산과 클리닉과 비슷해졌다. 새로운 손 씻기(hand washing) 절차가 시행되기 전인 1847년 4월의 사망률은 18.3%였다. 5월 중순에 새로운 절차가 시작되어 사망률이 감소했다. 6월 2.2%, 7월 1.2%, 8월 1.9%였다. 이 발견 이후 1년 후 두 달 동안, 해부학적 지침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사망률이 0이 되었다.

3. 3. 염소 소독법 도입과 효과

제멜바이스는 빈 종합병원 제1산부인과와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 차이에 주목했다. 두 병원의 시설과 기술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제1산부인과는 의대생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고, 제2산부인과는 조산사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제1산부인과에서는 의대생들이 부검을 한 후 산모를 진찰하는 경우가 많았다.

1847년, 제멜바이스의 동료 야코프 콜레치카가 부검 중 손가락을 다친 후 산욕열과 유사한 증상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통해 제멜바이스는 부검 시 발생하는 "시체 입자"가 산욕열의 원인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에는 세균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제멜바이스는 이 "시체 입자"가 어떤 미지의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제멜바이스는 "시체 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염소 소독법을 도입했다. 그는 표백분(차아염소산칼슘) 용액으로 손을 씻는 것이 부검 후 시체 냄새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용액이 "시체 입자"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847년 5월 중순부터 제멜바이스는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부검 후, 그리고 산모를 진찰하기 전에 표백분 용액으로 손을 씻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제1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1847년 4월 18.3%였던 사망률은 6월에는 2.2%, 7월에는 1.2%, 8월에는 1.9%로 감소했으며, 이듬해에는 월간 사망률 0%를 두 번 달성하기도 했다.

다음은 1841년부터 1846년까지 제1산부인과와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을 비교한 표이다.

제1산부인과와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 (1841년-1846년)
연도제1산부인과제2산부인과
출생수사망수사망률 (%)출생수사망수사망률 (%)
18413,0362377.82,442863.5
18423,28751815.82,6592027.6
18433,0602749.02,7391646.0
18443,1572608.22,956682.3
18453,4922416.93,241662.0
18464,01045911.43,7541052.8



제멜바이스의 염소 소독법 도입은 산욕열 예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지만, 당시 의학계는 그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4. 의학계와의 갈등

제멜바이스의 발견은 당시 의학계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 원인은 복합적이었는데, 당시의 지배적인 의학적 통념, 젬멜바이스의 주장의 한계,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의학계는 체액설을 굳게 믿고 있었고, 사혈과 같은 치료법이 주를 이루었다. 의사들은 환자 개개인의 체액 불균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산욕열 역시 단일 질병이 아닌 여러 질병의 복합체로 여겨졌다.[1] 이러한 상황에서 젬멜바이스의 주장은 기존 의학 지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또한,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루이 파스퇴르와 조셉 리스터 등에 의해 세균설이 확립된 1860년대 이후에야 그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1]

1848년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변과, 헝가리 출신인 젬멜바이스에 대한 오스트리아 의학계의 불신 또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다.[3] 일부 의사들은 신사로서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손이 더럽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젬멜바이스의 주장을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1]

유럽 대륙과 비교하여 영국에서는 젬멜바이스의 이론이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지만,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그의 이론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들 자신의 이론을 보강하는 것으로만 여겼다.[1]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젬멜바이스는 유럽 전역의 주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때로는 그들을 "무책임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 1861년에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산욕열의 원인, 개념 및 예방''(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을 출판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고 널리 알리고자 했다.[1]

젬멜바이스의 주요 저서: ''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 1861년 (표지)

4. 1. 당시의 의학적 통념

제멜바이스의 관찰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의학적 견해와는 맞지 않았다. 당시에는 질병이 몸 안의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는 체액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사혈과 같은 치료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당시 의학 교과서들은 각 질병이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체액 불균형의 결과이며, 의사의 주요 역할은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3]

산욕열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을 부검했을 때,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이는 산욕열이 한 가지 질병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알려지지 않은 질병들이 섞여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3]

제멜바이스의 주장이 거부된 것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심리적 경향, 즉 '믿음 고착'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일부 과학사학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들의 획기적인 발견에 대한 저항은 흔한 일이며,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3]

결과적으로 제멜바이스의 아이디어는 당시 의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다른 미묘한 요인들도 작용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의사들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들은 신사로서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자신의 손이 더럽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3]

당시 제멜바이스의 연구 결과는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루이 파스퇴르, 조셉 리스터 등이 질병의 세균 이론을 발전시킨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멜바이스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3]

1848년, 제멜바이스는 출산 환자와 접촉하는 모든 기구를 소독하도록 세척 절차를 확대했다. 그리고 사망률 시계열을 이용하여 병동에서 산욕열이 거의 사라졌음을 기록했다.[3]

4. 2. 젬멜바이스에 대한 반발

젬멜바이스의 발견은 당시 의학계의 주류 견해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다. 당시 의학계는 체액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주된 치료법은 사혈이었다. 의학 교과서는 각 질병이 개인의 체액 불균형으로 발생한다고 강조했으며, 환자마다 다른 불균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가르쳤다.[1]

산욕열로 사망한 여성들의 부검 결과는 다양한 신체적 징후를 보였는데, 이는 산욕열이 단일 질병이 아니라 여러 미지의 질병이 복합된 결과라는 믿음을 강화시켰다.[1]

젬멜바이스의 주장이 거부된 것은 믿음 고착이라는 심리적 경향, 즉 기존 믿음을 바꾸기 어려운 현상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부 과학사학자들은 무명 과학자의 획기적인 발견에 대한 저항은 흔하며, 과학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1]

의학계는 젬멜바이스의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일부 의사들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꼈는데, 이는 신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손이 더럽다는 생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루이 파스퇴르, 조셉 리스터 등이 세균설을 발전시킨 1860년대와 18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젬멜바이스의 발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졌다.[1]

1848년, 젬멜바이스는 모든 의료 기구를 세척하도록 절차를 확대했고, 사망률 시계열을 통해 산욕열이 거의 근절되었음을 입증했다.[1]

''폐렴연쇄구균''(적색)은 대부분의 중증 산욕열의 원인균이다. 건강한 사람의 인후와 비인두에서 흔히 발견된다.


1847년 말, 젬멜바이스의 연구 결과는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젬멜바이스와 그의 제자들은 여러 산부인과 병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연구 결과를 알렸다. 페르디난트 폰 헤브라는 1847년 12월과 1848년 4월 의학 저널에 젬멜바이스의 발견을 발표하며, 에드워드 제너우두 접종에 비견할 만한 실용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1]

1848년 말, 젬멜바이스의 전 제자가 그의 연구를 설명하는 강연을 했고, 왕립 의학 외과 학회에서 발표되었다. 이 강연은 ''란셋''에 리뷰가 실렸다. 몇 달 후, 또 다른 전 제자가 프랑스 정기 간행물에 유사한 논문을 발표했다.[1]

빈에서 사망률이 극적으로 감소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젬멜바이스는 염소 소독이 널리 채택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의사들은 그의 주장을 잘못 해석했고, 제임스 영 심슨과 같은 이는 젬멜바이스의 연구가 올리버 웬델 홈스 시니어가 1843년 논문에서 제시한 산욕열 전염성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1]

젬멜바이스는 모든 부패성 유기물을 경고했지만, 그의 연구는 동료나 제자들의 간접 보고서를 통해서만 알려졌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했다. 이러한 오해는 19세기 내내 그의 연구에 대한 논의를 흐리게 했다.[1]

일부 자료는 젬멜바이스가 자신의 방법을 빈 학계에 알리거나 서면으로 설명하는 것을 꺼렸다고 강조한다.[1]

1861년 저서에서 젬멜바이스는 빈에서 1823년 병리해부학 도입 이후 산욕열 발생률이 증가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세로선은 1847년 염소 소독제를 이용한 손씻기 도입을 나타낸다. 더블린 로툰다 병원의 통계는 비교를 위해 제시되었다.


젬멜바이스의 견해는 영국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해보다는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W. 타일러 스미스는 젬멜바이스가 "해부실에서 유래한 미아즘이 산욕열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영 심슨은 신랄한 편지를 통해 영국의 산과학 문헌이 빈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젬멜바이스가 영국에서 산욕열을 전염병으로 여기고 염소 소독제를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

1856년, 젬멜바이스의 조수였던 요제프 플라이셔는 성 로쿠스와 페스트 산부인과 병원에서 손씻기 활동의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했다. 편집자는 염소 소독제를 이용한 손씻기에 대한 이론에 대해 사람들이 더 이상 오도되지 말아야 할 때라고 비꼬았다.[1]

2년 후, 젬멜바이스는 "산욕열의 원인"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 후 2년 뒤, 그는 "산욕열에 대한 나와 영국 의사들의 의견 차이"라는 두 번째 에세이를 발표했다. 1861년, 젬멜바이스는 주요 저서인 ''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느리게 채택되는 것을 한탄하며, "대부분의 의학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유행성 산욕열에 대한 강의와 나의 이론에 반대하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1]

젬멜바이스의 후임이었던 칼 브라운은 교과서에서 산욕열의 원인을 30가지로 밝혔는데, 그중 28번째가 시체 감염이었다. 다른 원인으로는 임신, 요독증, 자궁 압력, 정서적 외상, 식단 실수, 저체온증, 대기 전염병 등이 있었다.[1]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1849년부터 1853년까지 제1과의 사망률을 낮게 유지했는데, 이는 젬멜바이스 자신이 달성한 비율과 거의 일치했다. 이는 브라운이 염소 소독제를 이용한 손씻기를 꾸준히 요구했음을 시사한다.[1]

독일 의사 및 자연 과학자 회의에서 대부분의 연사들은 젬멜바이스의 이론을 거부했는데, 루돌프 피르호도 포함되었다. 피르호의 권위는 젬멜바이스가 인정받지 못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젬멜바이스의 전임자 에데 플로리안 비를리도 젬멜바이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욕열이 장의 불결함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우구스트 브라이스키는 젬멜바이스의 책을 "순진한" 것이라고 거부하고 "산욕열 신학의 코란"이라고 불렀다. 칼 에드바드 마리우스 레비는 시체 입자의 비특이적 성질과 적은 양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로베르트 코흐는 여러 감염 물질이 인체에서 증식할 수 있는 생물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1]

젬멜바이스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기존 관점의 반감을 피했다면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

4. 3. 정치적, 사회적 요인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은 젬멜바이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비엔나에서 의과대학생과 젊은 교수들이 주도한 시위는 시민 권리 확대를 요구했고, 헝가리에서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전면전으로 이어졌다.[3] 젬멜바이스는 헝가리 출신으로 혁명에 동정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상관인 요한 클라인 교수는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인으로 젬멜바이스를 불신했을 수 있다.[3]

젬멜바이스의 임기 만료 후, 칼 브라운이 제1산부인과의 "조수" 자리에 지원했다.[3] 젬멜바이스의 연장 신청은 요제프 슈코다 등의 지지를 받았지만, 클라인은 브라운을 선택했고, 젬멜바이스는 1849년 3월 20일 산부인과를 떠나야 했다.[3] 이후 젬멜바이스는 비엔나 당국에 산부인과 도첸트(사강사)직을 신청했지만, 클라인의 반대로 거부되었다가 1850년 10월 10일에야 '이론적' 산부인과 도첸트로 임명되었다.[3] 그러나 이 직책은 시체 해부 권한이 없었고, 마네킹만을 사용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제한되었다.[3] 젬멜바이스는 임명 통보를 받은 지 며칠 후 비엔나를 떠나 페슈트로 돌아갔다.[3]

1848년부터 1849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는 헝가리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페슈트 일부를 파괴했다.[4] 1850년 페슈트로 돌아온 젬멜바이스는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4]

젬멜바이스의 주장은 당시 의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일부 의사들은 자신들의 손이 불결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젬멜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5]

4. 4. 젬멜바이스의 대응과 좌절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이 당시 의학계에서 거부당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유럽 전역의 주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때로는 그들을 "무책임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 이러한 그의 행동은 동료들에게 짜증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1]

1848년 말, 젬멜바이스의 전 제자 중 한 명이 그의 연구를 설명하는 강연을 런던의 왕립 의학 외과 학회에서 발표했고, 저명한 의학 저널인 ''란셋''에 리뷰가 실렸다.[1] 몇 달 후, 젬멜바이스의 또 다른 전 제자가 프랑스 정기 간행물에 유사한 논문을 발표했다.[1]

1861년에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산욕열의 원인, 개념 및 예방''(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을 출판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고 널리 알리고자 했다.[1]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젬멜바이스는 이에 다시 공개 서한을 통해 비평가들을 공격했다.[1]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젬멜바이스의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점차 고립되었고, 과음과 매춘부와의 만남 등 개인적인 문제도 겪게 되었다.[1] 결국 1865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2주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1]

젬멜바이스의 1862년 ''산과학 교수 일동께 보내는 공개 서한''


1864년 이그나츠 젬멜바이스의 마지막 사진

5. 정신병원 수감과 죽음

1861년 저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젬멜바이스는 공개 서한 형식으로 요제프 슈페트, 스칸조니, 지볼트 등 "모든 산과 의사"에게 반박했다. 그 서한은 "매우 논쟁적이고 극도로 공격적"이었으며,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비판자들을 무책임한 살인범이라거나 무지하다고 욕하였다. 또한 지볼트에게는 독일 어딘가에서 독일 산과 의사들을 모은 포럼을 개최하도록 요구하며, 자신은 "모두가 자신의 주장에 동의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겠다고 말했다.

젬멜바이스는 1865년 8월 15일 비엔나에 매장되었고, 장례식에는 몇몇 사람만 참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의 몇몇 의학 학술지에 간략하게 발표되었다. 헝가리 의사 및 자연 과학자 협회 규정에 따르면 전년도에 사망한 회원을 기리는 추모 연설을 해야 했지만, 젬멜바이스에 대한 연설은 없었고, 그의 사망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야노시 디셰르가 페스트 대학교 산부인과의 젬멜바이스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즉시 사망률이 6%로 6배나 증가했지만, 부다페스트 의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조사나 항의도 없었다.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어디에서도 젬멜바이스의 삶과 업적을 인정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유해는 1891년 부다페스트로 이장되었다. 1964년 10월 11일, 그의 유해는 그가 태어난 집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아프로드 우차 1-3번지에 있는 집은 현재 이그나츠 젬멜바이스를 기리는 의학사 박물관이다.

5. 1. 정신 질환 발병과 수감

1865년 중반, 젬멜바이스의 공개적인 행동은 동료들에게 짜증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과음하기 시작했고, 가족과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으며, 때로는 매춘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성적 행동의 변화를 눈치챘다. 1865년 7월 13일, 젬멜바이스 가족은 친구들을 방문했고, 그 방문 중 젬멜바이스의 행동은 특히 부적절해 보였다.

젬멜바이스의 질병에 대한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K. 코델 카터가 쓴 젬멜바이스의 전기에 따르면, 그 질병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급속한 인지 능력 저하와 기분의 변화를 일으키는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 수천 명의 여성을 무료로 진료했던 당시 산과 의사들이 자주 감염되었던 매독 3기 증상일 수도 있고,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정서적 쇠약이었을 수도 있다.

1865년, 야노시 발라샤는 젬멜바이스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했다. 7월 30일, 페르디난트 리터 폰 헤브라는 헤브라의 "새로운 연구소" 중 한 곳을 방문한다는 구실로 그를 비엔나 라차레트가세에 있는 정신병원(Landes-Irren-Anstalt in der Lazarettgasse)으로 유인했다. 젬멜바이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고 떠나려고 했다. 그는 여러 경비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고, 속박복을 입은 채 어두운 감방에 감금되었다. 정신병원에서의 치료에는 냉수 샤워와 피마자유(하제) 투여가 포함되었다. 그는 2주 후인 1865년 8월 13일, 오른손의 감염으로 인한 부상으로 인한 괴저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상은 격투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검 결과 사인은 패혈증으로 밝혀졌다.

5. 2. 정신병원에서의 삶과 죽음

1865년, 야노시 발라샤는 젬멜바이스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했다. 7월 30일, 페르디난트 리터 폰 헤브라는 젬멜바이스를 비엔나 라차레트가세에 있는 정신병원(Landes-Irren-Anstalt in der Lazarettgasse)으로 유인했다.[1] 젬멜바이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고 떠나려고 했으나, 여러 경비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고, 속박대에 묶인 채 어두운 감방에 감금되었다.[2]

정신병원에서의 치료에는 냉수 샤워와 캐스터 오일(하제) 투여가 포함되었다.[2] 젬멜바이스는 2주 후인 1865년 8월 13일, 오른손의 감염에 의한 부상으로 생긴 괴저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부상은 격투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검 결과 사인은 피혈증(패혈증)으로 밝혀졌다.[3]

젬멜바이스는 1865년 8월 15일 비엔나에 매장되었고, 장례식에는 몇몇 사람만 참석했다.[3] 그의 사망 소식은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의 몇몇 의학 학술지에 간략하게 발표되었다. 헝가리 의사 및 자연 과학자 협회 규정에 따르면 전년도에 사망한 회원을 기리는 추모 연설을 해야 했지만, 젬멜바이스에 대한 연설은 없었고, 그의 사망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3]

6. 유산과 재평가

젬멜바이스의 염소 소독법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을 중심으로 많은 의사들이 손 씻기를 실천했지만, 그들조차도 모든 전염병이 불결함에서 비롯된다는 젬멜바이스의 핵심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스타프 아돌프 미하엘리스는 젬멜바이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자신의 사촌이 출산 후 진찰로 인해 사망하자 죄책감을 느껴 자살했다.

테헤란 대학교에 있는 젬멜바이스 동상


젬멜바이스를 묘사한 2008년 오스트리아 기념주화(유로(€) 50 금화)


젬멜바이스의 출생지이자 현재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이 된 곳

6. 1. 과학적 재평가

루이 파스퇴르의 질병 세균 이론 연구는 젬멜바이스의 관찰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하며, 20년 이상 늦게 그의 업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데 기여했다.[1] 젬멜바이스의 이야기는 과학철학 강좌 등에서 경험론 또는 실증주의의 장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사용된다. 칼 구스타프 헴펠은 그의 저서 ''자연과학의 철학''에서 젬멜바이스의 방법이 의사가 일련의 가설을 제시하고 연역적-명제적 모델에 따라 오류 가능성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현대 과학 연구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1]

젬멜바이스의 비평가들이 자신들을 실증주의자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시체 입자"가 사람을 시체로 만들 수 있다는 마법적이고 미신적인 이론에 직면했을 때 실증주의조차도 문제를 겪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젬멜바이스는 수십 년 전의 추측적인 이론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아이디어가 당대에 조롱당하고 거부되었기 때문에, 뿌리 깊은 규범, 신념 또는 패러다임과 모순되는 새로운 지식을 자동적으로 거부하는 인간 행동의 특성은 젬멜바이스 반사라고 불린다.

젬멜바이스는 현재 소독제 정책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2] 그의 유산은 다음과 같다.

  • 젬멜바이스 대학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의학 및 보건 관련 분야의 대학교이다.
  •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은 그의 출생지에 위치해 있다.
  • 젬멜바이스 클리닉(Semmelweis Klinik)은 오스트리아 에 위치한 여성을 위한 병원이다.
  • 미슈콜츠에 있는 젬멜바이스 병원.
  • 헝가리 키슈쿤할라스에 있는 젬멜바이스 병원.
  • 2008년, 젬멜바이스의 이미지가 오스트리아 유로 기념주화의 앞면으로 선정되었다.
  • 소행성 4170 젬멜바이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32년 7월 1일 헝가리에서 "유명한 헝가리인" 시리즈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우표: 이그나츠 젬멜바이스 (1818~1865), 의사''
  • 1954년 12월 5일 헝가리에서 "과학자" 시리즈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 구글 두들에 포함되어 2020년 3월 20일부터 코로나19 범유행 동안 손씻기를 장려했다.
  • 이그나츠 젬멜바이스 상(Ignác Semmelweis Prize)은 헝가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학상이다.[2]
  • 2023년 1월 13일, 런던 퀸메리 대학교에서 젬멜바이스의 흉상이 공개되었다.[3]

6. 2. 사회적 영향

부다페스트의 세인트 로쿠스 병원에 있는 젬멜바이스 동상 (알라요슈 스트로블 작, 1904년)


젬멜바이스의 이론은 사후 20년이 지나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과 질병의 관계를 밝혀낸 이후에야 과학적 근거를 얻고 올바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젬멜바이스와 그의 주장이 거친 경위는 인식론과학철학 분야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그것은 경험론실증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장이며, 무엇이 "과학적"으로 여겨졌는지(즉, 널리 받아들여졌는지), 무엇이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의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1]

정설과 반대되는 새로운 지식에 접한 사람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은 젬멜바이스 반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이 동시대인들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고, 계속 거부당했던 젬멜바이스의 이름을 딴 용어이다.

젬멜바이스는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그의 이름을 남겼다.

  • 살균제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 젬멜바이스 대학교: 부다페스트의 의학 및 보건 관련 분야 대학교이다.
  • 젬멜바이스 의학사 박물관: 젬멜바이스의 생가가 있던 곳에 세워져 있다.
  • 젬멜바이스 클리닉: 빈에 있는 여성을 위한 병원이다.
  • 젬멜바이스 병원: 미슈콜츠(헝가리)에 있는 병원이다.
  • 2008년, 젬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의 50EUR 기념금화 초상화에 선정되었다.
  • 소행성 (4170) 젬멜바이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32년 7월 1일부터 헝가리 우표의 "저명한 헝가리인"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다.
  • COVID-19 유행으로 세계적으로 손씻기가 권장되던 2020년 3월 20일에는 구글의 첫 화면이 "Recognizing Ignaz Semmelweis and Handwashing (젬멜바이스 이그나츠의 손씻기 제창을 기념하여)"라는 제목의 특별 디자인(구글 두들 참조)으로 변경되었다.

6. 3. 한국 사회에의 시사점

젬멜바이스의 사례는 한국 사회, 특히 의료계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젬멜바이스가 강조했던 손 씻기의 중요성이 재조명되면서, 감염병 예방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2] 2020년 3월 20일, 구글 두들(Google Doodle)은 코로나19 범유행 동안 손 씻기를 장려하기 위해 젬멜바이스를 기념하는 특별 디자인을 선보였다.[2] 이는 젬멜바이스의 업적이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공중 보건을 위한 기본적인 수칙이 시대를 초월하여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Prentice-Hall, Inc.
[2] 웹사이트 Karikó Katalin megkapta a legrangosabb magyar orvosi díjat https://m.hvg.hu/tud[...] 2021-05-25
[3] 웹사이트 Ignác Semmelweis Statue Inaugurated in London https://dteurope.com[...]
[4] 뉴스 Az is bolond, aki zsenivé lesz Magyarországon – ilyen lenne Thuróczy Szabolcs az el nem készült Semmelweis-filmben https://24.hu/kultur[...] 2022-09-26
[5] 웹사이트 Full cast announced for Mark Rylance's Dr Semmelweis at Bristol Old Vic https://www.whatsons[...] 2021-11-29
[6] 웹사이트 Dr Semmelweis https://bristololdvi[...] 2022-01-07
[7] 웹사이트 http://semmelweis.hu[...]
[8] 웹사이트 名誉回復:手洗い唱えた医師、不遇の生涯 100年後の名誉回復 https://style.nikkei[...] NIKKEI STYLE 2020-03-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