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체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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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마일 체말리는 1844년 오스만 제국령 블로러에서 태어나 오스만 제국과 알바니아 독립 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오스만 제국 관료로 활동하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압둘하미드 2세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후 망명 생활을 하며 알바니아 민족 운동에 참여, 1912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하고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1914년 사임 후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19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사망했다. 그는 알바니아에서 '국부'로 존경받으며, 알바니아 지폐에 그의 초상이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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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체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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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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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이스마일 체말 베이 블로라 |
원어 이름 | sq: Ismail Qemal Bej Vlora tr: Avlonyalı İsmail Kemal Bey |
별칭 | sq: Babai Kombit (국가의 아버지) |
출생일 | 1844년 1월 16일 |
출생지 | 블로러, 야니나 빌라예트, 오스만 제국 (현재의 알바니아) |
사망일 | 1919년 1월 26일 |
사망지 | 페루자, 이탈리아 왕국 |
국적 | 알바니아 |
경력 | |
직업 | 정치가 |
학력 | 조시마이아 학교 |
모교 | 이스탄불 법과대학 |
정치 경력 | |
직책 | 알바니아의 총리 |
임기 시작 | 1912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914년 1월 22일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투르한 페르메티 |
직책 | 알바니아의 외무부 장관 |
임기 시작 | 1912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913년 6월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무피드 리보호바 |
직책 | 오스만 제국 대의원 의원 |
임기 시작 | 1908년 12월 23일 |
임기 종료 | 1912년 1월 17일 |
선거구 | 블로러 산자크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나시페 하나미 클레오니키 수르멜리 |
자녀 | 10명 (1명은 출산 중 사망) |
부모 | 아버지: 마흐무트 베이 블로라 어머니: 헤디예 리보호바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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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 [[파일:Titulli "Hero i Popullit".svg|17px]] 영웅 |
2. 초기 생애와 교육
이스마일 체말리는 1860년 5월 이스탄불로 이주한 후, 오스만 제국의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1] 그는 오스만 제국 헌법의 저자인 미드하트 파샤의 개혁파와 뜻을 같이했으며, 그와 긴밀히 협력했다.[1] 그는 여러 발칸 지역 도시의 지사를 역임했다. 이 시기에 알바니아어 알파벳 표준화 작업에 참여하여 알바니아어 표기에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지지했으며,[2] 알바니아 문화 협회 설립을 지원했다.
이스마일 체말리는 1877년 서부 아나톨리아로 추방되었다가 베이루트 지사로 복직했으나, 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의심을 받았다. 1892년 체말리는 술탄에게 발칸 연합 계획을 제시했는데, 이 계획은 발칸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정을 통해 통일된 대동방 국가를 건설하고, 과거 국경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틀 내에서 알바니아는 별도의 국가가 아닌 오스만 국가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스마일 체말리는 1844년 1월 16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블로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후, 이오안니나의 조시마이아 학교를 거쳐 이스탄불의 오스만 법학 학교를 졸업했다. 체말리는 그리스인 여성 클레오니키 수르멜리와 결혼했으며, 자녀들을 그리스에서 교육받도록 했다.
3. 오스만 제국 관료 경력
1877년까지 체말리는 오스만 행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듯했으나, 오스만 술탄 압둘하미드 2세(재위 II. Abdülhamid|1876년tr~II. Abdülhamid|1909년tr)가 미드하트를 총리에서 해임하자 이스마일 체말리는 서부 아나톨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술탄은 나중에 그를 소환하여 베이루트의 지사로 임명했다. 1892년 체말리는 술탄에게 발칸 연합 계획을 제시했다.[3] 이 계획은 발칸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 간의 협정을 포함하며, 궁극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된 대동방 국가 내에서 상호 방어 및 자원 개발 경제 협정을 통해 묶이고, 과거 국경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 이 틀 내에서 알바니아는 북마케도니아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국가가 아닌 오스만 국가의 일부로 간주되었다.[3]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자유주의적 정책 권고는 술탄의 호감을 다시 잃게 만들었다.[1] 체말리는 1895년의 아르메니아 위기로 인해 제국이 열강의 개입에 근접했음을 알고 있었다.[4] 압둘하미드 2세는 체말리에게 트리폴리의 지사(''왈리'') 직책을 수여했지만, 그는 이 고위직을 유배로 여겼다.[1]
4. 망명과 알바니아 민족 운동
1900년, 체말리는 영국 대사의 요트를 타고 망명길에 올라 이후 8년 동안 해외에서 알바니아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1] 아테네로 떠나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복무를 포기했음을 발표했고, 알바니아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큰 명성과 영향력을 가져왔다.[1]
파리에서 체말리는 파이크 코니차와 협력하며 알바니아의 단결과 독립을 촉구했다.[2] 그러나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인해 사이가 틀어졌고, 체말리는 오스만 튀르크어, 알바니아어, 그리스어로 ''셀라메트''(구원)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알바니아인과 그리스인 간의 협력을 촉구했다.[2] 하지만 일부 알바니아 활동가들은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그의 인기는 시들해졌다.[2]
체말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알바니아인들이 통일된 민족적 의견을 개발하고, 세속 학교를 설립하며, 자치를 달성하도록 돕도록 제안했다.[3] 이후 아르버레쉬인과 가까워지면서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어 알바니아에 대한 이탈리아 정책을 지지했다.[4]
그의 청년 튀르크당과의 관계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4. 1. 청년 튀르크당과의 관계
이스마일 체말리는 파리에서 열린 오스만 반대파 회의(1902)에 참여하여 메흐메트 사바하딘 왕자가 이끄는 파벌을 지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개혁, 소수 민족 권리, 혁명, 그리고 제국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요구했다.[1]
1902년 회의 결과, 발칸 반도에는 어떠한 조직도 설립되지 못했다. 체말리를 사칭한 사람이 불가리아 공국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많은 무슬림을 속이는 사건도 발생했다.[2] 회의 이후 '영구 위원회'를 만들려는 시도와 함께 새로운 중앙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체말리와 오스만 왕자 사바하딘, 루트풀라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3] 이후 왕자들의 집에서 열린 새로운 위원회의 영구 위원회 회원 모임에서 체말리는 의장으로 임명되었다.[4] 공식 CUP 신문 ''오스만리''에 대한 통제권은 이전 중앙 위원회 회원들에서 새로운 중앙 위원회의 사바하딘 왕자와 체말리에게 넘어갔다.[5]
새로운 위원회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적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려 했지만, 아르메니아 조직들은 체말리와 같은 인물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6] 체말리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알바니아는 새로운 위원회의 표적이 되었다. 신문 ''오스만리''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제국 내 영토를 발칸 국가들과 서방 국가들이 분할할 것이라는 경고 기사가 실렸다. 이러한 출판물은 체말리를 위해 일했던 젬일 블로라(아블로냐르 제밀)와 같은 협력자를 통해 알바니아에서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체말리는 주프 카스트라티를 위한 호소를 준비하거나 파리에 알바니아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알바니아 운동 지도부를 지원했다.
체말리가 지원하는 저널은 알바니아 자치를 촉진했지만, 새로운 위원회는 알바니아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는 오스만 왕자들과 함께 자신들을 탄지마트 개혁 시대의 정치가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체말리는 술탄을 전복하는 것과 알바니아 민족 운동을 점점 더 지지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1902년과 1903년 사이, 청년 튀르크당은 압둘하미드 2세를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 계획에는 셰브케트 베이 대령과 레제프 파샤 마티(Recep Pasha)가 군사적 측면을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고, 케말리와 사바흐에딘 왕자는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고 작전을 위한 선박 두 척을 구매하는 임무를 맡았다. 케말리의 임무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그는 파리에 부대를 유지하고, 망명 중인 고위 정치인으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오스만 정부가 그의 진정한 목표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런던을 자주 방문했다. 오스만 당국은 케말리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등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케말리는 쿠데타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에드먼드 몬슨 경과 토마스 샌더슨 경 등 영국 정부 관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방문했다. 그는 외교·연방·개발부(Foreign Office)로부터 답신을 받았지만, 케말리는 영국의 지원 수준을 과장했으며, 작전에 대한 도덕적 지원과 모호함만 있었다. 그는 영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그의 아들이 비틀리스로 망명한 것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영국은 케말리와 그의 협력자들의 활동을 인지하고 있었다.
케말리는 또한 런던에 있는 오스만 외교관들과도 이 계획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 중에는 청년 투르크당을 위해 비밀리에 일했던 레시드 사디도 있었다. 그는 크로머 백작 이블린 베링(Evelyn Baring, 1st Earl of Cromer)에게 "터키 문제"가 시급한 문제임을 설득하려 했고, 크로머 백작은 그 의견에 동의하여 외무부에 답신을 약속했다. 그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집트의 아바스 2세와 비밀리에 만났지만, 케디브는 나중에 케말리에 대한 의구심으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결국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케말리는 배를 구하는 것에 대한 지연된 협상을 탓했고, 레제프 파샤는 케말리의 미온적인 태도가 그의 마음을 바꾸는 이유라고 보았다. 사바흐에딘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케말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돈을 챙겼다는 견해가 있었다. 1908년 청년 투르크 혁명 이후, 청년 투르크당에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케말리가 음모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며, 왕자로부터 돈을 빼앗은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케말리는 청년 투르크당과 관계를 끊고 1903년 8월 16일, "알바니아 애국자"로서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알바니아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를 추구했다.
1907년, 체말리와 그리스 정부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동맹 가능성에 관한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측은 알바니아 독립에 대한 그리스의 지원을 대가로 미래의 그리스-알바니아 국경선을 케라우니아 산맥에 위치시키고, 해당 지역에서 알바니아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는 데 합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년 튀르크당(CUP)은 그리스와의 협약에 대해 체말리를 심하게 비판했다.
5. 1908년 혁명과 알바니아 독립 운동
청년 튀르크 혁명 (1908) 이후, 이스마일 체말리는 망명에서 돌아와 복원된 오스만 의회에서 베라트 지역 대표 의원으로 활동했다.[5] 그는 자유주의 정치인들과 협력하고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정부 개혁을 촉구했다.[5][6] 또한, 오스만 의회 내 알바니아 의원들의 지도자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합병을 인정하면서도, 발칸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시 제국의 안보 보장을 강조했다.[5]
31 마르트 사건 당시 자유당 지도부는 반란을 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체말리는 의원들을 설득하여 의회에 참석시키고, 군대의 요구를 수용하여 헌법과 샤리아 유지를 발표하게 했다. 잠시 오스만 국민 의회 의장을 맡아 새 정부를 인정하도록 이끌었으며, 발로러 지역구에 전보를 보내 새 정부를 인정하라고 알렸다. 그의 고향 알바니아인들은 그를 지지하며 술탄 지원을 위한 무장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후 체말리는 반란 진압 전 도시를 떠나 그리스로 피신했으나, 정부 조사 결과 무혐의로 밝혀졌다.
이후 체말리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운동에 집중했다. 1909년 남부 알바니아 게릴라 활동 증가로 오스만 정부의 의심을 받았으며, 아테네 주재 오스만 대사관은 체말리가 그리스 지원 단체와 연합 협상을 했다고 보고했다. 1910년, 체말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에게 청년 투르크 정부가 알바니아인에 대한 분할 통치 정책을 시행한다고 비판했다.
1911년 알바니아 반란 당시, 체말리는 몬테네그로 왕국 게르체 마을에서 열린 반란 지도자 회의에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알바니아 자치, 학교 및 언어 권리, 알바니아인 인정 등을 요구하는 "게르체 각서"를 작성하여 오스만 제국과 유럽, 특히 영국에 요구했다. 1911년 12월, 체말리는 하산 프리슈티나와 함께 이스탄불에서 알바니아 정치 명사들을 소집하여 알바니아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체말리는 알바니아 독립 운동 지원을 얻기 위해 유럽에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파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료들과 만나 알바니아의 지정학적 이익을 지지하면 알바니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1912년 알바니아 반란 관련 논쟁에서 체말리는 오스만 제국 내 알바니아 자치를 옹호하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6. 알바니아 독립 선언과 초대 총리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1912년 9월, 체말리는 루이지 구라쿠키와 함께 부쿠레슈티로 건너가 루마니아의 알바니아 공동체와 상의했다.[1] 이후 비엔나로 가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과 연락하며 알바니아 문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지지했다.[1] 11월 12일, 체말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부 관리들과 만났는데, 그들은 알바니아인들에게 공감했지만 전쟁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1]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외무 장관은 체말리의 견해를 지지하며 그에게 배를 제공했다.[1] 체말리는 트리에스테에서 11월 중순 두러스로 항해했지만, 세르비아 왕립군이 접근하자 블로러로 떠나 11월 26일에 도착했다.[1] 한편, 그의 아들 에템은 알바니아 전역에서 대표들을 블로러로 소환했다.[2]
체말리는 1912년 11월 28일 블로러 의회에서 알바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하고 독립 알바니아를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1][2] 이는 알바니아에서 400년 이상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알렸다.[2] 그는 구라쿠키와 함께 독립 선언이 서명된 블로러의 2층 건물 발코니에 알바니아 국기를 게양했다.
정부 수립은 알바니아 각 지역 대표들이 도착할 때까지 1912년 12월 4일까지 연기되었다.[1] 오스만 제국 각료 회의는 알바니아 자치를 선호하며 그의 행동에 반대했고, 체말리에게 오스만 제3군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2]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인식한 체말리는 열강에게 독립 알바니아를 인정하고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2]
이후 체말리가 알바니아를 떠난 후, 알바니아 전역에 혼란이 발생했다.[3]
6. 1. 베키르 피크리 사건
1913년, 오스만 제국은 베키르 피크리 중령을 알바니아로 보내 아흐메트 이제트 파샤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제트 파샤는 알바니아 출신의 오스만 장교이자 CUP 회원으로, 알바니아 왕위 후보였다.[1] 피크리는 이제트 파샤의 사절로 활동하며 이스마일 체말리와 접촉하여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만, 알바니아, 불가리아의 공동 군사 작전을 제안했다.[1] 이 작전에서 알바니아는 코소보와 차메리아를 할당받을 예정이었다.[1]체말리는 피크리에게 이제트 파샤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고, 세르비아와 그리스 군대에 대한 게릴라전을 위해 군대와 무기를 비밀리에 들여오려는 이스탄불 CUP 정부의 계획을 지지했다.[1] 피크리는 이스탄불에 탄약, 무기, 병력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1] 그러나 세르비아가 이 음모를 국제 통제 위원회(ICC)에 보고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1] ICC는 알바니아 헌병으로 복무하는 네덜란드 장교들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음모를 중단하도록 했다.[1] 1914년 1월 7~8일, 네덜란드 장교들은 블로러를 급습하여 200명이 넘는 오스만 군인을 발견하고 피크리를 체포했다.[1] 피크리는 군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체말리와 그의 내각은 사임했다.[1]
7. 망명과 죽음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동안 체말리는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자금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인맥을 유지하며 영국의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 대륙판 특파원 소머빌 스토리와 협력하여 회고록을 썼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 자서전은 영어로 쓰인 유일한 오스만 제국 말기 정치인의 회고록이며, 쇠퇴해 가는 제국의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고 다문화적인 접근 방식을 담은 독특한 기록이다. 1918년 체말리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여행하여 알바니아에서 자신의 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 금지되었고, 페루자의 한 호텔에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물러야 했다. 그는 1919년 1월 2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그의 시신은 블로러로 옮겨져 베크타시 교단의 현지 테케에 묻혔다.
8. 유산과 평가
이스마일 체말리는 알바니아에서 Babai i Kombit|국부sq로 기념된다.[1] 그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발행된 알바니아 200 레크 지폐의 앞면과 1996년부터 발행된 500 레크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1] 2012년 6월 27일, 알바니아 대통령 바미르 토피는 체말리에게 국가 깃발 훈장(사후)을 수여했다.[1]
참조
[1]
간행물
Studia Albanica
https://books.google[...]
L'Institut
[2]
서적
Arnavutluk İttihad ve Terakki
Ahmed Nezih Galitekin
[3]
웹사이트
Bank of Albania
http://www.bankofalb[...]
2009-03-06
[4]
웹사이트
Bank of Albania
http://www.bankofalb[...]
2009-02-26
[5]
웹사이트
Website Zyrtar
https://web.archive.[...]
2018-02-21
[6]
서적
Modernisierung durch Transfer zwischen den Weltkriegen
https://books.google[...]
Vittorio Klosterman GmbH
201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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