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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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주영은 북위 말기의 군벌로, 6세기 초 북위의 혼란기에 권력을 장악하고, 528년 하음의 변을 일으켜 영태후와 효명제의 종손 원소를 살해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효장제를 옹립하고 딸을 황후로 삼아 외척으로 권력을 강화했지만, 효장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북위의 쇠퇴와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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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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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523년 북위에서 6진의 난이 발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반란은 530년 장군 이주영이 진압했지만, 그 후 북위는 양나라 군대의 침공과 이주씨 일파의 전횡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되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1]
이주영은 하음의 변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고, 육진의 난을 평정하여 진양에서 조정을 움직였다. 그러나 휘하 장수 고환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였다.
이주영 사후, 532년 고환은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를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으며,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을 장악했다.[2]
이주영은 표면적으로는 효장제에게 권한을 반환했지만, 군대의 지휘권을 유지하고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 효장제를 감시했다. 또한 효장제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기를 원했고, 효장제는 근친상간에 해당했기에 주저했지만 결국 승낙했다.[4]
효장제는 정사에 근면했지만, 형사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주영이 추천한 모든 관리 임명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주영과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았고, 이주영은 계속해서 자신의 측근들을 황실 행정에 배치했다.[4]
하지만 효장제는 이주 세력의 승리에 불만을 품었고, 이주영의 찬탈이 현실로 다가온다고 믿었다. 그는 궁궐 안에서 질투심 많은 이주 황후의 압박을 느꼈다. 결국 530년, 효장제는 이주영을 궁으로 불러들여 암살했다.[5]
이후 이주씨 일족은 효장제를 살해하고, 원공(절민제)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주영은 진왕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는 무(武)였으며, 효문제의 사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532년 고환에 의해 이주씨가 멸망한 후, 이주영에게 주어진 많은 명예가 제거되었다.[5]
위수는 이주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5]
:''이주영은 부하들이 충성을 다하는 제국의 장군이었다. 효명제의 독살은 백성과 신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약자를 구원하고 낡은 왕조를 재건하려는 야망을 품었고, 그의 정의로운 봉기는 하늘의 문이 열린 것과 같았다. 백성들의 마음은 잃었고, 관리와 장군들의 사기는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누군가가 정의의 목소리를 내어 봉기를 시작하기를 바랐다. 이주영은 쉽게 성공했고, 정부와 백성 모두 그를 따랐다. 그는 왕위에 왕자를 앉혀 정부가 군주를 갖도록 했고, 황실 조상들이 하늘과 함께 숭배하도록 했다. 제국의 전통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반군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이 반군 지도자들은 지역을 점령했고, 사소한 도둑이 아니었다. 이주영이 이러한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주장했을 것이다. 이주영의 업적이 위대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왕위를 빼앗고 싶어했고, 이주 황후와 어린 원조를 황하에 던졌다. 하음 학살에서 모든 존경받는 관리들이 학살되었다. 이것이 그가 인간과 신에게 정죄받고 죽임을 당한 이유였다. 이주영이 반역과 잔혹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덕과 정의를 장려했다면, 이윤이나 곽광조차 그와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반역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았고 갑자기 폭력적으로 죽었다.''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주영은 493년 효문제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저 출신 계호 부족의 세습 수장이었으며,[3] 에르주 강(현대 산시 성 주자강)에 정착한 후 에르주를 성씨로 사용했다. 이주영의 증조부인 에르주 위젠(爾朱羽健)은 도무제의 원정에 참여하여, 에르주의 세습 영지로 시룽(秀容, 현대 삭주, 산시성) 지역을 하사받았다.[4]이주영은 창백한 피부를 가진 미남으로 묘사되었으며, 결단력 있고 야심이 있으며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고 특히 군 기강에 엄격했다. 그는 효명제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제국이 붕괴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가축의 일부를 팔아 용감한 전사들을 주변에 모았다. 그는 문성제의 형제인 남안왕 위안전(元禎)의 딸과 결혼하여 황실 위안 씨의 먼 친족과 연대를 강화했다.
이주영은 북위의 산기상시·평북장군이었던 이주신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은퇴하자 수용 제일 령민 추장의 작위를 이었다. 처음에는 직침·유격장군에 임명되었다.
2. 2. 육진의 난 진압과 권력 장악
524년, 북위가 다수의 농민 반란에 직면한 가운데, 이주영은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시룽 출신의 기후 모유(乞伏莫于)의 반란을 격파하고 장군직을 받았다. 528년, 효명제가 독살당하고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이주영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진격하여 효장제를 옹립하고 대장군, 상서령 등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하음의 변을 일으켜 황족과 조정 대신 등 2,000명 이상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 사건은 북위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1]528년, 무천진에 있던 이주영은 생모 영태후의 전횡을 제거하도록 효명제의 밀조를 받았지만, 음모가 발각되어 효명제는 생모인 영태후에 의해 독살당했다.[6] 이에 이주영은 군측의 간신을 제거한다고 칭하며 거병하여 고환을 선봉으로 낙양을 공격했다.[6] 비구니가 되어 사죄한 영태후를 용서하지 않고, 어린 군주 원소 (효명제의 종손)와 함께 황하에 던져 살해했다.[6] 또한 황족과 조정 대신 등 2000명 이상이 이와 같이 살해되었다.[6]
이주영은 장락왕 원자유(효장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의 장녀 (원 이주빈)를 아내로 삼아 그 외척이 되었다. 사지절·시중·도독중외제군사·대장군·개부·상서령·영좌우·영군장군에 취임하여 태원왕에 봉해졌다.
2. 3. 북위 조정 장악과 반란 진압
효장제를 옹립한 후, 이주영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군사적 권력을 바탕으로 조정을 장악했다.[4] 효명제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여러 반란을 진압하며 제국의 재통일을 시도했다.528년, 거롱의 반란을 진압하고, 529년에는 형고의 반란을 진압했다. 530년, 이주천광을 파견하여 모기추노의 반란을 진압하고, 소보인에게 자결을 명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이주영은 사실상 북위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4]
2. 4. 효장제와의 갈등 및 암살
530년 가을, 이주황후가 임신하자 이주영은 딸의 출산을 돌보기 위해 수도 낙양으로 오겠다고 요청했다. 효장제는 이주영이 궁에 오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측근들은 수도에 있는 이주영의 측근들을 학살하고 군사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효장제는 망설이다가 처음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5]한편, 이주세륭은 효장제의 음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주영에게 보고했지만, 이주영은 효장제가 자신을 거스르리라고 믿지 않고 낙양에 도착했다. 낙양 백성들은 이주영의 쿠데타나 효장제의 저항을 예상하고 도망쳤지만, 이주영은 최소한의 경비와 무기만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효장제는 처음에는 그에게 대항하지 않으려 했으나, 사촌의 남편인 연양왕 원휘는 이주영이 쿠데타를 계획하지 않더라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효장제를 설득했다.[5]
효장제는 진양에 있던 원천목이 잠재적 위협이 될까 두려워 그를 수도로 소환했다. 이주영이 효장제를 체포하고 수도를 진양으로 옮기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효장제는 더욱 불안해하며 음모 실행을 서둘렀다. 그는 한나라 장군 동탁의 역사 기록을 연구하고, 동탁 사후 왕윤의 실패는 동탁 측근들을 용서하지 않아 반란을 초래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하여 이주영을 먼저 죽이고 일반 사면을 선포할 준비를 했다.[5]
이주황후가 출산했다는 핑계로 효장제는 이주영과 원천목을 궁궐로 소환하여 기습, 이주영과 그의 아들 이주보제, 그리고 원천목을 죽였다. 이주영의 죽음에 백성들은 기뻐했지만, 이주영의 아내 북향공주는 슬퍼했다. 결국 이주세륭과 이주조 등이 군대를 모아 효장제를 격파하고 살해했다.[5]
3. 가족
관계 | 이름 |
---|---|
아내 | 북향군장공주 |
장녀 | 이주영아 |
아들 | 이주보리 |
아들 | 이주차라 |
아들 | 이주문수 |
아들 | 이주문창 |
아들 | 이주문략 |
4. 평가
이주영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북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을 재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523년 북위에서 일어난 6진의 난을 530년에 진압하여 그 능력을 입증했다.[1] 하지만, 이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한 이주씨 일파의 전횡은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고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1]
특히, 528년 이주영이 일으킨 하음의 변은 그의 잔혹한 통치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3] 이 사건으로 승상 이하 대신 1,000명이 살해되었고, 이는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무자비한 학살 행위였다.[3]
이주영은 진양에서 조정을 움직이며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의 폭정은 휘하 장수 고환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3] 결국 고환은 이주씨와 대립하게 되었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를 폐위하고 효무제를 옹립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4] 이주씨 일당은 각지에서 격파되었고, 이는 북위의 분열과 멸망을 가속화시켰다.[4]
참조
[1]
서적
Book of Wei
[2]
기타
Zizhi Tongjian
[3]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4]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antiquity through Sui, 1600 B.C.E.-618 C.E.
https://books.google[...]
M.E. Sharpe
2012-02-09
[5]
서적
Wei Shu
[6]
문서
奚胡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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