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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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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지는 진위 이씨 출신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관 사관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명나라에 성절사,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며,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척불론을 내세우며 유교 이념 정착에 힘썼고, 지방관으로 민정을 살피고 빈민 구제에 힘썼다. 사헌부대사헌으로 시무책을 올리고,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경제 정책을 펼쳤다. 태조가 사망하자 태종은 이지와 맹사성에게 태조의 시책을 빈전에 올리게 했으며, 이지 사후에는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황희, 맹사성, 윤회 등에게 국정 운영에 대한 조언과 가르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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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문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지
원래 이름李至
직책조선국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군주고려 공민왕, 고려 우왕, 고려 창왕, 고려 공양왕, 조선 태조, 조선 정종, 조선 태종
본관진위(振威)
별명자 지격(至格), 호 퇴암(退菴), 시호 문간(文簡)
출생일미상
출생지고려 개경부
사망일1414년 12월 9일
경력문인 겸 정치가
종교유교(성리학)

2. 생애

이지는 진위를 본관으로 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지격(至格), 호는 퇴암(退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관에서 사관(史官)으로 복무하였다. 1383년(우왕 9) 좌사의대부에 올랐으며, 1388년 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을 역임하고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밀직사에 올랐다. 이듬해 밀직제학에 제수되었고, 1392년 공양왕의 세자 정성군 왕석(王奭)의 태사(太師)가 되었다.

이후 예문관·춘추관 대학사를 거쳐 1401년(태종 1)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었고, 1407년 형조판서가 되어서는 공신들의 횡포를 제거하고자 했으며, 그 뒤 예조판서·판한성부사를 지냈다.

2. 1. 조선 건국과 개혁 정치

이지는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를 역임하면서 척불론(斥佛論)을 내세워 유교 이념 정착에 힘썼다. 1393년(태조 2)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를 따라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1396년 상의중추원사로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도찰리사(都察理使)가 되어 민정을 시찰했고, 1398년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영농과 양병, 특히 빈민 구제에 힘썼다.

2. 2.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

이지는 1383년(우왕 9) 한학과 문장에 능하여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후, 이듬해 하정사(賀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에는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를 따라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2. 3. 지방관으로서의 활동

1396년 상의중추원사로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도찰리사가 되어 민정을 시찰했고, 1398년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영농과 양병, 특히 빈민 구제에 힘썼다.

그 뒤 충청도도관찰사를 지냈다.

2. 4. 시무책 제시와 경제 정책

1401년(태종 1)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어 시무책을 올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서내용
첫째가묘법(家廟法)을 엄격히 할 것
둘째행정을 공평히 할 것
셋째감찰기능을 강화할 것
넷째서북면에 대한 진휼책 실시를 주장



이어서 예문관 대제학·서북면도순무사를 역임하고, 1405년 호조판서가 되어 경제 시책으로서 공신전을 감축해 재정을 확보하고, 광흥창의 양곡을 풍저창·군자감으로의 전용을 금지시켜 녹봉제의 토대를 정비하였다.

2. 5. 강직한 성품과 말년

이지는 직무에 충실했으며 성품이 강직했다고 한다.

태종 8년 9월 4일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태종은 이지와 맹사성에게 태조의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빈전(殯殿)에 올리게 하였다. 시보는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 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씌여 있었으며, 체제는 봉숭(封崇)하는 금보(金寶)의 예를 따랐다.

태종 14년 12월 9일 이지가 사망하자, 태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맹사성, 황희, 윤회와의 관계

이지는 고려 공민왕 시절부터 황희, 맹사성, 윤회와 함께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이들은 훗날 세종 대의 명신이 되는 인물들로, 이지는 이들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태조 사후, 태종은 이지와 맹사성에게 태조의 제문(祭文)을 짓게 하였다. 당시 황희는 지신사, 윤회는 이조 정랑이었다.

3. 1. 황희에게 준 영향

이지는 여말선초의 인물로, 황희에게 인사, 행정, 군사 분야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황희는 훗날 세종 대의 명신이 되었으며, 이지는 황희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국정 운영에 대한 조언을 하였다.

3. 2. 맹사성에게 준 영향

이지는 맹사성에게 교육과 제도 정비, 과거시험 제도화에 대해 조언했다. 훗날 태조가 사망하자 태종은 이지와 맹사성에게 태조의 제문(祭文)을 올리게 했다. 당시 이지는 태종의 섭태부(攝太傅)이자 예조 판서(禮曹判書)였고, 맹사성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윤(漢城尹)이었다.

3. 3. 윤회에게 준 영향

고려 공민왕 시절부터 황희, 맹사성, 윤회와 함께 국정운영에 참여하였다. 훗날 세종의 명신이 되는 황희, 맹사성, 윤회에게 국정운영에 관한 조언과 가르침을 주었던 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하다. 윤회에게는 외교 활동에 관한 조언과 가르침을 주었으며, 맹사성윤회에게 과거시험 제도화에 대한 조언을 하였다.

3. 4. 과거 제도 정비

이지는 맹사성윤회에게 과거시험 제도화에 대한 조언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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