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서위)
1. 개요
이호는 서위 시대의 무장으로, 당나라를 건국한 당 고조 이연의 아버지이다. 그는 북위의 장군 하발악을 섬기며 군공을 세웠고, 서위 건국 과정에서 우문태를 보좌하여 괄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팔주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실제 서열은 기록과 차이가 있었다. 551년에 사망했으며, 당나라가 건국된 후 황제로 추존되어 태조 경제의 묘호를 받았다.
| 휘 | 이호 |
|---|---|
| 작위 | 위국공(魏國公) 옹군공(雍郡公) |
| 시호 | 양(襄) |
| 생몰 기간 | 467년 ~ 551년 5월 25일 |
| 시대 | 남북조 시대 |
| 국가 | 북위 서위 |
| 부친 | 이천석 |
|---|---|
| 배우자 | 칠열씨(叱列氏) 독고씨(獨孤氏) |
| 자녀 | 이병 이요 이찰 이윤 이현 이진 이민 |
| 주요 관직 | 사공 태위 대장군 |
|---|---|
| 봉작 | 위국공(魏國公) → 옹군공(雍郡公) |
| 군사 경력 | 하발악 토벌 후경 토벌 |
| 관련 인물 | 우문태 이병 (당 고조) 당 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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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 사람 -
우근 (인물)
우근은 남북조 시대 서위와 북주의 무장으로, 팔주국 중 한 명으로서 북위에서 무관으로 시작해 서위 건국에 기여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
서위 사람 -
독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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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추존황제 -
이홍 (당)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장남인 이홍은 학문과 인자함으로 이름을 알리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와의 갈등 끝에 급사하여 독살 의혹이 제기된 비운의 황태자이다. -
당나라의 추존황제 -
무사확
무사확은 수나라 말에서 당나라 초의 인물로 당 고조 이연의 거병을 도와 당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측천무후의 아버지로, 사후 황제로 추존되었다가 당 현종 때 왕으로 격하되었다. -
551년 사망 -
소대기
소대기는 양나라 건문제의 아들로, 후경의 난에서 활약 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사후 애황태자로 추증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
551년 사망 -
서위 문제
서위 문제(507~551)는 남북조 시대 서위의 초대 황제로서, 북위 황족 출신으로 우문태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재위 기간 동안 우문태의 실권 장악과 동위와의 대립으로 불안정한 통치를 하였다.
2. 생애
이호(서위) 시대에 대한 공식 역사인 위서, 주서, 북사에는 그의 전기가 없다. 이들 역사는 모두 당나라 때 쓰여졌는데, 당나라는 그를 황제로 존경했기 때문에 관료, 제후 및 기타 인물에게 할애된 전기 부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호에 대한 많은 정보는 책부원귀, 자치통감 등 후대 왕조에서 편찬된 역사에서 얻을 수 있다.
이호는 북위의 장군 하발악을 섬겼고, 529년 양나라의 지원을 받은 북위의 찬탈자 원호를 격파하는 데 참여했다. 그 공로로 진수현자(晉壽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하발악을 따라 흉노 반란 지도자 모기추노(万俟醜奴)를 농서군에서 격파했다. 534년 하발악이 동료 장군 후모진열(侯莫陳悅)에게 살해되자, 부하들은 지휘권을 우문태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호는 하발악의 형인 장군 하발승에게 지휘권을 제안했으나, 하발승이 거절하자 우문태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영주자사(靈州刺史)가 되었다.
537년 사원 전투에서 고환의 군대에 참여했고, 수년간 반란을 진압하여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칭호를 얻었다.
548년 우군대도독·소사에 임명되었다. 《책부원귀》와 《서위서》에서는 이때 태위·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당시 서위의 주국대장군은 8명이 있어 "팔주국"이라고 칭해졌지만, 《주서》에서는 우문태 다음으로 제2위, 《통전》(권34·직관16 훈관조)에서는 우문태·원흔 다음으로 제3위, 《자치통감》에서는 우문태·원흔·이필 다음으로 제4위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에지마 요시타카의 설에 따르면, 548년은 우문태의 주도로 북주에서 시행될 《주례》에 기초한 관제 개혁이 이루어진 해였다. 이때 이호가 임명되었다고 하는 태위 등의 삼공을 비롯해 전한 이래의 관제가 폐지되어, 《주례》에 기초한 육경이 설치되었다. 게다가 543년에 이필이 태위에 임명되어 경질되지 않고 관제 개혁을 맞이했다고 보여지므로, 이호가 태위에 임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팔주국 중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인 우문태를 포함한 6명이 그대로 육경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호와 후막진숭만이 육경에서 제외되었다. 이호는 소보, 후막진숭은 소부이므로, 이호의 지위는 육경 아래·후막진숭의 위, 즉 제7위였고, 제6위 (육경 중 가장 아래)인 우근과 제8위인 후막진숭이 모두 549년에 주국대장군이 되었다고 보여지므로, 실제로는 제7위였던 이호의 주국대장군 취임도 549년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사료 조작은 이호가 추존 황제가 된 당나라 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황조인 그를 이필·독고신·조귀보다 하위에 둘 수 없다는 정치적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51년 5월에 사망하였다 (《자치통감》). 다만,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554년이라고 하는 설(《서위서》)이 있는 외에, 사망일을 9월 18일로 하는 기록(《당육전》 권4·상서예부·사부랑중·도관조 주)도 있다. 사후 롱서상공의 시호를 받았다. 북주 성립 후인 564년 9월에 건국의 공신으로서 당국공이 추증됨과 함께, 즉시 후계자인 이병에게의 계승이 인정되었다.
이연이 당을 건국한 후, 이호는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태조, 시호를 경제라고 했다.
2.1. 초기 생애 및 배경
구당서에 따르면, 이호는 서량 왕조의 창시자인 이고의 아들 이신을 통해 이어진 5대손이다. 이호는 북위에서 복무한 관리인 이천석(李天錫)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
이호는 처음에는 북위의 장군 하발악을 섬겼고, 529년 양나라의 지원을 받은 북위의 찬탈자 원호를 격파하는 데 참여했다. 그의 공로로 이호는 진수현자(晉壽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그는 하발악을 따라 흉노 반란 지도자 모기추노(万俟醜奴)를 농서군에서 격파했다. 534년 하발악이 동료 장군 후모진열(侯莫陳悅)에게 살해된 후, 그의 부하들은 지휘권을 우문태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호는 대신 하발악의 형인 장군 하발승에게 가서 그에게 지휘권을 제안했다. 하발승이 거절하자 이호는 우문태에게 돌아가 그의 지휘를 받았다. 이때 그는 영주자사(靈州刺史)가 되었다.
2.2. 서위 건국 기여
이호는 북위의 장군 하발악을 섬겼고, 529년 양나라의 지원을 받은 북위의 찬탈자 원호를 격파하는 데 참여했다. 그 공로로 진수현자(晉壽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하발악을 따라 흉노 반란 지도자 모기추노(万俟醜奴)를 농서군에서 격파했다. 534년 하발악이 동료 장군 후모진열(侯莫陳悅)에게 살해되자, 부하들은 지휘권을 우문태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호는 하발악의 형인 장군 하발승에게 지휘권을 제안했으나, 하발승이 거절하자 우문태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영주자사(靈州刺史)가 되었다.
537년, 사원 전투에서 고환의 군대에 참여했고, 수년간 반란을 진압하여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칭호를 얻었다.
548년에는 우군대도독·소사에 임명되었다. 《책부원귀》와 《서위서》에서는 이때 태위·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당시 서위의 주국대장군은 8명이 있어 "팔주국"이라고 칭해졌지만, 《주서》에서는 우문태 다음으로 제2위, 《통전》(권34·직관16 훈관조)에서는 우문태·원흔 다음으로 제3위, 《자치통감》에서는 우문태·원흔·이필 다음으로 제4위로 되어 있다.
2.3. 팔주국 지위
548년 우군대도독·소사에 임명되었다. 《책부원귀》와 《서위서》에서는 이때 태위·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당시 서위의 주국대장군은 8명이 있어 "팔주국"이라고 칭해졌지만, 《주서》에서는 우문태 다음으로 제2위, 《통전》(권34·직관16 훈관조)에서는 우문태·원흔 다음으로 제3위, 《자치통감》에서는 우문태·원흔·이필 다음으로 제4위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에지마 요시타카의 설에 따르면, 이 548년이라는 해는 우문태의 주도로 북주에서 행해지게 되는 《주례》에 기초한 관제의 전제가 되는 관제 개혁이 이루어진 해였다. 이때 이호가 임명되었다고 하는 태위 등의 삼공을 비롯해 전한 이래의 관제가 폐지되어, 《주례》에 기초한 육경이 설치되었다. 게다가 543년에 이필이 태위에 임명되어 경질되지 않고 관제 개혁을 맞이했다고 보여지고 있어, 이호가 태위에 임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팔주국 중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인 우문태를 포함한 6명이 그대로 육경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호와 후막진숭만이 육경에서 제외되었다. 이호는 소보, 후막진숭은 소부이므로, 이호의 지위는 육경의 아래·후막진숭의 위, 즉 제7위였고, 또 제6위 (육경 중 가장 아래)인 우근과 제8위인 후막진숭이 모두 549년에 주국대장군이 되었다고 보여지므로, 실제로는 제7위였던 이호의 주국대장군 취임도 마찬가지로 549년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사료 조작은 이호가 추존 황제가 된 당나라 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황조인 그를 인후 (이필·독고신·조귀보다 하위)에 둘 수는 없다는 정치적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4. 사망과 추존
551년 5월에 사망하였다 (《자치통감》). 다만,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554년이라고 하는 설(《서위서》)이 있는 외에, 사망일을 9월 18일로 하는 기록(《당육전》 권4·상서예부·사부랑중·도관조 주)도 있다. 사후 롱서상공의 시호를 받았다. 북주 성립 후인 564년 9월에 건국의 공신으로서 당국공이 추증됨과 함께, 즉시 후계자인 이병에게의 계승이 인정되었다.
이연이 당을 건국한 후, 이호는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태조, 시호를 경제라고 했다.
3. 가족 관계
| 구분 | 이름 | 비고 |
|---|---|---|
| 조부 | 당 헌조 선황제 이희 | |
| 조모 | 선헌황후 장씨 | |
| 생부 | 당 의조 광황제 이천석 | |
| 생모 | 광의황후 가씨 | |
| 배우자 | 경열황후 양씨 | 정실 |
| 배우자 | 경비 곽씨 | 후실 |
| 배우자 | 옥비 노씨 | 후실 |
| 자녀 | 남양공 이연백 | 장남 |
| 자녀 | 초왕 이진 | 차남 |
| 자녀 | 당인공 이병 | 3남, 고조 즉위 후 세조 원황제로 추존 |
| 자녀 | 필왕 이장 | 4남 |
| 자녀 | 옹왕 이회 | 5남 |
| 자녀 | 순왕 이의 | 6남 |
| 자녀 | 채렬왕 이울 | 7남 |
| 자녀 | 정효왕 이량 | 8남 |
| 자녀 | 최소 3명의 딸 |
3.1. 조부모와 부모
* 조부: 당 헌조(唐獻祖) 선황제(宣皇帝) 이희
* 조모: 선헌황후 장씨(宣獻皇后 張氏)
* 생부: 당 의조(唐懿祖) 광황제(光皇帝) 이천석
* 생모: 광의황후 가씨
3.2. 배우자
* 정실 : 경열황후 양씨
* 후실 : 경비 곽씨
* 후실 : 옥비 노씨
3.3. 자녀
| 이름 | 비고 |
|---|---|
| 남양공(南陽公) | 장남 |
| 초왕(譙王) | 차남 |
| 당인공(唐仁公) | 3남, 고조 즉위 후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로 추존 |
| 필왕(畢王) | 4남 |
| 옹왕(雍王) | 5남 |
| 순왕(郇王) | 6남 |
| 채렬왕(蔡烈王) | 7남 |
| 정효왕(鄭孝王) | 8남 |
| 최소 3명의 딸 |
3.3.1. 아들
* 장남: 남양공(南陽公)
* 차남: 초왕(譙王)
* 3남: 당인공(唐仁公) - 고조 즉위 후 세조(世祖) 원황제(元皇帝)로 추존.
* 4남: 필왕(畢王)
* 5남: 옹왕(雍王)
* 6남: 순왕(郇王)
* 7남: 채렬왕(蔡烈王)
* 8남: 정효왕(鄭孝王)
3.3.2. 딸
이호는 최소 3명의 딸을 두었다. 그 중 한명은 신도군 대장공주로, 북주의 표기장군이자 부성군 태수인 장의의 아들 장고와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