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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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주국은 서위 말기 우문태가 설치한 관직 제도로, 주국대장군을 중심으로 십이대장군을 포함하는 세력을 지칭한다. 팔주국은 우문태, 이호, 원흔 등 8명의 주국대장군과 12명의 십이대장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서위의 군사 및 정치적 핵심 세력이었다. 팔주국 가문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끈끈하게 연결되었으며, 북주, 수, 당 왕조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팔주국의 서열과 '팔주국' 용어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구성원의 민족적 배경은 주로 선비족과 무천진군벌 출신이었다.
북위 말기의 혼란으로 이주씨가 멸망하고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각각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전자는 532년, 후자는 537년).[12] 우문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족의 중진이었던 원흔(元欣)과 자신과 같은 무천진군벌에 속하는 6명의 유력한 장군에게도 주국대장군을 주었다. 548년 우문태가 대총재를 칭하며 후의 북주의 국제에 연결되는 관제 개혁(『주례』에서 유래하는 삼공·육경의 도입)을 도입할 무렵에는 8명의 주국대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팔주국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2. 역사
우문씨는 호족계원훈과의 통혼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우문태, 우문호, 무제 등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우씨, 달해씨, 양씨, 위지씨, 이씨 (이원 계), 두씨 등 "팔주국 십이대장군 클래스"의 호족계 원훈과 반복적으로 통혼하여 관계를 강화했다.[1] 그만큼 호족계 원훈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취미(베이징어언대학)는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5할이 서위 시대의 "팔주국 십이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임을 지적하며, 우문씨는 호족을 중시했고, 혼인을 통한 긴밀한 끈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2] 모한광(국립대만대학)은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7할이 원씨·호족으로 점유되어 있는 점, 우문씨와 한인군성의 혼인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문씨가 원씨·호족과 통혼함으로써 북주의 안정을 꾀했다고 평가한다.[2]
2. 1. 팔주국의 성립
서위 대통(大統) 3년(537), 문제(文帝)는 우문태(宇文泰)가 왕실 중흥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주국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이후 우문태는 왕실을 보좌한 공로와 높은 명망 및 지위 덕분에 이 관직을 모두 담당했다. 대통 16년(550) 이전에 주국대장군을 맡은 이는 8명이었다. 우문태는 백관을 통솔하고 조정의 내외 군무를 맡았다. 광릉왕(廣陵王) 원흔(元欣)은 황족이었으나 궁정 사무만을 담당하였다. 나머지 6명의 주국은 2명의 대장군을 통솔하였으며, 이들은 금군(禁軍)을 담당하거나 무장으로서 외적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들의 영예는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여서, 『주서(周書)』가 완성되었을 시기에는 '문벌(門閥)'이라고 하면 모두 팔주국 가문을 꼽았다.[9][10]
12대장군(十二大將軍)은 각자 2개의 개부(開府)를 통령하였고, 매 개부마다 1개 군(軍)의 사병을 통령하여 모두 24군(軍)이었다. 대통 16년 이전, 서위의 12대장군 외에도 염현(念賢)과 왕사정(王思政)도 대장군을 맡았다. 그러나 염현은 농우(隴右)에서 자사(刺史)를, 왕사정은 황하 이남에서 진수를 맡았을 뿐, 영병(領兵)의 반열에는 있지 않았다. 이후의 공신들이 주국과 대장군에 이른 경우가 많았으나, 모두 산질(散秩, 실제 관직은 없이 관품만 있음)이었고 군대를 통령하지는 않았다. 6주국 12대장군 이후 관위에 따라 관장 사무를 계승한 사람은 오로지 덕행과 명망이 종전에 각 왕공(王公)의 아래에 있었다면, 『주서』와 『북사(北史)』에 기재되지 않았다.[11][12]
원래 주국대장군은 "주국"이라는 칭호와 "대장군"이라는 관직이 합쳐진 것으로, 단순한 상위 군인에게 주어지는 잡호장군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북위 후기 효장제 시대에 그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이주영에게 주어져 승상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되면서, 사실상 국가 최고 지도자의 지위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후, 북위 말기의 혼란으로 이주씨가 멸망하고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각각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전자는 532년, 후자는 537년). 우문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족의 중진이었던 원흔(元欣)과 자신과 같은 무천진군벌에 속하는 6명의 유력한 장군에게도 주국대장군을 주었다. 548년에 우문태가 대총재를 칭하며 후의 북주의 국제에 연결되는 관제 개혁(『주례』에서 유래하는 삼공·육경의 도입)을 도입할 무렵에는 8명의 주국대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팔주국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팔주국 아래에는 십이대장군을 두었고, 그 아래에는 이십사개부를 두었으며, 이 24개 군단이 서위·북주에서의 부병제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팔주국을 배출한 가문(팔주국가)은 문벌의 필두에 위치했다(『주서』).
우문씨는 호족계원훈과의 통혼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우문태, 우문호, 무제 등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우씨, 달해씨, 양씨, 위지씨, 이씨 (이원 계), 두씨 등 "팔주국 십이대장군 클래스"의 호족계 원훈과 반복적으로 통혼하여 관계를 강화했다. 그만큼 호족계 원훈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1]는 평가를 받는다. 양취미(베이징어언대학)는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5할이 서위 시대의 "팔주국 십이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임을 지적하며, 우문씨는 호족을 중시했고, 혼인을 통한 긴밀한 끈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2] 모한광(국립대만대학)은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7할이 원씨·호족으로 점유되어 있는 점, 우문씨와 한인군성의 혼인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문씨가 원씨·호족과 통혼함으로써 북주의 안정을 꾀했다고 평가한다.[2]
2. 2. 팔주국의 역할과 영향력
서위 대통(大統) 3년(537), 문제(文帝)는 우문태(宇文泰)가 왕실을 다시 일으킨 공로로 우문태를 주국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이후 왕실을 보좌한 공로와 명망, 지위가 높아 이 관직을 모두 담당했다. 대통 16년(550) 이전 주국대장군은 8명이었다. 우문태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고 조정 안팎의 군사 업무를 맡았다. 광릉왕(廣陵王) 원흔(元欣)은 황족이었으나 궁정 사무만 담당하였다. 나머지 6명의 주국은 2명의 대장군을 통솔하여 금군(禁軍)을 담당하거나 무장으로서 외적을 막았다. 이들의 영예는 누구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주서』가 완성되었을 때 '문벌(門閥)'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팔주국 가문을 받들고 있었다.[9][10]
12대장군(十二大將軍)은 각자 2개의 개부(開府)를 통솔하였고, 각 개부는 1개 군(軍)의 사병을 통솔하여 모두 24군(軍)이었다. 대통 16년 이전, 서위의 12대장군 이외에, 염현(念賢)과 왕사정(王思政)도 대장군을 맡았다. 그러나 염현은 농우(隴右)에서 자사(刺史)를, 왕사정은 황하 이남에서 진수를 하였으나, 모두 군사를 통솔하는 반열에는 있지 않았다. 이후 공신들이 주국과 대장군에 오른 경우가 많았으나 모두 산질(散秩, 실제 관직은 없이 관품만 있음)일 뿐 군대를 통솔하지는 않았다. 6주국 12대장군 이후 관위에 따라 관장 사무를 계승한 사람은 오로지 덕행과 명망이 종전에 각 왕공(王公)의 아래에 있었다면, 『주서』와 『북사』에 기재되지 않았다.[11][12]
원래 주국대장군은 "주국"과 "대장군"이 합쳐진 칭호로, 단순한 상위 군인에게 주어지는 잡호장군의 취급을 받았으나, 북위 후기 효장제 시대에 그를 옹립하는데 공적이 있던 이주영에게 주어져 승상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되면서 사실상 국가 최고 지도자의 지위로 간주되었다.
그 후, 북위 말기의 혼란으로 이주씨가 멸망하고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가 분열되자 (동위와 서위), 각각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전자는 532년, 후자는 537년). 우문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족의 중진이었던 원흔(元欣)과 자신과 같은 무천진군벌에 속하는 6명의 유력한 장군에게도 주국대장군을 주었고, 548년에 우문태가 대총재를 칭하며 후의 북주의 국제에 연결되는 관제 개혁 (『주례』에서 유래하는 삼공·육경의 도입)을 도입할 무렵에는 8명의 주국대장군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바로 팔주국이다.
팔주국 아래에는 십이대장군을 두고, 그 아래에 이십사개부를 두었으며, 이 24개 군단이 서위·북주에서의 부병제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팔주국을 배출한 가문 (팔주국가)는 문벌의 필두에 위치해 있었다 (『주서』).
우문씨는 호족계원훈과의 통혼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우문태, 우문호, 무제와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우씨, 달해씨, 양씨, 위지씨, 이씨 (이원 계), 두씨 등 "팔주국 십이대장군" 가문의 호족계 원훈과 반복적으로 통혼,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호족계 원훈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1] 양취미 (베이징어언대학)는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5할이 서위 시대의 "팔주국 십이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임을 지적하며, 우문씨는 호족을 중시했고, 혼인을 통한 긴밀한 끈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2] 모한광 (국립대만대학)은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7할이 원씨·호족으로 점유되어 있는 점, 우문씨와 한인군성의 혼인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문씨가 원씨·호족과 통혼함으로써 북주의 안정을 꾀했다고 한다.[2]
| 직위 | 역할 | 비고 |
|---|---|---|
| 우문태(宇文泰) | 백관 통솔, 조정 내외 군무 | 주국대장군 |
| 원흔(元欣) | 궁정 사무 | 주국대장군, 황족 |
| 나머지 6명의 주국 | 2명의 대장군 통솔, 금군(禁軍) 담당, 무장으로서 외적 방어 | 주국대장군 |
| 12대장군 | 2개의 개부(開府) 통솔 | 각 개부는 1개 군(軍)의 사병 통솔 (총 24군) |
| 염현(念賢), 왕사정(王思政) | 대장군 | 염현: 농우(隴右)에서 자사(刺史) / 왕사정: 황하 이남 진수, 군사 통솔 X |
2. 3. 팔주국 가문의 혼인 관계와 왕조 건국
북위 후기 효장제 시대, 이주영이 주국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이 직위는 국가 최고 지도자 지위로 간주되었다. 북위 말 혼란기에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하며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양측 모두 주국대장군을 임명했다. 548년, 우문태는 대총재를 칭하며 관제 개혁을 단행했고, 이때 8명의 주국대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팔주국이다.팔주국 가문은 문벌의 필두에 위치했으며, 우문씨는 호족계 원훈과의 통혼을 중시했다. 정권 기반 안정을 위해 우문태, 우문호, 무제 등 권력자들은 "팔주국 십이대장군 클래스"의 호족계 원훈과 반복적으로 통혼하며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1] 양취미(베이징어언대학)는 우문씨 혼인 사례의 약 5할이 서위 시대 "팔주국 십이대장군" 중심의 호족임을 지적하며, 우문씨가 호족을 중시하고 혼인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분석했다.[2] 모한광(국립대만대학)은 우문씨 혼인 사례의 약 7할이 원씨·호족이며, 한인 군성과의 혼인은 적다는 점을 들어 우문씨가 원씨·호족과의 통혼으로 북주 안정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2]
3. 구성원
팔주국 중 주국의 수장 우문태는 후에 북주(北周)를 창건하였으며, 이호(李虎)는 당 고조 이연(李淵)의 조부이며, 이필(李弼)은 와강군(瓦崗軍)의 수령 이밀(李密)의 증조부이며, 독고신(獨孤信)은 수 문제 양견(楊堅)의 장인이자 이연의 외조부이다. 이들의 공적은 자손들에게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주서』에는 "오늘날 문벌이라는 것은 모두 팔주국의 집안을 추숭하고 있으니, 당대 영성은 이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당회요(唐會要)』 36권「씨족(氏族)」에는 무덕(武德) 원년(618) 당고조 이연이 내사령(內史令) 두위(竇威)에게 '옛날 (북)주대에는 팔주국의 귀족이 있었고, 나와 공의 집안은 모두 이 직에 올랐었다 ... 현재 관동인 최로(崔盧)가 혼인하면서 문벌을 자랑하는데, 공은 대대로 황제의 친척이었으니 귀하지 아니한가'라고 말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팔주국 대장군의 구성원 중 우문태, 원흔, 독고신, 우근, 후막진숭은 선비족이다. 또한 우문태, 이호(당 고조 이연의 조부), 독고신, 조귀, 후막진숭은 무천진 출신이다.[7] 십이대장군의 구성원 중, 원찬, 원육, 원곽, 우문도, 후막진순, 달계무, 두로녕, 우문귀, 하란상은 선비족이며, 원찬, 원육, 원곽은 서위의 황족, 후막진순은 팔주국 중 한 명인 후막진숭의 형이자 무천 출신, 달계무는 북위의 황족이다.[7]
선비족이라는 증거가 없는 사람은 팔주국에서는 이호, 이필, 조귀 세 명이나, 이 중 이호와 조귀는 그 조상이 무천진으로 이주했다. 십이대장군 중 이원, 양충(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 왕웅은 선비족이라는 증거가 없지만, 양충은 그 조상이 무천으로 이주했고, 이원은 농서성기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조부는 고평진으로 이주했다. 또한 왕웅은 태원 왕씨라는 한족 명문을 칭하지만, 자는 "호포두"라는 한족답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한족의 자는 두 글자가 보통임) 태원 왕씨를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7]
따라서 팔주국은 선비족 또는 무천진 출신이 근간을 형성하고, 십이대장군도 선비족으로 대부분이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 양충과 이호가 포함되어 있고, 게다가 모두 무천으로 이주한 것이 분명하므로 (무천진군벌은 북위에 대한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수도 방어의 최전선이기 때문에 북위의 근간을 구성하는 선비족 탁발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근무했다.[8]), 수실 양씨가 홍농화음의 양씨라고 하고, 당실 이씨가 농서적도, 혹은 농서성기 사람이라고 칭하더라도, 이것을 순수한 한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또한 팔주국 중 한 명인 독고신은, 그의 장녀를 우문육에게 시집보냈고, 또한 넷째 딸을 이호의 아들 이병에게 시집보냈으며, 더 나아가 일곱째 딸을 십이대장군 중 한 명인 양충의 아들 양견에게 시집보냈으며, 이는 모두 훗날 북주, 수, 당의 왕조를 형성했기에 우연히 밝혀졌지만 팔주국 십이대장군 가문은 모두 혼인 관계를 통해서도 굳게 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
3. 1. 팔주국
서위 대통(大統) 3년(537), 문제(文帝)는 우문태(宇文泰)가 왕실 중흥의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주국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이후 왕실을 보좌한 공로와 명망,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이 관직을 모두 담당했다. 대통 16년(550) 이전 주국대장군을 맡은 이는 8명이었다. 우문태는 백관을 통솔하고 조정의 내외 군무를 맡았다. 광릉왕(廣陵王) 원흔(元欣)은 황족이었으나 궁정 사무만을 담당하였다. 나머지 6명의 주국은 2명의 대장군을 통솔하였으며, 금군(禁軍)을 담당하거나 무장으로서 외적을 막았다. 이들의 영예는 누구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주서(周書)』가 완성되었을 시기에 '문벌(門閥)'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팔주국 가문을 받들고 있었다.[9][10]원래 주국대장군은 "주국"이라는 칭호와 "대장군"이라는 관직이 조합된 칭호로, 단순한 상위 군인에게 주어지는 잡호장군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북위 후기 효장제 시대에 그 옹립에 공적이 있던 이주영에게 주어져 승상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국가의 사실상 최고 지도자 지위로 간주되었다.
그 후, 북위 말기의 혼란으로 이주씨가 멸망하고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가 분열(동위와 서위)되자, 각각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전자는 532년, 후자는 537년). 우문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족 중진이었던 원흔과 자신과 같은 무천진군벌에 속하는 6명의 유력한 장군에게도 주국대장군을 주었다. 548년 우문태가 대총재를 칭하며 후의 북주의 국제에 연결되는 관제 개혁(『주례』에서 유래하는 삼공·육경 도입)을 도입할 무렵에는 8명의 주국대장군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팔주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팔주국 아래에는 십이대장군을 두고, 그 아래에 이십사개부를 두었으며, 이 24개 군단이 서위·북주 부병제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팔주국을 배출한 가문(팔주국가)은 문벌의 필두에 위치했다(『주서』).
우문씨는 호족계원훈과의 통혼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우문태, 우문호, 무제와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우씨, 달해씨, 양씨, 위지씨, 이씨(이원 계), 두씨 등 "팔주국 십이대장군 클래스"의 호족계 원훈과 반복적으로 통혼, 관계 강화를 도모했으며, 그만큼 호족계 원훈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1] 양취미(베이징어언대학)는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5할이 서위 시대의 "팔주국 십이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임을 지적하며, 우문씨는 호족을 중시했고, 혼인을 통한 긴밀한 끈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2] 모한광(국립대만대학)은 우문씨의 혼인 사례 중 약 7할이 원씨·호족으로 점유되어 있는 점, 우문씨와 한인군성의 혼인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문씨가 원씨·호족과 통혼함으로써 북주의 안정을 꾀했다고 한다.[2]
| 직위 | 성명 |
|---|---|
| 사지절·총백궤·주국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녹상서사·대행대·안정군개국공 | 우문태(宇文泰) |
| 사지절·태위·주국대장군·대도독·상서좌복야·농우행대·소사·농서군개국공 | 이호(李虎) |
| 사지절·태부·주국대장군·대종사·대사도·광릉왕 | 원흔(元欣)[13] |
| 사지절·태보·주국대장군·대도독·대종백·조군개국공 | 이필(李弼) |
| 사지절·주국대장군·대도독·대사마·하내군개국공 | 독고신(獨孤信) |
| 사지절·주국대장군·대도독·대사구·남양군개국공 | 조귀(趙貴) |
| 사지절·주국대장군·대도독·대사공·상산군개국공 | 우근(于謹) |
| 사지절·주국대장군·대도독·소부·팽성군개국공 | 후막진숭(侯莫陳崇) |
3. 2. 십이대장군
서위 대통(大統) 3년(537), 문제(文帝)는 우문태(宇文泰)의 공적을 기려 주국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이후 8명이 주국대장군을 맡았다. 우문태는 백관을 통솔하고 내외 군무를 맡았으며, 원흔(元欣)은 황족으로서 궁정 사무를 담당하였다. 나머지 6명의 주국은 2명의 대장군을 통솔하며 금군(禁軍)을 담당하거나 외적을 막았다.[9][10]12대장군은 각자 2개의 개부(開府)를 통령하였고, 매 개부는 1개 군(軍)의 사병을 통령하여 모두 24군(軍)이었다. 염현(念賢)과 왕사정(王思政)도 대장군을 맡았으나, 각각 농우(隴右)와 황하 이남에서 진수(鎭守)하여 영병(領兵)의 반열에는 있지 않았다. 이후 공신들이 주국과 대장군에 오른 경우가 많았으나, 모두 산질(散秩)이었고 군대를 통령하지는 않았다.[11][12]
12대장군은 다음과 같다.
| 성명 | 관직 |
|---|---|
| 원찬(元贊)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소보광평왕(使持節·大將軍·大都督·少保·廣平王) |
| 원육(元育) | 사지절대장군대도독회안왕(使持節·大將軍·大都督·淮安王) |
| 원곽(元廓)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제왕(使持節·大將軍·大都督·齊王) |
| 우문도(宇文導)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진칠주제군사진주자사장무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秦七州諸軍事·秦州刺史·章武郡開國公) |
| 후막진순(侯莫陳順) | 사지절대장군대도독평원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平原郡開國公) |
| 달해무(達奚武)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옹칠주제군사옹주자사고양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雍七州諸軍事·雍州刺史·高陽郡開國公) |
| 이원(李遠)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양평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陽平郡開國公) |
| 두로녕(豆盧寧) | 사지절대장군대도독범양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范陽郡開國公) |
| 우문귀(宇文貴) | 사지절대장군대도독화정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化政郡開國公) |
| 하란상(賀蘭祥) | 사지절대장군대도독형주제군사형주자사박릉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荆州諸軍事·荆州刺史·博陵郡開國公) |
| 양충(楊忠) | 사지절대장군대도독진류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陳留郡開國公) |
| 왕웅(王雄) | 사지절대장군대도독기주제군사기주자사무위군개국공(使持節·大將軍·大都督·岐州諸軍事·岐州刺史·武威郡開國公) |
4. 논란과 재해석
'팔주국'이라는 용어와 그 서열, 구성원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어 왔다. 특히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사료에서 보이는 왜곡 가능성과 실제 제도 존재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마에지마 요시타카와 야마시타 마사시 등의 연구자들은 팔주국 관련 기록과 제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4. 1. 팔주국의 서열 문제
팔주국의 서열은 『주서』와 『대당육전』 卷2 「상서이부(尙書吏部)」 사훈랑중(司勳郞中) 조항에 기반한다. 그러나 이호의 배열 순서는 사료마다 다르다. 『통전』 卷34 「직관(職官)16」 훈관(勳官) 조와 『문헌통고』 卷64 「직관(職官)18」 훈관(勳官) 조에는 이호가 원흔의 아래 제3위에 있으나, 『자치통감』 卷163에는 이호가 이필 아래 제4위에 등록되어 있다.[3]마에지마 요시타카(前島佳孝)는 당대에 『주서』를 편찬한 시기는 이호가 당의 추존 황제였기에, 팔주국 수령이자 북주의 실제 건국자 우문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이호를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의 사관들이 이호의 순서를 고쳤다고 본다. 마에지마는 팔주국 가운데 이호와 후막진숭 이외의 6명은 우문태의 관제 개혁 시기 육경에 임명되었으며, 소사(少師) 이호와 소부(少傅) 후막진숭은 육경보다도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호는 제7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4]
야마시타 마사시(山下將司)는 팔주국이 당대에 발명된 이론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마에지마는 12장군 중 한 명인 양충이 수 추존 황제이고 팔주국은 원래 12장군 집안보다 지위가 더 높으며, 수대에는 팔주국 집안이 수 황실 양씨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보았다. 한편 마에지마는 또한 우문호와 원자효가 서위 시기에도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팔주국 제도가 성립되기 전에 죽은 약간혜와 그 자손이 북조에서 팔주국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5] 마에지마는 팔주국 중 원흔과 이호는 북주 성립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우문태도 사망하였기에 그의 자손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북주 건국 이후 조귀와 독고신은 숙청당하였으며, 북주 초기 팔주국 중에 남은 사람은 3명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팔주국이라고 칭할 만한 문벌 집단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8명 정원이라는 제도로서의 팔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에, 마에지마는 야마시타의 팔주국이 당의 발명이라는 관점에 대체로 동의한다.[6]
4. 2. '팔주국' 용어의 기원
'팔주국' 용어의 배열 순서는 사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통전』, 『문헌통고』에서는 이호가 원흔 아래 제3위에, 『자치통감』에서는 이필 아래 제4위에 기록되어 있다.[3] 마에지마 요시타카는 당나라 때 『주서』를 편찬하면서 당의 추존 황제인 이호를 다른 신하보다 높이기 위해 순서를 조작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호와 후막진숭을 제외한 6명이 우문태의 관제 개혁 시 육경에 임명되었고, 소사였던 이호는 소부였던 후막진숭보다 지위가 낮아 제7위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3]야마시타 마사시는 '팔주국'이라는 용어가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3] 마에지마 요시타카는 12장군 중 한 명인 양충이 수나라 추존 황제였고, 수나라 때는 팔주국 집안이 황실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문호, 원자효가 서위 시기에 주국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약간혜와 그 자손이 북주에서 팔주국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4][5][6] 그는 팔주국 중 원흔과 이호는 북주 성립 이전에 사망했고, 우문태도 사망하여 그 자손이 황제가 되었으며, 조귀와 독고신은 숙청되어 북주 초기에 팔주국 중 3명만 남았다는 점을 들어, '8명 정원'이라는 제도적 팔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야마시타의 주장에 동의했다.
4. 3. 팔주국의 민족적 구성
팔주국 대장군의 구성원 중 우문태, 원흔, 독고신, 우근, 후막진숭은 선비족이었다. 또한 우문태, 이호(당 고조 이연의 조부), 독고신, 조귀, 후막진숭은 무천진 출신이다.[7] 십이대장군의 구성원 중 원찬, 원육, 원곽, 우문도, 후막진순, 달계무, 두로녕, 우문귀, 하란상은 선비족이며, 원찬, 원육, 원곽은 서위의 황족, 후막진순은 팔주국 중 한 명인 후막진숭의 형이자 무천 출신, 달계무는 북위의 황족이었다.[7]팔주국에서 선비족이라는 증거가 없는 사람은 이호, 이필, 조귀 세 명이었으나, 이 중 이호와 조귀는 그 조상이 무천진으로 이주했다. 십이대장군 중 이원, 양충(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 왕웅은 선비족이라는 증거가 없지만, 양충은 그 조상이 무천으로 이주했고, 이원은 농서성기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조부는 고평진으로 이주했다. 왕웅은 태원 왕씨라는 한족 명문을 칭하지만, 자는 "호포두"라는 한족답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한족의 자는 두 글자가 보통임) 태원 왕씨를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7]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볼때, 팔주국은 선비족 또는 무천진 출신이 근간을 형성하고, 십이대장군도 대부분 선비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충과 이호가 포함되어 있었고, 모두 무천으로 이주한 것이 분명하므로(무천진군벌은 북위에 대한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수도 방어의 최전선이기 때문에 북위의 근간을 구성하는 선비족 탁발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근무했다[8]), 수실 양씨가 홍농화음의 양씨라고 하고, 당실 이씨가 농서적도, 혹은 농서성기 사람이라고 칭하더라도, 이들을 순수한 한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팔주국 중 한 명인 독고신의 장녀는 우문태의 아들 우문육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이호의 아들 이병에게, 일곱째 딸은 십이대장군 중 한 명인 양충의 아들 양견에게 시집갔다. 이들은 모두 훗날 북주, 수, 당의 왕조를 형성했기에 우연처럼 보이지만, 팔주국과 십이대장군 가문은 혼인 관계를 통해서도 굳게 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
참조
[1]
서적
北周宗室の婚姻動向 :「楊文愻墓誌」を手がかりとして
https://hdl.handle.n[...]
駿台史学会
2012-03
[2]
서적
北周宗室の婚姻動向 :「楊文愻墓誌」を手がかりとして
https://hdl.handle.n[...]
駿台史学会
2012-03
[3]
서적
唐初における『貞観氏族志』の編纂と「八柱国家」の誕生
https://doi.org/10.2[...]
史学会
2002
[4]
문서
元子孝は祖父の拓跋新成の伝(『北史』巻17・列伝第5)に付記
[5]
문서
若干恵(徐国公)は北周成立後の564年に八柱国の李虎と同時に国公の追贈と子孫への即時襲封の特権を得ており、若干恵が柱国大将軍と同格とみなされ、もし数年長生きしていたら柱国大将軍の1人になっていた可能性が高い。なお、この時に李虎の唐国公の襲封が許されたのが李虎の嫡子で李淵の父である李昞 (北周)|李昞である。
[6]
문서
『旧唐書』竇威伝において、李虎の孫である李淵(唐の高祖)が皇帝に即位後、竇威に対して「むかし北周に八柱国があり、わたしと君の家がそうである。」と語る場面があるが、竇威の父の竇熾が柱国大将軍になったのは北周成立後の560年のことである。
[7]
서적
隋の煬帝と唐の太宗 暴君と明君、その虚実を探る
清水書院
2018-06-11
[8]
서적
隋の煬帝と唐の太宗 暴君と明君、その虚実を探る
清水書院
2018-06-11
[9]
문서
《周书·卷十六·列传第八》:初,魏孝庄帝以尔朱荣有翊戴之功,拜荣柱国大将军,位在丞相上。荣败后,此官遂废。大统三年,魏文帝复以太祖建中兴之业,始命为之。其后功参佐命,望实俱重者,亦居此职。自大统十六年以前,任者凡有八人。太祖位总百揆,督中外军。魏广陵王欣,元氏懿戚,从容禁闱而已。此外六人,各督二大将军,分掌禁旅,当爪牙御侮之寄。当时荣盛,莫与为比。故今之称门阀者,咸推八柱国家云。今并十二大将军录之于左。
使持节、太尉、柱国大将军、大都督、尚书左仆射、陇右行台、少师、陇西郡开国公李虎;
使持节、太傅、柱国大将军、大宗伯、大司徒、广陵王元欣;
使持节、太保、柱国大将军、大都督、大宗伯、赵郡开国公李弼;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马、河内郡开国公独孤信;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寇、南阳郡开国公赵贵;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空、常山郡开国公于谨;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少傅、彭城郡开国公侯莫陈崇。
右与太祖为八柱国。
[10]
문서
《北史·卷六十·列传第四十八》:初,魏孝庄帝以尔朱荣有翊戴之功,拜荣柱国大将军,位在丞相上。荣败后,此官遂废。大统三年,魏文帝复以周文帝建中兴之业,始命为之。其后功参佐命,望实俱重者亦居此职。自大统十六年已前,任者凡有八人。周文帝位总百揆,都督中外军事。魏广陵王欣,元氏懿戚,从容禁闼而已。此外六人,各督二大将军,分掌禁旅,当爪牙御侮之寄。当时荣盛,莫与为比。故今之称门阀者,咸推八柱国家。今并十二大将军录之于左。
使持节、太尉、柱国大将军、大都督、尚书左仆射、陇右行台、少师、陇西郡开国公李虎;
使持节、太傅、柱国大将军、大宗师、大司徒、广陵王元欣;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宗伯、赵郡开国公李弼;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马、河内郡开国公独孤信;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寇、南阳郡开国公赵贵;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大司空、常山郡开国公于谨;
使持节、柱国大将军、大都督、少傅、彭城郡开国公侯莫陈崇。
与周文帝为八柱国。
[11]
문서
《周书·卷十六·列传第八》:使持节、大将军、大都督、少保、广平王元赞, 使持节、大将军、大都督、淮〔安〕王元育, 使持节、大将军、大都督、齐王元廓, 使持节、大将军、大都督、秦七州诸军事、秦州刺史、章武郡开国公宇文导, 使持节、大将军、大都督、平原郡开国公侯莫陈顺, 使持节、大将军、大都督、雍七州诸军事、雍州刺史、高阳郡开国公达奚武, 使持节、大将军、大都督、阳平公李远, 使持节、大将军、大都督、范阳郡开国公豆卢宁, 使持节、大将军、大都督、化政郡开国公宇文贵, 使持节、大将军、大都督、荆州诸军事、荆州刺史、博陵郡开国公贺兰祥, 使持节、大将军、大都督、陈留郡开国公杨忠, 使持节、大将军、大都督、岐州诸军事、岐州刺史、武威郡开国公王雄。
[12]
문서
《北史·卷六十·列传第四十八》:使持节、大将军、大都督、少保、广平王元赞。
[13]
문서
《周书校勘记·卷十六·列传第八·二九》:大宗伯大司徒广陵王元欣 北史卷六0传末“大宗伯”作“大宗师”。按元欣是宗室,疑作“大宗师”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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