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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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홍주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는 주서, 교산찰방, 예조, 호조, 병조,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을 거쳤으며, 의주부윤, 안동부사, 전라도순찰사, 형조참판, 병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이괄의 난 당시 도원수로 활약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화의를 주장했지만 항복에는 반대했다. 163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가족 관계는 정종의 후손으로, 첩은 신숙주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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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고 선조 즉위 후 원상으로서 국정을 주도했으며, 을사사화 때 사림을 보호하고 을묘왜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이홍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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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홍주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예조, 호조, 병조, 이조 등 중앙 관서의 여러 직책과 의주부윤, 안동부사, 전라도 순찰사, 함경도 관찰사 등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9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도원수로서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36년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항복에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8년 마침내 영의정에 이르렀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낭관이 되었다. 1594년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교산찰방을 지냈으며, 이후 예조, 호조, 병조, 이조의 정랑, 좌랑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1609년에는 부수찬, 교리, 의주부윤, 안동부사를 거쳤다. 1618년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되었다가 돌아와 형조참판을 지냈다. 1619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진주사로 다시 선발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1620년에는 병조참판에 올랐다.
1621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예조참판을 거쳐 1624년 도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장만의 뒤를 이어 도원수를 맡아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1625년에는 우참찬과 좌참찬에 임명되었으며, 호태감접반사, 대사헌, 전주부윤, 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연이어 지냈다.
1632년 숭정대부에 오르고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에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7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3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2. 2. 중앙 관료 생활
1582년(선조 1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낭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주서, 교산찰방을 거쳐 예조, 호조, 병조,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1609년(광해군 1년)에는 부수찬, 교리, 의주부윤, 안동부사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년) 전라도 순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진주사로 또다시 선발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20년(광해군 12년)에는 병조참판이 되었고, 1621년(광해군 13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년) 도승지가 되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장만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1625년(인조 3년)에는 우참찬과 좌참찬이 되었으며, 이어 호태감접반사, 대사헌, 전주부윤, 도승지, 병조판서를 연이어 지냈다.
1632년(인조 10년) 숭정대부에 오르고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1636년(인조 1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항복에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7년(인조 15년)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638년(인조 16년)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2. 3. 외교 활동
1619년(광해군 11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같은 해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선발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1]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끝까지 항복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2. 4.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1624년 도승지로 재직하던 중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장만의 뒤를 이어 도원수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1625년 우참찬, 좌참찬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36년에는 우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나라와의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항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2. 5. 관직 생활 말년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낭관이 되었고, 1594년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교산찰방을 거쳤다. 이후 예조, 호조, 병조, 이조의 정랑 및 좌랑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1609년에는 부수찬, 교리, 의주부윤, 안동부사를 지냈고, 1618년에는 전라도순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었다. 1619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진주사로 또다시 선발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1620년에는 병조참판에 올랐고, 1621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돌아와 예조참판을 지냈다.
1624년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장만의 뒤를 이어 도원수로서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1625년에는 우참찬과 좌참찬이 되었으며, 호태감접반사, 대사헌, 전주부윤, 도승지, 병조판서를 연이어 역임하였다.
1632년에는 숭정대부에 오르고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636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과의 화의 교섭에는 참여하였으나 항복에는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637년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638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6대조 : 정종(定宗, 1357 ~ 1419)
- 5대조 :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 1392 ~ 1460)
- 5대조모 : 평산군부인 평산 한씨(平山郡夫人 平山 韓氏)
- 고조부 : 명선도정(明善都正) 이금정(李金丁)
- 고조모 : 밀양 박씨 - 박경식(朴景武)의 딸
- 증조부 : 하양군(河陽君) 이옥형(李玉荊)
- 증조모 : 파평 윤씨 - 윤구몽(尹龜蒙)의 딸
- 할아버지 : 파천군(坡川君) 이주(李珠, 1506 ~ ?)
- 할머니 : 함종 노씨(咸從 魯氏) - 노맹담(魯孟湛)의 딸
- '''부친''' : 간성군수(杆城郡守) 이극인(李克仁, 1525 ~ ?)
- '''모친''' : 기계 유씨 - 유환(兪煥)의 딸
- * 누나 : 이아진(李阿眞, 1556 ~ ?)
- * 누나 : 이덕진(李德眞, 1559 ~ ?)
- '''정부인''' : 능성 구씨 - 구효연(具孝淵)의 딸
- * '''장남''' : 감찰(監察) 이헌방(李憲邦, 1581 ~ ?)
- * 며느리 : 평창 이씨 - 이정직(李廷直)의 딸
- ** 손자 : 이지백(李知白, 1605 ~ ?)
- * '''장녀''' : 전주 이씨
- * 사위 : 여흥 민씨 민성임(閔聖任, 1590 ~ ?)[1] - 찰방(察訪)
- '''측실''' : 신복순(申福順, 1589 ~ ?) - 신례(申欚)의 서녀
- * '''서장남''' : 이안방(李安邦, 1609 ~ ?)
- * 며느리 : 벽진 이씨 - 이상길(李尙吉)의 딸
- ** 서손녀 : 이행원(李行遠)의 처
- ** 서손녀 : 장선윤(張善潤)의 처
- * '''차녀(서녀)''' : 이애임(李愛任, 1611 ~ 1673)
- * 사위 : 우계 이씨 이원빈(李元賓, 1608 ~ 1679)
- ** 서외손녀 : 이후영(李厚英, 1629 ~ ?)
- ** 서외손자 : 이경태(李慶泰, 1632 ~ 1691)
- ** 서외손녀 : 이정영(李貞英, 1635 ~ 1686)
- ** 서외손녀 : 이단영(李端英, 1645 ~ 1665)
- ** 서외손녀 : 이혜영(李惠英, 1651 ~ ?)
4. 기타
이홍주의 첩인 고령 신씨는 신례(申欚)의 서녀이다. 신례는 신숙주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 신수경(申秀涇)은 정랑을 지냈고 사후 승지로 추증되었다. 신수경은 신함(申涵)의 아들이며, 혜숙옹주와 신항(申沆)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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