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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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무는 백제 시기 외교 및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개로왕 18년(472년)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용양장군과 대방태수의 직위를 받았다. 장무는 중국계 관료들과 함께 백제의 외교 및 행정 업무에 참여했으며, 백제는 왕족과 귀족에게 왕호·후호를, 중국계 관료에게 태수호를 부여하여 왕권 내부의 위계를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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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 (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장무 |
원어 이름 | 張茂 |
한글 | 장무 |
한자 | 張茂 |
히라가나 | ちょう ぼう |
관직 | |
작위 | 백제의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
재임 | 미상 |
전임자 | 미상 |
공동 재위자 | 미상 |
후임자 | 미상 |
군주 | 백제 개로왕 |
섭정 | 미상 |
개인 정보 | |
국적 | 백제 |
성별 | 남성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능묘 | 미상 |
왕조 | 백제 |
가문 | 미상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형제자매 | 미상 |
자녀 | 미상 |
친인척 | 미상 |
종교 | 미상 |
군사 복무 | |
복무 | 미상 |
복무 기간 | 미상 |
소속 | 미상 |
근무 | 미상 |
근무 기간 | 미상 |
최종 계급 | 미상 |
충성 | 미상 |
주군 | 미상 |
지휘 | 미상 |
참전 | 미상 |
2. 백제의 대중국 외교와 관료
개로왕 18년(472년), 고구려의 압박이 강해지자 여례와 함께 처음으로 북위와의 교섭을 시도하며 원병을 요청했다.[7] 이때 장무는 사마 직책으로 북위에 파견되어 용양장군·대방태수 직위를 받았다.[7]
2. 1. 초기 외교 사절
개로왕 18년(472년), 고구려의 압박이 강해지자 여례와 함께 처음으로 북위와의 교섭을 시도하며 원병을 요청했다.[7] 이때 장무는 사마 직책으로 북위에 파견되어 용양장군·대방태수 직위를 받았다.[7]2. 2. 중국계 관료의 등용
백제는 중국계 인물들을 관료로 등용하여 외교 및 행정 업무를 맡겼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6]행룡양장군(行龍驤將軍), 낙랑태수 겸 장사 신모유(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성양태수 겸 사마 신왕무(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겸참군(兼參軍), 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 신장새(朝鮮太守臣張塞), 행양무장군 진명(行揚武將軍陳明)zh-Hant
여기에는 모유, 왕무, 장새, 진명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성씨로 미루어 중국계 백제 관료라고 할 수 있다.[6] 장씨의 경우, 전지왕대에 동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위도 있다.[6] 이 장씨는 구마모토현 타마나군 와즈마치(구 키쿠스이정)에 있는 전방후원분・에다후네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 명문의 서자인 장안과 통하므로, 장안은 백제에서 건너온 중국계 지식인일 가능성이 있다.[6]
424년의 장사 장위, 472년의 사마 장무, 495년의 참군 장새는 모두 장씨이며, 동족일 가능성이 있다.[1]
2. 2. 1. 남제서 기록
백제에는 중국계 백제 관료가 다수 존재했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이 『남제서』백제전의 다음 기사이다[6]。행룡양장군(行龍驤將軍), 낙랑태수 겸 장사 신모유(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성양태수 겸 사마 신왕무(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겸참군(兼參軍), 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 신장새(朝鮮太守臣張塞), 행양무장군 진명(行揚武將軍陳明)
이 기사에는 모유, 왕무, 장새, 진명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성씨로 미루어 중국계 백제 관료라고 할 수 있다[6]。 장씨의 경우, 전지왕대에 동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위도 있다[6]。
백제에서의 424년의 장사장위, 472년의 사마 장무, 495년의 참군장새는 모두 장씨이며, 동족일 가능성이 있다[1]。
2. 2. 2. 장씨 가문
백제에는 중국계 백제 관료가 다수 존재했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이 『남제서』백제전의 기사이다.[6]。행룡양장군(行龍驤將軍), 낙랑태수 겸 장사 신모유(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성양태수 겸 사마 신왕무(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겸참군(兼參軍), 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 신장새(朝鮮太守臣張塞), 행양무장군 진명(行揚武將軍陳明)zh-Hant
이 기사에는 모유, 왕무, 장새, 진명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성씨로 미루어 중국계 백제 관료라고 할 수 있다.[6]。장씨의 경우, 전지왕대에 동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위도 있다.[6]。이 장씨는 구마모토현타마나군와즈마치 (구키쿠스이정)에 있는 전방후원분・에다후네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 명문의 서자인 장안과 통하므로, 장안은 백제에서 건너온 중국계 지식인일 가능성이 있다.[6]。
백제에서의 424년의 장사장위, 472년의 사마 장무, 495년의 참군장새는 모두 장씨이며, 동족일 가능성이 있다.[1]。
3. 백제 국왕 막부의 속료
개로왕 18년(472년), 장무는 여례와 함께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7] 장무는 백제 왕의 사마였으며, 용양장군, 대방태수에 임명되었다.[7]
3. 1. 속료 목록
개로왕 18년(472년), 장무는 여례와 함께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7] 장무는 백제왕의 사마였으며, 용양장군, 대방태수에 임명되었다.[7]4. 백제 왕권의 특징
450년에 서하태수가 보이며, 458년에 장무에게 가수된 대방태수가 확인되지만, 490년과 495년에는 대방태수 외에도 광양태수, 강릉태수, 조선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가 보여 태수호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8] 이는 475년 백제의 일시적 멸망 이후, 문주왕과 동성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신흥 관료를 등용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신흥 관료에게 태수호를 가수했기 때문이다.[8]
태수호를 가수한 인물은 장무(대방태수), 고달(대방태수・광양태수), 양무(강릉태수・조선태수), 회매(청하태수), 모유(낙랑태수), 왕무(성양태수), 장새(조선태수)이며, 모두 중국식 단성과 이름을 가진 구 낙랑군・대방군 등의 중국 출신 한인 관료였다.[8] 이들은 왕호・후호를 수여받은 백제 왕족의 여씨와 세 글자로 이루어진 재지 유력자로 보이는 사법명과는 구별된다.[8]
백제는 왕족과 귀족에게는 왕호·후호를, 중국계 관료에게는 태수호를 부여했다.[8] 이는 백제가 왕족, 귀족, 호족과 도래계 관인을 명확하게 구분했음을 보여준다.[8] 태수호는 중국 왕조의 지명을 사용한 반면, 왕호·후호는 백제의 지명을 사용했다.[8]
태수호가 한인 관료에게, 왕호・후호가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가수된 것으로 보아, 해당 시기의 백제에서는 왕호・후호와 태수호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8] 스즈키 야스미와 정동준은 이 시기 백제 왕권이 백제 왕족・귀족・호족과 도래계 관인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지적하였다.[8]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태수호는 백제의 지명을 관칭한 왕호・후호와 달리, 낙랑군, 대방군, 강릉 등 중국 왕조에 유래하는 지명을 관칭하고 있는데, 이는 태수호가 중국 출신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것과 관련이 있다.[8] 과거 낙랑군, 대방군의 한인 중에는 장무이묘의 "대방태수", 동리묘의 "요동현도태수"와 같이 태수호를 자칭한 자도 있었고, 태수호가 한인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
백제는 태수호를 한인 관료에게 가수하는 작호로 이용했고, 왕호・후호와 태수호를 병용하여 백제 왕족・백제 귀족, 한인 관료를 왕권 내부에 위치시켰다.[8] 작위화된 태수호는 더 이상 실직으로 볼 수 없으며, 한인 관료는 왕권 중추에서 활약했다.[8] 왕호・후호에 관칭된 지명은 한반도 남서부에 편재하고 있으며, 염로제와 관련시키는 지적도 있지만, 백제 왕족・백제 귀족이 실제로 해당지에 부임하여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다.[8] 백제는 쇠퇴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인 관료를 적극 등용했지만, 왕권 내부의 우위성은 여전히 백제왕으로부터 왕호를 가수한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있었다.[8]
4. 1. 태수호의 증가
450년에 서하태수가 보이고, 458년에 장무에게 가수된 대방태수가 확인되지만, 490년과 495년에는 대방태수 외에도 광양태수, 강릉태수, 조선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가 보여 태수호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8] 이는 475년 백제의 일시적 멸망 이후, 문주왕과 동성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신흥 관료를 등용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신흥 관료에게 태수호를 가수했기 때문이다.[8]태수호를 가수한 인물은 장무(대방태수), 고달(대방태수・광양태수), 양무(강릉태수・조선태수), 회매(청하태수), 모유(낙랑태수), 왕무(성양태수), 장새(조선태수)이며, 모두 중국식 단성과 이름을 가진 구 낙랑군・대방군 등의 중국 출신 한인 관료였다.[8] 이들은 왕호・후호를 수여받은 백제 왕족의 여씨와 세 글자로 이루어진 재지 유력자로 보이는 사법명과는 구별된다.[8]
태수호가 한인 관료에게, 왕호・후호가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가수된 것으로 보아, 해당 시기의 백제에서는 왕호・후호와 태수호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8] 스즈키 야스미와 정동준은 이 시기 백제 왕권이 백제 왕족・귀족・호족과 도래계 관인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지적하였다.[8]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태수호는 백제의 지명을 관칭한 왕호・후호와 달리, 낙랑군, 대방군, 강릉 등 중국 왕조에 유래하는 지명을 관칭하고 있는데, 이는 태수호가 중국 출신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것과 관련이 있다.[8] 과거 낙랑군, 대방군의 한인 중에는 장무이묘의 "대방태수", 동리묘의 "요동현도태수"와 같이 태수호를 자칭한 자도 있었고, 태수호가 한인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
백제는 태수호를 한인 관료에게 가수하는 작호로 이용했고, 왕호・후호와 태수호를 병용하여 백제 왕족・백제 귀족, 한인 관료를 왕권 내부에 위치시켰다.[8] 작위화된 태수호는 더 이상 실직으로 볼 수 없으며, 한인 관료는 왕권 중추에서 활약했다.[8] 왕호・후호에 관칭된 지명은 한반도 남서부에 편재하고 있으며, 염로제와 관련시키는 지적도 있지만, 백제 왕족・백제 귀족이 실제로 해당지에 부임하여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다.[8] 백제는 쇠퇴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인 관료를 적극 등용했지만, 왕권 내부의 우위성은 여전히 백제왕으로부터 왕호를 가수한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있었다.[8]
4. 2. 왕호·후호와 태수호
백제는 왕족과 귀족에게는 왕호·후호를, 중국계 관료에게는 태수호를 부여했다.[8] 이는 백제가 왕족, 귀족, 호족과 도래계 관인을 명확하게 구분했음을 보여준다.[8] 태수호는 중국 왕조의 지명을 사용한 반면, 왕호·후호는 백제의 지명을 사용했다.[8]450년에 서하태수가 보이며, 458년에 장무에게 가수된 대방태수가 확인되지만, 490년, 495년 단계에서는 대방태수 외에, 광양태수, 강릉태수, 조선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가 보여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475년 백제의 일시 멸망 후, 신백제왕이 된 문주왕계의 문주왕과 동성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신흥 관료를 등용하고, 신흥 관료에게 태수호를 가수한 것이다.[8]
태수호를 가수한 것은 장무(대방태수), 고달(대방태수・광양태수), 양무(강릉태수・조선태수), 회매(청하태수), 모유(낙랑태수), 왕무(성양태수), 장새(조선태수)이며, 모두 중국식 단성와 이름을 가진 인물이며, 구 낙랑군・대방군 등의 중국 출신 한인 관료였다.[8]
태수호는 더 이상 실직으로 볼 수 없고, 아마 한인 관료는 왕권 중추에서 활약했다.[8] 백제는 쇠퇴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인 관료를 적극 등용했지만, 왕권 내부의 우위성은 여전히 백제왕으로부터 왕호를 가수한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있었다.[8]
4. 3. 왕권 내부의 우위성
백제는 쇠퇴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한인 관료를 적극 등용했지만, 왕권 내부의 우위성은 여전히 백제왕으로부터 왕호를 가수한 백제 왕족과 백제 귀족에게 있었다.[8] 백제는 왕호·후호와 태수호를 병용하여 백제 왕족·귀족, 한인 관료를 왕권 내부에 위치시켰다.[8] 475년 백제의 일시 멸망 후, 신백제왕이 된 문주왕계의 문주왕과 동성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신흥 관료를 등용하고, 신흥 관료에게 태수호를 가수했다.[8]태수호가 한인 관료에게, 왕호·후호가 백제 왕족·백제 귀족에게 가수된 것으로 보아, 해당 시기의 백제에서는 왕호·후호가 왕족이나 재지 유력자에게, 태수호가 한인 관료에게 가수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8] 해당 시기의 백제 왕권은 백제 왕족·귀족·호족과 도래계 관인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스즈키 야스미와 정동준의 견해는 수긍된다.[8]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태수호는 백제의 지명을 관칭한 왕호·후호와 달리, 낙랑군, 대방군, 강릉 등의 중국 왕조에 유래하는 지명을 관칭하고 있으며, 태수호가 중국 출신 한인 관료에게 가수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8] 한인 관료에게 왕호·후호가 아닌, 태수호만 가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과거의 낙랑군, 대방군의 한인에게는, 장무이묘의 "대방태수", 동리묘의 "요동현도태수"와 같이 태수호를 자칭한 자도 있었고, 태수호가 한인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백제는 태수호를 한인 관료에게 가수하는 작호로 이용했다.[8]
태수호와 대응하는 왕호·후호도 실직으로 볼 수 없으며, 아마 한인 관료는 왕권 중추에서 활약했다.[8] 왕호·후호에 관칭된 지명은 한반도 남서부에 편재하고 있으며, 염로제와 관련시키는 지적이 있지만, 왕호·후호는 실제로 백제가 획득한 지명을 관칭하고 있었지만, 백제 왕족·백제 귀족이 실제로 해당지에 부임하여, 동지를 직접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8] 왜냐하면, 백제 왕족·백제 귀족도 또한 왕권 중추의 고위자이며, 지방관으로 현지에 부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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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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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례(餘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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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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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國大學東洋學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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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張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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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世紀の韓日関係史-『宋書』倭国伝の検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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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百済の王号・侯号・太守号と将軍号 : 5世紀後半の百済の支配秩序と東アジア
国立歴史民俗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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