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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조 (18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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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광조는 1883년 한성부 출신으로, 3·1 운동 당시 손병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이후 천도교 내 분파 갈등에서 최린을 지지하며 시중회에 가입하여 일제에 협력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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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조 (1883년)
기본 정보
이름정광조
한자 이름鄭廣朝
로마자 표기Jeong Gwang-jo
출생1883년
사망1927년
직업천도교 지도자
배우자박창애
주요 활동
1919년3·1 운동 참여
천도교 내 역할독립운동 자금 조달
체포 및 투옥일본 경찰에 체포, 옥고를 치름
사후
1963년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다. 손병희 사후 최린 주도의 신파가 교권 및 사회운동 방향을 놓고 구파와 갈등하면서 천도교단은 오랜 내분 사태에 돌입했다.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단 내 상당한 실력자였던 정광조는 이론가 이돈화와 함께 최린의 신파를 지지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정광조는 천도교 대령에 선임되었다가 구파에 의해 출교 처분을 받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

2. 1.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측근으로서 사전 모의 과정부터 깊숙이 가담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인호 등과 함께 실무를 맡았으며, 사후 수습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에서는 빠졌다. 당시 맡고 있던 직책은 천도교 대종사장이었다.[1]

3·1 운동을 사실상 주도한 뒤 곧바로 의친왕 탈출을 꾀한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이듬해에도 천도교인 신숙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계속했다.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발행에도 천도교 교무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2. 천도교 신파 가담과 친일 행적

손병희의 사위로, 1919년 3·1 운동 당시 손병희의 측근으로서 사전 모의에 참여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실무를 맡았고, 사후 수습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천도교 대종사장이었다.[1]

3·1 운동 직후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를 유지하며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발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손병희 사후 천도교단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내분을 겪었다. 정광조는 이돈화와 함께 최린의 신파에 가담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정광조는 천도교 대령에 선임되었다가 구파에 의해 출교 처분을 받는 등 갈등을 겪었다.

천도교 신파는 대세론이라는 타협적 노선을 내세워 시중회를 설립했고, 정광조는 이에 가입하여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1939년에는 이용구의 장남 이석규가 주최한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에 참석했다.[2] 이 행사는 흑룡회와 공동 개최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을 추도했다.

1942년 천도교 교령으로 선출된 정광조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등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전몰 장병 위령제를 개최했고, 1943년에는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하여 학병제를 선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3. 사후

정광조는 사후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일제 말기 친일 행적 논란으로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천도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천도교단은 정광조와 김병제 등의 친일 논란에 대해, "일제의 총체적 강압 강요" 하에서 "교단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4]

3. 1. 진보 진영의 비판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일제 말기에 뚜렷한 친일 행적을 보인 서훈자들이 논란이 되면서 1996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과 함께 서훈이 취소되었다.[3]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천도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천도교단은 정광조와 김병제 등 천도교 지도자들의 친일 논란에 대해, "일제의 총체적 강압 강요" 하에서 "교단이 해체나 와해되지 않고 교단을 유지 보존시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4]

3. 2. 보수 진영의 반박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일제 말기에 뚜렷한 친일 행적을 보인 서훈자들이 논란이 되면서 1996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과 함께 서훈이 취소되었다.[3]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천도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천도교단은 정광조와 김병제 등 천도교 지도자들의 친일 논란에 대해, "일제의 총체적 강압 강요" 하에서 "교단이 해체나 와해되지 않고 교단을 유지 보존시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4]

참조

[1] 독립유공자
[2]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2) 한길사 2006-03-10
[3] 뉴스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8-31
[4] 웹인용 알림 https://web.archive.[...] 천도교중앙총부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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