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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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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카는 티베트 불교 회화의 한 형태로, 불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7세기경 인도에서 유래했다. 탕카는 만다라, 초크신, 부처, 조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14~15세기 이후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탕카 제작은 종교적인 의식을 동반하며, 면이나 비단에 천연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탕카는 기법과 재료에 따라 채색 탕카, 자수 탕카 등으로 분류되며, 현재는 상업화와 전통 계승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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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탕카
다른 명칭티베트 불교 그림
네팔어 명칭(파우바)
로마자 표기Thangka (탕카)
IPA (국제음성기호)/t̪ʰaŋka/ (티베트어) /tʰaːŋkaː/ (힌디어)
유형
종류티베트 불교 그림
특징불교 신앙을 표현하는 그림
제작 기법캔버스에 천을 덧대어 그림을 그림
문화적 중요성
종교적 의미만다라, 진언, 무드라, 탄트라 등 밀교의 요가 수행 도구로 사용
용도불교 수행
명상
신앙심 고취
표현부처
보살

여신
만다라
존경하는 인물
역사적 의미티베트 문화의 중요한 부분
인도, 네팔, 중국 등 주변 문화의 영향 받음
제작 과정
제작 재료
비단
광물 안료

그림 기법상세한 그림과 화려한 색채 사용
보관두루마리 형태로 보관
습기 및 손상 방지 필요
관련된 문화
지역티베트
네팔
부탄
인도
몽골
중국
종교티베트 불교
기타문화적 유산
예술적 가치
참고 항목
관련 항목불교
티베트 불교
만다라
밀교
티베트 미술
불화
이미지
금강저
불교 신앙의 상징, 금강저

2. 역사

탕카는 티베트 불교불화 족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7] 주로 티베트에서 제작된 것을 가리키지만,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이나 중국에서도 제작된다. 네팔의 족자는 보통 파우바(thangka)라고 불리지만, 탕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초기 탕카는 크기, 형태, 주제 등이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이 정해졌다. 전형적인 탕카는 면포를 백토로 칠해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비단 표장(밑바탕)에 꿰맨 것이다.

탕카는 원래 불교 승려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불교 교리나 석가의 전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휴대가 편리하도록 족자로 제작되었다. 티베트 회화는 탕카 외에도 벽화나 모래 만다라 형태로도 그려진다.

탕카의 화풍은 8세기부터 17세기경까지는 「벵갈・네팔 방식」과 「카슈미르 양식( 구게 양식)」으로, 18세기 이후는 「중앙아시아 양식」과 「중국・캄 양식」으로 나뉘며, 달라이 라마 6세 이후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8]

14세기 이전의 티베트 회화는 탕카뿐만 아니라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대와 전란으로 소실된 것도 있지만,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것이 많다. 탕카는 휴대가 가능하여 티베트 폭동 등의 경우 중국 밖으로 반출되어 현재에도 몇 점이 남아 있지만, 벽화는 대부분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7] 모래 만다라는 모래를 뿌려 만든 그림으로, 제작과 파괴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어 옛것이 남아 있지 않다.

2. 1. 초기 역사와 발전

티베트 불교인도아잔타 석굴과 실크로드의 막고굴과 같은 몇몇 장소에서만 남아있는 초기 불화의 광범위한 전통에서 발전했다. 탕카 형식은 대부분 수도원에 있던 티베트 불교 벽화 전통과 함께 발전했다.[17]

이러한 형식의 초기 역사는 휴대용 그림보다 벽화를 통해 더 쉽게 추적할 수 있다.[17] 대부분의 탕카는 공덕을 얻기 위해 개인에 의해 위촉되었고, 수도원이나 다른 개인에게 주어지거나 의뢰인이 사용했다. 어떤 탕카들은 뒷면에 명상하는 유명한 승려의 모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18]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수도승이었을 것이나, 평신도 예술가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9] 의뢰인은 종종 귀중한 재료를 제공했고, 예술가에 대한 보상은 수수료가 아닌 "선물"로 여겨졌다.[19] "탕카"라는 단어는 고전 티베트어로 "돌려 펴는 것"을 의미한다.[20] 탕카는 매우 드물게 서명되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예술가로서보다는 중요한 수도원 지도자였기 때문에 알려져 있다.[21]

천 위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티베트 그림은 둔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되었다. "경전 동굴"은 11세기에 봉인되었는데, 많은 그림에는 티베트어 비문이 있거나 티베트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스타일이거나, 인도식을 반영하고 있다.[4] 연대 측정이 어렵지만, 이 작품들은 대부분 당나라 통치 기간인 약 781년에서 84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티베트 자체에서 제작된 천 위의 탕카는 11세기부터 시작되며, 11세기와 12세기의 탕카는 약 20점이 남아 있다. 이러한 초기 예는 구성이 이미 복잡하지만 후기 예보다 덜 복잡하다. 일반적인 구성은 작은 인물로 둘러싸인 중앙 인물을 보여주는데, 종종 틀 안에 있거나 불꽃 같은 후광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작은 구름 위에 앉아 있다. 이러한 인물 뒤에는 하늘이 많은 풍경 배경이 종종 나타난다. 중앙 인물은 신, 아라한 또는 중요한 승려일 수 있으며, 동일한 그룹이 배경 인물을 구성한다.

그 후 수세기 동안 티베트 회화, 벽화와 탕카 모두는 인도-네팔과 한족 중국 회화의 두 가지 주요 영향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했다. 티베트 내에서 네팔과 중국의 다른 지역에 가까운 지역은 종종 지역 스타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부탄 탕카는 주로 중앙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다. 서로 다른 수도원 종파도 다소 다른 스타일의 특징을 발전시켰다.

티베트 회화는 특히 14세기 이후부터 한족 중국 회화의 많은 요소를 통합하여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탕카의 인물 스타일은 인도-네팔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5] 주세페 투치에 따르면, 청나라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 18세기 중국의 부드럽고 화려한 귀족적인 것을 지방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티베트 예술이 발전했습니다."[5]

2. 2. 티베트, 네팔, 그리고 주변 지역

티베트 불교인도아잔타 석굴과 실크로드의 막고굴 등에서만 살아남은 초기 불화의 광범위한 전통에서 발전했다. 탕카 형식은 대부분 수도원에 있던 티베트 불교 벽화 전통과 함께 발전했다.

탕카의 초기 역사는 휴대용 그림보다 벽화를 통해 더 쉽게 추적할 수 있다.[17] 대부분의 탕카는 공덕을 쌓기 위해 개인들이 의뢰했다. 탕카는 수도원이나 다른 개인에게 주어지거나, 의뢰인이 보관하기도 했다. 어떤 탕카들은 뒷면에 명상하는 유명한 승려의 모습(덤스댐)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18]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수도승이었을 것이나, 금속 조각처럼 평신도 예술가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종 귀중품이었던 자료들은 의뢰인이 제공했고, 예술가에 대한 보상은 수수료가 아닌 "선물"로 여겨졌다.[19] "탕카"라는 단어는 고전 티베트어로 "돌려 펴는 것"을 의미한다.[20] 탕카는 매우 드물게 서명되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예술가로서보다는 중요한 수도원 지도자였기 때문에 알려져 있다.[21]

네팔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탕카 그림은 서기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신과 자연 경관을 그린 것은 그 이전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네팔 그림에 대한 티베트인과 중국의 영향은 파우바(탕카)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네팔의 화풍은 티베트 예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파우바는 신들을 묘사한 팔라와, 특정한 의미를 지닌 원과 정사각형의 복잡한 패턴을 묘사한 만다라의 두 종류로 나뉜다. 대승불교는 7세기 앙슈바르마 때 네팔을 통해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 전역의 새로 지어진 수도원에는 종교적 성화와 불교 필사본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프라즈나파라미타를 포함한 많은 불교 필사본들이 카트만두 계곡에서 복사되었다. 예를 들어, 아스타사하스 리카 프라즈나파라마리타는 999년 나렌드라 데바와 우다야 데바의 통치 기간 동안 파탄에서 티베트의 사샤키아 수도원을 위해 복제되었다. 티베트의 노르 수도원의 경우, 네팔에서 1069년에 아스타사하스리카 프라즈나파라마리타 한 권과 1111년에 카브야다르샤 한 권이 복제되었다. 네팔 미술의 영향력은 13세기부터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아라니코로 알려진 네팔의 혁신가이자 건축가인 발바후가 쿠빌라이 칸의 수석 제국 예술가가 되면서, 네팔 장인들은 중국 황제들의 요청으로 솜씨를 발휘하고 전문 지식을 전달했다.

이후 티베트 회화(벽화와 탕카)는 인도-네팔과 한족 중국 회화의 영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했다. 불교가 쇠퇴했음에도 스타일은 티베트 지역뿐 아니라 탕카가 그려진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를 수 있었다. 티베트 내에서 네팔과 중국에 가까운 지역은 종종 지역 스타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부탄 탕카는 주로 중앙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다. 서로 다른 수도원 종파도 다른 스타일의 특징을 발전시켰다.

티베트 회화는 14세기 이후부터 한족 중국 회화의 요소를 통합하여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했다. 풍경 배경에 더 많은 공간과 강조를 허용하는 것이 한 예이다. 탕카의 인물 스타일은 인도-네팔 전통에서 유래했다. 주세페 투치에 따르면, 청나라 시대에는 "18세기 중국의 부드럽고 화려한 귀족적인 것을 지방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티베트 예술이 발전했다."[5] 원나라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통치되었지만, 청나라가 집권하면서 티베트 불교에 대한 궁정의 관심이 증가했고, 황실 예술가들이 제작한 세련되고 우아한 작품이 티베트로 보내져 현지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궁정 스타일 외에도 티베트 근처 중국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

탕카는 몽골, 라다크, 시킴, 히말라야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다람살라, 히마찰프라데시의 라훌 및 스피티 지구 일부, 러시아( 칼미키아, 부랴티야, 투바) 및 중국 동북부 일부 등 티베트 불교가 번성한 모든 지역에서 그려졌다.

3. 종류

탕카는 제작 기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크게 채색 탕카(티베트어: bris-tan)와 덧붙이기 기법이나 자수 기법으로 만든 실크 탕카로 나뉜다.

14세기 이전의 티베트 회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대와 전란으로 소실된 것도 있지만,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것이 많다.[7] 탕카는 휴대가 가능하여 티베트 폭동 때 중국 국외로 반출되어 일부가 남아 있지만, 벽화는 대부분 파괴되었다.[7]

3. 1. 기법에 따른 분류

탕카는 기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크게 채색 탕카와 덧붙이기 기법 또는 자수 기법으로 제작된 실크 탕카로 나뉜다.

탕카는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세분된다.

유형설명
채색 탕카 (tson-tang|촌탕bo)가장 일반적인 유형
덧붙이기 기법 탕카 (go-tang|고탕bo)
검은색 바탕 탕카 (nagtang|낙탕bo)검은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그림
목판 인쇄 탕카목판화/목판 인쇄 기법으로 종이 또는 천에 윤곽선을 그림
자수 탕카 (tsem-thang|tsem탕bo)
금색 바탕 탕카길상적인 표현. 평화로운 장수의 신이나 완전히 깨달은 부처를 그릴 때 신중하게 사용
붉은색 바탕 탕카 (mar-tang|마르탕bo)주홍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그림



일반적인 채색 탕카는 높이가 20cm~50cm 정도이다. 그러나 사원에서 특별 종교 행사를 위해 제작되는 대형 축제용 탕카는 너비가 약 18.29m 이상, 높이가 약 6.10m 이상일 수 있다. 부탄에서는 이러한 탱카를 탕드렐(thongdrel)이라고 부른다. 제단이나 사원에 전시하기 위한 평균보다 큰 탕카도 있다.

티베트 차크리(tsakli)는 높이 15cm 정도의 미니어처 탕카와 같은 카드이다. 이것들은 세트로 제작되어 승려 훈련, 입문 카드, 공양물, 임시 만다라 등에 사용된다. 필사본 책의 나무 겉표지(약 6cm × 55cm)도 탕카와 유사한 기법으로 제작된다.

오늘날에는 종교적 목적으로 실제 탕카 대신 탕카 포스터를 사용하기도 한다.

아시아 미술 자료에서는 직물 탕카를 "태피스트리"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수, 덧붙이기 기법 등 여러 기법의 조합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시 기법으로 제작된 태피스트리 탕카는 극히 드물다.

탱카 제작 과정

3. 2. 크기와 용도에 따른 분류

기법과 재료에 따라 탕카는 여러 유형으로 분류된다. 크게 채색된 것(bris-tanbo)과 덧붙이기 기법 또는 자수 기법으로 제작된 실크 탕카로 나뉜다.

탕카는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 채색 탕카(tson-tangbo):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 '''덧붙이기 기법(go-tang)'''
  • 검은색 바탕 탕카(nagtangbo): 검은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그림을 그린 탕카이다.
  • 목판 인쇄 탕카: 목판화/목판 인쇄 기법으로 종이 또는 천에 윤곽선을 그려 만든 탕카이다.
  • 자수 탕카(tsem-thangbo)
  • '''금색 바탕 탕카''': 길상적인 표현으로, 평화로운 장수의 신이나 완전히 깨달은 부처를 그릴 때 신중하게 사용된다.
  • 붉은색 바탕 탕카(mar-tangbo): 문자 그대로 금색 선이지만, 주홍색 바탕에 금색 선으로 그린 탕카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탕카는 비교적 작으며, 채색된 부분의 높이가 약 20~50cm 정도이다. 하지만 사원에서 특별한 종교 행사를 위해 벽에 펼쳐 놓도록 제작된 거대한 축제용 탕카도 있다. 이러한 탕카는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며, 너비가 약 18.29m, 높이가 약 6.10m 이상일 수도 있다. 부탄에서는 이러한 탕카를 탕드렐(thongdrel)이라고 부른다. 제단이나 사원에 전시하기 위해 제작된 평균 크기보다 큰 탕카도 있다.

티베트 차크리(tsakli)는 높이가 15cm 정도이고 종종 정사각형이며, 보통 단일 인물이 그려진 미니어처 탕카와 같은 카드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세트로 제작되었으며, 초기 승려 훈련 단계에서 또는 입문 카드나 공양물로, 또는 임시 만다라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 또 다른 관련 형태는 필사본 책의 나무 겉표지로, 길고 좁은 띠 모양(일반적으로 약 6cm × 55cm)이며, 종종 여러 칸에 나뉘어 앉아 있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4. 제작 과정

탕카 제작은 단순한 그림 작업이 아니라, 여러 단계와 의미를 지닌 복합적인 과정이다.

탕카는 완성 후, 표장(바탕)에 꿰맨다. 15세기 이후 탕카는 구조가 거의 정해져 있다. 감색이나 검정색 바탕 위에 별도로 그린 그림을 꿰매어 붙이고, 그림 틀로 바깥쪽은 노란색, 안쪽은 붉은색 천을 꿰매 붙인다. 그림 바로 아래 꿰매 붙인 천은 '창'이라고 하며, 특히 화려한 것을 사용한다. 표장 상하에는 축목이 붙어 있어 운반 시 말 수 있다.[7] 축목 양 끝에는 은이나 구리 축첨이 붙는다.[10] 표장 상부에는 포포가 붙어 있어 운반 시나 비관람 시 탕카 앞면에 드리워 그림을 보호한다. 포포에는 관람 시 말아 올리기 편하도록 풍억이라는 끈이 붙어 있다. 다만, 이는 원칙이며 그림 내용만큼 엄격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15세기 이전 탕카는 반드시 이런 형태는 아니다.[7]

15세기 이후 전형적인 형식의 탕카 (아플리케 기법). 19세기 부탄 제작. 주제는 부탄의 드룩파 카규파(Drukpa Kagyu).


오래된 탕카 뒷면에는 묘사된 신의 만트라나 소유주 정보가 적히기도 하지만, 의뢰자나 화가 정보는 드물다. X선을 통해 그림 앞면 안료 아래 새겨진 명문을 볼 수도 있다.[7]

탕카 제작은 영적인 수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탕카를 그리기 전, 도중, 후에 정화 의식, 만트라 염송, 스승의 축복 기원 등 특정 의식을 따르며, 이를 통해 탕카에 신성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또한, 탕카는 지역 사회 역량 강화에도 기여한다. 많은 탕카 학교와 협동조합은 지역 예술가들에게 훈련과 고용 기회를 제공하며, 탕카 예술 지원은 티베트 문화 보존과 히말라야 지역 사회 생계에 도움이 된다.

4. 1. 재료와 기법

탕카는 이나 비단에 그려진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너비 40cm에서 58cm로 생산되는 느슨하게 짜인 면이다. 45cm보다 넓은 탕카는 종종 이음매가 있다. 안료는 동물성 접착제를 수용성 매체로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광물성과 유기성 안료 모두 사용된다. 서구 용어로는 템페라 기법이지만, 종종 구아슈의 한 형태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으며, 안료는 바르기 직전에 혼합된 따뜻한 액체로서 사용되었다.[7]

네팔에서는 24캐럿 금을 탕카 그림 일부에 도금하기도 한다.

탕카의 구성은 대부분의 불교 미술과 마찬가지로 매우 기하학적이다. 팔, 다리, 눈, 콧구멍, 귀 및 다양한 의식 도구는 모두 각도와 교차선의 체계적인 격자에 배치된다. 숙련된 탕카 화가는 일반적으로 구성에 포함할 다양한 사전 디자인된 항목(시주 그릇과 동물부터 인물의 눈, 코, 입의 모양, 크기 및 각도까지 다양함)을 선택한다.

탕카는 종종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상징과 암시는 불교 경전에 제시된 엄격한 지침을 따라야 한다. 화가는 정확하고 적절한 탕카를 제작하기 위한 충분한 종교적 이해, 지식 및 배경을 가져야 한다. 티베트 미술은 부처의 물리적 몸인 응신신과 부처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예술 작품은 부처 또는 신을 올바르게 의인화하기 위해 비율, 모양, 색상, 자세, 손 위치 및 속성에 관한 불교 경전에 명시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

안료의 성분은 흰색은 백토, 붉은색은 주사, 주황색은 연단, 노란색은 웅황, 녹색은 공작석, 파란색은 남동석, 갈색은 벵갈, 금색은 금 등 광석으로 만든 안료가 사용된다.[9] 그러나 티베트 폭동 이후에는 화학 안료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7]

채색 작업


그림은 안료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직물, 자수, 아플리케, 목판화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7] 안료로 그릴 경우, 바탕에는 천이 사용된다. 무지의 면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7] 이 천 위에 백토와 교질을 섞은 것을 바르고 표면을 매끄럽게 한 후 그림을 그린다. 이 처리 과정은 안료의 박리(벗겨짐)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7]

윤곽선을 그리는 작업


그림은 먼저 밑그림이 그려진다. 티베트 그림에서는 특정 인물의 손발 길이 비율이나 인물 간의 위치 관계 등이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 이 밑그림은 보조선 등을 다수 사용하여 신중하게 그려진다. 밑그림은 후의 채색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되지만, 오래된 그림에서는 안료가 벗겨져 밑그림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채색이 이루어진다. 그림물감은 안료를 교질로 풀어서 만든 것이다. 채색한 위에 윤곽선을 그리고 완성한다. 눈 부분은 개안법요 시에 그린다.[7] 개안법요는 길일인 신월이나 망월에 행해진다.[10]

여러 사람이 작업을 분담하는 경우, 주요 인물이나 특히 그 얼굴은 스승이, 다른 부분은 제자가 분담하는 경우가 많다.[7]

4. 2. 종교적 의례

탕카는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며, 종교적인 예술이므로 모든 상징과 암시는 불교 경전에 제시된 엄격한 지침을 따라야 한다. 화가는 정확하고 적절한 탕카를 제작하기 위해 충분한 종교적 이해, 지식 및 배경을 갖추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3]

탕카의 구성은 불교 미술과 마찬가지로 매우 기하학적이다. 팔, 다리, 눈, 콧구멍, 귀 및 다양한 의식 도구는 모두 각도와 교차선의 체계적인 격자에 배치된다. 숙련된 탕카 화가는 시주 그릇과 동물부터 인물의 눈, 코, 입의 모양, 크기 및 각도까지 다양하게 구성에 포함할 다양한 사전 디자인된 항목을 선택한다. 이 과정은 매우 체계적으로 보이지만, 종종 그 정신을 포착하기 위해 관련된 상징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티베트 미술은 부처의 물리적 몸인 응신신과 부처의 특성을 신의 형태로 보여준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부처 또는 신을 올바르게 의인화하기 위해 비율, 모양, 색상, 자세, 손 위치 및 속성에 관한 불교 경전에 명시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4]

5. 도상과 상징

탕카를 비롯한 티베트 불교 회화는 불교 이론에 기반하여 소재, 구성 및 기하학적 배치가 결정된다.[7] 불교 회화는 7세기경 인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지만,[7] 현존하는 티베트 탕카의 대부분은 14~15세기 이후의 작품이다.[7] 티베트 불교 회화는 15세기에 완성을 보았기 때문에,[7]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교 회화가 현대 티베트 미술 양식과 거의 일치한다.

탕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8세기 말부터 9세기 중반까지 티베트 민족의 토번에 지배되었던 돈황에서 티베트 불교와 관련된 회화가 몇 점 발견되었으며, 이것이 탕카의 원류 중 하나로 생각된다.[7]

탄카

5. 1. 주요 도상

탕카의 구성은 대부분의 불교 미술과 마찬가지로 매우 기하학적이다. 팔, 다리, 눈, 콧구멍, 귀 및 다양한 의식 도구는 모두 각도와 교차선의 체계적인 격자에 배치된다. 숙련된 탕카 화가는 일반적으로 구성에 포함할 다양한 사전 디자인된 항목(시주 그릇과 동물부터 인물의 눈, 코, 입의 모양, 크기 및 각도까지 다양함)을 선택한다. 이 과정은 매우 체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종 그 정신을 포착하기 위해 관련된 상징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탕카는 종종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이 예술은 명백히 종교적이기 때문에 모든 상징과 암시는 불교 경전에 제시된 엄격한 지침을 따라야 한다. 화가는 적절한 훈련을 받고 정확하고 적절한 탕카를 제작하기 위한 충분한 종교적 이해, 지식 및 배경을 가져야 한다.

티베트 미술은 부처의 물리적 몸인 응신신과 부처의 특성을, 아마도 신의 형태로 보여준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부처 또는 신을 올바르게 의인화하기 위해 비율, 모양, 색상, 자세, 손 위치 및 속성에 관한 불교 경전에 명시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7]

탕카는 목적에 따라 만다라, 초크신, 기타 형태로 그려진다.[7] 기타 형태로는 라마 등의 위인, 붓다 등 불교의 신이나 인물, 불법에 대해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10] 티베트 의학의 설명도 탕카로 남아 있다.[11]

만다라는 기하학 무늬 속에 인물이나 사물을 그린 그림으로, 그려진 사물에 사상이나 행 등 불교의 추상적 개념을 의미 부여한 것이다. 초크신은 중심 인물과 그 관련 인물과의 관계를 나무처럼 나열하여 그린 것이다. 기타 그림의 대부분은 중심에 주제가 되는 인물을 그린 것으로, 그 주위에 관련 인물이나 그 인물에 얽힌 이야기 등이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 불교 회화 제작은 15세기에 무명의 장인에서 유명한 화가에 의한 것으로 바뀌었고, 형식도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엄격해졌다.

만다라의 예


초크신의 예


만다라(曼荼羅)는 불교의 경전인 밀교(밀교)(タントラ)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기하학 무늬이다.[7]

;시간륜만다라(時輪曼荼羅, 카라차크라만다라)

시간륜만다라(時輪曼荼羅)는 시간륜밀교(時輪タントラ)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만다라이다. 가장 중앙에는 팔엽연화(꽃잎이 8장인 연꽃)가 놓여 있으며, 그 주위를 볼록한 무늬를 조합한 사각형이 3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각 볼록 무늬의 바깥쪽에는 3층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문이다. 즉, 사각형은 벽이다. 가장 중앙에 도달하려면 3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 건물 안에는 보살이나 분노존 등이 그려진다. 최외곽 벽 주위는 4중의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쪽부터 땅(아래 그림에서는 노란색), 물(물결 무늬), 불(빨간색), 바람(검은색)을 나타낸다. 즉 지수화풍이다. 불과 바람의 원을 가로질러 팔대시림(8개의 무덤인 폭虐, 뼈사슬, 금강염, 밀총, 길상, 幽暗, 啾啾, 광소)이 쓰여 있다(그림인 경우도 있지만, 아래 그림에서는 글자). 시림과 시림 사이에는 법륜이나 연꽃이 그려진다. 지수화풍의 원 바깥쪽에는 금강저의 원, 그 바깥쪽에는 불꽃의 원이 그려진다.[10]

;약사만다라(薬師曼荼羅)

중앙에 약사여래(약사瑠璃光如来)본원공덕경의 경본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에 팔불약사가[12] 놓여 있고, 그 주위에 16대보살, 그 주위에 24의 호법존 등이 놓여 있다. 네 개의 문은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최상부의 9명은 조사(교조), 존사(중요한 승려) 등이다.[10]

;법신보현만다라(法身普賢曼荼羅)

중앙의 사각형을 5개의 사각형이 둘러싸고 있다. 즉, 6개의 작은 만다라를 포함한 것으로, 육족평등을 설하는 일체불상응요가밀교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작은 만다라에는 중앙의 인물과 주위에 8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8명의 인물이 있는 부분에는 성병이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13]

;바즈라바라히만다라(ヴァジラヴァーラーヒー曼荼羅)

वज्रवाराही|바즈라바라히sa는 헤바지라의 비이며, 힌두교의 신이기도 하다. 중앙의 인물이 वज्रवाराही|바즈라바라히sa이며, 2중의 삼각형이 조합되어 그 주위를 원으로 둘러싸고 있다.[13]

몇몇 탕카는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인물이 정면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세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티베트 폭동과 관련하여 유실되거나, 축장(軸装)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세트 조합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많다.

;여래

존격(인물)에 따라 인상(印相)과 소지품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7]

;조사

종파의 개조나 주요 승려를 그린 것. 손발의 치수와 소지품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주위에는 관련된 존격(인물)이나, 생애의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는 간단한 전기 등이 그려져 있다.[7]

;여성존

티베트에서는 관음보살의 여성화신인 타라보살의 신앙이 강하며, 특히 녹색 타라와 흰색 타라가 많다.[7]

;수호존, 호법존

티베트의 수호존, 호법존은 일본 등의 명왕에 해당한다. 도감 등에서는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그림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 사찰 등에서는 포옹 그림은 관정(灌頂)을 받은 자만이 열람을 허락받고, 원래는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그림이다.[7]

5. 2. 상징

탕카는 대부분의 불교 미술과 마찬가지로 매우 기하학적이다. 팔, 다리, 눈, 콧구멍, 귀 및 다양한 의식 도구는 모두 각도와 교차선의 체계적인 격자에 배치된다. 숙련된 탕카 화가는 일반적으로 구성에 포함할 다양한 사전 디자인된 항목(시주 그릇과 동물부터 인물의 눈, 코, 입의 모양, 크기 및 각도까지 다양함)을 선택한다. 이 과정은 매우 체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종종 그 정신을 포착하기 위해 관련된 상징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탕카는 종종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이 예술은 명백히 종교적이기 때문에 모든 상징과 암시는 불교 경전에 제시된 엄격한 지침을 따라야 한다. 화가는 적절한 훈련을 받고 정확하고 적절한 탕카를 제작하기 위한 충분한 종교적 이해, 지식 및 배경을 가져야 한다.

티베트 미술은 부처의 물리적 몸인 응신신과 부처의 특성을, 아마도 신의 형태로 보여준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부처 또는 신을 올바르게 의인화하기 위해 비율, 모양, 색상, 자세, 손 위치 및 속성에 관한 불교 경전에 명시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7]

탕카 그림은 전통적으로 광물, 식물, 심지어는 보석에서 채취한 천연 안료를 사용한다. 이러한 안료는 생생한 색감을 더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 예를 들어, 금은 깨달음을, 청금석은 하늘을, 주사는 활력을 상징한다. 이러한 안료의 상징성을 이해하면 탕카 예술에 대한 감상이 더욱 깊어진다.

탕카 그림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원리와 신성 기하학을 구현한다. 탕카 제작에 사용되는 정확한 측정과 비율은 황금비와 만다라 상징론과 같은 고대 수학 및 철학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티베트 문화에서 예술과 영성의 조화를 반영한다.

6. 현대의 탕카

14세기 이전의 티베트 회화는 시대와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1966년부터 1978년까지의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7] 탕카는 휴대가 가능하여 티베트 폭동 등의 상황에서 중국 국외로 반출되어 현재에도 몇 점이 남아 있지만, 벽화는 대부분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7] 모래 만다라는 모래를 뿌려 제작하고 파괴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어 옛것이 남아 있지 않다.

6. 1. 상업화와 전통 보존

청나라 건륭제는 청나라 건국 이래의 국가 사업인 몽골족 회유에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그 일환으로 몽골족이 믿는 티베트 불교 지배를 시도했다. 건륭제는 초크신 탕카를 제작하게 했는데, 보통 티베트 불교의 중요 인물 등을 중심에 두는 것과 달리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게 했다. 탕카에 쓰인 티베트어 설명에 따르면, 건륭제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다. 중국 문학자 나카노 미요코는 그림 대부분은 티베트인 화가가, 건륭제의 얼굴 부분만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이라고 분석했다.[15]

참조

[1] harvp
[2] harvp
[3] harvp
[4] harvp
[5] harvp
[6] 웹사이트 Metropolitan Museum http://www.metmuseum[...]
[7] 서적 タンカの世界
[8] 서적 タンカ チベット・ネパールの仏画
[9] 논문 青木文教師将来チベット仏画の色彩と彩色技術 https://doi.org/10.1[...] 国立民族学博物館
[10] 서적 タンカ
[11] 서적 チベット生と死の文化
[12] 기타 七仏薬師に釈迦如来を加えたもの
[13] 서적 マンダラ 西チベットの仏教美術
[14] 서적 四部医典タンカ全集
[15] 서적 乾隆帝
[16] 기타
[17] 기타
[18] 기타
[19] 기타
[20] 기타
[2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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