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각
1. 개요
정언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3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홍문관 직제학 등을 거쳤으며,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하며 정미사화를 일으켰으며, 이후 전라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 호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1556년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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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출생 -
미라 바이
미라 바이는 크리슈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노래한 인도의 시인이자 성자로, 라지푸트 왕족 출신으로 메와르 왕가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 후 크리슈나 신앙에 귀의하여 시를 짓고 노래하며 바크티 운동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
1498년 출생 -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는 루도비코 데 메디치라는 본명을 가진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로로, '검은 부대의 조반니'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여러 전쟁에서 활약하다 코냐크 동맹 전쟁 중 부상으로 사망한 마지막 위대한 이탈리아 용병대장 중 한 명이다. -
1556년 사망 -
레 중종
레 중종은 후 레 왕조의 황제였으나 권신 찐끼엠에 의해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후사 없이 요절하여 레 태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
1556년 사망 -
피에트로 아레티노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재치 있는 풍자와 신랄한 비판으로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왕자들의 재앙"이라 불린 이탈리아의 작가, 시인, 풍자가이다. -
낙마사한 사람 -
움베르토 보초니
이탈리아 미래파 화가이자 조각가인 움베르토 보초니(1882-1916)는 로마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미래파 운동에 참여하여, 역동적인 움직임과 공간을 혁신적으로 표현한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남겼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요절했다. -
낙마사한 사람 -
알렉산더 3세 (스코틀랜드)
알렉산더 3세는 7세에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친정 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하고 잉글랜드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스코틀랜드의 국력 신장에 기여했으나,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2. 생애
정언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 자는 경보(慶甫)이다.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그의 종고조부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홍문관 등에 근무하였다. 경연과 시강원에서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였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여러 차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간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47년에는 선위사로서 일본 사신을 접대하고 무역 협상을 맡았다. 같은 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켜 정미사화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전라도와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550년 한성부우윤, 1551년 전라도관찰사, 1552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53년 경상도관찰사, 1555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56년 8월 23일, 낙마 사고로 인한 상처로 사망하였다.
2.1. 초기 생애
할아버지는 철원도호부사를 지내고 증 가선대부 도승지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정연경(鄭延慶)이며, 아버지는 성균관진사로 사후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와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어은 정희검(漁隱 鄭希儉)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생원 신승준의 딸이다.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 정희량은 그의 백부가 된다.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은 그의 종고조부 정충경의 아들이다. 좌찬성 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정도공 정역의 5대손이다.
숙부 허암 정희량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그의 할머니 청주 경씨의 묘소 시묘살이를 하다가 실종된 후, 아버지 정희검은 친형 정희량을 의관장을 하다가 고양에 설단하고 봉제사하였다. 부인은 고령 신씨로 신공제의 셋째 딸이며, 신숙주의 종증손녀가 된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2.2. 관료 생활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예문관에 뽑혔다가 얼마 후 홍문관에 발탁되었다. 다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경연에 있었고 여러번 시강원에 옮겨 임명되었으며, 네 차례나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여섯 차례나 간관의 임무를 다하였다. 인종 때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다. 1547년 일본 사신 안심동당이 조선에 찾아오자, 선위사가 되어 무역 협상을 맡아보았다.
1550년 한성부우윤, 1551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552년 동지중추부사 재임 시절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553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1555년 호조 참판이 되었다.
이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56년 8월 23일 졸하였다. 낙마 사고 후 말발굽으로 인한 상처가 나 사망했다 한다.
2.2.1. 정미사화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 중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서 문정왕후와 이기 등을 비난하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하고 왕에게 바쳐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154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2.3. 지방관 생활과 죽음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다. 1547년 일본 사신 안심동당이 조선에 찾아오자, 선위사가 되어 무역 협상을 맡아보았다.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 중에 전라도 양재역에서 문정왕후와 권신 이기 등을 비난하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하고 왕에게 바침으로써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154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50년 한성부우윤, 1551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552년 동지중추부사 재임 시절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553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1555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56년 8월 23일 졸하였다. 낙마 사고 후 말발굽으로 인한 상처가 나 사망했다 한다. 사후 시신은 그해 10월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서쪽, 내서산 은행정(銀杏亭) 자좌(子坐)에 쌍분으로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