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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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이(程頤, 1033-1107)는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형인 정호와 함께 송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는 호안정에게 대학을 배우고 서경국자감 교수를 지냈으며, 소동파 등과의 당쟁에 휘말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정이는 '리일분수', '성즉리', '격물치지' 등의 사상을 주창하며 형이상학적 사유를 전개했고, 그의 사상은 주희에게 계승되어 주자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과부의 정절을 강조하는 등 여성관과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대표 저서로는 《이천역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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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정이는 1033년 허난성 뤄양에서 태어났으며, 형인 정호와 함께 북송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이들 형제를 이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어릴 때 형과 함께 주돈이에게서 배웠고, 이후 송학(宋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호안정(胡安定) 밑에서 수학했다. 1059년에는 진사 학위를 받았으나[3], 이후 여러 차례 고위 관직 제의를 거절하고 뤄양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3] 그는 왕안석이 추진한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3]
이후 사마광 등의 추천으로 54세 때 철종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시강(侍講)으로 발탁되었으나[3],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소동파를 비롯한 다른 학자 및 관료들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는 당시 정치적 대립이었던 낙촉당쟁(洛蜀黨爭)으로 이어졌고, 결국 정이는 조정에서 밀려나 유배되는 등[4] 순탄치 않은 관료 생활을 보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106년에야 최종적으로 사면받았다.[4]
정이는 형 정호와 함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은 《역(易)》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핵심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理)'를 강조하며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고, 이는 '성즉기'(性卽氣)를 내세운 형 정호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또한, 앎(知)과 실천(行)을 모두 중시하여, 마음을 수양하고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학문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훗날 남송의 주자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었다.
1452년, 명나라 조정은 정이를 비롯하여 맹자, 증자, 주돈이, 주희 등 유교 현인들의 후손들에게 오경박사(五經博士) 칭호를 수여하여 그 학문적 공로를 기렸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정이는 1033년 허난성 뤄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정욱(程昱)은 황저우 황피 현령을 지냈고, 부친 정상(程珦)은 정이가 태어날 당시 황피 현위를 맡고 있었다. 정이에게는 형 정호가 있었다.
정이는 형 정호와 함께 14세 무렵부터 주돈이에게서 배웠고, 24세 무렵에는 송학의 선구자 호안정을 스승으로 삼아 대학(大學)에서 공부했다. 그는 학문 수양을 통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논술한 『안자호학론』(顔子好學論)을 써 호안정에게 인정받았고, 대학의 교관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1056년(24세) 국립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059년(27세)에는 진사 학위를 받았다.[3] 이후 뤄양에 머물며 학문을 가르쳤고, 여러 차례 고위 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그는 왕안석이 추진한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3]
2. 2. 관직 생활과 정치적 갈등
정이는 송학(宋學)의 선구자 호안정(胡安定)에게서 배우고, 서경국자감(西京國子監)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였다. 이후 숭전전설서(崇政殿說書)에 발탁되었지만, 당시 조정 내 다수의 문사들은 소동파를 따르며 정이의 학문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소위 낙촉(洛蜀) 당쟁이 발생하였고, 정이는 결국 조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개혁파가 실각한 후인 1086년(54세)에는 사마광 등의 추천으로 철종에게 유교를 강의하는 시강(侍講)에 임명되었다.[3] 그러나 정이는 형 정호보다 더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동료들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특히 쓰촨 지역 학자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소식 및 그의 문하생들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다시 조정에서 쫓겨났다.[3]
휘종 때가 되어서야 복관(復官)되어 수도 경사(京師)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시련은 계속되었다. 1097년, 정적들의 모함으로 그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부주로 추방(좌천)되는 등 만년에는 대체로 불우한 시기를 보냈다.[4] 3년 뒤인 1100년에 사면되었으나, 1103년에는 다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저작이 금지되는 탄압을 받았다. 정이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106년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사면될 수 있었다.[4]
2. 3. 만년
54세 되던 해인 1086년, 사마광 등의 추천을 받아 철종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시강(侍講)으로 임명되었다.[3] 하지만 그는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동료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특히 쓰촨 지역 학자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소식 및 그의 문하생들과 격렬하게 대립했는데, 이는 낙촉당쟁(洛蜀黨爭)으로 불리는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정이는 조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3]
이후 만년에는 대체로 불우한 삶을 보냈다. 1097년에는 정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그의 학문 강의가 금지되고 재산마저 몰수당했으며, 부주(涪州)라는 먼 곳으로 좌천되어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4] 3년 뒤인 1100년에 잠시 사면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정치적으로 위험인물로 분류되었고, 1103년에는 그의 저서들이 또다시 금서로 지정되는 탄압을 받았다.[4] 사망하기 1년 전인 1106년에야 비로소 모든 혐의를 벗고 완전히 사면될 수 있었다.[4]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제자들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로 '정문입설'(程門立雪)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양시(楊時)와 유초(游酢) 두 사람이 그의 집 문 앞에서 눈을 맞으며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이야기로, 학문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유교적 미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6]
한편, 정이는 과부의 정절을 지나치게 강조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7][8] 그는 남편이 죽은 여성이 재혼하는 것은 정절을 잃는 부적절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남편 사후 생계가 막막해진 과부의 어려움에 대해 餓死事小,失節事大|아사사소 실절사대중국어 (굶어 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지만, 정절을 잃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7][8] 이러한 그의 견해는 후대 명·청 시대에 과부의 재혼을 금기시하고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수많은 과부들에게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주었으며, 심지어 과부들의 자살률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9][10][11]
3. 사상
정이는 형인 정호(程顥)의 직관적인 학풍과 달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그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道)'가 음양의 근원이자 원리이며, 동시에 개별 사물에 내재하는 '리(理)'가 된다고 보았다. 이는 우주 전체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리'는 하나이지만(理一), 개별 사물 속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分殊)는 '리일분수(理一分殊)' 사상으로 이어진다. 또한 만물의 물질적 재료인 '기(氣)'와 별개로, 그 존재와 운동의 근본 원인인 형이상학적 '리'를 인정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시했다. 나아가 인간의 본성 '성(性)' 역시 '리'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앎에 이르는 '격물(格物)'을 중요한 수양 방법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후대 주희(朱熹)에게 계승되어 성리학 이론 체계의 핵심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정이의 사상은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서문에 원부(元符) 2년 정월이라는 기록이 있어 1099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제자 양시(楊時)에 따르면 미완성 상태에서 문인들에게 보인 것을 후에 수집,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주역정씨전』은 주역의 상경·하경·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편(文言篇)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지만, 계사(繫辭) 이하의 전(傳)에 대한 주석은 없다. 이는 왕필(王弼)의 역주(易註)를 모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사고전서 총목제요》 등에서는 미완성작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정이는 왕필의 영향을 받아 역(易)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면서, 역의 도리는 매우 심오하고 역이 보여주는 상(象)은 매우 분명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하는 것(현상, 體)과 그것의 존재 방식(이치, 用)은 근원이 하나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사물의 현상과 그 본질적 이치가 별개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역정씨전』은 일부 내용이 누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희의 『역본의(易本義)』와 비교될 만큼 송대(宋代) 역학(易學)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경설』(經說) 등이 전해진다.
3. 1. 리일분수(理一分殊)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정이의 학문은 형인 정호(程顥)의 직관적인 학풍과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기존에 음양의 두 기(氣)를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道)'로 보던 관점에서 나아가, '도'는 음양의 근거이자 원리인 동시에, 음양의 작용으로 생성된 현상 세계 각각에 내재하는 '리(理)'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상을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부른다. 이는 우주 전체의 근본 원리로서의 '리'는 하나이지만(理一), 개별 사물에 깃들어 나타날 때는 다양하게 분화된다(分殊)는 뜻이다.정이는 만물의 물질적 재료로서 '기'를 인정하는 점은 다른 학자들과 같았으나, '기'가 존재하고 운동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원인으로서 '리'의 독립적인 존재를 강조했다. 즉, '리'가 '기'보다 근원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개별 사물에 내재한 '리'가 우주 전체의 보편적인 '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도덕의 근원인 '도'의 중요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나아가 사람의 본성인 '성(性)' 역시 '리'와 같다고 보아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그는 '리'에는 절대적인 선(善)과 정신적 속성을, '기'에는 상대성과 물질적 속성을 부여했다. 따라서 인간은 물질적인 기(氣) 속에 내재된 순수한 '리'를 깊이 탐구함으로써 본래의 선한 성(性)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이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格物)'의 의미를 바로 이러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처럼 '리'와 '기'를 별개의 근원으로 보는 정의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 관점과 성즉리, 격물에 대한 해석은 이후 주희(朱熹)에게 계승되어 성리학 이론 체계의 핵심적인 토대가 되었다. 정의의 주요 저서로는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과 『경설』(經說) 등이 전해진다.
3. 2. 성즉리(性卽理)
정이의 학문은 형인 정호(程顥)의 직관적인 학풍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이전 학자들이 음양(陰陽) 두 기(氣)를 우주의 원리인 도(道)로 보았던 것과 달리, 도는 음양의 근거이자 원리이며 동시에 음양 두 기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현상 세계에 내재하여 각각의 사물의 리(理)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한다.정이는 기(氣)를 물질적인 질료로 보았지만, 기의 존재와 운동의 원인이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리(理)의 존재를 인정했다. 즉, 물질적인 것(기)과 그것의 원리(리)를 구분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한 사물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리는 우주 전체의 보편적인 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도덕의 근원인 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사람의 본성인 성(性) 역시 리(理)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즉리(性卽理)' 사상이다. 그는 리에는 절대적인 선(善)과 정신성이 내재되어 있고, 기에는 상대성과 물질성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물질적인 기질 속에 가려진 순수한 리, 즉 본래의 선한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이는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격물(格物)'을 바로 이 '사물의 리를 깊이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개별 사물에 내재된 리를 하나하나 탐구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우주의 보편적인 리에 도달하고, 자신의 선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이의 이러한 이기이원론, 성즉리, 격물 등의 사상은 후대의 주희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의 핵심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 『경설(經說)』 등이 있다.
3. 3. 격물치지(格物致知)
정이의 학문은 형인 정호(程顥)의 직관적인 학풍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종래처럼 음양의 두 기(氣)를 곧 우주의 원리인 '도(道)'로 보지 않았다. 대신 '도'는 음양의 근거이자 원리이며, 동시에 음양 두 기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현상 세계에 내재하여 각각의 사물의 '리(理)'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한다.정이는 '기(氣)'를 물질적인 질료로 보았지만, '기'의 존재와 운동의 원인이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리(理)'의 존재를 명확히 인정했다. 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기초가 된다. 그는 한 사물에 깃든 '리'가 우주 전체의 '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도덕의 근원인 '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사람의 본성인 '성(性)' 역시 '리'라고 보아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그는 '리'에는 절대적인 선(善)과 정신적인 속성을, '기'에는 상대성과 물질적인 속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이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格物)'을 '사물의 리를 끝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물질적인 현상(기) 속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원리(리)를 깊이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성)이 타고난 선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의의 이러한 이기이원론, '성즉리', '격물'에 대한 해석은 후대의 주희(朱熹)에게 큰 영향을 주어 성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3. 4. 여성관
정이(程頤)는 과부 정절 숭배 관념이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7][8] 그는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 재혼하는 것은 정절을 잃는 것이므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생계가 어려워진 과부 문제에 대해 정이는 "굶어 죽는 것은 작은 문제지만, 정절을 잃는 것은 큰 문제다."(餓死事小,失節事大중국어)라고 말하며 여성의 정절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7][8] 이러한 정이의 사상은 후대에 영향을 미쳐,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과부의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이는 수많은 과부들에게 큰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주었으며,[9] 특히 명나라 시기에는 과부들의 자살률이 극적으로 증가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10][11]4. 저서
정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과 『경설(經說)』 등이 있다.
『주역정씨전』은 서문에 원부(元符) 2년(1099년) 정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자인 양시(楊時)에 따르면, 이 책은 미완성인 상태로 문인들에게 보였고, 이후 흩어진 것을 양시가 수습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이 책은 주역의 상경, 하경, 단전(彖傳), 상전(象傳), 문언편(文言篇)만을 해석하고 있으며, 계사전(繫辭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에 대한 주석은 없다. 이는 왕필(王弼)의 『주역주(周易注)』 형식을 따른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사고전서 총목제요》에서는 양시의 말처럼 미완성작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이는 왕필의 해석 방식을 일부 받아들여 주역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역(易)의 도리가 매우 심오하면서도 그것이 드러내는 상(象)은 분명하며, 본체(體)와 작용(用), 드러난 것(顯)과 숨겨진 것(微)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현상)과 그것의 존재 원리(이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주역정씨전』은 비록 일부 내용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주희(朱熹)의 『주역본의(周易本義)』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송대 역학(易學)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저작으로 인정받는다.
정이의 학문적 사상은 그의 저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는 형 정호(程顥)의 직관적인 방식과 달리, 우주의 원리인 '도(道)'가 음양(陰陽)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개별 사물 속에 내재하는 '리(理)'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리일분수(理一分殊)',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성즉리(性卽理)', '격물(格物)' 등의 개념으로 발전했으며, 훗날 주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5. 영향
정이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이천역전》(伊川易傳)은 그의 역학(易學)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서문에 원부(元符) 2년 정월이라는 기록이 있어 1099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자인 양시(楊時)에 따르면, 이 책은 미완성 상태로 문인들에게 보였던 것이며, 이후 흩어진 것을 양시가 수집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이천역전》은 역(易)의 상경·하경·단전(彖傳)·상전(象傳) 및 문언편(文言篇)을 해석하였으나, 계사(繫辭)·설괘(說卦)·잡괘(雜卦)의 여러 전(傳)에는 주석(註)이 없다. 주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왕필(王弼)의 《역주》(易註)를 모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사고전서 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는 양시의 주장처럼 미완성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한다.
정이는 왕필의 역 해석 방식을 일부 수용하여 역(易)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역의 도리가 매우 미묘하면서도 역이 나타내는 상(象)은 분명하며,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는 존재하는 것(현상, 易象)과 그것의 존재 방식(도, 易理)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즉, 사물이 존재하면 반드시 그 사물의 이치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주석이 누락되었지만, 《이천역전》은 주자(朱子)가 자신의 저서 《역본의》(易本義)에 대해 스스로 불만족스러워했던 것과 비교될 만큼 높이 평가받는다. 이 책은 송대(宋代) 역학의 정통을 확립한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6. 평가
정이가 저술한 이천역전은 주역의 상경, 하경, 단전, 상전, 문언편을 해석한 책이다. 비록 계사, 설괘, 잡괘 등 일부 전(傳)에 대한 주석이 빠져 있어 미완성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왕필의 역주(易註)를 따른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사고전서 총목제요》에서는 미완성작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역전》은 왕필의 논리적 해석 방식을 계승하여, 역(易)의 도리와 현상(象)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 사상을 제시하며 송대 역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452년, 정이의 후손들은 맹자, 증자, 주돈이, 주희 등 다른 유교 현인들의 후손들과 함께 오경박사(五經博士) 칭호를 수여받아, 그가 유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5]
또한, 유명한 고사성어인 '정문입설(程門立雪)'은 양시(楊時)와 유좌(游酢) 두 사람이 정이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의 집 문 앞에서 눈을 맞으며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는 유교적 미덕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전해진다.[6]
6. 1. 부정적 평가
정이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으며, 개혁파가 실각한 후인 1086년에야 황제에게 유교를 강의하는 시강으로 임명되었다.[3] 그는 형보다 더 공격적이고 완고한 성격으로 인해 쓰촨 파의 지도자였던 소식을 비롯한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그 결과 1097년, 그의 적들은 그의 가르침을 금지시키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를 추방했다. 추방 3년 만에 사면되었으나 여전히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1103년에는 그의 저작이 다시 금지되었다. 사망 1년 전인 1106년에야 최종적으로 사면되었다.[4]특히 정이는 과부의 정절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후대에 비판을 받는다.[7][8] 그는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정절을 잃는 것이므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과부의 문제에 대해 정이는 "굶어 죽는 것은 작은 문제지만, 정절을 잃는 것은 큰 문제다."(餓死事小,失節事大중국어)라고 말하며 여성의 정절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7][8]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과부의 재가를 금기시하고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수많은 과부들에게 큰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주었고 심지어 과부들의 자살률을 증가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9][10][11]
참조
[1]
웹사이트
Cheng Yi
https://web.archive.[...]
[2]
서적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09-02
[3]
웹사이트
Cheng Yi
[4]
문서
Cheng Hao and Cheng Yi
Harper Collins
1995
[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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