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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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869년에서 870년 사이에 열린 기독교 공의회로,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킨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를 단죄하고, 전임자 이그나티우스를 복위시켰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서열을 로마 다음으로 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이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후 포티오스가 복권되면서 동서 교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이 공의회는 또한 성상 숭배를 옹호하고, 성상과 성인의 이미지를 숭배할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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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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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정보 | |
공식 명칭 |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 |
다른 명칭 | 콘스탄티노폴리스 제8차 공의회 포티오스 공의회 |
시기 | 869년 – 870년 |
인정 교단 | 가톨릭교회 |
이전 공의회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제1차 라테란 공의회 |
소집자 | 바실리오스 1세 황제 및 교황 하드리아노 2세 |
주재자 | 교황 특사 |
참석자 수 | 20–25명 (869년 첫 회의), 102명 (870년 마지막 회의) |
주요 의제 | 포티오스 1세의 총대주교 직위 |
주요 결과 | 포티오스 폐위, 27개 규범 |
2. 배경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면서 교황청은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적 보호자를 얻게 되었다. 이는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관계에서는 긴장과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동서 교회의 긴장 관계 속에서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동로마 황제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성 이그나티우스를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포티오스 1세를 임명하자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른바 '포티오스 문제'로 불리는 이 갈등은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포티오스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필리오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18]
포티오스 문제의 근본 원인에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주교직에 대한 오랜 해석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황제가 총대주교 임명에 관여하는 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웠고 평신도가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서방 교회에서는 주교는 성직자 중에서 임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었다. 또한, 고대부터 이어져 온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 차이도 갈등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858년 평신도 신분으로 총대주교에 임명된 포티오스는 전임자 이그나티우스 지지자들과 대립했으며, 로마 교황의 불인정에 맞서 교황을 파문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867년에 즉위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2. 1.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황제로 대관하면서 교황청은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적 보호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반을 둔 동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으로부터 교황청이 어느 정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관계에서는 긴장과 분열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로마 황제가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를 해임하고 포티오스 1세를 그 후임으로 임명하자,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임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티오스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필리오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18]
이 갈등, 즉 '포티오스 문제'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주교(사교)직에 대한 해석 차이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교를 신자들이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고,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주교로 선임되는 경우도 비교적 늦게까지 인정되었다. 특히, 세속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를 지명하는 관행이 있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점차 자치권을 확보하고 교회가 세속 행정 조직의 역할까지 겸하게 된 서방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성직자 중심의 조직화가 진행되어, 주교는 반드시 고위 성직자 중에서 임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다.
858년, 평신도 신분이었지만 저명한 학자이자 고위 관료였던 포티오스는 황제 미카엘 3세(재위 838년-867년)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취임 직후부터 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와 그의 지지자들과의 심각한 대립에 직면했다. 로마 교황은 이그나티오스를 지지하며 포티오스의 주교 임명 자격과 그 지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포티오스는 로마 교황의 개입을 비난하고 오히려 교황을 파문한다고 선언하며 맞섰다. 이러한 대립의 기저에는 고대 말기부터 로마 교회가 주장해 온 교황의 수위권 문제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려 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오랜 견해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867년에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 황제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포티오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로마 측과의 화해를 모색하고자 했다. 바실리우스 1세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2년에 걸쳐 진행된 공의회는 결국 포티오스를 배척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이 공의회에서는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이 명확히 정리되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로 확정하고, 그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서열을 정했다.
그러나 포티오스 배척 결정은 동방 정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실리우스 1세가 기대했던 로마 측의 정치적 양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영향을 미쳤으며, 포티오스는 이후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에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이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이후 서방 교회(가톨릭교회)에서 개최된 공의회들 역시 동방 정교회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동서 교회는 오랜 기간 누적된 정치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분열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가 서로를 파문하는 사건을 계기로 동서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단, 1054년의 분열이 진정한 의미의 '결정적 분열' 시점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있다). 이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공식적인 화해는 1965년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의 만남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루어졌다.
2. 2. 포티오스 이전의 상황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면서 교황청은 서방에서 새로운 정치적 보호자를 얻게 되었다. 이는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로 여기던 동로마 제국 황제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이러한 동서 교회의 긴장 관계 속에서 공의회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는 858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성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그나티우스를 해임하고, 평신도이자 저명한 학자였던 포티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동방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가 총대주교 임명에 관여했으며,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 중에서 총대주교가 선출되는 경우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이미 성직자 중심의 교계 제도가 확립되어 주교는 성직자 중에서만 임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평신도였던 포티오스의 총대주교 임명을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교황은 해임된 이그나티우스를 지지하며 포티오스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포티오스는 교황의 불인정에 반발하며 오히려 로마 교황을 비난하고 파문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포티오스는 훗날 동서 교회 분열의 주요 쟁점이 되는 필리오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18] 이 갈등의 근본에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로마 주교에게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부여하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이그나티우스의 해임과 포티오스의 임명, 그리고 이를 둘러싼 로마 교황과의 갈등은 동서 교회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이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소집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3. 포티오스 분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의제는 이른바 포티오스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단순히 인물 간의 갈등을 넘어, 동서 교회의 주교직에 대한 해석 차이, 동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간의 권력 투쟁, 그리고 고대부터 이어져 온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분열의 시작은 858년, 황제 미카엘 3세가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를 폐위시키고, 귀족 가문 출신의 평신도이자 저명한 학자였던 포티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19] 동방 교회에서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지명하고 평신도를 임명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서방 교회의 관점에서는 성직자가 아닌 포티오스의 임명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다.
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는 퇴위를 거부했고, 로마 교황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그나티우스를 지지하며 포티오스의 임명 자격과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교황의 도전으로 비춰졌으며, 두 권력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포티오스는 교황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며 오히려 교황을 파문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867년에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 황제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869년부터 870년까지 열린 공의회는 결국 포티오스를 단죄하고 총대주교직에서 폐위시킨 뒤, 이그나티우스를 복위시키는 결정을 내렸다.[19] 또한 이 공의회에서는 5대 총대주교의 서열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회의 결정은 동방 정교회 측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제가 기대했던 로마 측의 정치적 양보가 없었던 점도 작용했으며, 포티오스는 이후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다. 결국 포티오스 분열과 이를 둘러싼 공의회는 동서 교회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골을 깊게 만들었으며,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1. 포티오스의 임명과 갈등
858년, 동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 출신 평신도이자 저명한 학자였던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로마 다음으로 높은 권위를 지닌 주교직이었다. 이 임명은 미카엘 3세 황제가 전임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를 폐위시킨 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퇴위를 거부하였고, 이는 황제와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다.[19]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주교 임명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교가 신자들에 의해 선출될 수 있으며,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명하는 관행처럼 평신도가 임명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서방 교회에서는 교회가 세속 행정 조직과 분리되어 발전하면서 주교는 성직자 중에서만 임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포티오스는 총대주교 취임 후 이그나티우스와 그의 지지자들과의 대립에 직면했다.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그나티우스를 지지하며, 평신도였던 포티오스의 주교 임명 자격과 그 지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포티오스는 로마 교황의 개입을 비판하며 오히려 교황을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대립의 배경에는 고대부터 존재해 온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려 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이 충돌하고 있었다.
867년에 새로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 황제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포티오스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 측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이 사태를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공의회 소집을 결정하게 된다.
3. 2. 동서 교회의 주교직 해석 차이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주교직에 대한 해석 차이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내부의 대립과도 연관되어 있었다.동방 교회에서는 주교가 신자들에 의해 선출될 수 있으며,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주교로 임명되는 것도 비교적 늦게까지 인정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세속 신도의 수장인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명하는 관행이 있었다. 858년, 평신도이자 저명한 학자, 고급 관료였던 포티오스가 황제 미카엘 3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19]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점차 자치권을 확보하고 교회가 세속 행정 조직의 역할까지 겸하게 된 서방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성직자 중심의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서방 교회에서는 주교를 고위 성직자로 간주하고, 성직자 중에서만 임명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포티오스의 임명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3. 황제와 교황의 권력 투쟁
85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를 폐위시키고, 저명한 학자이자 평신도 신분이었던 포티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했다.[19] 이는 로마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교직이었다.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주교직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명하는 것이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으며, 평신도가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행정 조직의 역할까지 수행했던 서방 교회에서는 주교는 성직자 중에서만 임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폐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황제와 로마 교황 교황 니콜라오 1세 사이의 심각한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그나티우스를 지지하며 포티오스의 총대주교 임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를 넘어, 동로마 황제의 권한에 대한 교황의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러한 대립의 근저에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포티오스는 교황의 개입에 강하게 반발하며 오히려 로마 교황을 비난하고 파문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867년 쿠데타로 미카엘 3세를 살해하고 황위에 오른 바실리우스 1세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포티오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로마 측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이에 바실리우스 1세는 당시 교황이었던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공의회 소집을 결정하게 된다.
4. 869-87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년부터 870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이 공의회는 주로 포티오스 총대주교의 지위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동서 교회의 주교직 해석 차이와 정치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황제 바실리우스 1세와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주도로 소집된 공의회는 포티오스를 파면하고 전임자 이그나티오스를 복권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의 결정, 특히 포티오스 파면은 동방 정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포티오스는 후에 복권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4. 1. 공의회의 소집과 목적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의제는 이른바 포티오스 문제였다. 이 문제의 배경에는 동서 교회의 주교직에 대한 해석 차이와 당시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교가 신자들에 의해 선출될 수 있으며, 평신도가 주교로 선임되는 것도 비교적 늦게까지 인정되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를 직접 지명하는 관행이 있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고 교회가 세속 행정 역할까지 겸했던 서방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성직자 조직이 발달하여, 주교는 고위 성직자 중에서만 임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858년, 평신도이자 저명한 학자이며 고위 관료였던 포티오스는 황제 미카엘 3세(재위 838년-867년)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취임 직후부터 전임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오스와 그의 지지자들과 심각한 갈등에 직면했다. 로마 교황은 이그나티오스를 지지하며 포티오스의 주교 임명 자격과 그 지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포티오스는 로마 교황의 개입을 비난하며 오히려 교황을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대립의 근본에는 고대 말기부터 지속된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려 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입장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867년에 새로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 황제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았다. 그는 포티오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로마 측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에 바실리우스 1세는 당시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포티오스 문제로 인한 동서 교회의 갈등을 수습한다는 명분 아래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4. 2. 포티오스 파면과 이그나티우스 복권
공의회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의제는 이른바 포티오스 문제였다. 이는 동서 교회의 주교직에 대한 해석 차이, 그리고 당시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명하는 관행이 있었고, 평신도 신분이었던 학자이자 고위 관료 포티오스는 858년 황제 미카엘 3세에 의해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그러나 포티오스의 임명은 전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와 그의 지지자들과의 심각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로마 교황은 이그나티오스를 지지하며, 평신도였던 포티오스의 주교 서임 자격과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포티오스는 오히려 로마 교황을 비난하고 파문을 선언하며 강경하게 맞섰다. 이러한 갈등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수위권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오랜 견해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867년에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 황제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포티오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로마 측에 대한 유화적인 제스처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바실리우스 1세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와 협력하여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약 2년에 걸쳐 진행된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포티오스의 총대주교직을 박탈하고 파문을 결의했다. 이 결정은 실질적으로 전임자였던 이그나티오스의 복권을 의미했다. 또한 공의회는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하지만 포티오스 파면 결정은 동방 정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실리우스 1세가 기대했던 로마 측의 정치적 양보가 없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포티오스는 나중에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이후의 공의회들 역시 가톨릭교회만이 인정하게 되는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4. 3.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 확립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5대 총대주교좌의 서열이 명확히 정해졌다. 이 결정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는 로마 다음인 두 번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서열이 확립되었다.4. 4. 성상 숭배 옹호
공의회의 주요 요소 중 하나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즉 성상과 성스러운 이미지 지지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이를 통해 공의회는 비잔틴 성상 파괴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공의회의 세 번째 정령은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복음서와 동일한 숭배를 받도록 명시했다:[20]: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사람의 해방자이자 구세주의 성스러운 이미지가 거룩한 복음서에 주어지는 것과 동일한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책에 담긴 말씀의 언어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이미지들이 색상으로 행사하는 활동으로 인해 현명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 모두가 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말로 전달하는 것을 그림이 색상으로 알리고 드러낸다.
공의회는 또한 성모 마리아, 천사 및 성인의 이미지 숭배를 장려했다:[5]
:누구든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숭배하지 않는 자는 그가 재림할 때 영광 속에서 그를 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의 지극히 순결하신 어머니의 이미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이미지,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이미지 또한 우리의 경의와 숭배의 대상이다.
5. 공의회 이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포티오스의 배척을 결의하고 5대 총대주교의 서열(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공의회의 핵심 결정이었던 포티오스 배척은 동방 정교회에서 수용되지 않았고, 포티오스는 이후 명예를 회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다. 이로 인해 이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 수도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이후 가톨릭교회만이 인정하는 공의회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동서 교회의 오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과정으로 평가된다.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화해 노력은 천 년이 지난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5. 1. 동방 정교회의 불인정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결의된 포티오스의 배척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1세가 공의회를 통해 로마 측으로부터 기대했던 정치적 양보를 얻지 못한 점도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공의회에서 배척되었던 포티오스는 이후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에 복귀하였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로부터 공식적인 공의회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공의회는 가톨릭교회만이 인정하는 공의회가 되었으며, 이후 가톨릭교회 단독으로 개최하고 승인한 공의회들 역시 동방 정교회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2. 동서 교회의 분열 심화
이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포티오스의 배척을 결의했으며, 5대 총대주교의 서열을 명확히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다음의 지위에 두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정했다.그러나 포티오스의 배척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실리우스 1세가 기대했던 로마 측으로부터의 정치적 양보가 없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으며, 포티오스는 후에 명예가 회복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 측에서는 공식적인 공의회로 인정받지 못했다. 더 나아가, 이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만이 단독으로 공의회를 개최하고 승인하게 되었으며, 동방 정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분열의 단초가 되었다.
비록 동서 교회는 오랜 정치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항상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지만, 이 공의회는 결과적으로 동서 교회의 균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동서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동서 교회의 분열). 1054년의 분열이 동서 교회의 '결정적 분열' 시점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동서 교회의 분열 문서 참조).
이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공식적인 화해는 1965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상호 파문을 취소하면서, 천 년에 걸친 분열 상태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을 알렸다.
6. 역사적 의의와 평가
이 공의회는 포티오스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나, 그 결과는 동서 교회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는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직에서 배척하고 파문을 결의했지만, 이러한 결정은 동방 정교회 측에서 수용되지 않았다.[1]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이 공의회를 통해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했지만, 정치적 실익을 얻지 못했다. 결국 포티오스는 나중에 명예를 회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다.[1]
이러한 이유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만이 인정하는 공의회가 되었고, 동방 정교회는 이를 공식적인 공의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이후의 공의회에서도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서로 다른 공의회를 인정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1]
공의회에서는 5대 총대주교의 서열이 로마를 필두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명확히 정해졌다.[1] 그러나 이는 교황 수위권을 둘러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로마 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명예상의 우위만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1]
결과적으로 이 공의회는 동서 교회가 오랫동안 쌓아온 정치적, 문화적 차이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가 서로를 파문하며 맞선 대분열로 나아가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화해는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1965년,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1] (다만, 1054년을 동서 교회의 '결정적인 분열' 시점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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