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보논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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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보논치니는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1670년 모데나에서 태어나 1747년 빈에서 사망했다. 그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첼로를 배우고, 1688년 교회 악장으로 활동하며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베를린 등을 거쳐 빈에서 황제의 궁정에서 활동했으며, 런던에서 헨델과 경쟁하기도 했다. 오페라 《크세르세》, 《카밀라의 승리》, 《그리젤다》 등과 미사곡, 칸타타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모데나 출신으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조반니 마리아 보논치니이며, 동생은 작곡가 안토니오 마리아 보논치니이다. '작은 보논치니'(Bononcini the younger)라고 불렸다.
보논치니의 초기 첼로 작품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필사본에 포함된 두 개의 ''Sinfonie''이다.[6] 그 외에도 다수의 오페라, 미사곡, 말버러 공작을 위한 장송곡 등이 있다. 프란체스코 카발리의 이전 오페라에서 "Ombra mai fu"를 포함한 자료를 패러디 형식으로 사용한 크세르세는 헨델의 세르세에 의해 다시 개작되어 "Ombra mai fu"의 세 번째 버전이 사용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보논치니의 노래 "Vado ben spesso cangiando loco"를 그의 피아노 모음곡 ''순례의 해: 두 번째 해: 이탈리아''에서 "칸초네타 델 살바토르 로사"로 잘못 표기하여 사용했다.
2. 생애
볼로냐에서 첼로를 배우고 1685년에 이 악기를 위한 첫 작품을 발표했으며, 1688년 몬테 산 조반니 교회의 악장이 되었다. 그 후 오페라 작곡을 시작하여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베를린을 거쳐 1698년부터 1711년까지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궁정에 머물렀다. 1714년 로마로 돌아와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페라를 상연했다.
1720년 말버러 공작존 처칠의 초청을 받아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이미 런던에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있어 그와 라이벌 관계였다. 대체로 토리당이 헨델을 지지한 데 반해, 휘그당은 보논치니를 지지했다.
1727년 작곡한 마드리갈에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스캔들로 인해 1733년 런던을 떠나 파리로 건너가 콩세르 스피리추엘을 위해 작곡했다. 1741년 다시 빈으로 가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는 많은 오페라, 미사곡,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을 위한 장송 찬가 등이 있다. 그의 오페라 중 하나인 《크세르세》(Xerse) 및 그 안의 아리아 〈그림자 짙어지네〉는 런던을 떠난 보논치니가 남긴 악보를 헨델이 후에 개작한 것이 유명해졌다[8][9].
이 외에 《그리젤다》의 아리아 "그대를 찬양하는 영광을 위해"는 알레산드로 파리조티가 1914년에 리코르디 사에서 출판한 "Arie antiche" (「옛 이탈리아 아리아집」) 중 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 (1670-1691)
모데나에서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마리아 보논치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으며, 그의 남동생 안토니오 마리아 보논치니 역시 작곡가였다. 8세 때 고아가 된 조반니 바티스타는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 조반니 파올로 콜론나에게 음악을 배웠다(아마 1680년 또는 1681년).[2][3]
1685년, 15세에 그는 기악 작품집 3권을 출판했다(그중 두 권에서는 자신의 나이를 13세로 표기했다).[3] 1686년 5월 30일, 볼로냐 필하모닉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었다.[2] 그의 재능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산 페트로니오에서 현악 연주자이자 가수로 활동했고, 기악 작품집을 더 출판했으며, 볼로냐와 모데나에서 공연할 오라토리오 2곡을 제작했다.[2] 1687년부터 1691년까지 볼로냐의 산 조반니 인 몬테 교회에서 악장으로 활동했으며, 1688년 작품 7번으로 출판된 2중 합창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했다.[2][3] 1690년에는 모데나를 위해 오라토리오를 한 곡 더 작곡했다. 1689년과 1690년에는 밀라노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3] 1691년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성악 2중창집(작품 8)을 헌정했으며, 볼로냐의 교황 사절인 베네데토 팜필리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2]
2. 2. 로마에서의 활동 (1691-1697)
1691년 보논치니는 로마로 이주하여 예술 후원자인 필리포 2세 콜론나의 궁정에 들어갔다. 그는 콜론나의 대본 작가인 실비오 스탐필리아와 함께 1692년부터 1696년 사이에 6개의 세레나데, 오라토리오 1개, 그리고 3개(혹은 5개)의 오페라를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큰 성공을 거둔 ''크세르세''(1694)가 포함된다.[2][3] 또 다른 성공작인 ''일 트리온포 디 카밀라''는 콜론나의 처남인 루이스 데 라 세르다가 스페인의 현지 부왕으로 임명된 후 나폴리에서 제작되었다(1696년 또는 1697년).[2][3] 1695년에서 1696년 사이에 보논치니는 로마에서 가장 배타적인 두 개의 예술 단체인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아와 아르카디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었다(그는 "합창단" 또는 공연 부문의 창립 멤버로 제안된 7명의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2] 이 즈음에 절충주의 음악가이자 시인인 주세페 발렌티니는 보논치니의 뛰어난 교육 능력을 칭찬하는 소네트를 썼다.[2]
2. 3. 빈과 베를린에서의 활동 (1697-1711)
1697년 콜로나의 아내 로렌차가 사망한 후 보논치니는 로마를 떠나 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레오폴트 1세 황제의 하인이 되어 많은 봉급을 받았으며 레오폴트의 상속자이자 후계자인 요제프 1세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2] 170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후 보논치니는 베를린의 조피 샤를로테 여왕의 궁정으로 옮겨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었고, 새로운 오페라 "폴리페모"를 제작하여 대중적 명성을 넓혔다(그는 그곳에서 "체팔로"도 작곡했다).[2][3]
그 후 10년 동안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1706년 베네치아 카니발 기간 동안 새로운 오페라를 제작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3] 이 무렵 보논치니는 부러움을 살 만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동료 작곡가 프란체스코 제미니아니의 말에 따르면, "카밀라"는 "그때까지 그들의 귀가 익숙해져 있던 건조하고 평평한 멜로디에서 벗어나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라고 한다.[2] 1710년까지 "카밀라"(아마도 보논치니의 버전을 바탕으로 한)의 공연은 런던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많은 도시에도 상륙했다.[2] 이 10년 동안 이탈리아로의 여행 중 그는 마르게리타 발레티와 결혼했다. 그녀는 배우이자 ''코메디아 델아르테'' 배우 집안 출신이었고, 루이지 리코보니의 처제였다.[6]
2. 4. 런던에서의 활동과 헨델과의 경쟁 (1720-1732)
1720년 말버러 공작존 처칠의 초청으로 런던으로 이주한 보논치니는, 이미 런던에 있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720년부터 1732년까지 런던에서 보논치니의 인기는 헨델에 필적했다. 토리당은 헨델을, 휘그당은 보논치니를 지지하며 정치적인 대립 구도까지 형성되었다.[1] 이들의 경쟁은 존 바이럼의 경구 "트위들덤과 트위들디"라는 구절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헨델은 꾸준히 우위를 점했고, 보논치니는 그의 팬들을 이끌었던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의 연금 수급자가 되었다.[1]
그러나 1727년에 보논치니가 작곡한 마드리갈에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다. 보논치니는 안토니오 로티의 마드리갈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속여 팔았다는 혐의가 입증된 후 런던을 떠났다.[4]
2. 5. 후기 생애 (1733-1747)
1733년 런던을 떠난 보논치니는 사기꾼 우기 백작과 함께 프랑스로 갔는데, 우기 백작은 보논치니의 재산 대부분을 가로챘다. 파리에서 보논치니는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종교 음악 연주회를 열었고, 이후 리스본으로 가서 포르투갈 국왕의 첼로 교사가 되었다. 1736년 빈으로 돌아온 그는 1737년에 오페라 ''알레산드로 인 시도네''와 오라토리오 ''에제키아''를 공연했다. 1742년에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해 10월,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논치니가 궁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한 달에 50florin의 연금을 지급했다. 보논치니는 1747년 7월 9일 빈에서 가난하고 거의 잊혀진 채로 사망했다. 사후인 1741년에 프란츠 1세를 위해 작곡한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인 테 데움이 아헨 조약을 기념하여 연주되었다.[8][9]
3. 주요 작품
3. 1. 오페라
3. 2. 기타 작품
4. 유산 및 평가
1720년부터 1732년까지 보논치니는 런던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그의 인기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경쟁할 정도였다. 토리스당은 헨델을, 휘그당은 보논치니를 지지했다.[1] 이들의 경쟁은 존 바이럼의 경구에 영감을 주어 "트위들덤과 트위들디"라는 구절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헨델은 꾸준히 우위를 점했고, 보논치니는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의 연금 수급자가 되었다.[1] 그러나 보논치니는 안토니오 로티의 마드리갈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속여 팔다가 표절 혐의가 입증되어 런던을 떠나야 했다.[4]
보논치니의 오페라 중 하나인 《Xerse (Bononcini)|크세르세영어》와 그 안의 아리아 〈그림자 짙어지네〉는 훗날 헨델이 개작하여 널리 알려졌다.[8][9] 또한 《그리젤다》의 아리아 "그대를 찬양하는 영광을 위해"는 알레산드로 파리조티가 1914년에 출판한 "옛 이탈리아 아리아집" 중 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AmCyc
[2]
Grove
Bononcini family
[3]
저널
Giovanni Bononcini, 1670–1747
1970-07
[4]
EB1911
[5]
백과사전
Bononcini, Giovanni
https://www.treccani[...]
2023-07-17
[6]
서적
I Bononcini – Da Modena all'Europa
Libreria Musicale Italiana
[7]
음반
La nemica d'amore fatta amante
https://www.chandos.[...]
Chandos Records
[8]
IMSLP
[9]
서적
贋作・盗作音楽夜話
北辰堂出版
[10]
AmCyc
[11]
EB1911
[12]
저널
Giovanni Bononcini, 1670–1747
1970-07
[13]
AmCyc
[14]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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