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석유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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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석유주식회사는 1935년 일본의 석유업법 시행에 따라 설립된 회사로, 일본 석유와 조선질소비료가 주도하여 자본금 1,000만 엔으로 설립되었다. 함경남도 원산에 정유 공장을 건설하여 휘발유, 등유 등을 생산했으며, 일본 석유로부터 판매 기반을 무상으로 양도받아 조선 전역에 제품을 보급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울산으로 정제 설비를 이전하려 했으나 종전으로 중단되었고, 광복 후에는 소련군정 하에 놓였다. 6.25 전쟁 중 원산 정유 공장이 파괴되었고, 울산 정유소는 대한석유공사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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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석유주식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 |
---|---|
회사 정보 | |
이름 | 조선석유주식회사 |
원어 | 朝鮮石油株式会社 |
약칭 | 조선석유, 朝鮮石油 |
형태 | 주식회사 |
설립 근거 | 불명 |
창립 | 1935년 6월 25일 |
창립자 | 야마구치 준(野口遵), 하시모토 게이자부로(橋本圭三郎) |
이전 회사 | 해당 사항 없음 |
이후 회사 | 해당 사항 없음 |
해체 | 불명 |
장소 | 조선 경성부 |
사업 지역 | 내지 조선 |
산업 | 석유산업 |
대표 제품 | 불명 |
재무 정보 | |
자본금 | 10,000,000엔 |
매출액 | 불명 |
영업 이익 | 불명 |
순이익 | 불명 |
순자산 | 불명 |
자산 총액 | 불명 |
발행 주식 총수 | 200,000주 |
결산기 | 불명 |
주주 정보 | |
주요 주주 | 조선질소비료 (3만 3천주) 일본석유 (3만주) 동양척식회사 (2만주) 미쓰이 물산 (1만주) 스미토모 본사, 아사노 물산 및 기타 (1만 5천주) |
기타 정보 | |
모기업 | 불명 |
자회사 | 불명 |
계열사 | 불명 |
종업원 | 불명 |
웹사이트 | 불명 |
비고 | 불명 |
2. 설립
1934년 7월 1일, 일본에서는 석유의 민간 보유를 허용하고 석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석유업법이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 하의 조선에서도 같은 법이 시행되면서 새로운 석유 회사 설립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5년 6월 25일, 조선질소비료 사장 노구치 준과 일본석유 사장 하시모토 게이잔이 중심이 되어 경성부에 조선석유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1000만엔이었으며, 이 중 4분의 1이 납입되었다.
함경남도 원산부 포하동(현 강원도 원산시 장촌동)에 건설된 정유공장은 1936년 11월에 완공되었다.[1] 1938년에는 연산 30만 톤(하루 약 6천 배럴) 규모로 확장되었으며,[1] 미국에서 전용 유조선으로 들여온 원유를 정제하여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파라핀 등을 생산했다.[1]
총 발행 주식 20만 주 가운데 17만 주는 발기인과 주요 찬성 기업들이 나누어 가졌다. 발기인인 조선질소비료가 3만 3천 주, 일본석유가 3만 주를 보유했으며, 찬성인으로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2만 주, 미쓰이 물산이 1만 주를 인수했다. 그 외 스미토모 본사, 아사노물산, 일본광업 등이 합쳐서 15,000주를 맡았다. 나머지 3만 주는 일반 공모를 통해 모집했는데, 신청자가 몰려 60배가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조선석유주식회사는 석유업법 시행과 맞물려 사실상 국책기업에 가까운 성격을 띠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 사업 운영에 있어 여러 가지 우대를 받았다.
3. 정유소 및 판매·정제 설비
일본석유는 조선석유 설립 후 기존의 판매 기반을 무상으로 양도했다.[1] 이를 통해 조선석유는 조선 내 유일한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석유업법의 보호 아래 조선 전역에 공급할 수 있었다.[1]
정제 설비로는 일본석유의 NNC식 분해 증류 장치 등이 도입되었다.[1] 특히 고급 윤활유 제조에 필요한 푸르푸랄 추출 장치는 일본석유 시모노세키 정유소보다 먼저 준공되어 가동되었는데, 이는 일본 전체에서 첫 번째 사례였다.[1] 이 푸르푸랄 추출법은 현재 한국에서도 주요 용제 추출법으로 사용되고 있다.[1] 이 외에도 용제 정제 기술인 바리졸 탈랍, 백토 콘택트 릴란 설비 등을 갖추어 일본 본토의 대형 정유소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1]
1944년 10월 28일, 외지인 대만과 조선에도 군수 회사법이 시행되면서 조선석유는 같은 해 12월 8일 제1차 지정을 받았다. 석유 정제 시설은 군사 및 경제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 말기 공습 피해를 우려하여 1944년 정제 설비 대부분을 울산으로 분산 이전하려 했으나, 약 70%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실제 생산에는 이르지 못했다.
3. 1. 외국 기업과의 갈등
일제강점기하의 조선 석유 시장은 다이쇼 시대 말기까지 중국, 만주 등과 마찬가지로 외국 기업 3사(스탠다드, 쉘, 텍사코)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와 초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석유가 시장 개척을 시작하고 판매점 및 특약점을 설치하며 외국 기업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조선석유가 설립된 후, 일본석유는 기존에 구축했던 판매 기반을 조선석유에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조선 내 유일한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석유업법의 보호를 받으며 외국 기업의 제품을 대체했고, 조선 전역으로 공급망을 넓혀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국 석유 기업들(라이징 선, 스탠다드)로부터 항의가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석유와 직접적인 자본 관계가 없었던 일본 본토의 다른 석유 기업들(고쿠라 석유, 미쓰비시 석유) 역시 조선석유에 대한 보호 정책, 예를 들어 조선 내 판매 할당량 배정 등이 자사에 불이익을 초래한다며 항의하여 한때 문제가 되기도 했다.
4. 2차 세계대전 시기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본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팔렘방 유전 등을 점령하며 남방 석유 자원을 확보했지만, 선박 대부분이 해군용으로 징발되어 원유 수송에 필요한 선박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전쟁이 심화되면서 미군 전폭기의 폭격이 잦아져 석유 수송은 더욱 어려워졌고, 결국 원산정유공장은 가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28일, 일본 본토 외 지역인 대만과 조선에도 군수 회사법이 시행되었고, 조선석유주식회사는 같은 해 12월 8일 군수 회사로 제1차 지정을 받았다.[1] 이와 함께 울산군(현 울산광역시)에 연간 생산량 200000ton 규모의 제2 정유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공습 피해를 우려하여 1944년 원산정유공장의 정제 설비 대부분을 울산으로 분산 이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울산 정유소는 건설 공정률이 70%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실제 생산에는 이르지 못했다.
5.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원산정유공장은 소련 군정 하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 기술진의 지원을 받아 공장이 가동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의 핵심 유류 공급 기지로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전쟁 중 미국 해군 제77기동부대 소속 밸리포지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1950년 7월 18일부터 19일까지 원산 정유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당초 계획되었던 미 제1기병사단의 포항 상륙 작전 지원 계획이 변경되면서 북한군의 석유 공급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이 폭격으로 연간 170만 배럴의 생산 능력을 갖춘 정유공장이 완전히 파괴되어, 북한의 군사 작전 수행 능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전쟁 후 원산 정유공장은 소련과의 합작 기업 형태로 '원산 석유 공장'으로 운영되었으나, 1950년대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인근의 석면 공장과 통합되어 '원산 화학 공장'으로 개편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광지, 크롬 등으로 생산 품목을 늘렸고, 최근에는 석면포, 밀폐재 등도 제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명반, 크롬, 석면, 인화지·감광지, 밀폐재 등을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5. 1. 대한석유공사 설립의 모태
일제 강점기 말 완공되지 못한 울산 정유소는 광복 이후 한국 정부가 상당한 자금을 투입하여 복구 및 확장 공사를 추진했으나, 외화 부족 문제로 원유를 확보하지 못해 실제 가동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유엔군의 석유 보급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전쟁 이후 해당 부지는 1962년 설립된 대한석유공사(KOCO)에 인계되었다. 하지만 조선석유 시절의 설비는 너무 낡아 대부분 철거되고 새로운 설비로 교체되었다(스크랩 앤 빌드 방식). 대한석유공사는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의 SK이노베이션으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부터 공업 도시의 기반이 있었던 울산에 조선석유가 정유소 부지를 마련한 것은 오늘날 울산이 대한민국 대표 석유화학 산업 도시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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