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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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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요섭은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소설가, 번역가, 시인,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에 기여한 인물이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상하이, 미국 유학을 거쳐 중국과 한국에서 문학 활동을 펼쳤다. 신경향파 소설가로 활동하며, 《사랑 손님과 어머니》, 《개밥》, 《살인》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7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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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주요섭
한자 표기朱耀燮
로마자 표기Ju Yo-seop
출생일1902년 12월 23일 (음력 11월 24일)
출생지평안남도 평양
사망일1972년 11월 14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직업소설가
언어한국어
국적대한민국
활동 기간1921년 - 1972년
장르소설
데뷔 작품깨어진 항아리
작가 정보
필명(정보 없음)
본명(정보 없음)
학력(정보 없음)
등단 시기(정보 없음)
주제(정보 없음)
사조(정보 없음)
주요 작품(정보 없음)
수상(정보 없음)
스승(정보 없음)
제자(정보 없음)
배우자(정보 없음)
부모(정보 없음)
형제(정보 없음)
동거인(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영향 받은 인물(정보 없음)
영향 준 인물(정보 없음)
서명(정보 없음)
웹사이트(정보 없음)
묘소(정보 없음)
묘비(정보 없음)

2. 생애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의 아들로 태어났다.[1] 형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주요한, 동생은 극작가 주영섭이다.[1] 1918년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했으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평양에서 지하 신문 발행에 참여하다 투옥되었다.[1]

1920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의 권유로 후장 대학 부속 중학교와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1] 이 시기인 1921년 『개벽』에 단편 「추운 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고, 상하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을 통해 신경향파 작가로 주목받았다.[1] 1926년에는 마닐라에서 열린 극동 선수권 대회에 중국 대표로 참가하여 육상 1만 미터에서 우승하기도 했다.[1]

후장 대학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29년 귀국했다.[1] 귀국 후 1931년신동아』 주간을 맡았고, 1935년에는 다시 중국으로 가 북경의 보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한 문필 활동을 펼쳤다.[1] 1936년 북경에서 기자 김자혜와 재혼했다.[1]

1943년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정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강제 송환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1] 1945년 해방 직후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고 춘천으로 갔으나, 38선으로 인해 분단이 현실화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에 정착하게 되었다.[1]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1947년 상호출판사 주간, 1950년 코리아 타임스 주필, 1953년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 등을 역임하며 언론 및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1] 197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2년 음력 11월 24일, 평안남도 대동군 내천면 신양리 외가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朱孔三, 아명 주진우朱珍雨, 1875년~1953년)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평양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다. 이후 평양 본가에서 성장하였다. 형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주요한(朱耀翰)이며, 막내 동생은 극작가, 연출가, 시인인 주영섭(朱永燮, 1912년생)이다.[1]

목사의 아들로서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나, 그의 작품에서는 종교가 민중과 여성을 비참한 삶이나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대표작 중 하나인 인력거꾼에서는 비참한 인력거꾼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말로 현실의 고통을 위로할 뿐(대표적인 인민의 아편)인 당시 개신교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1918년 형 주요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아오야마가쿠인 중학부 3학년에 편입했다.[1]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1] 평양에서 김동인(金東仁) 등과 함께 지하 신문인 '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발행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1920년 출옥 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형에게 가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다.[1]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하던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 후장 대학 부속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1] 문단에는 1921년 잡지 『개벽』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 1923년 후장 대학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1927년까지 상하이에서 수학했다.[1] 이 시기 발표한 작품들은 주로 상하이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다루었으며, 「거리의 인력거꾼」, 「살인」, 「개밥」 등은 그가 신경향파 작가로 분류되는 계기가 된 대표작들이다.[1]

주는 학업 외에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여, 1926년 마닐라에서 열린 극동 선수권 대회에 중국 대표로 출전하여 육상 10,000미터 종목에서 우승하기도 했다.[1] 후장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29년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1]

학력학교명비고
초등학교 졸업평양 숭덕소학교
고등학교 수료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중학교 수료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1918년 편입, 1919년 3.1운동으로 귀국
중학교 수료중국 쑤저우 안청 중학교
중학교 졸업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 부속중학교1920년 편입
학사중국 후장 대학 교육학과1923년 입학, 1927년 졸업 추정
석사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1929년 졸업


2. 2. 문학 활동 및 신경향파

주요섭은 1921년 잡지 『개벽』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1] 1920년부터 형 주요한을 따라 상하이로 가 후장 대학에서 수학하며 1927년까지 머물렀는데,[1] 이 시기 그의 문학은 신경향파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상하이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1] 영국 조계의 억압에 맞서 파업(노동 거부), 파학(罷學, 학교 거부), 파상(罷商, 상업 거부) 등으로 저항하는 중국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모습, 민족 간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 성 착취를 당하던 조선 여성의 저항 등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거리의 인력거꾼」(또는 「인력거꾼」), 「살인」, 「개밥」, 《첫사랑 값》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1]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특징을 보였다.[1]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음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종교가 현실의 고통받는 민중과 여성을 구원하지 못하는 한계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인력거꾼」에서는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말로 내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당시 기독교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해결보다는 개인의 내세 구원에만 집중하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이른바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종교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단순한 통속 소설로 읽히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사회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남편과 사별한 젊은 여성이 남편의 친구였던 '사랑 손님'에게 새로운 사랑을 느끼지만, 딸 옥희가 장차 "화냥년의 딸"로 손가락질받을 것을 염려하여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과정을 어린 딸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를 통해 여성의 감정과 행복을 억압하는 당시 사회의 편견과 인습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신경향파 작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의 작품해설 역시 주요섭을 단순 통속소설 작가가 아닌,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신경향파 작가로 평가하며, 《사랑 손님과 어머니》 또한 이러한 사회 비판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1929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1931년에는 잡지 『신동아』의 주간을 맡았다.[1] 1935년부터는 중국 북경의 보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문필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 시기는 그의 창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때로 평가받는다.[1]

2. 3. 언론 및 교육 활동

1931년 신동아의 주간이 되어 서울에서 활동했다.[1] 4년 후인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보인대학 교수로 부임했다.[1] 해방 이후, 1947년에는 상호출판사 주간을 역임했으며,[1] 1950년 10월에는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을 맡았다.[1] 1953년부터는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 활동에 힘썼다.[1]

2. 4. 3.1 운동과 투옥

1918년 형 주요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아오야마가쿠인 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1]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1]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김동인 등과 함께 지하 신문인 '독립신문'을 갈리판으로 인쇄하여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1] 이 활동으로 인해 일제 당국에 의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2. 5. 결혼과 가족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인 주공삼(朱孔三)이며, 형은 시인이자 정치가인 주요한(朱耀翰), 동생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주영섭(朱永燮)이다.[1]

관계이름생몰년직업 및 기타 정보
아버지주공삼(朱孔三)1875년 ~ 1953년 10월 18일개신교 목사. 前 평안남도 평양 연화동교회 목사.
주요한(朱耀翰)1900년 10월 14일 ~ 1979년 11월 17일소설가, 번역문학가, 시인, 언론인, 정치인. 前 대한해운공사 사장.
동생주영섭(朱永涉)1912년 ~ ?연극배우, 극작가, 연출가. 前 국립연극연구소 연구위원.



1936년 북경에서 잡지 『신가정』의 여성 기자인 김자혜(金慈惠)와 재혼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국책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조선으로 송환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1945년, 아내 김자혜는 출산을 위해 친정이 있는 춘천으로 갔고, 주요섭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춘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같은 해 38선이 그어지면서 분단으로 인해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에 남게 되었다. 이후 1946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했다.

2. 6. 말년 및 사망

1943년 일본의 국책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주요섭은 아버지의 제재소 일을 도왔고, 아내 김자혜는 출산을 위해 1945년 춘천의 친정으로 갔다. 그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주요섭은 춘천으로 향했으나, 같은 해 그어진 군사분계선 때문에 고향 평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1946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했으며, 1947년에는 상호출판사 주간을 지냈다. 1950년 10월에는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을 맡았고, 1953년에는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취임했다. 197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1]

3. 주요 작품

중국 유학 경험은 주요섭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상하이 후장 대학교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중국 사회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대표적인 예로 《첫사랑 값》, 《인력거꾼》, 《살인》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영국 조계 내에서 영국 관헌의 폭력에 맞서 파업(노동 거부), 파학(학교 거부), 파상(상업 거부) 등으로 저항하는 중국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모습, 중국 여학생을 사랑하지만 문화적 차이로 갈등하는 조선 청년, 성 착취를 당하다 자유를 찾아 살인을 저지르는 조선 여성 등 당대 현실을 꾸밈없이 반영한 신경향파 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개밥》, 《살인》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한국문학전집 주요섭 중단편선 《사랑손님과 어머니 외》를 통해 접할 수 있다.

특히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단순한 통속 소설로만 평가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 해설 등에 따르면, 이 소설은 남편과 사별한 젊은 여성이 새로운 사랑(남편의 친구)을 느끼지만, 딸 '옥희'가 장래에 "화냥년의 딸"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5살 소녀 옥희의 순수한 시선을 통해 여성의 사랑과 재혼을 억압하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신경향파적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재평가된다. KBS TV 문학관에서 방영된 드라마 역시 이러한 사회적 억압 속에서 갈등하는 옥희 엄마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외에도 한국의 해방분단을 다룬 소설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원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ONE KOREA 번역위원회 편저, '소바꽃 필 무렵-일제시대 민족문학 대역선'(신간사, 1995)에 間借り客と母|간바리가쿠토하하일본어라는 제목으로 번역 수록된 작품이 이것으로 추정된다.

4. 사회 활동 및 평가

그는 형 주요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후장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중국 유학 경험은 초기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국 조계지에서 영국 관헌들의 폭력에 맞서 파업, 파학(학교 거부), 파상(상업 거부) 등으로 저항하던 중국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삶, 조선 청년과 중국 여학생 간의 문화적 갈등, 성 착취를 당하던 조선 여성이 자신을 억압하던 노파를 살해하고 자유를 찾는 이야기 등은 《첫사랑 값》, 《인력거꾼》, 《살인》과 같은 신경향파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대 현실을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주요섭의 대표작으로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개밥》, 《살인》 등이 꼽힌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모아 《사랑손님과 어머니 외》라는 제목의 중단편선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흔히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를 통속 소설 작가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작품 해설에 따르면 그는 《개밥》, 《살인》 등에서 보이듯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주로 다룬 신경향파 작가로서의 면모가 더 강하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역시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 새로운 사랑을 느끼지만 "화냥년의 딸"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받을까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는 과정을 어린 딸 '옥희'의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여성의 감정과 선택을 억압하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HDTV TV문학관 등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새로운 행복을 바라지만 사회적 시선 때문에 갈등하는 옥희 엄마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각색된 바 있다.

1984년에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주요섭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연도회차수상자비고
1984년제1회구인환서울대학교 교수[4]
1985년제2회최진우중앙대학교 교수[5]


5. 연보

wikitext

주요섭 연보
연도내용
1902년음력 11월 24일, 평안남도 평양 서문 밖 신양리에서 출생. 아버지 주공삼은 목사, 형 주요한은 시인 겸 독립운동가, 동생 주영섭은 극작가 겸 연출가.[1]
1915년숭덕소학교 졸업, 숭덕중학교 진학.
1918년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중학교 3학년에 편입.
1919년삼일 운동 발발 후 귀국. 평양에서 김동인 등과 지하 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0개월 징역형 선고받음.
1920년상하이로 건너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안창호의 권유로 후장대학(滬江大學) 중학교 3학년에 편입.
1921년잡지 개벽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1923년후장대학(滬江大學) 입학.
1926년아시아 올림픽 마닐라 대회에 중국 대표로 출전하여 트랙 경기 1만 미터에서 우승.
1927년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학 전공.
1929년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 황해도 출신 유씨와 결혼했으나 수개월 만에 이혼.
1931년신동아 주간 역임.
1934년중국 베이징의 보인대학 교수 취임.
1936년『신가정』 기자 김자혜와 재혼.
1941년장남 북명 출생.
1942년차남 동명 출생.
1943년일제의 국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강제 귀국당하여 평양으로 돌아옴.
1945년장녀 승희 출생. 아내의 출산을 위해 춘천으로 갔다가 38선으로 인해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함.
1946년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주.
1947년서울특별시 중구 신설동으로 이주. 상호출판사 주간 역임.
1950년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 주필 역임.
1953년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 취임.
1954년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선출됨.
1959년국제펜클럽 제30차 세계작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1961년코리안 리퍼블릭(Korean Republic) 이사장 역임.
1963년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미주리대학교 등 6개 대학에서 순회 강의.
1972년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이사. 11월 14일 오후 7시 50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


6. 가족 관계



주요섭은 1929년 황해도 출신의 유씨 성을 가진 여성과 결혼했으나 몇 달 만에 이혼했다. 이후 1936년 북경에서 『신가정』 기자였던 김자혜(金慈惠)와 재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7. 학력

참조

[1] 웹사이트 주영섭(朱永燮) https://encykorea.ak[...] 2023-09-29
[2] 웹사이트 백과사전(百科事典) http://100.daum.net/[...] 2011-09-20
[3] 웹사이트 인물정보(人物情報) http://people.search[...] 2011-09-20
[4] 뉴스 구인환 서울대 교수 제1회 주요섭 문학상 수상자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4-11-07
[5] 뉴스 최진우 중앙대 교수 주요섭 문학상 수상자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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