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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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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영희는 1901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시 동인지 《장미촌》을 통해 등단한 작가이다. 1920년대 초 낭만주의 시를 쓰다가,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카프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문학에 반영했다. 카프 활동 중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노선을 제시했으나, 1931년 카프를 탈퇴하고 전향하여 순수 문학으로 전환했다. 1938년부터는 친일 활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광복 후에는 춘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받았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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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박영희
이름박영희
출생일1901년 12월 20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사망일1950년 (50세)
활동 기간1920년 ~ 1950년
직업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
장르문학평론, 시문학, 소설

2. 생애

2. 1. 출생과 성장 (1901년 ~ 1920년)

1901년 12월 20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공옥(功玉) 소학교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5일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때 함께 체포되었으나 훈계 방면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나도향, 안석주, 김복진, 김기진과는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 가운데, 김기진은 동창으로 뒷날 카프에서 함께 활동한다.

2. 2. 일본 유학과 문단 등단 (1920년 ~ 1922년)

1921년 귀국한 뒤, 박종화, 황석우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을 발행하며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같은 해 《신청년》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1922년에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감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

'병적 낭만주의'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현실 도피적이고 유약한 감상에 도취된 〈월광으로 짠 병실〉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2. 3. 카프 결성과 경향파 문학 활동 (1923년 ~ 1931년)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에 입사한 후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파스큘라는 1925년 염군사와의 통합을 통해 카프(KAPF)로 발전하였으며, 박영희는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이 시기부터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 작업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냥개〉는 박영희의 의식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도덕하고 인색한 지주인 구두쇠 노인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줄거리의 〈사냥개〉는 우화적 수법으로 쓴 신경향파 소설로, 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와 유사하게 동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6년 프로문학 반대 진영의 대표적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해 말부터는 김기진과 계급문학과 카프의 노선을 놓고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김기진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포괄적 계급문학을 주창한데 반하여 박영희는 강경 노선을 택하여 이데올로기 우선을 내세웠다. 역시 강경파인 임화가 박영희 편에 가세하고 김기진을 공박했고,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하면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2. 4. 신간회 활동과 목적의식론 (1927년 ~ 1931년)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박영희는 신간회의 활동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텔리 계층에 국한된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에 대해 반성하고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하였다. 대중적 조직과 기반 조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내렸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박영희는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계급의식의 추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했다.[1]

이러한 '목적의식론'이 제기되자 카프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27년 이후 카프는 경성 지부(박영희 등)와 동경 지부(이북만, 임화 및 제3전선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쟁점은 '계급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그 실천방향'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요점은 '계급문학운동이 대중적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박영희와 경성지부는 '의식 투쟁으로 그 한계를 정해둔 것'을 주창한 반면, 이와 반대로 이북만 및 동경지부에서는 정치적 진출과 대중 투쟁을 중시하였다.

1928년 2월과 7월에 발생한 공산당 검거 사건(3차, 4차)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었다.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2]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12월 테제')를 채택하였다.

카프의 동경 지부는 '12월 테제'에 따라, 신간회 노선 지지를 철회했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이때부터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갔고, 박영희 자신은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2. 5. 전향과 순수 문학 (1931년 ~ 1937년)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3] 1933년 12월 10일 카프를 탈퇴하고, 1934년 1월 2일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기고하여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며 전향을 선언했다.[3]

1935년 5월 20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1년가량 수감되었다.[3] 출옥 후에도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초기 시를 묶어 1937년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를 발간했다.

2. 6. 친일 문학 활동 (1938년 ~ 1945년)

박영희는 1938년 전향자 대표로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총 1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매일신보》에 실은 〈국민문학의 건설〉(1940) 등 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설들이다.

2. 7. 광복 이후 (1945년 ~ ?)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잠시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 1945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46년 12월 사직했다.[5]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다.[5] 이후 좌익 경력을 가진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선도위원으로 정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5]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피해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5]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나 북한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5]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종합적 평가

참조

[1] 서적 문예운동의 방향전환 조선지광 1927-04
[2] 문서 광주학생운동 1929
[3] 문서 신건설(新建設)사건
[4]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s://web.archive.[...] 2007-10-13
[5] 웹사이트 박영희 (朴英熙) http://www.kwari.org[...]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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