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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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1921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활동한 테너 성악가이다. 1940년대 후반 스위스에서 첫 녹음을 시작했고, 1946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여 라 스칼라 극장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하며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에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여러 오페라를 녹음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며, 1973년에는 칼라스와 함께 리사이틀 투어를 가졌다. 1992년 마지막 오페라 출연을 한 후 2008년 사망했다. 그는 부드러운 음색과 뛰어난 성악 기교로 찬사를 받았으며, 리리코 테너로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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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디 스테파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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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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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세페 디 스테파노 |
별칭 | 핏포 |
출생일 | 1921년 7월 24일 |
출생지 | 모타산타나스타시아, 카타니아 광역시, 시칠리아 |
사망일 | 2008년 3월 3일 |
사망지 | 산타마리아호에, 레코현, 이탈리아 |
국적 | 이탈리아 |
직업 | 오페라 가수 (풀-리릭 테너) |
활동 기간 | 1946년 - 1992년 |
가족 | |
배우자 | 마리아 지롤라미 (1949년 결혼, 1976년 이혼) 모니카 쿠르트 (1994년 결혼) |
자녀 | 3명 |
2. 초기 생애 및 음악 훈련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1921년 시칠리아 카타니아 근처의 모타 산타나스타시아에서 태어났다.[3] 그는 6살 때 부모와 함께 밀라노로 이주했다.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자랐으며,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때 사제가 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4]
16세 때 친구의 권유로 노래를 시작했고, 2년 후 바리톤 루이지 몬테산토와 마리아노 스타빌레에게 성악을 배웠다. 스타빌레는 디 스테파노에게 정확한 발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38년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했고, 카페, 레스토랑, 영화관 등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에는 니노 플로리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오페라 아리아, 칸초네, 유행가 등 다양한 노래를 불렀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은 디 스테파노의 초기 경력을 방해했는데, 이탈리아군에 입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 복무 중에도 그는 종종 노래로 군인들을 즐겁게 했다.[4] 그는 형편없는 군인이어서 지휘관은 그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군대를 떠나는 것이 국가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4]1940년 바리톤 가수 Luigi Montesanto|루이지 몬테산토it에게 배웠지만, 1941년 입대했다. 1943년 독일군의 북부 이탈리아 점령에 따라 스위스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난민 캠프에서 생활했지만,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1944년부터 로잔의 이탈리아어 방송국인 라디오 스위스 로망드에서 노래했고, EMI와 계약하여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그는 니노 플로리오라는 가명으로 공연했고, 시칠리아어 노래들을 녹음했는데,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 밖에서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이 음반들이었다.[4]
3. 오페라 경력
1945년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6년 레조 에밀리아 시립극장에서 마스네의 마농 데그리외 역으로 데뷔했다. 1947년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으며, 이듬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도 데뷔했다.[5]
3. 1. 전성기
테너였던 디 스테파노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 역,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 역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8년 2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세페 베르디의 ''리골레토'' 만토바 공작 역으로 뉴욕 데뷔를 했다.[5] 한 달 후 ''마농'' 공연 후 ''뮤지컬 아메리카''는 "우리는 베니아미노 질리 시대 이후로 거의 들어보지 못한 풍부하고 벨벳 같은 소리를 냈다"고 평했다.[6] 1957년 디 스테파노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역으로 영국 데뷔를 했으며, 1961년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으로 데뷔했다.디 스테파노는 가수로서 훌륭한 발음, 독특한 음색, 열정적인 전달력, 특히 부드러운 노래의 달콤함으로 찬사를 받았다. 루돌프 빙 경은 회고록에서 "'파우스트'의 'Salut! demeure프랑스어'에서 높은 C음을 디미누엔도로 불렀을 때가 내 관찰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7]
1953년 EMI의 클래식 부문 대표인 월터 레지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인기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 전부를 녹음할 테너를 원했고, 디 스테파노를 선택했다. 그들의 녹음 업적 중에는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아래 녹음된 1953년 스튜디오 녹음 ''토스카''가 있었는데, 이는 "그라모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연 중 하나"로 여겨진다.[9] 두 사람은 1951년 남아메리카에서부터 1957년 말 라 스칼라에서 ''가면무도회''까지 자주 함께 공연했으며, 이것이 두 사람이 오페라에서 협력한 마지막이었다. 그는 1955년 라 스칼라에서 비스콘티가 연출한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를 불렀으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아래 라 스칼라, 베를린, 빈에서 그녀의 루치아 역에 에드가르도를 불렀다.
3. 2. 마리아 칼라스와의 협연
마리아 칼라스와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1951년 9월, 브라질 상파울루 시에서 열린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을 시작으로 자주 협연했다.[10] 라 스칼라 극장에서는 195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가에타노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루키노 비스콘티 연출의 라 트라비아타에 함께 출연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10]1973년, 디 스테파노는 칼라스의 마지막 세계 투어에 동행하여 일본을 포함한 각국을 순회하며 공연했지만, 예술적으로는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0]
두 사람은 EMI에서 다수의 오페라를 함께 녹음했다. 다음은 그 목록이다.[10]
녹음 연도 | 오페라 제목 |
---|---|
1953년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
1953년 | 청교도 |
1953년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1953년 | 토스카 |
1954년 | 팔리아치 |
1955년 | 리골레토 |
1956년 | 일 트로바토레 |
1956년 | 라 보엠 |
1956년 | 가면무도회 |
1957년 | 마농 레스코 |
1972년 11월에서 12월 사이, 안토니우 드 알메이다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필립스 레이블에서 디 스테파노와 칼라스의 듀엣 시리즈가 녹음되었다. 이 녹음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비공식 버전이 존재한다.
3. 3. 후기 활동
1955년경부터 디 스테파노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팔리아치의 카니오, 아이다의 라다메스 등 더 무거운 음성의 역할에도 도전하게 된다.[9] 그러나 이 결정은 오히려 화가 되었다. 원래 이탈리아 오페라 발성의 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열린 (아페르토)" 발성으로 목에 부담이 갔던 점, 생활상의 부절제 (오페라 공연 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 결과 공연 취소가 잦았던 점 등으로 인해, 디 스테파노는 차츰 "다루기 힘든 테너"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더 부담이 적은 리사이틀을 주 활동으로 삼게 되었다.[10]무대에서 돋보이는 용모, 풍부한 표정 등도 더해져, 관객들에게는 "피포 (Pippo)"라는 애칭으로 항상 친근하게 다가왔으며, 성악적으로는 쇠퇴기에 있던 1960년대에도, 라이브 녹음에서는 청중을 열광시키는 모습이 엿보인다.
1973년에는 사생활에서도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마리아 칼라스의 (결과적으로 마지막) 세계 투어에 동반하여, 일본을 포함한 각국을 방문했지만, 흥행상으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술적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1992년 6월, 로마 카라칼라 대욕장 유적에서의 야외 오페라 투란도트에 황제 역으로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4. 사생활 및 죽음
1949년, 그는 뉴욕에서 음악학교 학생이었던 마리아 지롤라미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1976년에 부부는 별거했다. 1977년, 그는 함부르크 출신의 오페레타 소프라노였던 모니카 쿠르트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고, 1993년에 결혼했다.[11]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 출연은 2004년 10월 24일 오데르초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였다.[11]
2004년 12월 3일, 그는 케냐 디아니 해변에 있는 자택에서 강도 사건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3][8] 몸바사의 한 병원에 입원한 후, 그의 상태는 처음에 보였던 것보다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소 세 번의 수술을 받은 후, 그는 12월 7일에 혼수상태에 빠졌다. 12월 23일, 그는 이탈리아로 이송되어 밀라노의 병원에 입원했다.[12] 결국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3] 그는 2008년 3월 3일, 밀라노 북쪽의 산타 마리아 호에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5. 한국과의 관계
1967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아이버 뉴턴의 피아노 반주로 각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1975년에는 마담 버터플라이 세계 콩쿠르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푸치니의 토스카|토스카 (오페라)it 전곡을 공연했다. (몽세라 카바예, 니콜라 헤르레아와 협연) 이후에도 리사이틀이나 마스터 클래스를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6. 평가 및 유산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독특하고 따뜻하며 풍부한 음색을 가진 테너였으며, 초기에는 매우 풍부한 성량을 자랑했다. 그는 뛰어난 성악 기교, 명확한 발음, 열정적인 악상 표현, 매혹적인 해석, 피아니시모와 음영의 섬세한 가벼움으로 존경받았다.[7] 비욜링이나 크라우스의 학구적인 정확성과 "침착함", 델 모나코의 압도적인 성량, 베르곤치의 스타일리시한 엄격함과는 달리, 디 스테파노는 관대하고, 본능적이며 소통적인 창법으로 자연스러운 음악성을 지녔다.
디 스테파노는 이탈리아 및 프랑스 레퍼토리의 테노레 리리코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속하며, 특히 경력 초기에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진주 조개잡이》, 《마농》, 《파우스트》에서 기억에 남는 공연을 선보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토스카》, 《운명의 힘》, 《투란도트》, 《카르멘》, 《팔리아치》, 《안드레아 셰니에》같은 보다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으며 리리코 레퍼토리로 발전했다.
디 스테파노는 훌륭한 발음, 독특한 음색, 열정적인 전달력, 특히 부드러운 노래의 달콤함으로 찬사를 받았다.[7] 1953년 EMI의 클래식 부문 대표인 월터 레지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모든 인기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녹음할 테너를 원했고, 디 스테파노를 선택했다.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아래 녹음된 1953년 스튜디오 녹음 ''토스카''는 "그라모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연 중 하나"로 여겨진다.[9] 두 사람은 1951년 남아메리카에서부터 1957년 말 라 스칼라에서 ''가면무도회''까지 자주 함께 공연했으며, 이것이 두 사람이 오페라에서 협력한 마지막이었다.[10]
1973년 디 스테파노와 마리아 칼라스는 1974년에 끝난 리사이틀 투어를 함께 했다. 비평가들은 마리아 칼라스가 목소리를 잃었다고 지적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모든 곳에서 열광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두 가수 사이에 짧은 로맨틱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참조
[1]
간행물
Opera
2002-01
[2]
서적
Singing from the Soul
[3]
뉴스
Obituaries in the News
https://www.washingt[...]
AP
2013-04-13
[4]
웹사이트
Giuseppe di Stefano
https://www.theguard[...]
2020-04-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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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Di Stefano – Metropolitan Opera debut, February 25, 1948
http://archives.meto[...]
[6]
간행물
Musical America
1948-04
[7]
서적
5000 Nights at the Opera
Hamish Hamilton
[8]
뉴스
Opera star critical after attack in Kenya
https://www.theguard[...]
2004-12-06
[9]
간행물
Opera
1973
[10]
뉴스
Giuseppe di Stefano, a Tenor Whose Career Flamed Out Too Early, Is Dead at 86
https://www.nytimes.[...]
2018-10-17
[11]
Youtube
Giuseppe Di Stefano - Tenore
https://www.youtube.[...]
2024-10-09
[12]
뉴스
Grave il tenore Di Stefano in coma al San Raffaele - la Repubblica.it
http://ricerca.repub[...]
2018-03-26
[13]
웹사이트
Obituary: Opera singer Giuseppe di Stefano, 1921-2008
https://www.theguard[...]
2008-03-03
[14]
서적
伊和中辞典
小学館
199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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