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중국민항 296편 불시착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중국민항 296편 불시착 사건은 1983년 5월 5일, 중국 선양을 출발해 상하이로 향하던 중국민항 소속 여객기가 6명의 무장 납치범에 의해 납치되어 대한민국 춘천 인근 미군 기지에 불시착한 사건이다. 납치범들은 중화민국으로의 망명을 요구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 사건은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비공식적인 외교 접촉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양국 관계 개선에 기여하여 1992년 수교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중국민항 296편 불시착 사건
사고 개요
사고 유형납치
발생일1983년 5월 5일
위치강원도 춘천시 캠프 페이지
요약중국 국내선 여객기가 납치되어 대한민국으로 향함
항공편 정보
항공기 종류호커 시들리 트라이덴트 2E
항공사중국민항
등록번호B-296
목적지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
탑승 정보
승객105명
승무원9명
생존자114명 (전원)
사망자0명
부상자2명
이미지
CAAC Hawker Siddeley Trident, similar to the one involved
사고기와 유사한 중국민항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2. 사건의 전개

1983년 5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의 선양 둥타 공항에서 상하이시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국민항 소속 트라이던트 Tr-2E 여객기(기체 기호: B-296)가 이륙 직후 6명의 무장 그룹에 의해 하이재킹되었다. 이 과정에서 통신사와 항법사가 총상을 입었다.[1]

납치된 여객기는 랴오둥반도 상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상공을 침범,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영공으로 진입했다. 주한 미군기가 긴급 발진했으나, 중국민항기는 기체를 좌우로 흔들며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이후 전투기 유도를 받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주한 미국군 기지(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했다. 범인은 랴오닝성 공무원 줘창런, 장훙쥔 등 남성 5명과 여성 1명으로, 총 6명이었다. 이들은 승무원 9명(운항 승무원 5명, 객실 승무원 4명)과 승객 90명(일본인 3명 포함)을 석방하고 중화민국으로 망명을 요구하며 투항했다.

중국 정부는 사건 해결을 위해 기존 소극적, 제한적 접촉에서 직접 교섭으로 전환해야 했다. 여기에는 한-중 직접교섭을 위한 미국과 일본의 지원, 알선이 있었다.[13] 초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간접교섭으로 항공기와 승무원 송환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용항공국장 선투(沈圖)와 관리 33명, 승무원이 서울을 방문, 공로명 외무부차관보와 직접 협상했다.

9개 항 외교 각서가 서명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라는 양국 정식 국호가 처음 사용되었다. 양국은 납치범을 대한민국 법으로 재판하고, 향후 유사 사건 발생 시 긴밀히 협조할 것을 합의했다.[14][15]

2. 1. 불시착

1983년 5월 5일, 중국민용항공국 296편(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기종, 기체 기호 B-296)이 랴오닝성 선양시의 선양 둥타 공항에서 출발하여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 탁장인 등 6명의 납치범에 의해 무력으로 장악되었다. 납치범들은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며, 승무원들이 거부하자 총격을 가해 승무원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여객기는 강원도 춘천시캠프 페이지 미군 기지에 불시착했다.[1]

납치범들은 주한 중화민국 대사와의 면담 및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납치범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며, 무장 해제를 유도했다.[13]

사건 당시, 비행기에는 승객 105명과 승무원 9명이 탑승하고 있었다.[6] 납치범들은 한국 당국에 타이완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2. 2.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1983년 5월 5일, 중국민항 296편 불시착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캠프 페이지 군사 기지에 불시착한 항공기와 승객, 승무원의 안전을 확보하고, 사건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시작했다.[1]

사건 당일, 미국 국무부는 부상당한 승무원 2명이 주한 미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나머지 승객과 승무원은 풀려났다고 발표했다.[1] 대한민국 정부 대변인은 국제민간항공 협약 정신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직접 협상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1]

당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외교 관계가 없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승객과 승무원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서울 관광을 주선하는 등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1] 대한민국 건설교통부대한민국 공군은 항공기 점검 및 수리를 지원했다.[1]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협상을 통해 승객, 승무원 및 기체 반환에 합의했다. 다만, 납치범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이 엇갈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 관례를 들어 범죄인 인도를 거부하고, 납치범들을 국내법에 따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1][5]

2. 2. 1.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직접 교섭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외교 관계가 없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납치된 여객기의 승무원과 승객들이 서울 외곽의 쉐라톤 호텔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했다.[7] 5월 7일, 선투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 민항 실무단이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한국 정부의 환영을 받았고, 중국 대표단은 신라호텔에 투숙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10분, 양측은 신라호텔에서 첫 회담을 가졌다.[1]

5월 8일, 양측은 합의에 도달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승객과 승무원은 5월 9일에 대표단과 함께 중국으로 귀환한다.
  • 납치된 항공기는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 후 즉시 중국으로 반환한다.[5]
  • 중상을 입은 승무원은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이후 중국으로 귀환한다.


주요 이견은 납치범 처리 문제였는데, 중국 측은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 국가에서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에서 범죄인 인도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5][1]

양해각서 초안 작성 당시, 서명자의 공식 신분에 대해 새로운 이견이 발생하여 귀국 일정이 하루 연기되었다. 한국 측은 선투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중국 정부 대표이고, 중국 민항 총국 국장은 장관급 관리이므로 양측의 협상 각서에 이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측은 국가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 없이 민항 당국의 이름으로 각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보관하는 각서 사본에는 한국의 공식 명칭을 사용하고, 중국 측이 가져갈 사본에는 이 세부 사항을 무시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주권 국가"로서 "협상 장소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중국 대표들과 국내 소통을 거친 후, 5월 10일 신라호텔에서 각서 서명 및 교환 행사가 열렸다. 각서 서명자는 각각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선투와 대한민국 외교부 대표였다. 같은 날 오후, 선투와 그의 팀은 296편의 승객 99명과 승무원 8명을 태우고 보잉 707 항공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1][8]

하이재킹 방지 조약에서는 기체와 승객을 신속하게 반환하고, 하이재커는 당사국 중 하나가 형사 재판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대한민국은 이 조약을 체결했지만, 국교가 없었고, 서로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중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북한을, 대한민국은 중국 유일의 합법 정부로 중화민국(대만)을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특별기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파견하여 중국민용항공총국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교섭단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첫 직접 교섭이 진행되었고, "중공(中共)", "남조선(南朝鮮)" 대신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国)", "대한민국(大韓民国)"이라는 정식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는 한국 측이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중국의 참가를 이끌어내고 싶어 했던 의도도 있었다.

2. 2. 2. 승객 및 승무원 송환

대한민국 정부는 납치된 여객기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워커힐 호텔에 묵게 하고, 여의도자연농원 등 관광을 제공하는 등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 승객들은 중국민항이 보낸 보잉 707 항공편으로 귀국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에게 컬러 TV를 선물하기도 했다.[1]

사건 당일, 미국 국무부는 부상당한 승무원 2명이 주한 미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나머지 승객과 승무원(남성 5명, 여성 1명)은 풀려났다고 발표했다.[1]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외교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이 서울 외곽의 쉐라톤 호텔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다.[7] 호텔은 이들에게 고급 중국, 한국, 일본 요리를 제공했다.[1] 5월 7일, 중국 민항 실무단이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한국 정부의 환영을 받았고, 이들은 신라호텔에 머물렀다.[1] 같은 날, 양측은 신라호텔에서 회담을 가졌고, 이후 중국 대표단은 병원과 호텔을 방문하여 부상당한 승무원과 다른 승객 및 승무원들을 만났다.[1] 한국 측은 납치된 중국 승객들에게 서울 관광을 주선하여 N서울타워, 백화점, 삼성전자 공장 등을 방문하게 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1]

5월 8일, 양측은 승객과 승무원을 9일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납치된 항공기는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즉시 반환하기로 합의했다.[5] 중상을 입은 승무원은 한국에서 치료를 받은 후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1] 5월 10일, 대한민국 외교부 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는 신라호텔에서 각서에 서명하고 교환했다. 같은 날 오후, 승객 99명과 승무원 8명은 보잉 707 항공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1][8] 공로명 등 한국 고위 관계자들이 공항에서 이들을 배웅했다.[1]

한편, 하이재킹된 기체는 착륙한 활주로에서 연료를 적재하고 중국으로 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국인 조종사의 지휘 하에 김포국제공항으로 회송되었다. 승객들은 이 기간 동안 버스 관광 여행에 초대되는 등 환대를 받았다. 하이재킹 기체는 5월 19일에 귀국했다.

3. 사건의 영향

이 사건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관계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1983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가 대한민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17] 이는 체육, 문화, 관광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양국 간 교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17] 1984년 2월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에 대한민국 선수단이 처음으로 참가했고,[2] 같은 해 3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경을 넘는 친척 간 상호 교류를 허용했으며, 4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농구팀이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이후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에 중화인민공화국 선수단이 참가하면서 양국 관계가 전반적으로 좋아졌고, 1992년 양국은 수교를 맺었다.[17]

3. 1. 외교 관계 개선

1983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가 대한민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17] 이는 체육, 문화, 관광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양국 간 교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17] 1984년 2월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에 대한민국 선수단이 처음으로 참가했고,[2] 같은 해 4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농구팀이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했다.[17] 이후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에 중화인민공화국 선수단이 참가하면서 양국 관계가 전반적으로 좋아졌고, 1992년 양국은 수교를 맺었다.[17]

3. 2. 납치범 처리

1983년 5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지방 검찰청은 납치범 6명을 정식 체포하고 6월 1일 항공기 항행 안전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1] 헤이그 협약, 몬트리올 협약 및 한국 항공기 항행 안전법에 따르면, 폭력이나 위협으로 항공기를 납치한 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지며, 납치 중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힌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서울 지방 형사 법원은 주범 주창런에게 6년, 다른 납치범들에게는 5년 또는 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에 불만을 표했다.[1]

1984년 8월 13일, 대한민국은 6명의 납치범을 사면하고 중화민국(대만)으로 보냈다.[1] 타이베이에 도착한 6명은 망명을 요청했고, "반공 영웅"으로 환영받았으며, 자유 중국 구제 협회로부터 재정적 및 생활 지원을 받았다.[9]

하지만, 1991년 7월, 주창런과 장훙쥔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납치를 시도했다. 인질은 납치 과정에서 두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주창런과 장훙쥔은 2000년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8월 10일, 주창런과 장훙쥔은 투청 구치소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다른 공범들도 경영자가 되거나 저소득층으로 전락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 관계가 없었던 상황에서 발생했기에, 하이재킹 방지 조약에 따른 처리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중화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양국 간 최초의 직접 교섭으로 이어졌고, 서로를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으로 호칭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참가를 원했던 점도 작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범인들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대한민국은 이들을 형사피고인으로 재판에 넘겼다. 서울지방법원은 이듬해 징역 2년에서 6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비판했다. 이후 1984년 8월 13일 대한민국은 이들의 중화민국 망명을 허용했는데, 이는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경제 교류 활성화와 중화민국과의 관계 악화 조짐을 고려한 결정으로 해석된다.

4. 관련 인물

다음은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위키텍스트입니다. 하위 섹션과 내용이 중복되므로, 대한민국 측 관련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납치범 중 일부는 망명 이후 중화민국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값을 위한 유괴, 살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18]

4. 1. 대한민국 측


  •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였던 공로명 전 외무장관이 협상 수석 대표였다.
  • 당시 안기부 해외 담당 제2차장이었던 박세직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만났다.
  • 당시 법무부 출입국 관리국장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이 사건의 실무 담당자 중 한 명이었다.[18]

참조

[1] 서적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 Modern Volume Social Science Press 2014-01
[2] 웹사이트 ROK Dropː 1983 hijacking of CCA flight 296 to Camp Page http://www.rokdrop.n[...]
[3] 서적 Korean Political Economy and Diplomacy Intellectual Property Publishing House 2013
[4] 서적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in Contemporary China and North Korea Jilin Literature and History Publishing House 2013-06
[5] 웹사이트 ASN Aircraft accident Hawker https://aviation-saf[...]
[6] 서적 Post-war Korean Diplomacy and China-Theory and Policy Analysis Shanghai Dictionary Press 2011-12
[7] 뉴스 Hijacking of jetliner is a windfall for South Korea's relations with China https://www.csmonito[...]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8] 서적 South Korea Social Sciences Academic Press 2009-05
[9] 뉴스 AROUND THE WORLD; China Accuses Taiwan And Seoul on Hijacking https://www.nytimes.[...] 1985-08-15
[10] 문서 트라이덴트는 [[린뱌오]]가 1971년 9월 13일 당시 쿠데타 미수에 그친 후 서둘러 망명길에 올랐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했을 때 탔던 기종이다. [[린뱌오]]가 탄 것은 1E였다.
[11] 뉴스 중국 민항기 사건 http://economy.hanko[...] 한국일보 2008-05-04
[12] 웹사이트 한류와 문구 http://cafe.naver.co[...]
[13] 서적 Chinan and Korea: Dynamic Relations Hover Institute Press 1996
[14] 서적 현대국제정치의 이해 오름
[15] 뉴스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1-07-04
[16] 뉴스 한·중공 국호명기 각서 교환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3-05-10
[17] 웹사이트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http://contents.arch[...]
[18] 뉴스 박희태 의장, 리자오싱 中 전인대 외사위 주임 접견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0-06-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