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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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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돈야는 악기 소리를 묘사하는 일본어 의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꽹과리와 북을 조합한 악기를 연주하며 길거리에서 선전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메이지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다이쇼 시대 말부터 쇼와 시대 초에 널리 퍼졌다. 일본 가부키, 선불교 승려 등 다양한 형태의 거리 공연에서 기원했으며, 오사카에서 광고 목적으로 처음 등장했다. 악기 연주, 화려한 의상, 다양한 광고 방식을 통해 상업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시대에 따라 사회적 의미가 변화해 왔다.

2. 어원

"진돈야"라는 단어는 악기 소리를 묘사하는 일본어 의성어인 '친'과 '돈'에 직업을 나타내는 접미사 '-야'가 붙어서 만들어졌다.[23] 이 단어는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사용되었지만, 용례가 적어 그 의미하는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24] 현대의 진돈야로 이어지는 "친돈야"라는 호칭은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1930년경부터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25]

꽹과리와 북을 조합한 드럼 세트를 친돈 또는 친돈 북이라고 부르며, 이를 사용하여 길거리에서 선전하는 직업을 "친돈야"라고 칭한다. "친돈"은 꽹과리의 "친" 소리와 몸통 북의 "돈" 소리를 조합한 의성어에서 유래했다.[23]

친돈야는 피로메야, 히로메야, 간사이 지방에서는 토자이야라고 불리기도 한다. 피로메야는 개점 피로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거나 연극의 구두에서 유래하며, 히로메야는 악대 광고 회사의 이름에서, 토자이야는 오사카의 이사미카메가 연극 구두인 "동서, 동서(토자이, 토자이)"를 요세 선전에 활용한 것에서 유래했다.[27][28] 현대에는 히로메야는 악대의 존재를, 토자이야는 구두를 주체로 하는 의미를 포함하여 구분해서 사용된다.[29]

3. 역사

일본에는 예로부터 가부키의 창시자인 이즈모노 오쿠니부터 선불교 후케슈의 고무소일본어 탁발승까지 다양한 형태의 음악 거리 공연이 존재했다. 19세기(에도시대 말기, 메이지 시대 초) 오사카에서 광고 목적으로 친돈야일본어가 등장한 기록이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1845년경 오사카의 사탕 판매상인 아메카츠가 최초의 친돈야로 여겨진다. 그는 노래와 소리 나는 장난감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동식 사탕 노점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메카츠는 입담이 훌륭하여 낙어의 선전을 맡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사미카메가 1880년-1881년경 연극의 입담인 "도자이, 도자이(東西、東西)"를 사용하여 요세 선전을 하면서 '도자이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도자이야는 가두 선전업의 일반 명사로 변했다. 이사미카메 외에도 마메토모라는 도자이야가 알려졌으며, 그는 1891년에 사망, 동생이 뒤를 이었다.

1880년대 오사카에서는 단바야 구리마루, 사츠마야 이모스케가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도쿄에서는 아키타 류키치의 광목가가 악대 광고를 시작했다. 1874년 기무라야가 출시한 앙빵은 문명 개화의 상징적 음식으로 메이지 천황의 보증을 얻어 처음으로 친돈야를 사용했다고 한다.

1887년경부터 콩이나 밤을 팔기 시작한 단바야 구리마루는 도자이야로 전향, 악사를 더해 짝짝이와 북을 치며 거리를 걸었다. 가시와야 개점 작업 때, 소나무에 하고로모를 더한 나가주반을 입고, 충신장에 빗댄 음률이 들어간 구절이 호평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광목가는 오사카 출신 아키타 류키치가 1888년 야에스에서 창업한 회사로, 광고 대리점, 장식 선전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광목가는 악대를 조직했기 때문에 악대를 사용한 노상 광고를 일반적으로 광목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1889년, 광목가가 기린 맥주의 선전을 맡아 오사카·나카노시마의 호텔 자유정의 음악대를 파견하면서 오사카에서도 악대 광고가 도입되었다. 1890년에는 구리마루도 군복풍으로 옷을 고쳐 입고 나팔, 북, 꽹과리 등을 이용하여 선전을 했다. 광목가의 아키타의 권유에 응하여 상경하여, 광고 행렬 속에서 충신장을 선보인 적도 있다.

한편, 광목가에서 독립한 후쿠토쿠조의 고사카 긴지로도 오사카에서 인기가 있었던 나니와 하야시를 도입하여, 히가시 하야시를 편성했다. 구리마루가 악대 도입을 추진하는 한편, 선배인 유키는 악대에 부정적이었고, 사츠마야 이모스케도 샤미센, 북을 울리는 것에 그쳐, 구절을 중시하는 도자이야의 흐름도 존재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에서는 히로메야(広目屋)라는 광고 대행사가 악단을 고용하여 광고를 시작하면서 친돈야가 도쿄에도 전파되었다.[41] 히로메야는 오사카 출신의 아키타 류키치가 설립한 회사로, 10명 이상의 연주자로 구성된 대규모 악단을 활용하여 광고 효과를 높였다.[53] 이는 군대 및 공공 밴드의 인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히로메야의 밴드는 축제와 파티에서 오락을 제공하고 무성 영화의 배경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기린 맥주 회사의 광고 캠페인에도 참여하여 오사카로 확산되었다.[53][56]

1874년 기무라야가 출시한 앙빵은 문명 개화의 상징적 음식으로 메이지 천황의 보증을 얻어 처음으로 친돈야를 사용한 광고 사례로 알려져 있다.[42] 1880년대 도쿄에서는 아키타 류키치의 히로메야가 악대 광고를 시작했다.[41] 1885년에는 체리네 곡마단의 내일 등 외국 악대의 선전 연주, 1886년에는 나팔을 사용한 용품점의 광고 등의 예가 있었다.

악대는 군가의 유행과 출정 군인을 보내는 기회가 증가함에 따라 청일 전쟁을 기점으로 유행하였다. 이후 활동 사진이나 서커스 순회, 담배나 치약 등의 대규모 악대 광고가 이루어졌고, 지방에도 악대 광고는 널리 퍼져나갔다.[55] 1911년 라이온 치약을 선전한 고바야시 상점은 100개 이상의 깃발을 내걸고 도카이·호쿠리쿠 지방으로 광고대를 파견하기도 했다.[42]

1920년대에 열기구비행기를 이용한 광고가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네온사인이 도쿄에 등장했다.[65] 1929년 일본에 유성 영화가 등장하면서 약 3,000명의 일본 거리 광고업자가 일자리를 잃었다.[65] 1930년대대공황은 일본의 진돈야를 더욱 감소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거리 공연이 완전히 금지되었다.[65][80]

기술 발전은 1910년부터 신문과 경쟁해 온 친돈야와 경쟁하는 많은 다른 광고 방식을 열었다.[65] 주식 폭락과 광고 단속법 시행 등으로 대규모 광고 악대·광고 행렬은 메이지 40년대에 들어 침체되었고, 대신 신문·잡지 등의 광고가 성행하였다.[65] 다이쇼 시대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선전과 네온사인도 등장했다.[65]

대표적인 오락이 된 활동사진에서는 영화관이 악사를 고용하여 오케스트라나 화양합주단을 결성하고, 손님을 끌기 위해 악대를 고용했다. 활동사진, 연극, 서커스 순회 공연에서는 악대가 선두에 서서 등장하고, 또한 선전을 위해 거리를 돌았다.

상점 개업 축하에서 진돈야. 1935년경. 현 야마나시현쓰루시.


쇠퇴를 향했던 진다의 관악기 연주자를 더한 형태가 다이쇼 말 무렵부터 늘어나기 시작했고, 토키의 등장과 함께 실직한 영화관 악사가 유입되어[72][73], 관악기를 포함한 편성이 정착한다.[74] 전성기는 1933년부터 38년경으로 여겨진다. 1936년, 하토야마 이치로 (전후, 내각총리대신)와 데키야 출신의 시의원 구라모치 츄스케가 선거에서 표를 모으기 위해 진돈야의 조합 (제도 음악 하야시 광고업 조합)을 만들었지만, 그 회원 수는 3000명에 달했다.[7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친돈야는 다시 부활하여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81][83] 암시장파친코 산업의 성장은 친돈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83] 특히 관동 지방에서는 파칭코 가게의 의뢰가 많았다. 1950년에는 친돈야 인구가 2500명에 달했다고 한다.[83]

TV와 라디오 광고의 도입은 친돈야에게 미미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소규모 상점들이 친돈야 서비스를 계속 이용했기 때문이다.[81] 대규모 광고 전개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소수 인원, 소규모로 탄력적인 친돈야의 영업 형태가 시대에 맞았던 것이다.[82]

쇼와 20년대 후반(1950년대)에는 서커스 관계자나[84] 여행 배우들도 진돈계에 유입되었다.[81] 1950년 도쿄 신바시에서 처음 개최된 것을 시작으로,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에는 마에바시, 누마즈, 히메지, 이세, 하코다테, 히코네[85] [86] [87][88] 등 전국 각지에서 진돈 콩쿠르가 개최되었다.

1955년 도야마에서 시작된 "전국 진돈 콩쿠르"(1965년에 '''전일본 진돈 콩쿠르'''로 개칭)는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90] 도야마 산업 대박람회를 마치고, 일시적으로 소비가 위축된 지역 상점가의 활성화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도야마시와 도야마 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벚꽃 축제" 행사로 시작되었으며, 42개의 진돈야가 참가했다.[91]

1960년대 이후, 진돈야의 수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3년 석유 파동과 그에 따른 경기 침체로 가속화되었다.[81] 196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진돈야는 "낡은" 것이 되었으며,[92] 스피커를 통한 광고와 자동차 교통량 증가는 진돈야의 활동 공간을 좁게 만들었다. 1970년경에는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많은 대도시에서 거리 공연이 금지되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급격히 수가 줄었지만, 일 자체가 줄지 않았다는 증언도 많다.[93] 1985년에는 약 150개의 진돈야가 남아 있었으며, 평균 연령은 약 60세였다.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질병과 사망 기간 동안에도 몇 달 동안 공공 공연이 금지되었다.

3. 1. 오사카에서의 기원

일본에는 예로부터 가부키의 창시자인 이즈모노 오쿠니부터 선불교 후케슈의 고무소일본어 탁발승까지 다양한 형태의 음악 거리 공연이 존재했다. 19세기(에도시대 말기, 메이지 시대 초) 오사카에서 광고 목적으로 친돈야일본어가 등장한 기록이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1845년경 오사카의 사탕 판매상인 아메카츠가 최초의 친돈야로 여겨진다. 그는 노래와 소리 나는 장난감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동식 사탕 노점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메카츠는 입담이 훌륭하여 낙어의 선전을 맡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사미카메가 1880년-1881년경 연극의 입담인 "도자이, 도자이(東西、東西)"를 사용하여 요세 선전을 하면서 '도자이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도자이야는 가두 선전업의 일반 명사로 변했다. 이사미카메 외에도 마메토모라는 도자이야가 알려졌으며, 그는 1891년에 사망, 동생이 뒤를 이었다.

1880년대 오사카에서는 단바야 구리마루, 사츠마야 이모스케가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도쿄에서는 아키타 류키치의 광목가가 악대 광고를 시작했다. 1874년 기무라야가 출시한 앙빵은 문명 개화의 상징적 음식으로 메이지 천황의 보증을 얻어 처음으로 친돈야를 사용했다고 한다.

1887년경부터 콩이나 밤을 팔기 시작한 단바야 구리마루는 도자이야로 전향, 악사를 더해 짝짝이와 북을 치며 거리를 걸었다. 가시와야 개점 작업 때, 소나무에 하고로모를 더한 나가주반을 입고, 충신장에 빗댄 음률이 들어간 구절이 호평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광목가는 오사카 출신 아키타 류키치가 1888년 야에스에서 창업한 회사로, 광고 대리점, 장식 선전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광목가는 악대를 조직했기 때문에 악대를 사용한 노상 광고를 일반적으로 광목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1889년, 광목가가 기린 맥주의 선전을 맡아 오사카·나카노시마의 호텔 자유정의 음악대를 파견하면서 오사카에서도 악대 광고가 도입되었다. 1890년에는 구리마루도 군복풍으로 옷을 고쳐 입고 나팔, 북, 꽹과리 등을 이용하여 선전을 했다. 광목가의 아키타의 권유에 응하여 상경하여, 광고 행렬 속에서 충신장을 선보인 적도 있다.

한편, 광목가에서 독립한 후쿠토쿠조의 고사카 긴지로도 오사카에서 인기가 있었던 나니와 하야시를 도입하여, 히가시 하야시를 편성했다. 구리마루가 악대 도입을 추진하는 한편, 선배인 유키는 악대에 부정적이었고, 사츠마야 이모스케도 샤미센, 북을 울리는 것에 그쳐, 구절을 중시하는 도자이야의 흐름도 존재했다.

3. 2. 도쿄에서의 발전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에서는 히로메야(広目屋)라는 광고 대행사가 악단을 고용하여 광고를 시작하면서 친돈야가 도쿄에도 전파되었다.[41] 히로메야는 오사카 출신의 아키타 류키치가 설립한 회사로, 10명 이상의 연주자로 구성된 대규모 악단을 활용하여 광고 효과를 높였다.[53] 이는 군대 및 공공 밴드의 인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히로메야의 밴드는 축제와 파티에서 오락을 제공하고 무성 영화의 배경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기린 맥주 회사의 광고 캠페인에도 참여하여 오사카로 확산되었다.[53][56]

1874년 기무라야가 출시한 앙빵은 문명 개화의 상징적 음식으로 메이지 천황의 보증을 얻어 처음으로 친돈야를 사용한 광고 사례로 알려져 있다.[42] 1880년대 도쿄에서는 아키타 류키치의 히로메야가 악대 광고를 시작했다.[41] 1885년에는 체리네 곡마단의 내일 등 외국 악대의 선전 연주, 1886년에는 나팔을 사용한 용품점의 광고 등의 예가 있었다.

악대는 군가의 유행과 출정 군인을 보내는 기회가 증가함에 따라 청일 전쟁을 기점으로 유행하였다. 이후 활동 사진이나 서커스 순회, 담배나 치약 등의 대규모 악대 광고가 이루어졌고, 지방에도 악대 광고는 널리 퍼져나갔다.[55] 1911년 라이온 치약을 선전한 고바야시 상점은 100개 이상의 깃발을 내걸고 도카이·호쿠리쿠 지방으로 광고대를 파견하기도 했다.[42]

3. 3. 현대 친돈야의 진화

1920년대에 열기구비행기를 이용한 광고가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네온사인이 도쿄에 등장했다.[65] 1929년 일본에 유성 영화가 등장하면서 약 3,000명의 일본 거리 광고업자가 일자리를 잃었다.[65] 1930년대대공황은 일본의 진돈야를 더욱 감소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거리 공연이 완전히 금지되었다.[65][80]

기술 발전은 1910년부터 신문과 경쟁해 온 친돈야와 경쟁하는 많은 다른 광고 방식을 열었다.[65] 주식 폭락과 광고 단속법 시행 등으로 대규모 광고 악대·광고 행렬은 메이지 40년대에 들어 침체되었고, 대신 신문·잡지 등의 광고가 성행하였다.[65] 다이쇼 시대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선전과 네온사인도 등장했다.[65]

대표적인 오락이 된 활동사진에서는 영화관이 악사를 고용하여 오케스트라나 화양합주단을 결성하고, 손님을 끌기 위해 악대를 고용했다. 활동사진, 연극, 서커스 순회 공연에서는 악대가 선두에 서서 등장하고, 또한 선전을 위해 거리를 돌았다.

쇠퇴를 향했던 진다의 관악기 연주자를 더한 형태가 다이쇼 말 무렵부터 늘어나기 시작했고, 토키의 등장과 함께 실직한 영화관 악사가 유입되어[72][73], 관악기를 포함한 편성이 정착한다.[74] 전성기는 1933년부터 38년경으로 여겨진다. 1936년, 하토야마 이치로 (전후, 내각총리대신)와 데키야 출신의 시의원 구라모치 츄스케가 선거에서 표를 모으기 위해 진돈야의 조합 (제도 음악 하야시 광고업 조합)을 만들었지만, 그 회원 수는 3000명에 달했다.[78]

3. 4. 황금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친돈야는 다시 부활하여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81][83] 암시장파친코 산업의 성장은 친돈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83] 특히 관동 지방에서는 파칭코 가게의 의뢰가 많았다. 1950년에는 친돈야 인구가 2500명에 달했다고 한다.[83]

TV와 라디오 광고의 도입은 친돈야에게 미미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소규모 상점들이 친돈야 서비스를 계속 이용했기 때문이다.[81] 대규모 광고 전개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소수 인원, 소규모로 탄력적인 친돈야의 영업 형태가 시대에 맞았던 것이다.[82]

쇼와 20년대 후반(1950년대)에는 서커스 관계자나[84] 여행 배우들도 진돈계에 유입되었다.[81] 1950년 도쿄 신바시에서 처음 개최된 것을 시작으로,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에는 마에바시, 누마즈, 히메지, 이세, 하코다테, 히코네[85] [86] [87][88] 등 전국 각지에서 진돈 콩쿠르가 개최되었다.

1955년 도야마에서 시작된 "전국 진돈 콩쿠르"(1965년에 '''전일본 진돈 콩쿠르'''로 개칭)는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90] 도야마 산업 대박람회를 마치고, 일시적으로 소비가 위축된 지역 상점가의 활성화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도야마시와 도야마 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벚꽃 축제" 행사로 시작되었으며, 42개의 진돈야가 참가했다.[91]

3. 5. 쇠퇴

1960년대 이후, 진돈야의 수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3년 석유 파동과 그에 따른 경기 침체로 가속화되었다.[81] 196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진돈야는 "낡은" 것이 되었으며,[92] 스피커를 통한 광고와 자동차 교통량 증가는 진돈야의 활동 공간을 좁게 만들었다. 1970년경에는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많은 대도시에서 거리 공연이 금지되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급격히 수가 줄었지만, 일 자체가 줄지 않았다는 증언도 많다.[93] 1985년에는 약 150개의 진돈야가 남아 있었으며, 평균 연령은 약 60세였다.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질병과 사망 기간 동안에도 몇 달 동안 공공 공연이 금지되었다.

4. 공연

진돈야는 보통 3~5명의 연주자로 구성된다.

4. 1. 구성원

진돈야는 소수의 예술가와 음악가로 구성되며, 보통 3명 이상, 대규모 그룹은 7명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그룹의 첫 번째 사람은 깃발을 들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하타모치/hatamochi일본어 또는 하타도리/hatadori일본어라고 불린다. 이 사람 뒤에는 보통 친돈/chindon일본어 드럼과 커다란 종이 우산을 들고 다니는 오야카타/oyakata일본어가 따라온다. 어떤 자료에서는 하타모치/hatamochi일본어를 그룹 리더라고 부르고, 다른 자료에서는 오야카타/oyakata일본어를 그룹 리더라고 부른다. 세 번째 사람은 예전에는 샤미센/샤미센일본어을 연주했지만, 요즘에는 드럼을 사용하기도 하며, 따라서 도라무야/doramuya일본어라고 불린다. 그 뒤를 1명 이상의 각키야/gakkiya일본어가 따라다니며 관악기를 연주한다.

편성은 친돈 북, 악사를 기본으로 3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며, 고로스(큰 북), 깃발 담당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 친돈 북: 하좌 음악에서 사용되던 악기인 꽹과리, 조임 북, 대동을 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몸에 수직이 되도록 위에는 꽹과리와 조임 북, 아래에는 대동을 나무 틀에 끼우고, 윗부분에 우산, 앞부분에는 상호를 쓴 팻말을 세우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조임 북, 꽹과리, 대동의 크기는 작으며, 특히 조임 북은 친돈야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작다. 끈을 어깨에 걸고 몸 앞쪽에 친돈 북을 고정한다. 도쿄에서는 야마노테의 친돈야는 조임 북을 대동 아래에 지면과 평행한 방향으로 고정했던 데 반해, 시타마치에서는 검극을 하면서 걷는 경우가 많아 조임 북을 윗부분에 놓게 되었다. 쇼와 초까지는 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동과 조임 북을 칠 때는 채, 꽹과리를 칠 때는 끝에 사슴의 뿔을 붙인 북채를 사용한다.

  • 고로스 (큰 북): 프랑스어의 큰 북 "grosse caisse"에서 유래했다. 드럼이라고 부르는 친돈야도 있다. 프랑스 방식을 채택했던 제국 육군의 군악대 퇴역자가 영화관 등에서 악사가 되어 이 단어가 널리 퍼졌다고 추측된다. 고로스는 종이 연극에서도 이야기의 추임새로 사용되었으며, 전후 종이 연극에서 친돈야로 전업할 때 가져왔다는 의견이 있다. 친돈야의 고로스 연주에 특징적인 점으로는 좌우에서 사용하는 채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악사: 주로 선율을 담당한다. 멜로디를 뭉개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로는, 쇼와 초 또는 전쟁 전부터 종전 직후까지는 샤미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전 후 음량이 큰 고로스가 보급되면서 음량이 작을 뿐만 아니라 기량을 요하는 것이 난점으로 여겨졌고 게다가 맘보 등 양악 리듬의 유행에 따라 쇼와 30년대 초에 쇠퇴하여 점차 관악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클라리넷, 색소폰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트럼펫 또는 코넷도 사용되었지만 점차 감소하고 있다. 악사는 특정 스승에게 속하는 고용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었지만, 의뢰에 따라 편성의 크기를 변경할 필요성도 있어, 일의 때마다 의뢰받거나 파견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4. 2. 의상과 화장

진돈야는 다채로운 옷을 입으며, 보통 전통적인 일본 의상을 기이하게 변형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여성들은 밝은 색상의 기모노전통 스타일의 가발을 착용하고, 진한 오시로이/oshiroi일본어 화장을 하는 등 전통적인 스타일로 옷을 입을 수 있다. 남성들은 보통 상투를 하지만, 요즘에는 보통 가발을 사용하며, 화려한 모자를 쓰기도 한다.

진돈야의 화장과 의상은 지타쿠라고 부른다. 대부분은 백분 칠을 하고, 가발을 쓴 와장, 착모한 양장 어느 쪽이든 화려한 의상을 걸친다. 초기에는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요세 게닌 출신이 진돈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가발 착용은 도쿄에서는 전부터 있었지만, 간사이에서는 전후에 아오조라 선전사가 시작했다.

와장의 경우에는 가부키, 대중 연극의 배역을 모방하고, 양장의 경우에는 삐에로로 분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를 도입하거나, 탈을 사용하기도 한다. 진돈 콩쿠르 등에서는 대규모 분장도 보이며, 코끼리전차 등을 허리보테로 만든 예도 있다.

4. 3. 악기

진돈야는 다채로운 옷을 입고 전통 일본 의상을 기이하게 변형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전통 일본 음악과 서양 악기를 포함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한다. 보통 한 사람은 작은 징(진돈야의 "chin" 소리를 낸다)과 작은 드럼 2개(진돈야의 "don" 소리를 낸다)로 구성된 복합 악기를 들고 다닌다. 다른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추가 악기에는 더 큰 드럼과 목관악기, 예를 들어 클라리넷, 트럼펫 또는 색소폰이 포함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일본 전통 곡조, 군가 또는 재즈를 연주한다.

편성은 친돈 북, 악사를 기본으로 3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며, 고로스(큰 북), 깃발 담당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 친돈 북: 하좌 음악에서 사용되던 악기인 꽹과리, 조임 북, 대동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몸에 수직이 되도록 위에는 꽹과리와 조임 북, 아래에는 대동을 나무 틀에 끼우고, 윗부분에 우산, 앞부분에는 상호를 쓴 팻말을 세우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조임 북, 꽹과리, 대동의 크기는 작으며, 특히 조임 북은 친돈야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작다. 끈을 어깨에 걸고 몸 앞쪽에 친돈 북을 고정한다. 대동과 조임 북을 칠 때는 채, 꽹과리를 칠 때는 끝에 사슴의 뿔을 붙인 북채를 사용한다. 리듬은 세밀하며, 장단에 발걸음의 리듬이 합성되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 고로스 (큰 북): 프랑스어의 큰 북 "grosse caisse"에서 유래했다. 드럼이라고 부르는 친돈야도 있다. 고로스 연주에 특징적인 점으로는 좌우에서 사용하는 채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 번 치기 "둥・둥・둥・(쉼)", 일곱 번 치기 "둥・둥・둥・둥・둥・둥・둥・(쉼)"과 같은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 악사: 주로 선율을 담당하며, 멜로디를 뭉개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로는 클라리넷, 색소폰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트럼펫 또는 코넷도 사용되었지만 점차 감소하고 있다.

4. 4. 레퍼토리

진돈야는 전통 일본 음악과 서양 악기를 포함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한다.[159] 보통 한 사람은 작은 징(진돈야의 "chin" 소리를 낸다)과 작은 드럼 2개(진돈야의 "don" 소리를 낸다)로 구성된 복합 악기를 들고 다닌다. 다른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추가 악기에는 더 큰 드럼과 목관악기, 예를 들어 클라리넷, 트럼펫 또는 색소폰이 포함될 수 있다.[160] 그들은 종종 민요, 군가 또는 재즈를 연주한다.

진돈야의 레퍼토리는 하좌 음악, 군가, 행진곡, 영화관 등에서의 일본식, 서양식 합주, 가요 등이 있다.[161][162] 손님을 모으기 위한 연주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널리 알려진 곡들이 채택되었다.

가부키 하좌 음악에서 차용한 '요초메(四丁目)', '타케스(竹に雀)'[159], 군함 마치', '천연의 아름다움'(아름다운 천연) 등 국산 군가・행진곡에서 채택된 것은 정곡으로 계속 연주되었다.[160] 전후에는 소위 가요가 연주되게 되었다.[161][162]

하좌 음악은 가부키나 요세 무대에서 계절이나 장소의 분위기를 내거나, 효과음을 내거나, 극중의 고마 노래나 사자춤 등의 반주를 한다.[163] '요초메', '타케스', '쌀 씻기' 등은 하좌 음악에서 진돈야의 레퍼토리가 되었다.[164] 연주의 처음에 울리는 '우치다시(打ち出し)'는 데바야시(出囃子)에서 차용된 것이다.[165]

군가는, 청일 전쟁 시기에 유행하여, 민간 취주악단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해군 군악대의 세토구치 도키치가 작곡한 행진곡 '군함'은 '군함 마치'로서 흥을 돋우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특히 전후 파친코점의 선전에 사용되어 일반화되었다.

'천연의 아름다움'이나 '군함 마치'는, 영화관의 호객에 사용되었지만, 관내에서는 반주를 위한 악단이 있었다.[166] 무성 영화 시대에는 하좌 음악이 유용되었지만, 토키 이후에는 영화 회사와 레코드 회사가 제휴하여 신곡을 만들게 된다. '명월 아카기산(名月赤城山)'이나 '무법송의 일생', '노자키 코우타(野崎小唄)' 등은, 일본식, 서양식 합주에 의한 영화의 반주에서 진돈야의 레퍼토리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168]

가요는 시대에 따라 선곡되며, 곡조 외에 템포, 선율 등에 의해 적합성이 있다고 생각된다.[169]

5. 광고 방식

진돈야는 광고판, 배너, 깃발 등을 사용하여 광고 메시지를 전달하며,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한다. 이들은 새 가게, 특별 할인 행사, 게임장 또는 파칭코장의 개업, 카바레 등을 광고한다. 거리 행진 외에도, 상점 앞에서 연주하는 '주둔' 형태의 공연도 한다.

유사한 광고 대행 형태로는 진타(ヂンタ)와 샌드위치맨이 있다. 진타는 광고 악대, 특히 영화나 서커스의 호객 악대를 가리키며, 다이쇼 시대부터 은어로서 존재했고 쇼와 초기에 도쿠가와 무세이가 만담 등에서 사용하게 되면서 널리 퍼졌다. 샌드위치맨은 메이지 19년에 이미 나타났으며, 음악이나 구상을 동반하지 않고 특별한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점에서 치돈야와 다르지만, 가두 선전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음성 광고는 판매 소리, 외침, 악기 사용에 의한 광고를 총칭하며, 중세의 행상이나 오하라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09] 에도 중기에는 다양한 궁리가 이루어졌고, 문화·분세이 시대의 인찰에는 구상이 기록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메이와 6년의 인찰에는 "토자이 토자이"라는 표현도 나타난다.[110] 이러한 구상은 가부키에도 채택되었다.[111]

옥외 광고는 메이지 10년대부터 활발해졌으며,[114] 메이지 후반의 악대 광고는 대규모화되었고, 악사 파견업도 성립했지만,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상을 주체로 하는 선전업은 개인 사업이 중심이었다. 쇼와 시대에 들어 야외 광고판, 애드벌룬이나 네온관에 의한 빌딩 등의 광고가 등장하면서, 진돈야는 지역 밀착형이 되었다고 한다.[119]

6. 사회적 의미

친돈야는 단순한 광고 수단을 넘어 일본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친돈야의 역할과 의미도 변화해 왔다. 한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친돈야는 "사기 행위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정교하고 화려한 행렬 또는 장면"을 의미하는 속어적인 비하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것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친돈야가 매우 낮은 신분이고, 매우 가난하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반영한다.

7. 한국 사회와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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