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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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기일은 평안남도 삭주군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저술가로, 일제강점기에는 학도병 징집을 거부하고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광복 후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하며 정치에 참여했으나 미국으로 유학하여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학문 활동을 이어갔고,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으며, 2002년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을 출간했다. 2005년 미국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최기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기일
원어 이름崔基一
로마자 표기Kee-Il Choi
출생일1922년 5월 1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
사망일2005년 12월 1일
사망지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
국적대한민국
미국
종교개신교
직업
직업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인
언론인
저술가
대학 교수
학력
학력일본 게이오기주쿠 고등부 중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
가족 관계
부모최지흥(부)
친척최기화(친누나)
최기택(동생)
최동선(족척 누나)
김원봉(족척 자형)
소속
소속미국 윌리엄 & 메리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우스터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활동 정보
활동 기간1945년 ~ 1991년
저술 활동
장르경제교육학 저술
회고록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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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생 역정

최기일은 평안남도 삭주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는 민족주의 의식을 키웠으며, 김준엽, 장준하 등과 교류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는 게이오기주쿠고등부에서 공부하였다.

1943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도가 발표되자, 최기일은 이를 거부하고 평양 부근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광복 후에는 윤치영의 비서와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하며 독립촉성중앙청년회에 가담했고, 1946년 민주의원 비서에 선출되었다.

1947년 리승만의 공보비서관 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유학, 프린스턴 대학교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후 미국 여러 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 및 하버드-옌칭 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1983년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을 후원하였고,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의 선거 유세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98년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2002년 저서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을 출간하였고, 2005년 폐렴으로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2.1. 생애 초기

평안남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던 최지흥(1882 ~ ?)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 기독교서북으로 전래되면서 기독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저서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서 생소한 기독교 교리가 전통적 유교사상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들이 기독교도에게 자주 던진 질문이 "너희는 돌에서 왔느냐"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반일감정과 민족주의 의식이 싹텄다. 신의주고보 재학 때 김준엽, 장준하 등을 만나 교류하였고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기주쿠구제전문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인 게이오기주쿠고등부(慶應義塾高等部)에 입학하였고, 재학 당시 1학년 D반(一學年D組)이었다.

1943년 일제에 의한 조선인 학도지원병제도가 발표되자 그에게도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압박이 왔다. 이를 거부한 최기일은 평양 부근 승호리 오노다시멘트공장에 배치되어 해방 때까지 2년 동안 강제노역을 했다. 학도병이 되기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 형사들로부터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강요를 받기도 하였다.

2.2. 광복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하자 서울에 와서 윤치영을 만나 면담, 그의 비서로 채용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돈암장에서 생활하며 리승만 박사의 비서인 정치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휘하의 독립촉성중앙청년회란 우익 청년단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그의 저서 《돌베개》에서 리승만의 공보비서인 그와 김구의 비서인 자신이 합작하여 이승만, 김구의 연합을 희망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윤치영의 전폭적인 추천으로 민주의원 비서에 선출되었다.

1947년 리승만의 공보비서관 직을 사퇴하고 미국 유학, 1951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밴더빌트 대학교, 마이애미 대학교, 우스터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하버드-옌칭 연구소 소속의 연구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도미한 후에도 가끔 친구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미국의 정세나 경제학과 관련된 글을 작성하여 실기도 하였다.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계훈제 등과도 교류하였다. 1983년 김대중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을 때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가 뒤에 철회하였다.

2.3. 생애 후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선거 유세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재야인사들에게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계훈제김준엽은 그의 김대중 지지 주장에 냉소적이었고 회의적이었다.

1988년부터는 한국의 언론에 칼럼, 기사,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에 대한 30년의 지지를 철회했다.

2002년 저서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을 출간하였다.

2005년 12월 1일 폐렴으로 미국 메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에서 향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학문 활동 및 저술

최기일은 학문 활동을 통해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3.1. 저서 및 논문

* 崔基一중국어,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생각과 나무)

4. 사상

최기일은 박정희 정권이 한국 최초의 쿠데타 정권이라는 점과 박정희가 한국 최초의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신의주고보 재학 시절에는 친일 성향이 강했던 동창들이 박정희처럼 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도 밝혔다.

4.1. 박정희 정권 비판

그는 박정희 정권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 최초의 쿠데타 정권이며 박정희가 한국 최초의 독재자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임재경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신의주고보 재학 시절 대개 친일 성향이 강했던 동창들이 박정희처럼 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4.2. 이승만, 김대중과의 관계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하자 서울에 와서 윤치영을 만나 면담, 그의 비서로 채용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돈암장에서 생활하며 리승만 박사의 비서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휘하의 독립촉성중앙청년회란 우익 청년단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그의 저서 《돌베개》에서 리승만의 공보비서인 그와 김구의 비서인 자신이 합작하여 이승만, 김구의 연합을 희망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윤치영의 전폭적인 추천으로 민주의원 비서에 선출되었다.

1947년 리승만의 공보비서관 직을 사퇴하고 미국 유학, 1951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3년 김대중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을 때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가 뒤에 철회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선거 유세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재야인사들에게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계훈제김준엽은 그의 김대중 지지 주장에 냉소, 회의적이었다.

1998년 김대중김종필이 DJP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에 대한 30년의 지지를 철회했다.

5. 가족 및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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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내용
아버지최지흥(1882년 ~ ?)
어머니
누나최기화
조순
인척김원봉(호는 약산)

김원봉의 후처 최동선은 그의 친척이었다. 유년기 이후 연락이 끊겼으나 그는 경성에 있을 때 친척의 딸인 최동선과 김원봉의 결혼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승만김구를 강도, 테러리스트, 파시스트로 모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박헌영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냐며 항의하였다. 이후 자신의 아버지 최지흥이 6.25 전쟁 당시 인민 재판을 당하고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를 떠돌다가 아사한 것을 두고 평생 공산주의자들에게 원한, 반감을 갖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을 할 때 성을 ‘다케야마(武山)’라고 정했고, 그가 재학했던 게이오기주쿠 고등부 명부에는 다케야마 기이치(武山基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