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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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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레 문학은 16세기 스페인 정복 이후 시작되어, 20세기 동안 역사,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다양한 문학 사조와 작가들을 배출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아라우코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19세기에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이 나타났다. 20세기 초에는 아방가르드 운동이 일어났고,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 등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1973년 쿠데타 이후 많은 작가들이 망명했으며, 이후 이사벨 아옌데, 로베르토 볼라뇨 등이 세계적인 작가로 활동했다. 칠레 문학은 크리올리즘, 이미지즘, 라 만드라고라, 신크리올리즘 등 다양한 사조를 거치며 발전해 왔으며, 칠레 시의 4대 거장으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비센테 위도브로, 파블로 데 로카, 파블로 네루다가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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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문학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언어스페인어
작가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블로 네루다
비센테 우이도브로
로베르토 볼라뇨
호세 도노소
마르셀라 세라노
문학 특징
주제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영향을 받음
현실 비판적 성향
사회적 불평등 및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
개인의 정체성 탐구
자연과 인간의 관계
특징다양한 문학 장르 발전 (시, 소설, 희곡, 수필 등)
모더니즘, 실존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등 다양한 문학 사조의 영향
독특한 비판적 시각과 강렬한 서정성
문학 발달
식민지 시대크리오요 문화 발전과 함께 문학 태동
초기에는 종교적, 역사적 내용 중심
독립 이후낭만주의사실주의 문학 발달
사회 문제 및 민족 정체성 탐구
20세기모더니즘아방가르드 문학 등장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배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블로 네루다)
정치적 격변기에 저항 문학 발전
현대다양한 문학적 실험 시도
여성 작가들의 활발한 활동
디아스포라 및 이주 문제에 대한 관심 증가
주요 작품 및 작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죽음의 소네트》(Sonnets of Death)
《절망》(Desolación)
《가시나무》(Tala)
《포도즙 짜는 기계》(Lagar)
파블로 네루다《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
《모든 노래의 노래》(Canto General)
《스페인 심장에》(España en el corazón)
《기념비》(Memorial de Isla Negra)
비센테 우이도브로《알타소르》(Altazor)
《시집》(Poemas)
로베르토 볼라뇨《야만스러운 탐정들》(Los detectives salvajes)
《2666》
호세 도노소《밤의 외설》(El obsceno pájaro de la noche)
《코로네이션》(Coronación)
마르셀라 세라노《우리 인생의 옛날》(Nuestra Señora de la Soledad)
《엘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Para que no me olvides)
참고 자료
외부 링크칠레 문학(Memoria Chilena)
칠레 문학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 역사

20세기 동안 칠레의 역사 및 역사 문학 연구는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전통에서 벗어나 심오한 변화를 겪었다. 이는 당시의 이념적 투쟁과 칠레 여러 대학교에 연구소와 전문 부서를 설립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점진적인 전문화를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결합 때문이었다.[58]

주요 경향 중 하나는 1960년대까지 역사 논쟁을 독점했던 영향력 있는 보수주의 학파였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저술가로는 "칠레의 역사적 외형(Fisonomía histórica de Chile)"으로 알려진 하이메 에이사기레(Jaime Eyzaguirre)[59], "칠레 역사(Historia de Chile)"를 저술한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엔시나(Francisco Antonio Encina), 그리고 "칠레 정당의 역사적 개요(Bosquejo histórico de los partidos políticos chilenos, 1903)", "칠레의 귀족적 혼란(La Fronda Aristocrática en Chile, 1928)", "칠레의 정치 조직(La Organización Política de Chile, 1943)"을 저술한 알베르토 에드워즈(Alberto Edwards)가 있다. 이들은 19세기 사회 자유주의와 1920년대 이후 발생한 변화를 쇠퇴 과정으로 보며, 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다. 보수주의 역사가들은 근대성을 거부하고 사회 질서와 가톨릭 신앙의 유지를 위해 대의 민주주의를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보수주의 학파와 경쟁하는 두 가지 새로운 역사적 경향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 경향으로, 훌리오 세사르 호벳(Julio César Jobet)[60]과 에르난 라미레스 네코체아(Hernán Ramírez Necochea)[61]를 포함한 저술가들이 칠레 노동 계급의 역사 재구성과 복원에 노력을 집중했다. 이 저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의 정치적·이념적 성격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1980년대 후대 세대를 통해 그들의 유산은 칠레 대중 운동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을 개발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두 번째 경향은 특히 프랑스의 아날 학파(Annales School)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럽 역사학에서 차용한 새로운 기법과 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역사 연구에 실질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이 학파의 역사가로는 마리오 곤고라(Mario Góngora), 알바로 하라(Álvaro Jara), 롤란도 멜라페(Rolando Mellafe)[62], 세르히오 비야로보스(Sergio Villalobos) 등이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경제와 인구 통계학과 같이 무시되었던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자들의 대다수는 칠레 대학교(University of Chile)의 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새로운 역사학 운동은 식민 시대 이후 칠레의 제도, 사회, 경제를 형성해 온 장기적인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강조했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이 학파의 역사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연계를 맺었다. 1973년 칠레 쿠데타는 이러한 과정에 갑작스러운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사회 역사학을 억압하여 이러한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이 망명하게 만들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럽 대학교로 가서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는데,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그들의 전문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2. 1. 식민지 시대 (16세기 ~ 18세기)



오늘날 칠레로 알려진 지역의 원주민 문화에는 문자 전통이 없었으므로(마푸둥군 알파벳 참조), 칠레 문학은 1500년대 스페인 정복 시대에 탄생했다.[2]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카를 5세 국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을 묘사했다.[2] 정복자들과 함께 선교사들이 와서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가르치면서 그들의 종교뿐만 아니라 언어, 문자 및 기타 예술과 기술도 전파했다.[2]

스페인 정복 시대의 칠레 문학은 주로 아라우코 전쟁에 관한 연대기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펜보다 칼을 더 자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정복과 식민지 시대 동안 문학의 주요 역할은 전쟁의 역사적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569년, 1578년, 1589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된 라 아라우카나는 예외였다.[2] 리카 마드리드가 쓴 라 아라우카나는 현대 스페인어로 가장 중요한 서사시이며 스페인 황금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헨데카실라보 운율로 칠레 정복을 묘사하고 있다.[2] 칠레에서 태어난 최초의 시인인 페드로 데 오냐는 1596년 에르실라의 모방 작품인 "엘 아라우코 도마도"를 출판했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마푸체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구전문학이 존재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이 현재의 칠레에 도착하고 마푸체족과 아라우코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라우코 전쟁은 칠레에 도착한 스페인인들에게 중요한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스페인군 군인이었던 알론소 데 에르실리아 이 수니가는 종군 경험을 바탕으로 고귀한 마푸체족의 스페인인에 대한 저항을 그린 서사시 『라 아라우카나』를 저술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알론소 데 곤고라 마르몰레호의 "칠레 왕국사", 알론소 데 오발레의 "칠레 왕국에 관한 역사적 관계", 프란시스코 누녜스 데 피네다 이 바스쿠냥의 "행복한 포로 생활"을 포함하여 역사적 저술이 우세했다. 이 시대에는 "칠레 자연사에 관한 에세이"를 쓴 후안 이냐시오 몰리나와 같은 과학 저술가와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쓴 서사시적 역사시 "길들일 수 없는 푸렌"도 등장했다.

19세기까지의 식민지 시대에는 칠레 수녀들이 쓴 문학 작품이 주목을 받았다. 영적인 편지, 일기, 자서전, 서간문 등이 있었고, 타데아 데 산 호아킨, 우르술라 수아레스, 호세파 데 로스 돌로레스 등 여러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들의 작품은 남미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되었습니다.[3]

2. 2. 독립 이후 19세기

카밀로 엔리케스(Camilo Henríquez)는 칠레 최초의 신문이자 인쇄물인 "라 아우로라 데 칠레(La Aurora de Chile)"(칠레의 여명)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취시켰다.[4] 이 신문은 주로 정치와 정치철학을 다루었으며, 1812년 2월 13일부터 1813년 4월 1일까지 발행된후 "엘 모니토르 아라우카노(El Monitor Araucano)"로 이름을 바꾸었다.[4] 이 신문은 각 2단으로 구성된 4페이지로, 매주 목요일에 발행되었다. 당시 다른 언론인으로는 마누엘 데 살라스(Manuel de Salas),[4] 호세 미겔 인판테(José Miguel Infante), 후안 에가냐 리스코(Juan Egaña Risco),[5] 안토니오 호세 데 이리스아리(Antonio José de Irisarri)가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메르세데스 마린 델 솔라르(Mercedes Marín del Solar)는[6] "돈 디에고 포르탈레스(Diego Portales)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Canto fúnebre a la muerte de don Diego Portales)"라는 시를 썼고, 마누엘 마갈라네스(Manuel Magallanes)의[7] "라 이하 델 수르(La Hija del Sur)" (남쪽의 딸)와 함께 극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매우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작가들이 있었지만, 예술적 기교는 제한적이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8]

칠레의 낭만주의는 비평가 세도밀 고이치(Cedomil Goic)에 따르면 1837년 세대, 1842년 세대, 그리고 1867년 세대로 분류될 수 있다.[9] 1867년 세대는 사실주의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실제로 사실주의 운동의 일부로 간주한다.[9]

1800년과 1814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로 구성되고 "세속주의적 세대"로도 알려진 1837년 세대는 지역의 일상생활과 풍속을 문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의 주요 특징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지역적인 것들을 관찰하는 데 특별한 중점을 두고,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 그룹에는 메르세데스 마린 델 솔라,[6] 빈센테 페레스 로살레스 및 호세 호아킨 발레호가 포함되었다.[10]

1815년부터 1829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로 구성된 1842년 세대는 "낭만적 사회주의" 세대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이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묘사했지만, 작품에 사회 비판이라는 또 다른 층위를 더했다. 호세 호아킨 데 모라(José Joaquín de Mora), 안드레스 벨로(Andrés Bello), 도밍고 파우스트노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 비센테 피델 로페스(Vicente Fidel López)와 같은 칠레의 외국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칠레 국민 문학 운동을 창립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했다. 이 세대의 시는 스타일 면에서 유럽 낭만주의와 유사하며, 살바도르 산후엔테스(Salvador Sanfuentes)의 "이나미(Inami)", 기예르모 마타 고예네체아(Guillermo Matta Goyenechea)의[11] "리릭 시(Poesías líricas)", 기예르모 블레스트 가나(Guillermo Blest Gana)의[12] "하모니(Armonías)", 호세 안토니오 소피아(José Antonio Soffia)의[13] "가을의 잎(Hojas de otoño)" 등이 포함된다. 서사 문학은 더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호세 빅토리노 라스타리아(José Victorino Lastarria)의[14] "빈추카의 순례(Peregrinación de una vinchuca)", 알베르토 블레스트 가나(Alberto Blest Gana)의 "정복 기간 동안(Durante la reconquista)"과 "미친 에스테로(El loco Estero, 1909)", 호세 호아킨 바예호(José Joaquín Vallejo)의[15] "관습에 관한 에세이(Artículos de costumbres)", 비센테 페레스 로살레스(Vicente Pérez Rosales)의 "과거의 추억(Recuerdos del pasado)", 다니엘 리켈메(Daniel Riquelme)의 "천막 아래(Bajo la tienda)" 등의 작품이 포함된다. 당시의 희곡에는 다니엘 칼데라(Daniel Caldera)의[16] "명예의 법정(El tribunal del honor)"이 있다.

1850년부터 디에고 바로스 아라나(Diego Barros Arana)의 "칠레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Chile)", 미겔 루이스 아무나테기(Miguel Luis Amunátegui)의 "칠레의 발견과 정복(Descubrimiento y conquista de Chile)", 벤하민 비쿠냐 마케나(Benjamín Vicuña Mackenna)의 "오히긴스의 숙청(El ostracism de O'Higgins)", 라몬 소토마요르 발데스(Ramón Sotomayor Valdés)의[17] "40년간의 칠레 역사(Historia de Chile durante 40 años)"와 같은 위대한 역사 작품들이 등장했다.

1886년 니카라과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는 칠레 발파라이소(Valparaíso)로 이주하여 동료 시인인 푸아리에와 에두아르도 데 라 바라와 함께 지냈다. 그들은 함께 "에멜리나(Emelina)"라는 제목의 감상적인 소설을 공동 집필했지만,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벤 다리오는 1888년 "아술(Azul)"로 칠레 서정시의 재부상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 카를로스 페소아 벨리스(Carlos Pezoa Véliz)의 "시골 장례식(Entierro de campo)"과 "병원에서의 오후(Tarde en el hospital)", 마누엘 마갈라네스 무레(Manuel Magallanes Moure)의[7] "바닷가 집(La casa junto al mar)" 등이 뒤따랐다. 카를로스 페소아 벨리스는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에야 유명해졌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전통적인 낭만적이거나 양식화된 묘사 대신 일상적이고 평범한 활동과 경험을 묘사하여 이전 세대와 차별화되었다.[18] 알베르토 블레스트 가나(Alberto Blest Gana)는 1862년에 발표한 "마르틴 리바스(Martín Rivas)"를 통해 칠레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이 작품은 당시 칠레 사회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블레스트 가나는 당시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던 칠레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로 보이는 것을 묘사하였다. 그는 지역 전통이 사라지고 유럽 관습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믿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대는 구식이고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동료 작가 루이스 오레고 루코(Luis Orrego Luco)는 이러한 변화를 슬픔으로 관찰하고 그 과정의 도덕적 결과를 비난했다. 블레스트 가나와 오레고 루코의 상반된 견해는 칠레 사실주의 운동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시이다. 이 세대의 다른 중요한 작가로는 다니엘 바로스 그레스(Daniel Barros Grez),[19] 에두아르도 데 라 바라(Eduardo de la Barra),[20] 소로바벨 로드리게스(Zorobabel Rodríguez), 호세 안토니오 소피아(José Antonio Soffia), 모이세스 바르가스(Moisés Vargas), 그리고 리보리오 브리에바(Liborio Brieba)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서사 문학은 시나 희곡보다 더 발전했지만, 새로운 극장 건설은 후자의 발전을 어느 정도 촉진했다. 중요한 극장으로는 1844년에 개관한 발파라이소(Valparaíso)의 빅토리아 극장, 1848년에 개관한 산티아고의 레푸블리카 극장, 그리고 1857년에 개관한 산티아고 시립극장이 있다.[21]

독립 이후 19세기 칠레 문학은 빈약하여, 대개 지식인들의 정치 논쟁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지 못했다.[78] 이 시대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칠레로 이주하여 칠레대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 된 안드레스 벨로(Andrés Bello)나, 낭만주의를 비판한 호세 호아킨 발리에호(José Joaquín Vallejo), 호세 빅토리노 라스타리아(José Victorino Lastarria)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소설 분야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발자크의 영향을 받은 역사 소설을 쓴 알베르토 브레스트 가르나(Alberto Blest Gana)가 활약했다.

2. 3. 20세기 초

사실주의 작가들은 전통적인 낭만적이거나 양식화된 묘사 대신 일상적이고 평범한 활동과 경험을 묘사하여 이전 세대와 차별화되었다.[18] 이 운동은 1830년과 1844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알베르토 블레스트 가나(Alberto Blest Gana)는 1862년에 발표한 "마르틴 리바스(Martín Rivas)"를 통해 칠레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이 작품은 당시 칠레 사회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블레스트 가나는 당시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던 칠레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로 보이는 것을 묘사하였다. 그는 지역 전통이 사라지고 유럽 관습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믿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대는 구식이고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동료 작가 루이스 오레고 루코(Luis Orrego Luco)는 이러한 변화를 슬픔으로 관찰하고 그 과정의 도덕적 결과를 비난했다. 블레스트 가나와 오레고 루코의 상반된 견해는 칠레 사실주의 운동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시이다.

이 세대의 다른 중요한 작가로는 다니엘 바로스 그레스(Daniel Barros Grez),[19] 에두아르도 데 라 바라(Eduardo de la Barra),[20] 소로바벨 로드리게스(Zorobabel Rodríguez), 호세 안토니오 소피아(José Antonio Soffia), 모이세스 바르가스(Moisés Vargas), 그리고 리보리오 브리에바(Liborio Brieba)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서사 문학은 시나 희곡보다 더 발전했지만, 새로운 극장 건설은 후자의 발전을 어느 정도 촉진했다. 중요한 극장으로는 1844년에 개관한 발파라이소(Valparaíso)의 빅토리아 극장, 1848년에 개관한 산티아고의 레푸블리카 극장, 그리고 1857년에 개관한 산티아고 시립극장이 있다.[21]

20세기 초, 칠레 문단에는 새로운 문학적 장면, 즉 아방가르드 운동이 등장했다. 이 운동의 첫 번째 표현은 1908년 페드로 프라도(Pedro Prado)의 "카르도의 꽃"(Flores de cardo)이었는데, 이 작품은 운율의 제약과 시의 규칙을 깨뜨렸다. 프라도는 또한 1913년과 1915년에 "세계의 부름"(El llamado del mundo)과 "떠돌이 새들"(Los pájaros errantes)을 출판했으며, 1916년에 건축가 후리오 베르트랑(Julio Bertrand)과 함께 예술 단체 "로스 디에스"(Los Diez)를 설립했다.[23] [24]

1914년 12월 22일, 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산티아고(Santiago)" 시 축제(Juegos Florales de Santiago)에서 우승하며, 뛰어난 재능으로 처음 인정받았다. 1919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1945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인 "황폐(Desolación)"을 출판했다. "황폐", "탈라(Tala)", "라가르(Lagar)"는 그녀의 가장 중요한 시 작품 중 일부였다.

1914년, 비센테 위도브로(Vicente Huidobro)는 시를 저자에 의해 자체 목적으로 창조된 진정으로 새로운 것으로 보는 창조주의(Creacionismo) 운동을 시작한 두 작품인 "암시의 예술"(Arte del sugerimiento)과 "노예가 되지 않겠다"(Non serviam)를 출판했다. 위도브로는 1916년 그의 책 "물의 거울"(El espejo de agua)에서 이 운동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세대의 또 다른 시인인 안헬 크루차가(Ángel Cruchaga)[25]는 "사랑"을 주요 주제로 삼았고, 그의 시의 슬픔으로 유명했다. 1915년, 그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손을 맞잡고"(Las manos juntas)를 출판했다.

파블로 데 로카(Pablo de Rokha)[26]는 시를 통해 세계에 대한 그의 무정부주의적이고, 투쟁적이며, 논쟁적인 견해를 묘사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각각 1920년과 1922년에 출판된 "악마의 연재 소설"(El folletín del Diablo)과 "신음"(Los gemidos)[27]가 있다. 1938년, 파블로 데 로카는 미국, 러시아, 라틴 아메리카에 책을 배포한 출판사 "멀티투드"(Multitud)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또한 1914년부터 1925년 사이에 후안 구즈만 크루차가(Juan Guzmán Cruchaga)는 "화로 옆에서"(Junto al brasero), "움직이지 않는 시선"(La mirada inmóvil), "멀리"(Lejana), "마음의 축제"(La fiesta del corazón), 그리고 시집 "하늘의 물"(Agua de cielo)을 출판했다.[28]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1923년과 1924년에 "황혼"(Crepusculario)과 "사랑의 20편의 시와 한 편의 절망적인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를 출판했는데, 이는 그가 다음 25년 동안 거둘 엄청난 성공의 전조였다.

칠레 노벨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칠레에서는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시인 마누엘 마갈리아네스 모우레가 등장했다. 이 시기에 모더니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페드로 프라도와 그의 계보를 잇는 시인 안헬 쿨차가 산타 마리아를 언급할 수 있다. 비센테 위드브로는 이베로아메리카에 다다이즘을 도입했지만, 재능이 부족하여 이베로아메리카의 앙드레 브르통이 되지는 못했다.[79] 소설에서는 에두아르도 바리오스에 의해 자연주의가 도입되었다.

2. 4. 전간기 (1920년대 ~ 1930년대)

1925년에 시작된 칠레 이미지즘(Imaginismo)은 민족주의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비판받던 크리올리즘(Criollismo)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문학 경향이다.[25] 이미지즘 작가들은 일상생활, 농촌 생활, 자연과의 싸움 등 이전 세대의 영감의 원천에서 벗어났다. 안헬 크루차가 산타 마리아(Ángel Cruchaga Santa María),[25] 살바도르 레이스, 에르난 델 솔라(Hernán del Solar), 루이스 엔리케 데라노(Luis Enrique Délano),[29] 마누엘 에두아르도 위브너(Manuel Eduardo Hübner)[30] 등으로 구성된 이미지즘 그룹은 당시 가장 저명한 문학 비평가들과 결별했다. 루이스 엔리케 데라노는 이미지즘의 기원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혁신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칠레 문학이 '크리올리즘'으로 가득 차 있고, 지나치게 달콤하고 무겁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31]

이미지즘 그룹은 아우구스토 달마르(Augusto d'Halmar), 마리아노 라토레(Mariano Latorre), 마르타 브루네(Marta Brunet), 루이스 두랑(Luis Durand),[33] 로사멜 델 발레(Rosamel del Valle),[34] 후안 마린,[35] 야코보 단케(Jacobo Danke)[36] 등과 함께 "레트라스(Letras)"라는 잡지를 창간했다.[32] 이 잡지는 이미지즘을 편집 방향으로 삼았지만, 크리올리즘 작가들도 참여했으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국제적인 대화를 목표로 했다.

1938년 7월 12일 브라울리오 아레나스(1913~1988), 테오필로 시드, 엔리케 고메스 코레아, 그리고 호르헤 카세레스(당시 십 대)에 의해 칠레의 초현실주의 그룹인 ''라 만드라고라''(스페인어로 ''만드라케'')가 설립되었다.[37] 이들은 탈카에서 만났고, 1932년 브라울리오 아레나스는 테오필로 시드와 엔리케 고메스와 아이디어를 교환했다.[38] 1935년까지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더욱 발전되었고, 1938년 그들은 칠레 대학교에서 초현실주의 시와 텍스트를 낭독했다. 정치적으로 이 그룹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다.

"라 만드라고라"는 칠레 대학교에서 열린 학술회의 (1939년), 칠레 국립도서관(칠레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 (1941년), 산티아고의 갈레리아 데달로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 (1948년)등을 통해 칠레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홍보했다. 브라울리오 아레나스는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앙드레 브르통, 뱅자맹 페레, 에메 세제르의 기고가 포함된 "Leit-motiv"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라 만드라고라"를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 연결했다.

비센테 우이도브로


이 그룹은 파블로 네루다와 비센테 우이도브로와 같은 현대 칠레 시와 칠레 작가들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1949년 그룹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1957년 브라울리오 아레나스, 엔리케 고메스 코레아, 호르헤 카세레스는 초현실주의 사전과 칠레 초현실주의 서지가 포함된 "엘 AGC 데 라 만드라고라"를 출판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여성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과 사회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활약했다. 미스트랄은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가 그녀의 내면에 존재했던 반면, 네루다는 모데르니스모와 거리를 두고,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사회주의와 스페인 내전, 마추픽추와 같은 남미 원주민과 고대 문명, 그리고 서민들로부터 강한 영감을 얻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엄청난 변화의 결과로 칠레 문학은 주제 면에서 더 보편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었으며, 인류 전체의 공통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63][64] 소설 분야에서는 마누엘 로하스의 "도둑의 아들",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수의를 입은 여인", 호세 도노소의 "밤의 음탕한 새"와 같은 중요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시 분야의 주요 작품으로는 니카노르 파라의 "시와 반시", 움베르토 디아스 카사누에바의 "레퀴엠", 에두아르도 안귀타의 "쓰레기 더미 위의 비너스", 곤살로 로하스의 "죽음에 맞서", 호르헤 테이예르의 "죽음과 경이", 페르난도 곤살레스 우리사르의 "하늘의 징후", 미겔 아르테체의 "새벽의 불사조", 라울 추리타의 "연옥" 등이 있다. 희곡 분야에서는 루이스 알베르토 헤이레만스의 "작은 광대", 에곤 볼프의 "옥상의 포플러", 호르헤 디아스 구티에레스의 "칫솔"과 "대머리 가수" 등이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설 분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 붐의 맥락 속에서 호세 도노소와 호르헤 에드워즈가 활약했고, 시 분야에서는 네루다가 계속 활약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의 언론 통제를 피하기 위해 많은 문학가들이 칠레에서 망명했다. 쿠데타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사벨 아옌데, 루이스 세풀베다, 로베르토 볼라뇨, 아리엘 도르프만 등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2. 6. 1973년 쿠데타 이후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이후 칠레의 문화는 쇠퇴했다.[65] 쿠데타로 많은 작가들이 망명을 강요받았고, 얼마 후 칠레 작가들은 망명지인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출판사와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65] 망명 중인 칠레인들이 발행한 잡지로는 스페인의 "Araucaria", 캘리포니아의 "Literatura chilena en el exilio"(망명 중인 칠레 문학), 네덜란드의 "América Joven"(젊은 아메리카)이 있다.[65] 캐나다의 "Ediciones Cordillera", 스페인의 "LAR"과 "Ediciones Michay"라는 편집부도 있었다.[65]

칠레에 남아 있던 칠레인들이 대부분의 다른 예술 형태와 함께 작가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칠레 문학은 국제화 과정을 거쳤다.[66] 마법적 리얼리즘과 "가족 서사"의 조합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페르난도 알레그리아, 곤살로 로하스, 움베르토 디아스 카사누에바, 아리엘 도르프만, 이사벨 아옌데, 에르난 네이라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66] 독재와 탄압의 시대에 칠레 문학은 칠레 상황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66][67] 서구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는 칠레 작가들이 살았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을 비난했다.[66][67]

망명의 이산 현상 때문인지, 독재 시대 중과 그 이후의 칠레 문학은 스타일이 균일하지 않았다.[68]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외국 문화에 이식된 것을 발견했고, 망명에서 돌아온 작가들이 칠레 지식인 환경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68] 시에서는 소위 "Nueva poesia chilena"(새로운 칠레 시)가 있었다.[69] 이 "Nueva poesia chilena"에는 유럽에서 망명에서 돌아온 많은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라울 수리타, 로드리고 리라, 안토니오 아레발로[69], 브루노 몬타네[70] 등이 가장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설 분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 붐의 맥락 속에서 호세 도노소와 호르헤 에드워즈가 활약했고, 시 분야에서는 네루다가 계속 활약했다.

쿠데타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사벨 아옌데, 루이스 세풀베다, 로베르토 볼라뇨, 아리엘 도르프만 등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2. 7. 2000년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오마르 페레스 산티아고(Omar Pérez Santiago)와 그의 단편 소설집 『네필림 인 알우에』(Nefilim en Alhué, 2011)를 필두로 판타지 또는 상상 문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가 세대가 등장했다.[71] 이들은 고딕적 실존적 문제, 공포, 마법, 몽환적 요소, 대중 문화 속 악마적 요소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71] 이러한 경향은 마리아 루이사 봄발(María Luisa Bombal)의 『라 아모르타하다』(La amortajada, 1938), 엘레나 알두나테(Elena Aldunate)의 『후아나와 사이버네틱스』(Juana and cybernetics, 1963), 카를로스 드로게트(Carlos Droguett)의 『개의 발』(Patas de perro, 196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71]

이러한 흐름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파블로 에스피노사 바르디(Pablo Espinoza Bardi)의 『피, 광기, 죽음의 이야기』(Tales of gore, madness and death, 2011), 호세 바로하(José Baroja)의 『기억처럼 죽어간 그림자의 기묘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the shadow that died as a memory, 2018), 알도 아스테테 쿠아드라(Aldo Astete Cuadra)의 『자살 충동과 다른 죽음들』(Suicidal mind and other deaths, 2012) 등이 있다.[71]

3. 주요 문학 사조

3. 1. 크리올리즘 (Criollismo)

크리올리즘(Criollismo)은 코스툼브리즘(Costumbrismo)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 문학 운동이다.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운동은 작가의 나라의 풍경, 관습, 그리고 풍속을 애국심을 약간 섞어 묘사했다.[22] 1910년 칠레 독립 100주년은 국가와 작가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전통적으로 도시 생활만을 이야기의 유일한 근원과 배경으로 삼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촌 생활에 대한 새로운 강조를 보여주었다.[22]

산문 문학에서는 발도메로 릴로의 「지하(Sub Terra)」와 「태양 아래(Sub Sole)」, 마리아노 라토레의 「주르줄리타(Zurzulita)」와 「콘도르의 요람(Cuna de cóndores)」, 그리고 페데리코 가나의 「시골의 날들(Días de campo)」이 중요한 작품이었다.[22] 주요 희곡 작품으로는 안토니오 아세베도 에르난데스의 「늙은 나무(Árbol Viejo)」와 「차나르실로(Chañarcillo)」가 있다.[22]

기준크리올리즘(Criollismo)이마지니즘(Imaginismo)
기원현실: 관찰과 기록.상상: 관찰, 환상 및 감수성.
성격묘사적, 이종 목적적(목적을 가진), 국가적 기반.서술적, 자족적(자체적 의미나 목적을 포함하는), 보편적 주제.
기능인지적 및 교육적: 독자를 사로잡는다.쾌락적 및 오락적: 독자를 자유롭게 한다.


3. 2. 이미지즘 (Imaginismo)

칠레 이미지즘(Imaginismo)은 1925년에 시작된 문학 경향으로, 민족주의적이고 협소하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비판받던 크리올리즘(Criollismo)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25][29][30] 이미지즘 작가들은 이전 세대의 영감의 원천(일상생활, 농촌 생활, 자연과의 싸움)에서 벗어났다.

안헬 크루차가 산타 마리아, 살바도르 레이스, 에르난 델 솔라, 루이스 엔리케 데라노, 마누엘 에두아르도 위브너 등으로 구성된 이미지즘 그룹은 당시 가장 저명한 문학 비평가들과 결별했다. 루이스 엔리케 데라노는 이미지즘의 기원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혁신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칠레 문학이 '크리올리즘'으로 가득 차 있고, 지나치게 달콤하고 무겁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31]

이미지즘 그룹은 몇몇 저명한 크리올리즘 작가들과 함께 "레트라스(Letras)"라는 잡지를 창간했다.[32] 잡지의 편집 방향은 이미지즘이었지만, 아우구스토 달마르, 마리아노 라토레, 마르타 브루네, 루이스 두랑,[33] 로사멜 델 발레,[34] 후안 마린,[35] 야코보 단케[36] 등 중요한 크리올리즘 작가들도 참여했으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국제적인 대화를 목표로 했다.

기준크리올리즘(Criollismo)이마지니즘(Imaginismo)
기원현실: 관찰과 기록.상상: 관찰, 환상 및 감수성.
성격묘사적, 이종 목적적(목적을 가진), 국가적 기반.서술적, 자족적(자체적 의미나 목적을 포함하는), 보편적 주제.
기능인지적 및 교육적: 독자를 사로잡는다.쾌락적 및 오락적: 독자를 자유롭게 한다.


3. 3. 라 만드라고라 (La Mandrágora)

''라 만드라고라''(스페인어로 ''만드라케'')는 1938년 7월 12일 브라울리오 아레나스(1913~1988), 테오필로 시드, 엔리케 고메스 코레아, 그리고 호르헤 카세레스(당시 십 대)에 의해 설립된 칠레의 초현실주의 그룹이다.[37] 이 그룹은 탈카에서 만났고, 1932년 브라울리오 아레나스는 테오필로 시드와 엔리케 고메스와 아이디어를 교환했다.[38] 1935년까지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더욱 발전되었고, 1938년 그들은 칠레 대학교에서 초현실주의 시와 텍스트를 낭독하는 일종의 입회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그룹과 같은 이름의 잡지 "라 만드라고라"(1938년 12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소규모로 7호 발행[37])를 발간했고, ''엘 AGC 데 라 만드라고라''(만드라케의 AGC)라는 시집을 출판했는데, 테오필로 시드를 제외한 모든 창립자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이 그룹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다.

이 그룹의 주요 업적으로는 칠레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홍보한 "라 만드라고라"의 발간, 1939년 칠레 대학교에서 열린 학술회의, 1941년 칠레 국립도서관(칠레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 그리고 1948년 산티아고의 갈레리아 데달로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있다. 브라울리오 아레나스는 또한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앙드레 브르통, 뱅자맹 페레, 에메 세제르의 기고가 포함된 "Leit-motiv"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라 만드라고라"를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 연결했다.

그들은 파블로 네루다와 비센테 우이도브로와 같은 현대 칠레 시와 칠레 작가들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이 그룹은 1949년 해체되기 시작했다. 1957년 브라울리오 아레나스, 엔리케 고메스 코레아, 호르헤 카세레스는 초현실주의 사전과 칠레 초현실주의 서지가 포함된 "엘 AGC 데 라 만드라고라"를 출판했다.

3. 4. 신크리올리즘 (Neocriollismo)

1940년대 전반에는 "1940년대 신크리올리스트 세대(Generación neocriollista de 1940)"가 등장했다.[40] 신크리올리스트(neocriollistas)들은 지역 관습을 매우 강조하고 일반 사람들의 삶을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좌익 정치 활동에 헌신했는데, 이는 격변하는 정치적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세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은 니코메데스 구스만(Nicomedes Guzmán)이었다.[41] 그는 사회적 불평등, 착취, 교외 생활의 고통, 빈곤 속의 도덕적 타락, 권력의 부패와 같은 사회적 주제를 작품에 포함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어둠 속의 사람들(Los hombres oscuros)", "피와 희망(La sangre y la esperanza)", "빛은 바다에서 온다(La luz viene del mar)", "강에 동전을 던지고 다른 이야기들(Una moneda al río y otros cuentos)" 등이 있다.

곤살로 드라고(Gonzalo Drago)[42]는 광부들의 고난과 힘든 삶에 관한 이야기 모음인 "구리(Cobre)", 농민에 관한 이야기 모음인 "고랑(Surcos)", 군 복무 중 징집병으로서의 경험을 묘사한 소설 "연옥(El Purgatorio)"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안드레스 사벨라(Andrés Sabella)와 볼로디아 테이텔보임(Volodia Teitelboim)은 칠레 북부 초석 광부들의 삶을 묘사한 "큰 북쪽(Norte Grande)"과 "초석의 아들(Hijo del salitre)"을 저술했다.

프란시스코 콜로아네(Francisco Coloane)와 니카시오 탕골(Nicasio Tangol)[43]은 칠레 남단의 삶에 대해 썼다. 니카시오 탕골은 칠로에(Chiloe), 칠레 파타고니아(Chilean Patagonia) 남부 섬과 그 극단적인 지역의 원주민들의 전통과 신화를 보여주었다. 프란시스코 콜로아네는 "합페르노스 곶(Cabo de Hornos)"과 "바케다노호의 마지막 갑판원(El último grumete de La Baquedano)"에서 남쪽 바다에서 인간의 투쟁을 묘사했다.[44]

마이테 아야만드(Maité Allamand)[45]와 마르타 브루네트(Marta Brunet)는 시골 생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썼다. 브루네트의 희곡 "산속으로(Montaña adentro)"는 시골 언어와 농민 속어를 사용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며, 아야만드는 아동 문학에 특별히 중점을 두었고 이 장르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4. 칠레 시의 4대 거장

칠레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들로 손꼽히는 칠레 시의 4대 거장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비센테 위도브로, 파블로 데 로카, 파블로 네루다이다.[73][74]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테무코의 여자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이미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훗날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는 십대 소년 네프탈리 레이예스가 자신의 시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자 미스트랄을 찾아왔다. 1945년 미스트랄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지 26년 후인 1971년, 네루다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미스트랄의 뒤를 이었다.[73][74]

미스트랄은 칠레에서 어떤 정치적 성향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스트랄의 작품 전문가인 칠레 작가 하이메 케사다[75]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작품 "탈라"에서 팬아메리카니즘 의지를 표명했고, 1928년에 발표된 두 편의 글에서 니카라과 혁명가 아우구스토 산디노와의 연대를 표명했다.

위도브로, 데 로카, 네루다는 동시대인이자 같은 세대의 일원이었으며, 삶의 어느 시점에서 모두 칠레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데 로카는 나중에 지도자들과의 의견 불일치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들 세 시인의 공산당과의 연관성은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와 칠레의 사회 변혁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반영했지만, 개인적인 분쟁이 그들의 관계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블로 데 로카는 네루다를 부르주아적이고 정치적, 사회적 삶에서 위선적인 기회주의자로 여기며 가장 격렬하게 비난했다. 데 로카는 "단테식 삼행시"와 같이 네루다를 비난하는 여러 에세이와 팸플릿을 썼는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76]

:노쇠한 위선자이자 강도

:더러운 원숭이 시의

:네 배는 돈으로 부풀어 있다.

Gallipavo senil y cogoteroes

de una poesía sucia, de macacos,es

tienes la panza hinchada de dinero.es

비센테 위도브로는 파블로 네루다보다 먼저 공산당에 가입했고, 그의 삶의 대부분 동안 매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생애 말년에 정치권을 떠나 카르타헤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은퇴했다. 비센테 위도브로는 네루다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표절했다고 비난했고, 1934년 11월 "PRO" 잡지의 두 번째 판에는 위도브로의 친구 볼로디아 테이틀보임이 발견한 두 편의 시, 즉 타고르의 "정원사"에 나오는 "시 30"과 네루다의 "20편의 연애시"에 나오는 "시 16"이 별다른 언급 없이 게재되었다.[77] 위도브로는 또한 네루다를 15세 소녀들을 위한 시를 쓰는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루다는 동료들의 비판에 대해 1938년 파리에서 출판된 "아키 에스토이"(여기 있다)라는 글을 써서 그들의 적대감과 비방을 규탄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네루다는 서구 정전을 구성하는 26명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네루다는 데 로카와 위도브로가 사망한 후에야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고,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위도브로를 언급하며 "시인은 작은 신이 아니다"(El poeta no es un pequeño Dios)라고 말했다.

5. 아동 문학

칠레에서 아동 문학이 처음 출판된 것은 1812년경 인쇄술이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초기에는 스페인 사제들이 아동 교육을 위해 집필한 교육적, 종교적인 서적이 주를 이루었다.[46]

20세기 초에는 "Revista de los Niños"(어린이 잡지, 1905년), "Chicos y Grandes"(아이들과 어른들, 1908년), "El Penaca" 등 여러 어린이 잡지가 창간되었다.[46] 같은 시기에 아구스틴 에드워즈 맥클루어(Agustín Edwards Mac-Clure)는 "Aventuras de Juan Esparraguito"(꼬마 아스파라거스 후안의 모험)와 "El niño casi legumbre"(거의 콩처럼 생긴 아이) 등 두 권의 아동 도서를 출판했다.

Blanca Santa Cruz Ossa[47]는 칠레와 다른 나라의 이야기와 신화를 편찬한 선구자로, "Cuentos rumanos"(루마니아 이야기, 1929년), "Cuentos maravillosos del Japón"(일본의 놀라운 이야기, 1935년)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48] Maité Allamand, Carmen de Alonso, Marta Brunet 또한 칠레 민속에서 영감을 받은 아동 문학을 저술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주로 "Tala"와 "Ternura"에서 아동을 위한 시를 지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945년


1964년에는 국제 아동 청소년 도서 위원회(IBBY)의 칠레 지부가 설립되어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을 홍보했다.[49] Marcela Paz("Papelucho"), Maité Allamand 등이 참여했으며, 이 단체는 작가들을 위한 중요한 만남의 장소이자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Alicia Morel,[50] Lucía Gevert,[51] Cecilia Beuchat 등도 IBBY에 기여했다.[52][53][54][55][56][57]

6. 역사학

20세기 동안 칠레의 역사 및 역사 문학 연구는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전통에서 벗어나 심오한 변화를 겪었다. 이는 당시의 이념적 투쟁과 칠레 여러 대학교에 연구소와 전문 부서를 설립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점진적인 전문화를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결합 때문이었다.[58]

1960년대까지 역사 논쟁을 독점했던 영향력 있는 보수주의 학파는 주요 경향 중 하나였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저술가로는 "칠레의 역사적 외형(Fisonomía histórica de Chile)"으로 알려진 하이메 에이사기레(Jaime Eyzaguirre)[59], "칠레 역사(Historia de Chile)"를 저술한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엔시나(Francisco Antonio Encina), 그리고 "칠레 정당의 역사적 개요", "칠레의 귀족적 혼란", "칠레의 정치 조직"을 저술한 알베르토 에드워즈(Alberto Edwards)가 있다. 이들은 19세기 사회 자유주의와 1920년대 이후 발생한 변화를 쇠퇴 과정으로 보며, 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다. 보수주의 역사가들은 근대성을 거부하고 사회 질서와 가톨릭 신앙의 유지를 위해 대의 민주주의를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20세기 중반에는 보수주의 학파와 경쟁하는 두 가지 새로운 역사적 경향이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 경향은 훌리오 세사르 호벳(Julio César Jobet)[60]과 에르난 라미레스 네코체아(Hernán Ramírez Necochea)[61]를 포함한 저술가들이 칠레 노동 계급의 역사 재구성과 복원에 노력을 집중했다. 이들은 정치적·이념적 성격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1980년대 후대 세대를 통해 칠레 대중 운동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을 개발하면서 그 유산은 계속 이어졌다.

또 다른 경향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Annales School)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럽 역사학에서 차용한 새로운 기법과 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역사 연구에 실질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이 학파의 역사가로는 마리오 곤고라(Mario Góngora), 알바로 하라(Álvaro Jara), 롤란도 멜라페(Rolando Mellafe)[62], 세르히오 비야로보스(Sergio Villalobos) 등이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경제와 인구 통계학과 같이 무시되었던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자들의 대다수는 칠레 대학교(University of Chile)의 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새로운 역사학 운동은 식민 시대 이후 칠레의 제도, 사회, 경제를 형성해 온 장기적인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강조했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이 학파의 역사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연계를 맺었다. 1973년 칠레 쿠데타는 이러한 과정에 갑작스러운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사회 역사학을 억압하여 이러한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이 망명하게 만들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럽 대학교로 가서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는데,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그들의 전문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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