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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이우니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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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이자 프랑크 왕국의 왕자였다. 그는 772년 또는 773년에 태어나 작센 전쟁에 참여하고 노스트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등 군사적, 정치적 활동을 펼쳤다. 790년에는 프랑코니아, 노스트리아, 작센의 왕으로 봉해졌으며, 800년에는 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806년에는 제국 분할 계획에 따라 프랑키아 본토 등을 상속받을 예정이었으나, 811년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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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이우니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를 대제의 서명
카를 대제의 서명
왕조카롤링거 왕조
아버지카를 대제
어머니힐데가르트
출생 추정 시기772년경
사망일811년 12월 4일
작위
프랑크 왕카를 대제와 공동 재위
메인 공작790년–811년
프랑켄 왕790년–811년, 카를 대제와 공동 재위
노르트리아 왕790년–811년, 카를 대제와 공동 재위
작센 왕790년–811년, 카를 대제와 공동 재위
잉겔하임 공작780년–811년
통치
프랑크 왕 즉위800년 12월 25일
이전 작위그리포 (메인 공작)
계승루트비히 1세

2. 생애

카롤루스(Charles)는 772년 또는 773년에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아내 힐데가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의 둘째 아들로, 곱사등이 피핀이라는 이복 형이 있었다.[2] 774년, 카롤루스 대제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를 포위하고 있을 때, 그는 힐데가르트와 아들들에게 도시 밖 야영지에 있는 군대에 합류하라고 보냈다. 카롤루스 대제는 774년 6월까지 도시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 외에도 롬바르드 왕이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가족은 7월 또는 8월까지 프랑키아 북부로 돌아갔다. 카롤루스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카롤루스 대제는 모든 자녀에게 자유 교양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들은 승마, 전투, 사냥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781년, 카롤루스 대제와 힐데가르트는 카를로만과 루이를 포함한 어린 자녀들을 로마로 데려갔고, 피핀과 카롤루스는 프랑키아에 남겨두었다. 로마에서 교황 아드리아노 1세가 아이들을 세례했고, 그 과정에서 카를로만은 피핀으로 개명되어 이복 형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새로 개명된 피핀과 루이는 또한 성유를 받고 대관식을 치렀으며, 피핀은 롬바르드 왕으로, 루이는 아키텐 왕으로 임명되었다. 두 새로운 왕은 여전히 어린 아이였으며, 그들의 법정에서 섭정 및 조언자들에 의해 양육되기 위해 새로운 왕국으로 보내졌다. 이탈리아와 아키텐은 카롤루스 대제의 영토에 추가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가 이들을 어린 아들들에게 할당함으로써 카롤루스, 그리고 형 피핀에게 핵심 프랑크 왕국을 분할 상속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카롤루스는 784년에 성인이 되면서 첫 번째 지휘권을 받았으며, 작센 전쟁 중 베스트팔렌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그 이후로, 카롤루스는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지속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작센에서 계속 군대 지휘를 받게 되었다. 789년,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루스에게 센 강 서쪽의 왕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으며, 이는 노스트리아의 메인 공작령에 해당한다. 카롤루스가 머시아의 앨플레드와 결혼하여 프랑크족과 앵글로색슨 왕 사이의 동맹을 맺는 것이 제안되었다. 오파는 이에 동의했지만, 카롤루스의 여동생 베르타도 자신의 아들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에 모욕감을 느껴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는 잉글랜드로부터의 모든 무역을 봉쇄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요크의 알쿠인이 협상한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지도. 카롤루스는 생전에 센 강 서쪽의 노스트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왕국의 대부분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카롤루스와 그의 이복 형 사이에는 불화가 커져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중반에 글을 쓴 수도승 반델베르트는 두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라인 강을 따라 각자 배를 타고 여행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연히, 두 형제는 모두 성 고아르에게 헌정된 성 고아르의 교회에 들렀고, 교회의 성스러움과 성인에 감동하여 "그들은 이제 형제애와 우정의 약속으로 함께 모였다." 카롤루스와 피핀 사이의 이러한 불화는 아마도 상속 문제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피핀은 카롤루스 대제와의 정확한 관계가 불분명했던 히밀트루드의 아들이었다. 780년대에 이르러, 피핀은 사생아로 여겨졌고, 이전 프랑크족의 상속 관행은 어머니의 결혼 상태에 따라 아들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피핀의 소외는 카롤루스가 군사 작전에서 아버지의 대리인 지위를 얻은 반면, 피핀은 그러한 지휘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 나타났다. 메인 지역의 토지를 하사받은 후, 카롤루스는 피핀이 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primogenitusla, 즉 "맏이"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792년, 피핀은 바이에른 귀족들과 공모하여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피핀, 루이(모두 레겐스부르크에 모였음)를 암살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다. 음모가 발각되어 카롤루스 대제에게 알려졌다. 피핀은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많은 공모자들이 처형되었다.

800년 카롤루스는 아버지와 함께 덴마크 해적이 침략했던 노스트리아의 토지와 방어를 조사하기 위해 합류했고,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로마로 여행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의 복위를 감독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800년 12월 25일 성탄절 미사에서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신성 로마 황제의 왕관을 씌우고 카롤루스를 왕으로 성유했다.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가 말년에 직접 군대를 이끄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핵심 부관이자 군사 지도자로서 계속 활동했다. 804년, 카롤루스는 레오 3세를 프랑키아로 마지막 방문을 할 때 교황을 호위하는 특권을 받았다. 프랑크 연대기에는 카롤루스가 805년과 806년에 보헤미아인, 소르브인 및 기타 슬라브족을 상대로 성공적인 작전을 펼친 기록이 있다. 806년, 카롤루스 대제는 사망 시 제국의 상속 계획을 공식화한 Divisio Regnorumla을 발표했다. 총애를 받는 맏아들인 카롤루스에게 프랑키아 본토, 작센, 노르드가우, 알레마니아의 일부를 포함한 가장 큰 상속분이 주어졌다. 루이와 어린 피핀은 아키텐과 이탈리아의 왕국을 확인받았고, 추가 영토를 얻었으며, 바이에른과 알레마니아의 대부분은 피핀에게, 프로방스, 셉티마니아, 부르고뉴의 일부는 루이에게 주어졌다. 카롤루스 대제는 황제의 칭호 상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Divisiola는 또한 형제의 사망에 대해서도 다루었으며, 형제와 상속받을 조카 사이의 평화를 촉구했다. 808년, 카롤루스는 덴마크 왕 구드프레드의 침략에 대응한 프랑크 군대를 이끌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상속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피핀은 그의 여동생 로트루데, 고모 셸의 기젤라 수녀원장, 그리고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과 함께 810년에서 811년에 걸쳐 잇따라 사망했다. 카롤루스도 그 뒤를 이어 811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모두 810년에 가축에서 퍼진 전염병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카롤루스의 사망 장소와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죽음 이후, 카롤루스 대제는 피핀의 아들 베르나르도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자신의 유일한 생존 아들 루이를 제국의 나머지 상속자로 선언했다. 루이는 813년에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고, 814년 카롤루스 대제의 사망과 함께 제위를 완전히 계승했다.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이복 형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인 은 792년 아버지에 대한 반란에 연루되어 프륌 수도원에 수감되었다[2].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동생 카를만 (피핀으로 개명)은 이탈리아의 부왕, 루트비히는 아키텐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3].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주로 카롤링거 제국과 경계를 접하며 최소 두 번 반란을 일으킨 브르타뉴인을 처리하며 쉽게 진압했고, 작센인과의 전쟁에도 여러 차례 파견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계승을 예정했던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피핀 또한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제국 전체가 루트비히의 손에 넘어갔다.

789년경,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와 머시아 왕오파의 딸 엘프레다의 결혼을 계획했다. 오파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 에그프리스와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의 결혼도 요청했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이를 거부하고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혼담도 파기했으며 제국의 항구에서 잉글랜드 상인을 추방했다[4]. 이후 양국은 관계를 정상화하고 항구도 개방되었다. 수년 후인 796년에는 카롤루스 대제와 오파 사이에 알려진 바로는 영국 역사상 최초의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790년,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를 프랑크 왕국과 작센의 통치에 참여시켜, 두카투스 케노만니쿠스(후의 메인 공국에 해당)의 지배를 맡기고 왕의 칭호를 부여했다[5]. 800년 12월 25일, 카롤루스 대제가 황제로 즉위한 날,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도 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806년,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현재의 바이센펠스 부근에서, 소르브인 공작 와 슬라브인 크냐지인 누시트(네씨타)와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6]

811년 12월 4일,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바이에른에서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다. 자녀는 없었다. 훗날 프랑스 연대기에 나오는 샤를로의 모델이 되었다.

2. 1. 젊은 시절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세 번째 정비인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의 아들이었다. 출생 연도는 772년 또는 773년으로 추정되며, 바이에른의 베이언 근처 혹은 라인란트 근처에서 태어났다.[7] 이복형으로 곱사등이 피핀이 있었고,[2] 친동생으로는 루트비히 1세와 로타르 형제가 있었으나, 로타르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7]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초기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일찍이 잉겔하임의 공작에 봉해졌다. 781년, 동복형 피피노와 동복동생 루트비히가 각각 랑고바르드와 아키텐의 왕으로 분봉될 때, 그는 왕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잉겔하임 공작과 케노노마니 공작에 임명되었다.[7]

784년, 아인하르트의 카롤 대제 전기 중 784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카롤루스는 성인이 되면서 첫 번째 지휘권을 받았으며, 작센 전쟁 중 베스트팔렌에서 군대를 이끌었다.[7] 그 이후로, 카롤루스는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지속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작센에서 계속 군대 지휘를 받게 되었다.

2. 2. 네우스트리아의 왕과 프랑코니아, 작센 통치

782년부터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작센 족 원정에 동행하여 여러 번 출정하였다. 783년 작센 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참여했고, 784년 카롤루스가 작센 족을 정벌할 때도 참전하여 에레스부르크에 본진을 설치하고 기병 군사 일부를 이끌고 튀링겐으로 이동했다가 베스트팔렌에 주둔하였다. 이때 기병대를 이끌고 드라인가우(Dreingau)에서 작센 족과 교전하기도 했다.[8]

788년 네우스트리아의 분봉왕에 임명되었다.[9] 789년 잉글랜드 머시아 왕국의 오파 왕의 딸 엘프리이에드와 혼담이 오갔으나, 카롤루스 대제와 오파 왕 사이의 갈등으로 무산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오파에게 자신의 아들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와 오파의 딸 엘프리이에드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오파는 자신의 아들 에그프리드와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의 결혼을 역제안했다. 결국 머시아와 프랑크 왕국 사이의 교역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 문제는 796년에 프랑크 왕국과 머시아 왕국 간의 무역 조약 체결로 완화되었다.[4]

790년 아버지에 의해 프랑코니아와 네우스트리아, 작센의 왕으로 봉해져 해당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케노마니니쿠스 공국(ducatus Cenomannicus) 공작직을 겸임했다.[9] 이후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네우스트리아 변방을 공격한 브르타뉴인 공략과 색슨족의 반란 토벌에 파견되었다.

792년 이복형 곱추 피핀이 프륌 수도원에 감금된 후, 왕위 계승자로 공개 선포되었다.[2]

799년 파더보른의 제국 의회에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참석할 때, 소수의 군사와 함께 작센의 바덴가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파견되었다.[10]

800년 12월 25일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인의 황제로 축성받을 때 프랑크의 왕으로 같이 축성 세례를 받았다.

805년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자, 프랑크 왕국의 대표자 자격으로 알프스산맥에 나가서 교황을 영접하여 랭스 대성당까지 동행하였다. 그해 보헤미아 공략에 파견되어 보헤미아를 황폐화하고 보헤미아 공작 레초(Lecho)와 슬라브 족 부족장들을 사로잡아 죽였다.

806년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슬라브 원정에 동행하여 누시토(Nussito)를 점령하고 소르브인 공작 밀리더흐와 슬라브인 지도자 켄즈(Knez), 누시토(Nussito) 등을 사살하였다.[11][12] 같은 해 2월 6일 카롤루스 대제가 티옹빌(디덴호펜)에서 발표한 제국 칙령(Divisio Regnorum)에서, 루아르강 일대와 라인강 일대의 프랑코니아 지역, 엘베강다뉴브 강변 일대의 제국의 동쪽 지역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806년 2월 6일 티옹빌 칙령에서 청년 카롤루스의 영토로 지정된 지역 (노란색)

2. 3. 공동 통치자와 제국 분할 계획

790년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프랑코니아와 네우스트리아, 작센의 왕에 봉해져 통치를 위임받았고, 분국 정부를 설치했다. 그해 케노마니니쿠스 공국(ducatus Cenomannicus, 후일의 메인 공국)을 설치하고 두카툭스 케노마니쿠스(ducatus Cenomannicus)에 임명, 케노마니니쿠스 공작직을 겸임하였다.[9]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는 그에게 영지를 주기를 주저했는데, 그가 성년이긴 하지만 미혼이고 정식 상속자가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799년에는 아버지 카롤루스가 파더보른의 제국 의회에 참석할 때, 소 카롤루스는 소수의 군사와 함께 작센의 바덴가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파견되었다.[10]

800년 아버지 카롤루스에 의해 후계자 겸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2] 80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아버지 카롤루스가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에서 로마인의 황제로서 축성받을 때 소 카롤루스는 프랑크의 왕으로 같이 축성 세례를 받았다.[3] 805년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자, 프랑크 왕국의 대표자 자격으로 알프스산맥에 나가서 교황을 영접하여 랭스 대성당까지 동행하였다.

|섬네일|오른쪽|150px|806년 2월 6일 티옹빌 칙령에서 청년 카롤루스의 영토로 지정된 지역 (노란색)]]

805년 소 카롤루스는 보헤미아를 황폐화하고 그들의 부족장 출신 보헤미아 공작 레초(Lecho)와 슬라브 족 부족장들을 사로잡아 죽였다. 806년 그는 아버지 카롤루스의 슬라브 원정에 동행하여 누시토(Nussito 또는 네시타(Nessyta), 현재의, 작센안할트주 남부 바이센펠스)를 점령하고 소르브인 공작 밀리더흐(Miliduch)와 슬라브인 지도자 켄즈(Knez), 누시토(Nussito) 등을 사살하였다.[11][12][6] 같은 해 2월 6일 부왕 카롤루스가 티옹빌(후일의 디덴호펜)에서 발표한 티옹빌 제국 칙령Divisio Regnorum )에서, 소 카롤루스는 루아르강 일대와 라인강 일대의 프랑코니아 지역, 엘베강다뉴브 강변 일대의 제국의 동쪽 지역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부왕 카롤루스는 소 카롤루스에게 왕궁 아헨 일대도 유산으로 지정했지만, 당시까지도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의 지위는 다소 위태로울수 있었다.

2. 4. 생애 후반과 죽음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808년 덴마크 왕 구드프레드프랑크 왕국을 침공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맞섰다.[13] 810년에는 하렐베케 변경백 플랑드르의 리데리크 4세의 미망인 루시용의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13] 그는 데인 족과 동맹을 맺은 리노네스, 스메르딩게르 등을 공격하여 황폐화시켰다.[14]

811년 12월 4일, 카롤루스 이우니오르는 바이에른을 순찰하던 중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15] 일설에는 810년부터 에게서 확산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15] 그의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죽음으로, 제국 전체는 동생인 루트비히 경건왕에게 넘어갔다. 이는 카롤루스 대제의 여러 아들들이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다.[15] 훗날 프랑스 연대기에 나오는 샤를로의 모델이 되었다.

2. 5. 가계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
할아버지피핀 3세
할머니베르타
고모베르타
고모부밀론
고종사촌롤랑
아버지카롤루스 대제
계모이멜트루다
이복 형곱사등이 피핀
계모데시데리아
친모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
친형피피노
동생로타르
동생루트비히 1세
누이아델라이드
누이베르타
이름 미상, 율리아나(Juliana?)
서자롤랑
손자고드프리



그의 아들을 낳은 여성은 이름을 알 수 없으며, 일설에는 이름이 율리아나(Juliana)라 하나 불분명하다.

2. 6. 기타

일설에는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로베르 르 포르가 그의 서자였다는 설이 있다. 또다른 설에는 플랑드르의 백작 아우다카르(Odacre)도 그의 서자라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한국사와의 비교

참조

[1] 문서 カール大帝の長男{{仮リンク|傴僂のピピン|en|Pepin the Hunchback}}を生んだヒミルトルードは、大帝の妾あるいは内妻であり、正式な妃ではなかった。Riche, Pierre, ''The Carolingians'', p.86 ("Although he already had a son by his concubine, Himiltrude..."); Chamberlin, Russell, ''The Emperor Charlemagne'', p.61: "he made the first of those confusing sexual relationships which was something more than concubinage, less than marriage...the Franks called it ''friedelehe'', and it could perhaps be compared with the English system of common-law wife or husband..."
[2] 서적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3] 서적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4] 서적 Walls, Ramparts, and Lines of Demarcation: Selected Studies from Antiquity to Modern Times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5] 웹사이트 Counts of Maine http://home.eckerd.e[...] 2006-11-04
[6] 서적 History of Bohemia https://archive.org/[...] C. H. Sergel Company
[7] 서적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8] 간행물 Annales regni Francorum
[9] 웹인용 Counts of Maine http://home.eckerd.e[...] 2006-11-04
[10] 간행물 Annales regni Francorum
[11] 서적 Rex germanorum, populos sclavorum: http://books.google.[...] University City Press
[12] 서적 Russland in historischer, statistischer, geographischer und und literarischer Beziehung http://books.google.[...] Eduard Franken
[13] 문서 리데리크는 808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14] 간행물 Annales regni Francorum
[15] 서적 King and Emperor: A New Life of Charlemagn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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