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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석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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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우석은 당나라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793년 진사에 급제한 후 왕숙문의 개혁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재정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개혁 실패로 좌천과 유배를 겪었다. 유우석은 흉노 출신으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초기 관직 생활을 거쳐 영정 개혁에 참여했다. 문학적으로는 한유, 유종원, 백거이 등과 교류하며, 시를 통해 정치적 풍자와 민중의 삶을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누실명〉, 〈죽지사〉, 〈현도관 도화〉 등이 있으며, 만년에는 검교예부상서와 태자빈객을 역임했다. 유우석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상을 제시하며,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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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석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바이디청에 있는 류우석의 동상
바이디청에 있는 류우석의 동상
이름류우석
본명유우석
로마자 표기Liu Yuxi, Liu Yuxi
몽득
로마자 표기 (자)Mengde
기본 정보
출생772년
출생지뤄양, 허난성, 중국
사망842년
사망지뤄양, 허난성, 중국
직업수필가, 철학자, 시인
주요 작품누실명
기타 정보
영향유종원
한유

2. 생애

대대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 9년(793년) 진사에 급제했다. 이후 회남 절도사 두우 밑에서 서기로 일했으며, 중앙 정계에서는 유종원과 함께 왕숙문의 정치 개혁(영정의 혁신)에 참여하여 재정 분야를 담당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이왕유류(二王劉柳)'로 불렸으나, 개혁은 환관과 무원형 등 보수 세력의 반발로 순종이 8개월 만에 퇴위하고 헌종이 즉위하면서 실패했다. 이로 인해 왕숙문은 실각하고 유우석을 포함한 개혁파 관료 8명은 지방의 사마로 좌천되었다(팔사마 사건).

유우석은 낭주 사마로 약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문학에 몰두했다. 원화 10년(815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도교 사원인 현도관에서 지은 시가 권력층을 풍자한다는 이유로 다시 연주 자사 등으로 좌천되었다. 여러 지방의 자사를 거쳐 대화 2년(828년)에야 장안으로 돌아와 주객랑중(主客郎中)이 되었다. 이후 배도의 도움으로 잠시 중앙 관직에 머물기도 했으나, 결국 다시 지방관으로 나가 소주 자사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뤄양(낙양)에서 백거이와 깊이 교류하며 시를 주고받았고, 최종적으로 검교예부상서 겸 태자빈객으로 생을 마감했다.

2. 1. 가문 배경과 초기 생애

유우석의 조상은 본래 흉노 유목민족 출신이었다. 그의 7대조로 추정되는 유량(劉亮)은 북위(386–534) 시대의 관료였는데, 효문제(재위 471–499)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494년에 그를 따라갔다. 당시 북위 조정의 한화 정책에 따라 유량은 한족으로 동화되었고, 성을 유(劉)씨로 등록하게 되었다. 이후 유씨 가문은 낙양에 터를 잡고 살았다.

아버지인 이유(李緖)는 당나라 시대에 일어난 안사의 난(755–763)의 혼란을 피해 낙양을 떠나 남쪽의 가흥(오늘날 저장성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로 인해 유우석은 남쪽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젊은 시절 그는 회계(오늘날 사오싱)에서 당대의 유명한 선종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영철(靈澈, 746–816)과 교연(皎然, 730–799) 두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 속에 불교적인 감성이 반영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2]

2. 2. 초기 관직 생활

793년, 유우석은 진사 과거에 합격했다. 같은 해에 유종원 역시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두 사람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유우석은 같은 해 상위 시험(boxue hongceke)에도 합격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795년, 임명부는 그를 황태자의 가정교사로 임명하여 그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그러나 796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양주로 돌아가야 했다.

800년, 유우석은 서주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은 두우의 비서가 되어 군대 생활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후 그는 두우를 따라 양저우로 이동하여 시인 이역과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

802년, 유우석은 섬서성 위남의 등록관(zhubu)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인 803년에는 어사대의 관원 이문의 추천을 받아 감찰어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감찰어사에는 이미 저명한 문장가이자 시인인 한유가 있었고, 곧이어 유종원도 합류했다. 중당 시대를 대표하는 이 세 명의 문학 거장들은 이때부터 친구가 되어 평생 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2. 3. 영정 개혁과 유배

805년, 당나라 덕종이 사망하고 아들 당나라 순종이 즉위했다. 순종 즉위 후 정국은 한림원 학사 출신인 왕숙문과 왕비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순종의 연호를 따 '영정(永貞)의 혁신'이라 불리는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유우석은 정원 9년(793년)에 함께 진사에 급제한 유종원과 더불어 왕숙문 세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개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유우석은 재정 분야를 담당하며 왕숙문, 왕비, 유종원과 함께 '이왕유류(二王劉柳)'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무원형과 같은 정적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게다가 당나라 순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강력한 환관 세력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개혁은 시작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환관들은 순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아들 당나라 헌종을 즉위시켰다.

헌종이 즉위하자 무원형 등 수구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했고, 개혁파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왕숙문은 실각 후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개혁에 참여했던 관료들은 제국의 외딴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우석은 처음 광동성 연주 자사로 좌천되었으나, 임지로 가던 도중 더욱 강등되어 호남성 낭주 사마로 보내졌다. 유종원 역시 영주 사마로 좌천되었다. 이때 유우석과 유종원을 포함하여 개혁을 주도했던 위지이, 정이, 한엽(韓曄), 한태(韓泰), 릉준(凌准) 등 총 8명의 핵심 인물들이 각지의 사마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팔사마 사건(八司馬 事件)'이라고 부른다.[2]

유우석은 낭주에서 약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문학 창작에 몰두했다. 그는 옛 초나라 땅이었던 낭주 지역의 풍속을 소재로 시를 짓거나, 민중을 위한 제사용 가사를 만드는 등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

2. 4. 두 번째 유배와 소환

원화 10년(815년), 유우석은 다른 영정 개혁 관련자들과 함께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3] 그러나 이듬해 초(816년) 장안에 도착한 그는 궁정 정치를 풍자하는 시 "현도관 도화"(玄都觀桃花)[3]를 지었는데, 이 시가 다시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즉시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유우석은 파주(播州, 현재의 귀주성 준의시) 자사로 좌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노모가 살기에는 너무 험한 곳이었기에, 동지였던 유종원이 대신 파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4] 마침내 부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가 황제를 설득하여 유우석이 연주(連州, 현재의 광동성) 자사로 임명될 수 있도록 했고,[4] 유종원은 유주(柳州, 현재의 광서성) 자사로 가게 되었다.

연주 자사로 부임한 후, 821년 유우석은 다시 양쯔강 유역의 규주(夔州) 자사로, 이후 하주(賀州, 현재의 광서성) 자사 등으로 전전했다.

826년, 유우석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낙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 유배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2] 이듬해인 827년에는 관직에 복귀했고, 대화 2년(828년)에는 관청의 낭중(郎中)이 되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배도의 후원으로 집현원학사로 다시 승진하여 4년간 재직하며 배도, 최군, 시인 백거이 등과 교류했다.[2] 828년 장안을 방문했을 때, 그는 다시 현도관을 찾아 "다시 현도관을 찾아서"(再遊玄都觀)[5]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에는 14년 전과 달리 복숭아나무가 모두 사라진 풍경을 담았다.[2]

2. 5. 소환 이후의 삶

원화 10년 (815년), 오랜 유배 생활 끝에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현도관(도교 사원)에서 지은 시가 당시 권력층을 풍자한다는 이유로 다시 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여러 지방의 자사를 거쳐 대화 2년 (828년)에야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주객랑중(主客郎中)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다시 현도관을 찾아 이전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시(〈재유현도관〉(再遊玄都觀)으로 추정)를 읊었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배도의 비호 덕분에 추가적인 좌천은 피할 수 있었다.

830년, 배도가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유우석은 쑤저우(소주) 자사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수해 방지에 큰 공을 세워 백성들로부터 위응물, 백거이와 더불어 '삼현'(三賢)으로 칭송받았으며, 훗날 세 사람을 기리는 삼현당(三賢堂)이 세워지기도 했다. 소주 자사 이후에는 유주(현재의 허난성 지역)와 동주(현재의 산시성 지역)의 자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836년, 동주 자사 임기를 마치고 뤄양(낙양)으로 돌아와 태자빈객(太子賓客)이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841년에는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의 직무를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백거이 역시 뤄양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두 노년의 시인은 함께 교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이는 원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842년 가을, 유우석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호부상서(戶部尙書)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3. 사상과 철학

유우석은 동시대의 문인이자 시인이었던 한유, 유종원과 함께 천인 관계(天人關係), 즉 하늘(자연 세계 또는 신)과 인간 세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 참여했다. 유교 신봉자였던 한유는 하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유종원은 하늘과 땅(인간 세계)을 별개의 영역으로 보았다.

유우석은 자신의 견해를 《천륜서(天論書)》(Tiānlùn shū)라는 수필을 통해 밝혔다. 그는 하늘과 땅(즉, 자연과 인간)이 어느 정도 상호 작용한다고 보았다. 때로는 하늘이 땅보다 우세할 수 있지만, 반대로 땅이 하늘보다 우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종원의 『천설(天說)』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쓰인 『천론(天論)』에서 더욱 발전하는데, 이는 하늘에 관한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유우석은 이 글에서 전통적인 천인상관설(天人相関説)에 이의를 제기하며, 하늘은 만물을 생성할 뿐이며 사람은 법과 제도를 통해 그것들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문학 세계

싱양 시 허난성에 있는 유우석의 묘


당나라시인 유우석은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상, 민속, 우정, 역사 등 다채로운 소재를 다루었으며, 특히 소박하고 정감 있는 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2]

그는 동시대의 뛰어난 문인들인 유종원, 한유, 백거이 등과 깊이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백거이와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6] 유우석 시의 구체적인 특징과 대표작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4. 1. 시풍(詩風)

유우석의 시는 주제가 매우 다양하여, 평범한 민중들의 경제적, 사회적 관습과 그들의 문제, 민속 음악과 민속, 우정, 연회와 음주, 역사적 주제와 과거에 대한 향수 등을 다루었다.[2] 그의 시 중 일부는 단순하고 '민요' 스타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700편이 조금 넘는 시가 전해지며, 그중 4편은 청나라 시대에 편찬된 고전 시 선집인 ''당시삼백수''에도 실려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시의 짧고 복잡한 형식에 뛰어났다. 기술적으로는 오언시(다섯 글자 행)보다 칠언시(일곱 글자 행)를, 율시보다는 고시를, 긴 시보다는 짧은 형식인 8행 절구를 더 선호했다.[2]

영정의 혁신에 참여했다가 좌천된 경험은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악부 형식의 우언시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예를 들어, 모기가 하찮은 존재임에도 여름철 시끄럽게 날아다니며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을 중앙 정계의 간신에 빗대어 풍자했다. 이는 겨울이 오면 모기가 사라지듯 간신들 역시 결국 몰락할 것이라는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유우석은 각지에서 불리던 민요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작업에도 힘썼다. 특히 기주 자사로 재직할 당시 그 지역의 민요였던 죽지사(竹枝詞)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사를 붙인 〈죽지사〉 연작을 창작하여 민중들의 삶과 정서를 생생하게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동시대의 위대한 시인들인 유종원, 한유, 백거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특히 백거이는 유우석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유우석에게 헌정한 시에서 "유와 포, 그 두 미친 노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6]

4. 2. 대표작

유우석의 시 서예


유우석의 시는 그가 가진 광범위한 관심사를 반영하여 주제가 매우 다양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관습과 그들의 문제, 민속 음악과 민담, 우정, 연회와 음주, 역사적 주제와 과거에 대한 향수 등이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다.[2] 특히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단순하면서도 민요와 같은 스타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약 700여 편의 시가 전해지며, 그중 4편은 청나라 시대에 편찬된 대표적인 당시 선집인 당시삼백수에도 실려 있다.

기술적으로는 오언시(다섯 글자 행)보다는 칠언시(일곱 글자 행)를, 율시보다는 고시를, 긴 시보다는 8행의 짧은 절구 형식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2] 그는 동시대의 위대한 시인들인 유종원, 한유, 백거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특히 백거이는 유우석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유우석에게 바치는 시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6]

유우석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누실명〉(陋室銘)''': "누추한 선비의 거처에 부치는 글"이라는 뜻으로, 비록 소박하고 누추한 곳에 살더라도 선비로서 학문과 덕을 쌓으며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세를 노래한 유명한 산문시이다. 간결하면서도 운율감 있는 문체로 작가의 높은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나고;

: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영험하다.

: 이곳은 누추한 집이지만, 오직 나의 덕이 향기롭다.

: ...

: 남양제갈량의 초가집과

: 서촉의 양자운의 정자.

: 공자가 말하기를, "무엇이 누추하겠는가?"

  • '''〈죽지사〉(竹枝詞)''': 유우석이 낭주 사마 등으로 좌천되었을 때 그 지역의 민요 가락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만든 시이다. 특히 기주 자사 시절에 많이 창작했으며, 민중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과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내어 민요풍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좌천 경험은 오히려 민중의 삶에 더 깊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 '''현도관 시 (〈현도관 도화〉(玄都觀桃花) 및 〈재유현도관〉(再遊玄都觀))''': 유우석의 정치적 소신과 권력에 대한 비판 정신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는 영정의 혁신이라는 정치 개혁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좌천되는 아픔을 겪었다. 원화 10년(815년) 잠시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도교 사원인 현도관의 복숭아꽃을 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자신을 좌천시킨 정치 세력을 풍자하는 시(〈현도관 도화〉)를 지었다. 이 시가 문제가 되어 그는 다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10여 년 후인 대화 2년(828년)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유우석은 또다시 현도관을 찾아 복숭아꽃은 간데없고 채소밭이 된 풍경을 보며, 지난번 시의 속편 격인 〈재유현도관〉을 지어 여전히 꺾이지 않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들은 당시 집권 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어 유우석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유우석은 악부체의 우언시(寓言詩, 비유를 통해 교훈이나 풍자를 담은 시)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름철 시끄럽게 사람을 괴롭히는 모기를 조정의 간신들에 비유하며, 겨울이 오면 모기가 사라지듯 간신들도 결국 몰락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시를 짓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좌천이라는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5. 평가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사상가,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정원 9년(793년) 진사에 급제한 후, 왕숙문, 유종원 등과 함께 영정의 혁신이라 불리는 정치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재정 분야를 담당하며 왕숙문, 왕비, 유종원 등과 함께 '이왕유류'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환관 세력과 무원형 등 보수 정적들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개혁 실패 후 순종이 퇴위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유우석은 팔사마 사건에 연루되어 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도중에 낭주 사마로 강등되어 약 9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적 좌절과 오랜 유배 생활은 그의 문학 세계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옛 초나라 지역이었던 그곳의 풍속을 소재로 시를 짓거나 민중을 위한 제사 가사를 짓는 등 문학에 몰두하며 현실 비판적인 목소리를 담아냈다.

원화 10년(815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나, 도교 사원인 현도관에서 당시 권력층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다시 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의 자사를 거쳐 대화 2년(828년) 장안으로 돌아와 주객랑중이 되었으나, 또다시 현도관에서 이전 시의 속편 격인 풍자시를 읊었다. 이때는 재상 배도의 도움으로 좌천을 면했지만, 배도가 은퇴하자 낙양으로 가게 되었고, 대화 6년(832년)에는 소주 자사가 되는 등 순탄치 않은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한 강직함 때문에 그의 관직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만년에는 백거이와 깊은 교유를 나누며 시를 통해 서로의 문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개혁 의지와 현실 참여 정신,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높이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최종적으로 검교예부상서, 태자빈객 등의 관직을 지내며 생을 마감했다.

참조

[1] 웹사이트 Liu Yuxi short biography at Renditions.org https://web.archive.[...]
[2] 서적 刘禹锡集 (Liu Yuxi Selected Works) 凤凰出版社 2014
[3] 웹사이트 The Peach Blossoms of Xuandu Temple http://www.mountains[...]
[4] 문서 Zizhi Tongjian
[5] 웹사이트 Visiting Xuandu Temple Again http://www.mountains[...]
[6] 웹사이트 To Liu Yu-hsi (AD 838) from More Translations from the Chinese http://www.sacred-te[...] 1919
[7] 서적 Chinese Poetry in English Verse https://archive.org/[...] Bernard Quaritch, London 1898
[8] 서적 Poems of the Masters: China's Classic Anthology of T'ang and Sung Dynasty Verse Copper Canyon Press 2003
[9] 간행물 The Scholar's Humble Dwelling (Poem). Liu Yu Hsi. Translated by James Black. http://opensiuc.lib.[...]
[10] 웹사이트 Liu Zongyuan and Liu Yuxi. Theories of Heaven and Man http://www.crvp.org/[...] 1989
[11] 서적 五胡興華:形塑中國歷史的異族 https://www.google.c[...] 知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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