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게프하르트
1. 개요
카를 게프하르트는 1897년 독일에서 태어난 의사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스포츠 의학 분야에서 활동하며, 1930년대에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에 들어가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주치의를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자행했으며,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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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적십자사 관련자 -
마르가레테 힘러
마르가레테 힘러는 간호사 출신으로 나치 독일 고위 관료 하인리히 힘러의 아내였으며, 나치당 가입 후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고 독일 적십자사에서 활동하다 전쟁 후 포로로 수감, 석방되었고 탈나치화 과정에서 나치 수혜자로 분류되었다. -
독일적십자사 관련자 -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는 독일의 의사이자 나치 친위대 고위 간부로서, 친위대 위생국장, 무장친위대 위생 총감, 독일 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며 나치 정권의 범죄 행위에 깊이 관여했다. -
SS집단지도자 -
헤르만 페겔라인
나치 독일의 고위 군인이자 친위대 장성이었던 헤르만 페겔라인은 승마 선수 출신으로 나치당에 입당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전선에서 활동하며 홀로코스트에 관여했고, 히믈러의 추천과 히틀러 처제와의 결혼으로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으나 탈영 시도와 평화 협상 연루 의혹으로 처형되었다. -
SS집단지도자 -
하인리히 뮐러
하인리히 뮐러는 나치 독일의 경찰 관리이자 친위대 고위 장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게슈타포 수장으로서 나치 정권의 테러 집행과 홀로코스트 실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종전 직전 실종되어 그의 행방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뉘른베르크 미군 군사재판 사형수 -
파울 블로벨
파울 블로벨은 나치 친위대 장교로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고 존더코만도 4a의 지휘관으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으며,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뉘른베르크 미군 군사재판 사형수 -
카를 브란트
카를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의사로서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를 역임하고 T4 작전을 주도하며 인체 실험을 발안하여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
카를 게프하르트는 나치 독일(나치) 시대 친위대(SS) 소속 의사로, 하인리히 힘러의 주치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을 했다.
1933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과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의 체육 의학 연구소장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의사장을 거쳐 1937년 베를린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레벤스보른에도 참여했다. 1938년 하인리히 힘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1945년 힘러와 함께 도주 중 영국군에 체포되었고,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의 의사 재판에서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카를 게프하르트는 1897년 바이에른 왕국의 하그 인 오버바이에른(:de:Haag in Oberbayern)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란츠후트의 김나지움을 다녔는데, 이곳은 하인리히 힘러의 아버지가 교장을 맡고 있었고 힘러도 같은 학교에 다녔다. 게프하르트와 힘러는 이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으며, 1916년에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김나지움을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바이에른 왕국 육군의 제4 보병 연대에 입대하였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후인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프란츠 폰 에프가 지휘하는 자유군단에 들어가 루르 지방의 공산주의자와 투쟁하였다.
1919년부터 뮌헨 대학교 의학부에서 의학을 배웠고, 1922년 의사 시험에 합격해 다음 해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922년 가을부터 1935년까지 란츠후트의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일하였고, 뮌헨대학교 교수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의 해부병리학 연구소에서 조수를 맡기도 하였다.
이후 에리히 렉서의 스포츠 의학 연구에도 종사했으며, 1924년 3월 뮌헨 대학교로부터 의학 박사 학위(Dr.med)를 받았다. 1925년, 호헨아샤우(Hohenaschau) 에 의사 훈련 시설을 세웠고, 독일체육의학협회 (Deutschen Ärzteverbandes für Leibesübungen)의 스포츠 의사도 지냈다.
게프하르트는 학생 시절 국가 반혁명 운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의용군 "우플란트 동맹"에서 활동했다. 1923년 자유군단 오버란트의 일원으로 뮌헨 폭동에 참여했다. 1924년, 2년간의 무보수 보조 의사 생활을 거쳐 뮌헨 대학교 외과 클리닉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와 에리히 렉서의 지도하에 훈련을 받았으며, 1932년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뛰어난 경력을 쌓았으며, 스포츠 의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물리 의학 및 재활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고, 스포츠 재활에 대한 교재를 저술했으며, 독일 및 유럽 전역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했다.
2.2. 의학 경력
게프하르트는 1897년 바이에른 왕국의 하그 인 오버바이에른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란츠후트의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하인리히 힘러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1916년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김나지움을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바이에른 왕국 육군의 제4 보병 연대에 입대하였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후인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프란츠 폰 에프가 지휘하는 자유군단에 들어가 루르 지방의 공산주의자와 투쟁하였다.
1919년부터 뮌헨 대학교 의학부에서 의학을 배웠고, 1922년 의사 시험에 합격해 다음 해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922년 가을부터 1935년까지 란츠후트의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일하였고, 뮌헨대학교 교수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의 해부병리학 연구소에서 조수를 맡기도 하였다.
이후 에리히 렉서의 스포츠 의학 연구에도 종사했으며, 1924년 3월 뮌헨 대학교로부터 의학 박사 학위(Dr.med)를 수여받았다. 1925년, 호엔아샤우에 의사 훈련 시설을 세웠고, 독일체육의학협회 (Deutschen Ärzteverbandes für Leibesübungen)의 스포츠 의사도 지냈다. 1932년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게프하르트는 학생 시절 국가 반혁명 운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의용군 "우플란트 동맹"에서 활동했다. 1923년 자유군단 오버란트의 일원으로서 뮌헨 폭동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뛰어난 경력을 쌓았으며, 스포츠 의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물리 의학 및 재활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고, 스포츠 재활에 대한 교재를 저술했으며, 독일 및 유럽 전역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했다.
2.3. 나치 친위대 가입 및 활동
1933년 5월 1일, 게프하르트는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하였고(당원 번호 1,723,317), 동시에 하인리히 힘러가 이끌던 친위대(SS)에 입대하였다(대원 번호 265,894). 1935년 베를린으로 이사하여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게프하르트는 친위대에 입대하여 우커마르크에 있는 호헨리헨 요양원의 의무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 요양원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에서 정형외과 클리닉으로 바꾸었다. 호헨리헨 요양원에서 게프하르트는 독일 최초의 스포츠 의학 클리닉을 시작했으며, 절단 장애 환자 및 기타 장애인을 위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1936년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수석 의사로 활동하면서 스포츠 및 체육 아카데미 의학부의 수장을 겸임했다. 호헨리헨 요양원은 제3 제국의 스포츠 요양원이 되었으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을 위한 중앙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37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정형외과 외과 과장이 되었고, 레벤스보른의 구성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개인 주치의로 임명되었다.
1944년 초, 게프하르트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피로와 부은 무릎으로 치료했다. 그는 슈페어를 거의 죽일 뻔했지만, 슈페어를 위해 개입한 다른 의사인 프리드리히 코흐 박사로 교체되었다. 게프하르트는 결국 일반친위대에서 집단지도자의 계급으로, 그리고 무장친위대에서 중장의 계급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국 참모의 수석 외과 의사로 복무했으며, 그의 지휘 아래 호헨리헨 요양원은 무장친위대를 위한 군 병원이 되었다.
1942년 5월 27일, 히믈러는 게프하르트에게 작전 인류이드 중 대전차 수류탄에 부상당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진찰하기 위해 프라하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하이드리히는 SS-상급집단지도자이자 경찰 대장이었으며, 보헤미아 및 모라바 보호령의 임시 제국 보호령이었다. 광범위한 부상에 대한 수술 후 하이드리히가 열이 나자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인 테오도르 모렐은 게프하르트에게 하이드리히를 설폰아미드 (초기 항생제)로 치료할 것을 제안했다. 게프하르트는 하이드리히가 항생제 치료 없이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모렐의 조언을 거부했다. 하이드리히는 공격 8일 후인 1942년 6월 4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1945년 4월 22일, 적군이 베를린 외곽에 진입하기 하루 전, 요제프 괴벨스는 아내와 아이들을 벙커로 데려왔다. 아돌프 히틀러와 몇몇 충성스러운 인물들이 인접한 총통 벙커에 모여 베를린의 마지막 방어를 지휘했다. 게프하르트는 독일 적십자사의 지도자 자격으로 괴벨스에게 아이들을 그와 함께 도시 밖으로 데려가자고 제안했지만, 괴벨스에게 거절당했다.
2.4. 강제 수용소에서의 인체 실험
게프하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라벤스브뤼크와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의학 및 외과 실험을 실시했다. 라벤스브뤼크에서는 수용소장 프리츠 수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SS 지도부의 지원을 받아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 당시, 게프하르트는 하이드리히 치료에 설폰아미드를 사용하지 않아 하이드리히가 사망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히믈러의 제안으로 라벤스브뤼크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설폰아미드의 효과를 부정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수감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다양한 유기체를 감염시켜 설폰아미드가 가스 괴저 치료에 효과가 없음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수용소 희생자의 사지를 동부 전선에서 부상당한 독일 군인에게 이식하려는 시도도 했다.
이 실험에서 설폰아미드 치료를 받은 그룹은 간호를 거의 받지 못한 반면, 대조군은 더 나은 간호를 받아 생존율이 더 높았다. 이는 실험 결과가 게프하르트에게 유리하게 편향되었음을 보여준다. 1942년 8월에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의 75명의 폴란드인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을 통해 총탄에 의한 감염증에 설파제가 효과가 없음을 입증했고, 1943년 5월 군사 의학회 총회에서 이 결과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