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피돌리오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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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캄피돌리오 언덕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로마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에 의해 광장과 주변 건물들이 재설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언덕에는 유피테르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과 타불라리움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로마 시민 정부의 중심지,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이 조성되었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인 예시로,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나토리오 궁전, 누오보 궁전 등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 있으며, 코르도나타 계단은 광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다. 또한, 영어 단어 "capitol"의 어원이 되었으며, 미국 국회의사당의 명칭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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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피돌리오 언덕 | |
---|---|
개요 | |
이름 | 카피톨리노 언덕 |
라틴어 이름 | Mons Capitolinus (몬스 카피톨리누스) |
이탈리아어 이름 | Campidoglio (캄피돌리오) |
지리 | |
위치 | 이탈리아 로마 |
로마의 일곱 언덕 | 예 |
행정 구역 | 캄피텔리 |
건축 및 구조물 | |
광장 | 캄피돌리오 광장 |
주요 건물 | 팔라초 세나토리오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 팔라초 누오보 타불라리움 아이데스 텐사룸 |
교회 |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
조각상 | 콘스탄티누스 1세의 거상 |
역사 및 문화 | |
종교 시설 | 유피테르 신전 (카피톨리노 언덕) 베이오비스 신전 아이데스 텐사룸 |
행사 | 루디 카피톨리니 |
2. 역사
캄피돌리오 언덕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장소였다. 사비니 여인 강탈 사건과 관련된 장소로, 사비니족이 로마 처녀 타르페이아의 배신으로 시타델에 접근할 수 있었다. 타르페이아는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던져지는 처벌을 받았다.[4] 이후 사비니족은 캄피돌리오 언덕에 정착했다.[4]
기원전 8세기에는 불카날(불칸 신전)이 언덕의 동쪽 하부 경사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곳은 나중에 로마 포룸이 되었다. 언덕 정상에는 캄피돌리오 삼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는데, 로마의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시작하여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완공했다. 이 신전은 도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전 중 하나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유피테르 신전의 기초를 파던 중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최근 발굴을 통해 유피테르 신전 아래에서 초기 묘지가 발견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유노 모네타 신전, 비르투스 신전,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등 여러 신전이 세워졌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기원전 509년에 지어졌으며 파르테논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은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6] 사투르누스 신전은 로마 포룸 서쪽 끝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세워졌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강 전투 이후 세노네스 갈리아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 수비대가 요새화하여 방어에 성공한 유일한 구역이었다.[7] 전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만리우스 캄피톨리누스는 유노의 신성한 로마 거위에 의해 갈리아족의 공격을 경고받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의 행위에 대한 유피테르의 분노를 나타내는 개선식 중 사고를 당했을 때, 불운한 징조를 피하기 위해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에 무릎을 꿇고 다가갔다.[8] 네 명의 황제의 해(69년) 동안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그의 조카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가 신전에서 포위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신전은 화재로 파괴되었다.[9]
광장과 언덕 꼭대기 아래에 있는 타불라리움은 로마의 국가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에 지어졌다. 타불라리움은 뒤쪽에서 로마 포룸을 내다본다. 타불라리움의 주요 볼거리는 구조 자체 외에도 베이오비스 신전이다.
중세 시대 캄피돌리오 언덕은 신성한 기능보다는 로마 시민 정부의 중심지로서 더 중요해졌다. 12세기 로마가 코뮌으로 부활하면서, 캄피돌리오 언덕은 교황령의 통제 속에서도 도시 저항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11] 1144년, 교황과 귀족의 권위에 반발한 시민 봉기로 상원 의원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공식적인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다.[11] 상원 의원의 새 궁전은 고대 로마 포룸을 등지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미켈란젤로가 강조하게 될 언덕의 방향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4세기 중반에는 길드 재판소가 광장 남쪽에 건설되었고, 15세기에 이 건물은 콘세르바토리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11] 콜라 디 리엔초의 개혁 운동 등 도시 저항 운동도 이 언덕에서 벌어졌다.[11]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캄피돌리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을 재설계하도록 의뢰했다.[10] 1536년부터 1546년까지 미켈란젤로는 설계를 진행했는데, 이는 1538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줄 새로운 로마의 상징을 만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12]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의 방향을 로마 포룸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쪽으로 전환하여, 교황령 로마의 새로운 중심지임을 강조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광장 중앙에 배치되었고,[11] 세나토레 궁전은 이중 계단과 함께 복원되었으며, 종탑은 중앙 축으로 이동되었다. 콘세르바토리 궁전도 복원되었고, 광장 북쪽에 누오보 궁전이 신축되어 사다리꼴 광장이 만들어졌다. 광장 앞에는 벽과 난간이 설치되었고, 코르도나타 계단이 광장으로 이어지는 중심 축을 강조했다.[11]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의 사후에도 그의 설계에 따라 17세기에 캄피돌리오가 완성되었다.[14] 포장 설계는 3세기 후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오 광장은 다양한 건물들을 대칭 축으로 통합하여 바로크 건축의 초기 예를 제시했으며, 이는 베르니니의 성 베드로 광장 설계에 영향을 주었다.
2. 1. 고대 로마 시대
캄피돌리오 언덕은 사비니 여인 강탈 사건과 관련된 장소로, 사비니족이 시타델로 접근하다가 로마 처녀 타르페이아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 배신 행위로 타르페이아는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던져지는 처벌을 받았다.[4] 사비니 여인 강탈 이후 로마로 이주한 사비니족은 캄피돌리오 언덕에 정착했다.[4]기원전 8세기에는 불카날 (불칸 신전)이 캄피돌리오 언덕의 동쪽 하부 경사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곳은 나중에 로마 포룸이 되었다. 언덕 정상에는 캄피돌리오 삼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는데, 로마의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재위 기원전 616–579년)[5]가 시작하여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기원전 535–496년)가 완공했다. 이 신전은 도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전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유피테르 신전의 기초 참호를 파던 중 사람의 두개골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는 ''caput'')이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최근 발굴을 통해 유피테르 신전 아래에서 초기 묘지가 발견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유노 모네타 신전, 비르투스 신전,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등 여러 신전이 세워졌다. 그중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기원전 509년에 지어졌으며 파르테논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은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6] 사투르누스 신전은 로마 포룸 서쪽 끝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세워졌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강 전투 이후 세노네스 갈리아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 수비대가 요새화하여 방어에 성공한 유일한 구역이었다.[7] 전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만리우스 캄피톨리누스는 유노의 신성한 로마 거위에 의해 갈리아족의 공격을 경고받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의 행위에 대한 유피테르의 분노를 나타내는 개선식 중 사고를 당했을 때, 불운한 징조를 피하기 위해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에 무릎을 꿇고 다가갔다.[8] 네 명의 황제의 해 (69년) 동안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그의 조카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가 신전에서 포위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신전은 화재로 파괴되었다.[9]
광장과 언덕 꼭대기 아래에 있는 타불라리움은 로마의 국가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에 지어졌다. 타불라리움은 뒤쪽에서 로마 포룸을 내다본다. 타불라리움의 주요 볼거리는 구조 자체 외에도 베이오비스 신전이다.
고대 로마의 오랜 기간 동안 캄피돌리오 언덕은 지리적 및 의례적 중심지였다.
2.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 캄피돌리오 언덕은 신성한 기능보다는 로마 시민 정부의 중심지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 로마가 코뮌으로 부활하면서, 캄피돌리오 언덕은 교황령의 통제 속에서도 도시 저항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11]1144년, 교황과 귀족의 권위에 반발한 시민 봉기로 상원 의원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공식적인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다.[11] 상원 의원의 새 궁전은 고대 로마 포룸을 등지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미켈란젤로가 강조하게 될 언덕의 방향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상원 의원 궁전 앞에는 공동 목적을 위한 작은 광장이 조성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길드 재판소가 광장 남쪽에 건설되었고, 15세기에 이 건물은 콘세르바토리(Conservatori)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1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6세기에는 캄피돌리오 광장이 이미 여러 건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콜라 디 리엔초의 개혁 운동 등 도시 저항 운동도 이 언덕에서 벌어졌다.[11]
2. 3. 르네상스 시대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캄피돌리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을 재설계하도록 의뢰했다.[10] 1536년부터 1546년까지 미켈란젤로는 설계를 진행했는데, 이는 1538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줄 새로운 로마의 상징을 만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12]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의 방향을 로마 포룸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쪽으로 전환하여, 교황령 로마의 새로운 중심지임을 강조했다.[12] 이는 도시의 중심을 고대 유적에서 벗어나 새롭게 개발되는 지역으로 옮기려는 의도였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광장 중앙에 배치되었고,[11] 세나토레 궁전은 이중 계단과 함께 복원되었으며, 종탑은 중앙 축으로 이동되었다. 콘세르바토리 궁전도 복원되었고, 광장 북쪽에 누오보 궁전이 신축되어 사다리꼴 광장이 만들어졌다. 광장 앞에는 벽과 난간이 설치되었고, 코르도나타 계단이 광장으로 이어지는 중심 축을 강조했다.[11]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의 사후에도 그의 설계에 따라 17세기에 캄피돌리오가 완성되었다.[14] 포장 설계는 3세기 후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오 광장은 다양한 건물들을 대칭 축으로 통합하여 바로크 건축의 초기 예를 제시했으며, 이는 베르니니의 성 베드로 광장 설계에 영향을 주었다.
3. 캄피돌리오 광장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은 바로크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광장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있는데, 이는 고대 로마 시대의 작품이었으나 현재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캄피돌리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장 주변에는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나토리오 궁전(현 로마 시청사), 누오보 궁전 등이 위치해 있다.[25]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1546년까지 캄피돌리오 광장과 주변 궁전들을 설계했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의뢰를 받아 1538년에 방문할 예정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깊은 인상을 줄 새로운 로마의 상징을 만들고자 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의 고전적인 방향을 반전시켜, 로마의 시민 중심지가 로마 포룸에서 떨어져 교황 로마와 성 베드로 대성당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강조했다.[12]
미켈란젤로는 세나토리오 궁전을 복원하고, 콘세르바토리 궁전을 복원하고, 광장 북쪽에 누오보 궁전을 신축하여 사다리꼴 광장을 만들었다. 광장 앞에는 벽과 난간을 건설하여 도시를 향하는 면에 확고한 경계를 부여했다.[11]
광장, 중앙 궁전, 코르도나타 계단의 순서는 이탈리아 정원 계획을 점유하고 프랑스에서 결실을 맺을 "축의 숭배"를 도시적으로 처음 도입한 것이다.[14]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17세기에 완성되었으며, 포장 설계는 3세기 후에 완성되었다. 에티엔 뒤페락의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의 공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조화로운 사다리꼴 공간을 만들고, 코르도나타라고 불리는 경사 계단으로 광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코르도나타 계단은 방문객을 하늘로 들어 올려 시의 권력 문턱에 내려놓도록 의도되었다.[12]
포장 바닥에 새겨진 트래버틴 디자인은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며, 중앙 부분이 약간 솟아 있어 마치 도시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에 거의 묻혀 있는 거대한 달걀의 노출된 부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16] 열두 개의 점으로 엮인 별은 별자리를 은밀하게 언급하며, "세상의 머리"라는 뜻의 라틴어인 ''Caput mundi''라고 불리는 이 공간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940년에 미켈란젤로의 디자인대로 포장 공사를 완료하도록 명령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중심을 바라보았다. 조각상은 중심과 초점을 제공했고 건물들은 공간을 정의했으며, 캄피돌리오 단지의 인상적인 성과는 건물만큼이나 이 공간이다. 거대한 야외 방으로, 하늘로 열려 있고 다섯 개의 대칭적인 입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지만, 둘러싸여 보호받는 광장이다.[10] 축성(軸性)과 대칭성은 캄피돌리오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미켈란젤로는 또한 중세 시대의 팔라초 델 세나토레에 중앙 종탑, 개조된 파사드, 웅장한 분할된 외부 계단을 제공했다. 그는 기둥이 있는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의 새로운 파사드를 설계했으며, 광장의 반대편에 동일한 구조인 팔라초 누오보를 구상했다. 사다리꼴 평면의 좁은 면에서는 언덕을 아래 도시와 연결하는 웅장한 계단을 통해 중심 축을 연장했다.[17]
그는 로마 시 정부의 두 공식 건물인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나토리오 궁전, 누오보 궁전에 새로운 정면을 제공했다. 미켈란젤로는 낡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에 새로운 파사드를 설계했으며, 누오보 궁전을 거울처럼 보완하도록 설계하여 기존 구조물의 조잡한 앙상블에 균형과 일관성을 부여했다.[10] 이 두 건물의 건설은 그의 사후 토마소 데이 카발리에리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12] 캄피돌리오 디자인 전체에서 유일한 아치형 모티프는 창문 위에 있는 분절된 페디먼트로, 디자인의 완전한 각도 수직-수평 균형에 약간의 탄력을 준다. 이 세 개의 궁전은 현재 캄피돌리오 박물관의 본거지이다.
거대한 기둥머리 위에 조각상이 배치된 난간은 미켈란젤로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인 중 하나를 완성했다. 난간을 장식하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두 개의 거대한 고대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배치한 조각상과는 다른 것으로, 현재는 퀴리날레 궁전 앞에 있다.[6]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면서, 여러 다른 형태의 건물들을 하나의 명확한 대칭 축선상에 통합함으로써, 건축사상 처음으로 바로크적 광장을 창안했다. 이 조경 설계 기법은 후에 미켈란젤로의 뒤를 이은 베르니니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3. 1. 코르도나타 계단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코르도나타는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계단이다.[12] 말을 탄 채로 언덕을 오를 수 있도록 넓게 지어졌다.[25] 계단 입구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사자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고,[25] 계단 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대리석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25]4. 주요 건물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유노 모네타 신전, 비르투스 신전,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캄피톨리누스 신전 등 여러 중요한 신전들이 세워졌다. 이 중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기원전 509년에 지어졌으며 파르테논과 거의 같은 크기로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다.[6]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은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6] 사투르누스 신전은 로마 포룸 서쪽 끝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세워졌다.
알리아 강 전투 이후 기원전 390년, 세노네스 갈리아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 수비대가 요새화하여 야만족의 점령을 피한 유일한 구역이었다.[7] 전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만리우스 캄피톨리누스는 유노의 신성한 로마 거위 덕분에 갈리아족의 공격을 경고받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의 행위에 대한 유피테르의 분노를 나타내는 개선식 중 사고를 당했을 때, 불운한 징조를 피하기 위해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에 무릎을 꿇고 다가갔다.[8] 네 명의 황제의 해 (69년) 동안 형제와 조카가 신전에서 포위되었고, 이로 인해 신전이 불타기도 했다.[9]
광장과 언덕 꼭대기 아래에 있는 타불라리움은 로마의 국가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타불라리움은 뒤쪽에서 로마 포룸을 내다보며, 주요 볼거리는 베이오비스 신전이다.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은 광장에 인접해 있으며, 언덕 꼭대기에 있던 고대 ''아르크스''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 기저에는 로마의 ''인술라'' 유적이 있으며, 거리에서 4층 이상이 보인다.
중세 시대에 언덕의 신성한 기능은 12세기에 코뮌으로 부활한 로마 시민 정부의 중심지로서의 다른 역할에 가려졌다. 1144년, 교황과 귀족의 권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란으로 상원 의원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공식 거주지를 갖게 되었다. 14세기 중반, 길드 재판소가 광장 남쪽에 건설되었고, 15세기에 콘세르바토리(Conservatori)를 수용하게 된다.[11]
미켈란젤로는 로마 시 정부의 공식 건물인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나토리오 궁전, 누오보 궁전에 새로운 정면을 제공했다. 캄피돌리오 디자인 전체에서 유일한 아치형 모티프는 창문 위에 있는 분절된 페디먼트이다. 이 세 개의 궁전은 현재 캄피돌리오 박물관의 본거지이다.
캄피돌리오 언덕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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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콘세르바토리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관리인의 궁전)은 중세 시대에 지역 행정관들의 집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기원전 6세기에 유피테르에게 봉헌된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 위에 세워졌다.[27]미켈란젤로는 콘세르바토리 궁전 개보수 작업을 통해 2개 층으로 뻗어 있는 대 오더를 처음으로 사용했다.[27] 1층의 로자 입구와 2층의 창문 옆에는 코린토스식 필라스터와 이를 보조하는 이오니아식 원주가 배치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새로운 포르티코는 엔타블러처와 평평한 격천정으로 구성되어 옛 양식을 재해석하였다.[27] 기둥에 배치된 엔타블러처는 각 구간 앞에 설치되었고, 조화되는 반기둥은 뒤쪽 벽에 기대어 있다. 각 필라스터는 양쪽에 교각과 원주가 있는 혼합체를 이루며, 거대한 필라스터는 포르티코와 위층과 접하고 있는 넓은 기초를 형성하였다. 모든 창은 분절 페디먼트로 덮여 있다.[27] 천장의 발러스트레드는 전체적으로 강한 수평성을 강조하며, 수직을 이루는 원주들과 웅장한 대비를 이룬다.[28] 거대한 기둥의 수직성은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만들고, 엔타블러처와 발러스트레드의 수평성은 광장의 세로축을 강조한다. 궁전의 파사드는 1530년대에 미켈란젤로가 보수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다.[27]
로마에서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포르티코는 여러 길드들을 보호했다. 재판소에 갈 만큼 중요하지 않은 사업 상 분쟁은 이곳에서 판정을 내렸다.[29] 1470년대까지 로마의 주요 시장은 캄피돌리오 일대에서 열렸고, 캄피돌리오 남쪽의 옛 포룸에서 가축에 대한 세금 부과 및 매매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29]
현재 콘세르바토리 궁전은 캄피돌리오 박물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4. 2. 세나토리오 궁전 (로마 시청사)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이중 계단이 특징인 세나토리오 궁전은 13세기와 14세기에 지어졌으며, 고대 로마의 기록 보관소였던 타불라리움 위에 자리 잡고 있다.[21] 타불라리움의 페페리노 석재는 궁전 왼쪽과 종탑의 한 모퉁이에 재사용되었다. 현재 이곳은 18세기에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가 원로원 의원 아본디오 레초니코를 위해 거주지로 개조한 후 로마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21]궁전으로 이어지는 이중 계단은 궁전 오른쪽에 있던 오래된 계단과 2층 로지아를 대체했다. 이 계단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광장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11] 각 날개 중앙에서 시작하는 계단은 안쪽 모퉁이에 도달할 때까지 완만하게 위로 올라가 수평을 이루며 파사드의 주요 표면으로 물러난다. 그런 다음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웅장하게 이어져 2층 중앙 출입구에서 수렴한다.[12] 계단 앞 분수에는 티베르 강과 나일 강의 강신과 데아 로마 (미네르바)가 조각되어 있다. 정면의 상부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했으며, 다른 두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거대한 코린트식 기둥이 특징이다.[22] 종탑은 마르티노 론기 더 엘더가 설계하여 1578년부터 158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현재의 파사드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지롤라모 라이날디가 건설했다.

4. 3. 누오보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과의 대칭을 위해 17세기에 건설된 건물이다.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지어졌으며, 현재 캄피돌리오 박물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10]아라코엘리의 탑을 가리기 위해 1603년에 건설되어 1654년에 완공되었으며, 1734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정면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정면과 동일한데, 이는 한 세기 전에 미켈란젤로가 콘세르바토리 궁전을 재설계했을 때 사용했던 청사진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25]
5. 현대적 의의
캄피돌리오 언덕은 오늘날 로마의 중요한 정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로마 시청사와 캄피돌리오 박물관이 위치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25] 특히,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과 건물들은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1546년까지 교황 바오로 3세의 의뢰를 받아 캄피돌리오 광장과 주변 궁전들을 설계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깊은 인상을 줄 새로운 로마의 상징을 만들고자 했다. 미켈란젤로는 고전적인 방향을 반전시켜, 도시의 중심지가 로마 포럼에서 벗어나 성 베드로 대성당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계했다.[12]
코르도나타라고 불리는 경사 계단은 방문객을 광장으로 이끌도록 설계되었다.[12] 광장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배치되었고,[11] 주변에는 세나토레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 누오보 궁전이 배치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17세기에 완성되었으며, 포장 디자인은 1940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완성되었다.[16]
캄피돌리오 광장은 건축사상 처음으로 바로크적 광장을 창안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설계 기법은 베르니니의 성 베드로 광장 설계에 영향을 주었다.[25]
6. 한국과의 관계
캄피돌리오 언덕은 한국의 역사 및 문화 유적과 비교하여 그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왕궁인 경복궁은 캄피돌리오 언덕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였다.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표출하는 공간인 광화문 광장은 캄피돌리오 광장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역사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캄피돌리오 언덕의 보존 및 활용 방안을 연구하고, 한국의 문화 유산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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