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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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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컬러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짐바브웨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혼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인종 분류의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복잡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케이프 컬러드, 그리콰족 등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며, 아프리칸스어를 주로 사용하고 서구식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유전적으로는 다양한 인종의 혼합 양상을 보이며, 사회, 문화적으로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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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민족명컬러드
다른 이름Coloured (영어)
Kleurling (아프리칸스어)
갈색 사람들 (Brown people) (영어)
Bruin mense (아프리칸스어)
인구남부 아프리카에서 약 5,600,000명
주요 거주 지역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5,052,349명 (2022년 인구 조사)
나미비아 인구107,855명 (2023년 인구 조사)
짐바브웨 인구14,130명 (2022년 인구 조사)
잠비아 인구3,000명 (2012년 인구 조사)
사용 언어아프리칸스어
영어
코사어
츠와나어
종교주로 기독교, 소수 이슬람교
관련 민족아프리카인
물라토
백인 남아프리카인
아프리카너
보어인
케이프 네덜란드인
케이프 컬러드
케이프 말레이
그리콰
산족
코이코이족
줄루족
코사족
세인트헬레나인
레호보트 바스터
츠와나족
이미지
케이프타운, 킴벌리, 프리토리아 출신의 확장된 컬러드 가족
케이프타운, 킴벌리, 프리토리아 출신의 확장된 컬러드 가족
추가 정보
추가 설명남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적 기원을 가진 혼혈 민족 집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문화적,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줌
역사적 배경식민지 시대의 인종 혼합에서 기원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인종 차별 정책의 대상
현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요한 인구 집단 중 하나

2. 역사적 배경

2. 1.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양한 문화, 부족, 인종, 종교, 국적 때문에 '무지개 국가'로 알려져 있다.[13]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색 인종들은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있는 국가의 여러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조상을 가지고 있다.[14]

유색 인종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이전 정책에 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02년에 설립된 아프리카 정치 조직(African Political Organisation)은 유색 인종 회원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지도자였던 압둘라 압두라만(Abdullah Abdurahman)은 수년 동안 유색 인종의 정치적 노력을 결집했다.[71] 많은 유색 인종이 나중에 아프리카 민족 의회(African National Congress)와 남아프리카 연합 민주 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에 합류했다. 이러한 조직이든 다른 조직이든 많은 유색 인종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유색 인종의 정치적 권리는 지역과 시간에 따라 달랐다. 19세기에는 이론적으로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에서 백인과 유사한 권리를 가졌지만(하지만 소득과 재산 자격이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이나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에서는 권리가 거의 없었다. 유색 인종 회원들이 케이프타운 시 당국에 선출되었는데 (수년 동안 압두라만도 포함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의 수립으로 유색 인종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지만, 1930년까지는 백인 대표를 선출하는 데 제한되었다. 그들은 항의의 표시로 빈번한 투표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투표 거부 운동은 1948년 남아프리카 국가당(National Party)의 승리에 기여했을 수 있다. 국가당은 유색 인종의 남은 투표권을 박탈하는 아파르트헤이트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카피르"(Kaffir)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 아프리카인을 가리키는 인종 모욕적인 용어이다. 흑인에 대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유색 인종에 대해 사용되는 것만큼 흔하지는 않다.[72][73]

===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 ===

백인과 코이코이인(コイコイ人)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가 얀 판 리베크(ヤン・ファン・リーベック)의 감독 하에 희망봉(喜望峰)을 개척하면서 처음으로 산발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원래 코이코이인은 목축(牧畜)을 영위하고 있었고, 백인들은 식량 확보와 무역 확대를 위해 그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オランダ領ケープ植民地)가 공식적으로 발족함에 따라 서유럽 출신 백인 남성들에 의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지역에 백인 여성이 거의 없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본국에서 아내를 데려오거나 고아(孤児) 소녀들을 집단으로 보낸 외에, 후에 "케이프 말레이"(ケープマレー)라고 불리게 되는 현재 인도네시아(インドネシア) 지역에서 끌려온 여성 노예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러한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이르지 못했고, 많은 백인 남성들은 부리는 코이코이인이나 노예 여성과 결혼(結婚)하거나 강간(強姦)을 계속했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케이프타운에 여성 노예를 수용한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했고, 여성들은 선원들의 성적 노예(性的奴隷)로 혹사당했다.

이러한 이종족 간의 결혼과 성폭력(性暴力)이 빈발한 결과, 수많은 혼혈아가 태어났고, 이것이 후에 "컬러드"(カラード)라고 불리게 되는 민족 집단, 혹은 케이프타운에서 대규모 컬러드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원이 되었다. 단,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원칙적으로 백인 가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5]

코이코이인은 백인이 자신들의 거주지인 서케이프에 침략했을 때, 조직적인 저항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 대부분이 노예로서 백인에게 복종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코이코이인 사회에서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번한 가뭄(旱魃)을 겪었고, 1713년에는 천연두(天然痘)가 유행하여 면역력이 없는 많은 코이코이인이 사망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겹친 것이 그들이 수 세대에 걸쳐 쌓아온 문화와 부족 조직이 18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03]

물론, 백인에 저항하기 위해 오지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 대부분은 백인 사회에 편입되었다. 산인(サン人)은 코이코이인과는 대조적으로 백인에 대해 강렬한 저항을 계속했지만, 칼라하리 사막(カラハリ砂漠) 등으로 도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백인에게 멸절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1795년 영국(イギリス)이 케이프 식민지(ケープ植民地)를 형성함에 따라, 식민지 정부는 모든 원주민에 대해 대규모 기독교(キリスト教) 선교 활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컬러드의 서구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thumb|크로토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공식적인 인종 간 결혼을 한 최초의 원주민 여성]]

=== 그리콰족 ===

아담 콕 3세(Adam Kok III), 그리콰 유색인들의 지도자


1902년에 설립된 아프리카 정치 기구(African Political Organization)는 주로 컬러드로 구성되었으며, 의사이자 지도자였던 압둘라 압둘라만(Abdullah Abdurahman)은 오랫동안 컬러드의 정치적 노력을 촉진했다. 이후 많은 컬러드가 아프리카 민족 의회나 통일 민주 전선 (남아프리카)(United Democratic Front (South Africa))에 참여하는 등 용감하게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임하게 되었다.

특히 그리쿠아인(Griqua people)은 트레크보어(Trekboers) 남성과 코이산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었지만, 남아프리카 사회 질서에서 혼혈이라는 이유로 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리쿠아인 지도자 아담 콕 1세는 18세기에 케이프타운 외곽에서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고 케이프 식민지 총독으로부터 땅을 제공받은 전 노예였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관할이 아닌 지역을 소유했기에 탈영병이나 도망친 노예 등 다양한 코이코이인들을 계속 숨겨 주었다.

=== 나탈 식민지 ===

1900년대 초 크리스마스 날 농고마(콰줄루-나탈)의 컬러드 공동체


48명의 줄루족 아내와 118명의 혼혈 자녀를 둔 백인 줄루족 족장 존 로버트 던


===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신분증에 따른 백인, 유색인종, 인도인 인구 하위 집단에 대한 설명


컬러드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기반이 된 정책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컬러드의 정치적 권리는 거주지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달랐다. 19세기아프리카너에 의해 건국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에서는 컬러드에게 거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반면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법적으로는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백인과 달리 소득과 재산에 따라 조건이 제한되었고, 이것은 컬러드 사이에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했다. 컬러드 중에는 압둘라만을 포함하여 케이프타운 시의회 의원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됨에 따라, 백인 이외에는 계속해서 선거권은 인정되었지만, 피선거권은 박탈되었다. 이에 반발한 컬러드는 자주 투표 보이콧을 했지만, 이러한 저항 운동은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 (남아프리카)(National Party)의 승리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아파르트헤이트가 제정되어 나중에는 컬러드의 선거권까지 박탈되었다.

정부는 컬러드를 강제 이주 대상으로 삼았고, 특히 케이프타운 6구역(District Six)에서는 불도저를 사용하여 철거를 강요하고, 당시에는 충분한 인프라와 고용 기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케이프 플래츠(Cape Flats)를 새로운 거주지로 정해 이주시켰다. 이것은 컬러드 청소년 사이에 갱단 활동이 만연하는 온상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에도 여러 갱단의 항쟁이 계속되어 현재도 서케이프주의 만성적인 치안 악화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

1950년에 공포된 인구등록법에 따라 “컬러드(coloured)”라는 분류가 법제화되었고, 이후 개정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다.

예를 들어, 코이코이인과 케이프 말레이인은 모두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상호간 통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두 집단을 합쳐도 흑인 인구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혼혈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컬러드”로 분류되었다.

또한, 인도계 남아공인은 처음에는 컬러드의 하위 집단으로 분류되었으나, 후에 법 개정을 통해 “아시아인”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컬러드와는 별개의 독립된 인종으로 규정되었다. 이와 함께, 발타자르 포르스터를 비롯한 아프리카너 보수파를 중심으로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인도인은 아리아인이다”라고 주장했던 점과, 영국계 주민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모어로 사용했던 점, 그리고 인구 규모에서도 백인이나 컬러드에 비해 소수였던 점이 더해져, 인도계 남아공인은 컬러드보다 우대받는 중간 지배층으로 이용되었다.

이처럼 같은 원주민·아시아계 주민 사이에서도 인종에 따라 다른 집단으로 구분하고 상하의 서열을 만들어 낸 것은, 비백인들 사이에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여 아파르트헤이트에 함께 맞서 싸우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그리쿠아인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흑인”이 아닌 “컬러드”임을 자처하게 되었지만, 흑인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신분증인 “돈패스”가 일반적인 컬러드에게는 소지가 의무화되지 않았던 반면, 원주민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그리쿠아인에게는 소지가 의무화되는 등, 컬러드 내에서도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았다.

1956년 요하네스 스트레이덤 총리는 컬러드에게 주어졌던 백인과 동등한 선거권을 박탈하는 동시에, 컬러드에게는 백인과 다른 유권자 명부를 작성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백인 의원을 국회 하원에서는 4명, 케이프 주 의회에서는 2명까지 선출할 권리를 부여하고, 상원에서는 총독에 의해 1명이 임명되는 것을 규정한 유권자 분리 대표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아프리카너 보수파와 흑인으로부터 반발이 일었지만, 활동가들은 컬러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동의했다.

정부는 1958년에 컬러드 문제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1959년에는 컬러드들 자신에 의해 “컬러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설립되었다. 후자에는 27명의 회원이 있었고, 정부와 컬러드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컬러드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백인 자유주의자들과 컬러드 소수 엘리트층의 활동에 대해 일반 컬러드들은 냉담한 시선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유권자 명부에 등록을 거부했고, 컬러드 등록 유권자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후에도 1963년에는 컬러드 교육법이 제정되어 백인과 컬러드 학생은 분리되어 교육을 받게 되는 등, 컬러드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개선되지 않았다.

1968년에 유권자 분리 대표법은 폐지되었지만, 이듬해 1969년에는 컬러드 대표 평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평의회의 임기는 5년이었고, 정부가 지명하는 20명과 소선거구제 하에 컬러드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40명으로 총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백인 유권자의 66.3%가 찬성표를 던진 1983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컬러드와 인도계 주민에 대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허용되어 인종별 삼원제 의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다수파인 흑인은 홈랜드를 “독립”시킴으로써 동국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방책은 남아프리카에서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압력도 있었기에 1990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되기 시작했다.

===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

1994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색인종 유권자의 60% 이상의 지지를 얻었고, 1997년신국민당으로 재편하며 비백인 유권자를 끌어들이려 했다. 이러한 정치적 연합은 국내외에서 혼란스러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반적으로는 백인과 유색인종이 아프리칸스어나 서구식 생활 방식 등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서 유색인종과 흑인의 동일시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점과,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했을 때 긍정적 차별정책으로 인해 자신의 기득권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06]

20세기 후반 이후, 유색인종에 의한 정체성 정치가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유색인종이 많이 거주하는 서케이프주는 민주동맹 등 야당이 부상하며 반 아프리카 민족회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민주동맹은 신국민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등 많은 유색인종의 지지를 얻었다. 2006년 케이프타운 시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동맹이 압승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한 이후, 유색인종은 "충분히 흑인이 아니다"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충분히 백인이 아니다"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던 점을 고려하면, 백인과 흑인 어느 쪽과도 동화될 수 없는 소수 민족이라는 인종적 주변성 문제를 건국 이래 끊임없이 안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06]

2. 1. 1.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이자 가장 큰 규모의 혼혈 결혼은 17세기, 얀 판 리베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도착한 직후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에서 일어났다.[15] 1652년 네덜란드인들이 케이프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그 지역 원주민인 코이코이족을 만났다.[16] 케이프에 정착한 후,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장을 세웠고, 따라서 케이프에서 노예 제도를 시행했다. 일부 코이코이족은 케이프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코이코이족의 저항이 있었고, 이는 코이코이-네덜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17] 이러한 저항의 결과로, 네덜란드인들은 세계 다른 지역, 특히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말레이 사람들과 남아프리카 여러 지역의 반투인으로부터 노예들을 수입했다.[18] 규모는 작았지만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인도,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 및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서도 노예들이 수입되었다.[19] 노예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독교식 이름을 받았지만, 그들의 출신지는 판매 기록 및 기타 문서에 기록되어 있어 서로 다른 지역 출신 노예들의 비율을 추정할 수 있다.[20] 그러나 이 노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져 문화적 정체성을 잃었다.[21]

케이프의 네덜란드 정착민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코이코이족, 남아프리카 반투족, 인도네시아 출신 말레이인 및 케이프의 다른 노예 민족들과 결혼하여 혼혈 자녀를 낳았다.[22] 노예들 사이에서도 인종 간 혼합이 있었고, 노예들이 다른 인종(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합에서 혼혈 자녀들이 태어났다.[22] 미국에서의 일드롭 룰과는 달리, 케이프의 혼혈 아이들은 "백인이 될 만큼 충분히 백인"이거나 "흑인이 될 만큼 충분히 흑인" 또는 "아시아인이 될 만큼 충분히 아시아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따라서 케이프에서 이러한 모든 인종 간 결합으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은 성장하여 서로 결혼하여, 나중에 "케이프 컬러드"로 알려지게 될 자체 공동체를 형성했다.[23]

|thumb|크로토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공식적인 인종 간 결혼을 한 최초의 원주민 여성]]

케이프에서 최초의 인종 간 결혼은 하녀이자 통역관이었고 네덜란드인과 코이코이족 사이의 중요한 중개자였던 코이코이족 여성 크로토아 (네덜란드 이름은 "에바 반 메어호프")와 네덜란드인들이 "피터 반 메어호프"로 개명한 덴마크 외과의사 피터 하브가르드 사이에서 이루어졌다.[24] 3명의 혼혈 자녀를 낳은 크로토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컬러드 공동체를 낳은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25]

프랑스 위그노와 독일인과 같은 더 많은 유럽인과 더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노예들이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함에 따라, 더 많은 인종 간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들의 혼혈 자녀들은 케이프 컬러드 공동체에 흡수되었다.[26][27][28] 케이프의 주요 아시아 노예들은 인도네시아 출신 말레이인이었다.[29] 그들 대부분은 케이프 컬러드 공동체에 인종 간 혼합되었지만, 소수는 그들의 공동체와 문화를 유지했고, 따라서 케이프 말레이로 알려지게 되었다.[30]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동안, 케이프 말레이인들은 유사한 조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가 1950년 인구 등록법: 흑인, 백인, 컬러드 및 인도인의 네 가지 인종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케이프 컬러드의 하위 집단으로 분류되었다.[31] 따라서 많은 케이프 말레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동안 케이프타운의 컬러드 타운십에 살도록 강요받았습니다.[31]

17세기(이 경우 1652년부터 1700년까지)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는 오늘날 케이프타운과 파알, 스텔렌보스, 프랑슈호크와 같은 주변 지역으로만 구성되었다.[32] 그러나 18세기부터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될 때까지 케이프의 영토는 점차 북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었다.[33]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의 확장은 주로 직접적인 내륙 지역의 건조하고 불모의 성격 때문이었으므로, 농부들은 영구적인 물을 공급하는 샘이 있는 곳에만 농장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비옥한 토지를 필요로 했다.[33] 그러나 18세기 동안 케이프를 떠나 카루로 이주한 트렉보어의 이주와 19세기 영국이 케이프를 합병한 후에도 영향을 받았다.[34] 18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의 영토는 오늘날의 스웰렌담에 이르렀고, 네덜란드 지배가 끝날 무렵(1814년 영국 합병 후) 케이프의 영토는 이미 동케이프와 북케이프의 특정 지역에 도달했다.[35] 케이프의 점진적인 확장과 영국, 아일랜드 등 다양한 유럽 국적의 추가 도착으로 인해 더 많은 인종 간 결합이 이루어졌고, 이번에는 북케이프의 백인과 코이산족 사이, 그리고 동케이프의 백인과 코사족 사이에서 더 많은 혼혈 아이들이 태어나 케이프 전체의 컬러드 인구에 더해졌다.[36]

19세기 초 영국이 합병한 후, 케이프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이는 대이주로 이어졌다. 부어들이 케이프를 보어트렉커로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륙으로 이주하여 보어 공화국을 형성했다.[37] 해방된 노예들(케이프 컬러드가 된 사람들) 대부분은 남았습니다. 많은 해방된 노예들은 케이프타운의 6구역으로 알려진 지역으로 이주했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6구역은 더욱 확립되고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그 인구는 주로 케이프 컬러드였지만, 6구역(케이프의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은 다양한 민족, 인종, 국적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다양한 곳이었습니다(흑인, 백인, 케이프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과 같은 아시아 이민자 포함)[38] 이러한 많은 그룹이 케이프 컬러드 공동체에 흡수되었습니다.[39] 케이프는 또한 많은 유럽 이민자들을 끌어들였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케이프 컬러드 공동체와 결혼하여 케이프 컬러드의 조상에 더해졌습니다.[22]

|250px|thumb|전장유전체 데이터를 사용하여 추정한 남아프리카 컬러드 인구의 조상 비율 막대 그래프.[40]

각 세로 막대는 개인을 나타냅니다.]]

결과적으로 케이프 컬러드는 매우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조상을 갖게 되었다.[41] 그러나 케이프 출신 모든 컬러드가 같은 조상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한 가지 유전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케이프 컬러드는 다음과 같은 민족 집단의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42][43][44][45]

여기서 유전적 참조 클러스터 용어인 "코이산" 자체는 식민지 시대에 혼합된 인구 클러스터를 가리키므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남아프리카 원주민 인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L0 해프로그룹 조상으로 종종 구분되는 고대 아프리카 유목민과 사냥꾼 조상에 대한 간단한 참조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동남아프리카 반투"와 같은 다른 원주민 유전적 참조 클러스터 용어의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50]

21세기에 컬러드 사람들은 서케이프(48.8%) 주의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북케이프(40.3%)에서도 많은 소수를 차지하며, 두 지역 모두 수 세기 동안 인구 간 혼합이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동케이프에서는 인구의 8.3%를 차지합니다.

백인과 코이코이인(コイコイ人)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가 얀 판 리베크(ヤン・ファン・リーベック)의 감독 하에 희망봉(喜望峰)을 개척하면서 처음으로 산발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원래 코이코이인은 목축(牧畜)을 영위하고 있었고, 백인들은 식량 확보와 무역 확대를 위해 그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オランダ領ケープ植民地)가 공식적으로 발족함에 따라 서유럽 출신 백인 남성들에 의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지역에 백인 여성이 거의 없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본국에서 아내를 데려오거나 고아(孤児) 소녀들을 집단으로 보낸 외에, 후에 "케이프 말레이"(ケープマレー)라고 불리게 되는 현재 인도네시아(インドネシア) 지역에서 끌려온 여성 노예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러한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이르지 못했고, 많은 백인 남성들은 부리는 코이코이인이나 노예 여성과 결혼(結婚)하거나 강간(強姦)을 계속했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케이프타운에 여성 노예를 수용한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했고, 여성들은 선원들의 성적 노예(性的奴隷)로 혹사당했다.

이러한 이종족 간의 결혼과 성폭력(性暴力)이 빈발한 결과, 수많은 혼혈아가 태어났고, 이것이 후에 "컬러드"(カラード)라고 불리게 되는 민족 집단, 혹은 케이프타운에서 대규모 컬러드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원이 되었다. 단,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원칙적으로 백인 가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5]

코이코이인은 백인이 자신들의 거주지인 서케이프에 침략했을 때, 조직적인 저항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 대부분이 노예로서 백인에게 복종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코이코이인 사회에서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번한 가뭄(旱魃)을 겪었고, 1713년에는 천연두(天然痘)가 유행하여 면역력이 없는 많은 코이코이인이 사망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겹친 것이 그들이 수 세대에 걸쳐 쌓아온 문화와 부족 조직이 18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03]

물론, 백인에 저항하기 위해 오지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 대부분은 백인 사회에 편입되었다. 산인(サン人)은 코이코이인과는 대조적으로 백인에 대해 강렬한 저항을 계속했지만, 칼라하리 사막(カラハリ砂漠) 등으로 도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백인에게 멸절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1795년 영국(イギリス)이 케이프 식민지(ケープ植民地)를 형성함에 따라, 식민지 정부는 모든 원주민에 대해 대규모 기독교(キリスト教) 선교 활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컬러드의 서구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2. 그리콰족



17세기와 18세기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에서 주로 서유럽인, 특히 네덜란드인과 코이코이족 사이에서 일어난 인종 간 결합으로 혼혈 인종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그리콰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1] 그리콰족의 조상은 콕(Koks) 씨족과 바렌드세(Barendse) 씨족 두 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자는 주로 코이코이족으로 구성되었고 후자는 혼혈 유럽계 혈통이었다.[52] 21세기에 이루어진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그리콰족은 코사족, 산족, 그리고 트스와나족 혈통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53] 그리콰족을 케이프 유색인종과 구분 짓는 것은 그리콰족에게는 아시아계 혈통이 없다는 점이며, 서구와 아시아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케이프 유색인종과 달리 그리콰족은 코이코이족의 생활 방식, 특히 아프리카 생활 방식을 더욱 고수했다는 점이다.[54]

'그리콰'라는 이름 자체는 차리아구리콰(Chariaguriqua)족의 공주가 최초의 그리콰 지도자 아담 콕(Adam Kok)의 아내가 된 것에서 유래되었다.[55] 케이프 식민지에서 발생한 차별과 천연두로 인해, 아담 콕(해방된 노예이기도 한 그리콰 지도자)은 그리콰족을 이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리퀄랜드 서부와 그리퀄랜드 동부의 두 그리콰 국가를 건설했다.[54] 그리퀄랜드 서부는 현재의 북케이프주에 위치했고, 그리퀄랜드 동부는 현재의 콰줄루-나탈주와 동케이프주 사이에 위치했다.[55] 불행히도, 이번에는 영국 통치하에 있던 케이프 식민지의 확장으로 두 그리콰 국가는 존재를 멈추고 케이프 식민지에 병합되었다.[51]

아파르트헤이트 정권(1948-1994) 기간 동안, 그리콰족은 혼혈 혈통 때문에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었고, 집단 지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색인종 공동체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56]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정책과 인종 계층 때문에, 많은 그리콰족은 그리콰 뿌리가 다른 집단보다 낮은 수준으로 놓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색인종"이라는 분류를 받아들였다.[57] 그 결과, 그리콰 인구의 실제 규모를 추정하고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전히 알 수 없다.[58]

그리콰족은 (역사적인 이동으로 인해) 전국에 흩어져 있지만, 북케이프주의 그리크와스타드(Griekwastad) 지역, 콰줄루-나탈주의 콕스타드(Kokstad) 지역, 그리고 서케이프주의 크란스호크(Kranshoek) 지역 출신 유색인종 대다수는 직접적으로 그리콰족이거나 그리콰족의 후손이다.[59]

2. 1. 3. 나탈 식민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 간 결혼 및 혼혈은 19세기와 20세기 초 나탈 식민지(현재의 콰줄루-나탈주)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60] 이 시기에는 주로 영국인/아일랜드인과 줄루족/코사족 사이의 혼혈이 발생했으며, 영국인과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사이의 혼혈, 세인트헬레나모리셔스 출신 이민자들의 현지 결혼도 이루어졌다.[61][62]

혈액형 표현형 및 유전자 빈도 연구에 따르면, 나탈 컬러드 인구는 약 40% 흑인, 30% 백인, 30% 인도(아시아) 유전자의 혼합으로 구성되어 있다.[63]

보어 공화국 나탈리아 공화국이 영국에 의해 합병된 후, 1845년 나탈이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인들이 나탈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해안 지역(더반, 스탠저 등)에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했고, 이 농장들은 집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64] 현지 줄루족으로부터 노동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영국은 나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인도인 노동자 수천 명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65]

케이프의 네덜란드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나탈의 영국 정착민들 대부분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수가 줄루 여성과 결혼했고 일부는 인도인과 결혼하여 혼혈 자녀가 생겼고, 결국 나탈의 혼혈 인종도 '컬러드'가 되었다.[66] 때로는 줄루 여성과 자녀를 낳은 백인 관리들이 혼혈 자녀를 그 지역의 컬러드 가정에 맡기기도 했다.[66] 다른 경우에는 '움룽구'(백인)와 혼혈 자녀를 낳은 아프리카 여성이 스스로 아이를 포기하기도 했다.[66] 이러한 방식으로 인종 간 연합과 결혼이 일반화되었고, 별개의 공동체가 성장했다. 이러한 모든 인종 간 연합의 후손들은 농고마, 에쇼우, 만데니, 만게테, 응카베니, 우무지와반투, 이지응콜웨네에 남아 있다.[66]

나탈에서 인종 간 결혼을 한 영국 남성 중 일부는 일부다처제를 실천하여 여러 명의 줄루족 아내를 두었고, 다른 일부는 여러 명의 줄루족 첩을 두었다.[66] 이것의 완벽한 예는 스코틀랜드계 부모를 둔 백인 상인이었던 존 로버트 던으로, 그는 48명의 줄루족 아내와 118명의 혼혈 자녀를 둔 줄루족 족장이 되었으며, 그의 대부분의 혼혈 후손(나탈에서 '컬러드'가 된)들은 오늘날 콰줄루-나탈주에 살고 있다.[67] 일부다처제를 실천한 또 다른 영국인은 네 명의 줄루족 아내와 여러 명의 혼혈 자녀를 둔 헨리 핀이다.[68] 헨리 오글(요크셔 출신 영국 상인)은 제이니라는 영국인 아내와 결혼하여 헨리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움코마스 근처 그의 족장촌에서 줄루족 첩들과 여러 명의 혼혈 자녀를 낳았다.[69]

2. 1. 4.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20세기 후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동안, 정부는 법으로 정의한 4개의 주요 인종 집단 중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컬러드(Coloured)"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백인 우월주의를 강요하고 인종적 분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다. 개인은 백인 남아프리카인(공식적으로 "유럽인"으로 분류됨), 흑인 남아프리카인(공식적으로 "원주민", "반투" 또는 단순히 "아프리카인"으로 분류되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함), 컬러드(혼혈), 그리고 인도인(공식적으로 "아시안"으로 분류됨)으로 분류되었다.[7]

191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조사는 국가 내 인종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인구 조사의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 중 하나는 조사원에게 개인을 다른 인종 범주로 분류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 사항이었다. "컬러드 인(coloured persons)" 범주는 모든 혼혈 인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여기에는 호텐토트, 부시맨, 케이프 말레이, 그리콰, 코라나, 크리올, 흑인, 그리고 케이프 컬러드와 같은 다양한 민족 집단이 포함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컬러드 인"을 별개의 인종 집단으로 분류하라는 지시 사항에 흑인으로 일반적으로 불리는 아프리카계 인종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70]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는 케이프 말레이와 케이프 컬러드를 포함한 다양한 컬러드 하위 집단을 인정했지만, 컬러드 인구는 다양한 조상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적으로 단일 집단으로 취급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많은 그리콰 사람들은 그러한 분류의 이점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동안 스스로를 "컬러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컬러드는 흑인 인구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된 신분증인 "돔파스(dompas)"를 휴대할 필요가 없었지만, 혼혈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아프리카 집단으로 여겨진 그리콰 사람들은 휴대해야 했다.

유색 인종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이전 정책에 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02년에 설립된 아프리카 정치 조직(African Political Organisation)은 유색 인종 회원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지도자였던 압둘라 압두라만(Abdullah Abdurahman)은 수년 동안 유색 인종의 정치적 노력을 결집했다.[71] 많은 유색 인종이 나중에 아프리카 민족 의회(African National Congress)와 남아프리카 연합 민주 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에 합류했다.

유색 인종의 정치적 권리는 지역과 시간에 따라 달랐다. 19세기에는 이론적으로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에서 백인과 유사한 권리를 가졌지만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이나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에서는 권리가 거의 없었다.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의 수립으로 유색 인종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지만, 1930년까지는 백인 대표를 선출하는 데 제한되었다. 그들은 항의의 표시로 빈번한 투표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투표 거부 운동은 1948년 남아프리카 국가당(National Party)의 승리에 기여했을 수 있다.

"카피르"(Kaffir)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 아프리카인을 가리키는 인종 모욕적인 용어이다. 흑인에 대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유색 인종에 대해 사용되는 것만큼 흔하지는 않다.[72][73]

유색인종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도시 케이프타운 지역의 식스 지구(District Six)에서 유색인종들을 이주시켰고, 그 지역은 나중에 불도저로 파괴되었다. 그들이 강제로 떠나야 했던 다른 지역으로는 콘스탄티아, 클레어몬트,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이 있다. 주민들은 케이프 플래츠(Cape Flats)의 대도시 지역 내 인종별로 지정된 구역으로 이주되었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유색인종들은 백인들보다 열악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흑인 남아프리카인들에게 제공된 교육보다 나았다.

"북방의 사자"로 알려진 J. G. 스트리돔(J. G. Strijdom)은 국민당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색인종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54년 배심원 제도에서 유색인종의 참여가 제거되었고, 케이프 주(Cape Province)에서 공통 유권자 명부에 대한 참여를 폐지하려는 노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1956년에 이루어졌다.

1958년 선거부터 유색인종들은 하원과 의회에서 별도의 유권자 명부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4명의 백인을 하원에 선출할 수 있었다. 2명의 백인은 케이프 주 의회(Cape Provincial Council)에 선출되었고, 총독은 상원 의원 1명을 임명할 수 있었다. 연합당과 더 자유주의적인 야당에서 흑인과 백인 모두 이 조치에 반대했다. 횃불 사령부(Torch Commando)가 두드러졌고, 검은 띠(Black Sash) (거리 모퉁이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똑같은 옷을 입은 백인 여성들) 또한 목소리를 냈다.

많은 유색인종들이 새로운 유권자 명부에 등록을 거부했고 유색인종 유권자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다음 선거에서 그들 중 50.2%만 투표했다. 그들은 백인 대표에게 투표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무의미한 일로 여겼다.

인구 등록법(Population Registration Act)이 개정되면서 유색인종은 케이프 유색인종(Cape Coloureds), 케이프 말레이인(Cape Malays), "기타 유색인종"을 포함한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공식적으로 분류되었다. 소규모 남아프리카 중국인(Chinese South African) 공동체의 일부도 유색인종 하위 집단으로 분류되었다.[74][75]

1958년 정부는 유색인종 사무국을 설립했고, 1959년에는 유색인종 사무 연합을 설립했다. 후자는 27명의 회원을 두고 정부와 유색인종 사이의 자문 역할을 했다.

1964년 유색인종 대표 평의회(Coloured Persons Representative Council)는 헌법적 문제로 드러났다. 1969년 유색인종들은 정부가 임명한 20명을 보충하기 위해 40명을 평의회에 선출하여 총 60명이 되었다.

1983년 국민투표에서 백인 유권자의 66.3%가 개헌을 지지함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어 유색인종과 인도인 소수 민족이 삼원제(tricameral) 의회에서 별도의 하급원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별도의 제도는 1990년부터 최초의 보편적 선거를 치르기까지 이루어진 협상을 통해 제거되었다.

1950년에 공포된 인구등록법에 따라 “컬러드(coloured)”라는 분류가 법제화되었고, 이후 개정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다.

코이코이인과 케이프 말레이인은 모두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상호간 통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두 집단을 합쳐도 흑인 인구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혼혈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컬러드”로 분류되었다.

인도계 남아공인은 처음에는 컬러드의 하위 집단으로 분류되었으나, 후에 법 개정을 통해 “아시아인”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컬러드와는 별개의 독립된 인종으로 규정되었다. 발타자르 포르스터를 비롯한 아프리카너 보수파를 중심으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인도인은 아리아인이다”라고 주장했던 점과, 영국계 주민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모어로 사용했던 점, 그리고 인구 규모에서도 백인이나 컬러드에 비해 소수였던 점이 더해져, 인도계 남아공인은 컬러드보다 우대받는 중간 지배층으로 이용되었다.

같은 원주민·아시아계 주민 사이에서도 인종에 따라 다른 집단으로 구분하고 상하의 서열을 만들어 낸 것은, 비백인들 사이에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여 아파르트헤이트에 함께 맞서 싸우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그리쿠아인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흑인”이 아닌 “컬러드”임을 자처하게 되었지만, 흑인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신분증인 “돈패스”가 일반적인 컬러드에게는 소지가 의무화되지 않았던 반면, 원주민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그리쿠아인에게는 소지가 의무화되는 등, 컬러드 내에서도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았다.

1956년 요하네스 스트레이덤 총리는 컬러드에게 주어졌던 백인과 동등한 선거권을 박탈하는 동시에, 컬러드에게는 백인과 다른 유권자 명부를 작성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백인 의원을 국회 하원에서는 4명, 케이프 주 의회에서는 2명까지 선출할 권리를 부여하고, 상원에서는 총독에 의해 1명이 임명되는 것을 규정한 유권자 분리 대표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아프리카너 보수파와 흑인으로부터 반발이 일었지만, 활동가들은 컬러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동의했다.

정부는 1958년에 컬러드 문제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1959년에는 컬러드들 자신에 의해 “컬러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설립되었다. 후자에는 27명의 회원이 있었고, 정부와 컬러드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유권자 명부에 등록을 거부했고, 컬러드 등록 유권자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후에도 1963년에는 컬러드 교육법이 제정되어 백인과 컬러드 학생은 분리되어 교육을 받게 되는 등, 컬러드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개선되지 않았다.

1968년에 유권자 분리 대표법은 폐지되었지만, 이듬해 1969년에는 컬러드 대표 평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평의회의 임기는 5년이었고, 정부가 지명하는 20명과 소선거구제 하에 컬러드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40명으로 총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백인 유권자의 66.3%가 찬성표를 던진 1983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컬러드와 인도계 주민에 대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허용되어 인종별 삼원제 의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다수파인 흑인은 홈랜드를 “독립”시킴으로써 동국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방책은 남아프리카에서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압력도 있었기에 1990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되기 시작했다.

2. 1. 5.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1994년 전 인종 선거에서, 유색인종들은 국민당에 대거 투표했다. 국민당은 비백인 다수와의 첫 경쟁에서 20%의 득표율과 새로운 서케이프주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는데, 이는 케이프 유색인종의 지지 덕분이었다. 국민당은 1996년 드 클레르크의 퇴임 후 신국민당으로 재편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비백인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가까워졌다. 이러한 정치적 동맹은 백인과 유색인종 신국민당 당원들이 아프리카어를 사용하는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다는 점, 그리고 두 집단 모두 흑인 남아프리카인들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는 차별적 우대 조치 프로그램에 반대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일부 유색인종들은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정부의 지도권을 잡으면 시정부 일자리 접근과 같은 기존의 특권을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워했다.

2005년 신국민당이 ANC에 흡수된 후, 유색인종 유권자들은 일반적으로 민주동맹에 끌렸고, 일부는 프라이하이트프론트 및 패트리샤 드 릴의 독립민주당과 같은 소수 정당을 선택했으며, ANC에 대한 지지는 미온적이었다. 20세기 후반 이후로 유색인종의 정체성 정치가 영향력이 커졌다. 서케이프주는 민주동맹(DA)과 같은 야당의 부상의 중심지였으며, 이 당이 지배적인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상대로 지지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지역으로 여겨진다. 민주동맹은 일부 전 신국민당 유권자들을 끌어들였고 상당한 유색인종의 지지를 얻었다. 신국민당은 2004년 선거에서 붕괴되었다. 유색인종의 지지는 2006년 케이프타운 시장 선거에서 민주동맹의 승리에 기여했다.

2011년 현재 해산된 독립민주당의 기반 위에서 케이프타운 시장이 된 패트리샤 드 릴은 유색인종이라는 꼬리표를 사용하지 않지만, 많은 관찰자들은 외모로 보아 그녀를 유색인종으로 간주한다. 독립민주당은 유색인종의 표를 얻으려고 했고, 특히 유색인종 거주 비율이 높은 서케이프주의 지역에서 2006년 시 및 지방 선거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급진적인 피터 마라리스(전 신국민당 지방 지도자)는 자신의 신노동당을 유색인종의 정치적 목소리로 묘사하려고 했다.

유색인종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이전, 도중,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지하고 그 구성원이었다. 주목할 만한 정치인으로는 에브라힘 라술(전 서케이프주 총리), 비아트리스 마쇼프, 존 슈르만, 앨런 헨드릭세 및 오랫동안 재무장관을 지낸 트레버 마누엘이 있다. 민주동맹은 2009년 전국 및 지방 선거에서 서케이프주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 후 독립민주당과 연합을 맺었다.

ANC는 노동 조합과 관련된 유색인종 유권자들과 중산층 유색인종 유권자들 사이에서 특히 유색인종 표를 얻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 유색인종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는 "백인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ANC 시대에는 "흑인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는 말로 ANC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76] 2004년 선거에서 유색인종 지역의 유권자 무관심이 높았다.[77] ANC는 핵심 흑인 아프리카인 지지 기반의 점점 더 국수주의적인 경제적 열망과 서케이프주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겠다는 야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색인종의 지지가 필요하다.[12]

1994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색인종 유권자의 60% 이상의 지지를 얻었고, 1997년신국민당으로 재편하며 비백인 유권자를 끌어들이려 했다. 이러한 정치적 연합은 국내외에서 혼란스러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반적으로는 백인과 유색인종이 아프리칸스어나 서구식 생활 방식 등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서 유색인종과 흑인의 동일시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점과,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했을 때 긍정적 차별정책으로 인해 자신의 기득권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유색인종에 의한 정체성 정치가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유색인종이 많이 거주하는 서케이프주는 민주동맹 등 야당이 부상하며 반 아프리카 민족회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민주동맹은 신국민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등 많은 유색인종의 지지를 얻었다. 2006년 케이프타운 시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동맹이 압승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한 이후, 유색인종은 "충분히 흑인이 아니다"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충분히 백인이 아니다"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던 점을 고려하면, 백인과 흑인 어느 쪽과도 동화될 수 없는 소수 민족이라는 인종적 주변성 문제를 건국 이래 끊임없이 안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06]

2. 2. 짐바브웨

짐바브웨의 컬러드는 쇼나족이나 데벨레족, 영국과 아프리카너 정착민, 그리고 아랍인과 아시아인의 후손이다. 짐바브웨와, 다소 덜하지만 잠비아에서도 혼혈 인종을 가리키는 데 "컬러드(Coloured)" 또는 "고팔(Goffal)"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아프리카인과 영국인 또는 아프리카인과 인도인의 혼혈 후손이다. 일부 컬러드 가족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케이프 컬러드 이주민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후손이다.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백인 중심 정부 하에서 컬러드들은 완전한 투표권을 포함하여 흑인 아프리카인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지만, 여전히 사회적 차별을 겪었다.

3. 인종적 정체성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근 국가들에서 소수 백인 정권은 역사적으로 비백인들을 백인으로부터 격리하는 정책을 취했다. 혼혈 인종들은 각자가 형성된 인종적, 역사적 배경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컬러드(coloured)'로 일괄 분류되었다.

19세기 말경 코이코이인이나 옛 노예 및 그 후손인 컬러드들은 사회적 지위, 아프리칸스어를 공통어로 사용하는 것, 생활 공간의 근접성 등의 요소에 의해 '원주민'과는 구별되는 '컬러드'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제정되었고, 정부는 '컬러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법으로 정의된 4개의 주요 인종 집단 중 하나로 규정했다. 이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은 '백인', '아시아인(주로 인도계 주민)', '컬러드',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많은 컬러드들은 백인에 대한 근접성을 강하게 원하면서도 '충분히 백인이 아닌' 것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백인 조상이 있는 가정에서는 그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집에 사진을 걸어두기도 했다. 또한 외모 면에서도 카포이드와 관련된 외모가 차별의 대상이 된 데 따라 많은 여성들이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고, 부유층 중에는 코를 성형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컬러드의 인종 의식은 '백인'에 가까워짐으로써 더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물질적인 유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백인과 피부색이 밝은 컬러드의 결혼도 드물지 않았고, 인구 등록법에서 '컬러드'가 아닌 '백인'으로 분류되어 백인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1991년에 인구 등록법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4개의 민족 집단은 여전히 강한 인종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어느 집단의 구성원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화나 흑인 경제력 강화 정책에서 대표되는 적극적 차별 수정 조치와 같은 정부 정책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유전적 특징

컬러드는 유전학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다양한 인종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종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모, 형제, 친척 간에도 외모가 크게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98] “컬러드(Coloured)”라는 명칭은 아파르트헤이트 시행 하에 법적으로 정의된 인종 분류에서 유래한다.[104]

미토콘드리아 DNA 해프로그룹과 Y염색체 해프로그룹 연구에 따르면, 케이프 컬러드의 모계는 대부분 카포이드(Capoid)에 기원을 두는 반면, 부계는 45.2%가 콩고이드(Congoid), 37.3%가 서유럽, 17.5%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 기원하는 것으로 나타나 성적으로 치우친 혼혈 양상을 보인다.[99]

콰줄루-나탈 주의 컬러드는 주로 영국인 정착민 남성과 줄루족 여성의 혼혈로 여겨지지만, 모리셔스세인트헬레나를 비롯하여 아일랜드, 독일, 인도, 코사족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100][101] 짐바브웨의 컬러드는 쇼나족과 데베레족, 영국인과 아프리카너 정착민, 아랍인과 아시아계의 피를 섞고 있다고 여겨진다.[100][101] 마다가스카르인은 말레이인과 반투계 민족의 혼혈임이 유전자 마커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최근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케이프 컬러드의 유전자 비율은 개인차가 있지만, 대략 코이산족 32~43%, 주로 남아프리카 출신의 반투족 20~36%, 현재 베네룩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출신 백인 21~28%,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출신 9~11%로 구성된다.[102]

5. 문화

유색인종 사회에는 많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있다. 이오안 그룹 극단은 케이프타운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한다. 케이프타운에서 매년 1월 2일에 열리는 케이프 클롭세(Kaapse Klopse) 카니발과 케이프 말레이 합창단 및 오케스트라 공연은 도시의 연휴 시즌의 중요한 부분이다. 케이프 클롭세는 올해 초 케이프타운 거리를 따라 노래하고 춤을 추던 여러 경쟁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화려하고 밝은 색상의 의상을 입은 드럼 라인이 경기장에서 공연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열리지만,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연주하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그 못지않게 활기 넘친다. 공연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여러 컬러드인들이 CAPAB(케이프 공연 예술 위원회) 발레단과 오페라단에서 활동했다. 이 사회는 잘 알려진 시인인 아담 스몰(Adam Small), S.V. 페터슨, P.J. 필랜더(P.J. Philander) 등 세 명의 주요 아프리칸스 시인을 배출했다. 1968년에는 컬러드 사회의 문화 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문화·레크리에이션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841년까지는 선교 단체들이 유색 인종 어린이들을 위한 모든 학교 시설을 제공했다.

모든 남아프리카 어린이는 최소 7세부터 16세까지 의무적으로 학교에 다녀야 한다.

초기에는 유색인종들은 주로 반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이었으며, 건축업자, 석공, 목수, 화가로서 케이프의 초기 건설 산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부와 농장 노동자였으며, 후자는 서케이프의 포도주, 과일, 곡물 농장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레이시아인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숙련된 가구 제작자, 재봉사, 협동조합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유색인종들이 제조업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유색인종 어부들이 있으며, 시골의 대부분의 유색인종은 농장 노동자이거나 심지어 농부이기도 하다. 경제 활동 인구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유색인종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경제 활동 인구 중 약 35%의 유색인종 여성이 의류, 섬유, 식품 및 기타 공장에 고용되어 있다.

또 다른 중요한 분야는 서비스업이며, 점점 더 많은 유색인종들이 행정, 사무 및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다. 더 많은 전문직과 관리직이 있다. 유색인종의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1962년에 유색인종 개발 공사가 설립되었다. 이 공사는 사업가들에게 자본을 제공하고, 교육 과정을 제공하고, 쇼핑센터, 공장 등을 설립했다.

5. 1. 언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컬러드 대다수는 아프리칸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소수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78] 영어를 사용하는 컬러드 대부분은 콰줄루-나탈 주(특히 더반)에 거주하는데, 이는 부분적인 영국 유산과 영어화의 영향 때문이다.[23]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출신의 컬러드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데, 이들 국가 또한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이다.[79]

Colin speaking Afrikaans.


아프리칸스어는 17~18세기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에서 다양한 민족과 국적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억양이 섞인 네덜란드어가 말레이어, 포르투갈어, 코이코이어 등과 혼합되어 형성된 언어이다.[83][84] 이러한 혼합 때문에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어의 파생어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언어에서 많은 단어를 차용했다.[85] 카압스어는 17세기 케이프의 노예들이 사용했던 언어로, 아프리칸스어의 더 오래된 방언으로 여겨진다.[87]

모든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컬러드가 네덜란드/아프리카너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88] 일부 컬러드는 다른 유럽 국적과 아프리카 부족의 혼혈이지만, 주로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아프리칸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89][90][91]

드물게 줄루어, 코사어와 같은 반투어나 코이코이어, 코에마나어와 같은 남아프리카의 코이산어를 사용할 수 있는 컬러드도 있다.[78] 코이산어를 사용할 수 있는 컬러드는 대부분 노던케이프주에 거주한다.[93]

아프리카너의 주요 언어가 된 아프리칸스어는 원래 백인 이주가 시작되었던 시절 케이프타운에서 백인과 원주민인 코이코이족 그리고 노예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탄생한 언어였다. 네덜란드인들이 "하이 더치"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한 반면, 코이코이족과 노예들은 "키친 더치"라고 불리는 문법이 간략화된 네덜란드어를 사용했고, 이 "키친 더치"가 코이코이족과 노예 등이 사용하는 언어와 융합되어 아프리칸스어로 정착하게 되었다.[103]

언어2011년 사용 인구비율
아프리칸스어344216474.58%
영어94584720.49%
세츠와나어403510.87%
코사어253400.55%
줄루어237970.52%
세소토어232300.50%
수화118910.26%
이신데벨레어82250.18%
페디어56420.12%
스와티어40560.09%
츠벤다어28470.06%
츠송가어22680.05%
수화57020.12%
해당 없음740431.60%
총계4616401100.0%


5. 2. 생활 양식

기독교도 혼혈인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식 생활 방식을 유지한다. 결혼은 엄격하게 일부일처제이지만, 부부 관계 외의 성관계나 결혼 전 성관계가 발생하기도 하며 가족마다 인식은 다르다. 노동 계층과 농업 계층에서는 영구적인 관계가 있더라도 종종 나중에 공식적으로 인정받거나 아예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평균 가족 규모는 6명으로,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련이 있으며 대가족이 흔하다. 혼혈 아동들은 확대 가족 친척들을 예의상 "아주머니" 또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부유한 가족들은 크고 현대적인 주택에 살지만, 많은 도시 혼혈인들은 국가 소유의 경제적 주택과 저렴한 주택에 의존한다.

초기에는 유색인종들이 주로 반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이었으며, 건축업자, 석공, 목수, 화가로서 케이프의 초기 건설 산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부와 농장 노동자였으며, 특히 서케이프의 포도주, 과일, 곡물 농장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숙련된 가구 제작자, 재봉사, 협동조합원이다. 최근에는 제조업과 건설업에 종사하는 유색인종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유색인종 어부들이 있으며, 시골의 대부분 유색인종은 농장 노동자이거나 농부이다. 제조업은 경제 활동 인구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며, 경제 활동 인구 중 약 35%의 유색인종 여성이 의류, 섬유, 식품 및 기타 공장에 고용되어 있다.

서비스업 또한 중요한 분야이며, 행정, 사무 및 판매직에 종사하는 유색인종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문직과 관리직도 증가 추세이다. 1962년에는 유색인종의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유색인종 개발 공사가 설립되어 사업가들에게 자본을 제공하고, 교육 과정을 제공하며, 쇼핑센터, 공장 등을 설립했다.

케이프 컬러드 어린이들


크리스마스에 케이프타운에서 열리는 케이프 컬러드 행진 밴드의 퍼레이드


케이프타운 등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케이프 컬러드 대다수는 기독교 신자이며, 일반적으로 서구식 생활 방식을 영위하고 있다.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서케이프 주에서는 케이프 컬러드와 말레이계 주민에 의해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1968년 케이프 컬러드 사회의 문화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문화 창조 협의회가 설립된 이후, 말레이계 주민을 중심으로 한 합창단과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많이 생겨났다. 매년 1월 1일에는 케이프타운에서 카프세 클롭세/Kaapse Klopse영어 축제가 열리며, 그들의 공연은 관광의 큰 볼거리가 되고 있다.

5. 3. 예술 및 문학

컬러드 사회에는 많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있다. 이오안 그룹 극단은 케이프타운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한다. 케이프타운에서 매년 1월 2일에 열리는 케이프 클롭세(Kaapse Klopse) 카니발과 케이프 말레이 합창단 및 오케스트라 공연은 도시의 연휴 시즌의 중요한 부분이다. 케이프 클롭세는 올해 초 케이프타운 거리를 따라 노래하고 춤을 추던 여러 경쟁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화려하고 밝은 색상의 의상을 입은 드럼 라인이 경기장에서 공연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열리지만,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연주하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그 못지않게 활기 넘친다. 공연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여러 컬러드인들이 CAPAB(케이프 공연 예술 위원회) 발레단과 오페라단에서 활동했다. 이 사회는 잘 알려진 시인인 아담 스몰(Adam Small), S.V. 페터슨, P.J. 필랜더(P.J. Philander) 등 세 명의 주요 아프리칸스 시인을 배출했다. 1968년에는 컬러드 사회의 문화 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문화·레크리에이션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5. 4. 요리

수많은 남아프리카 요리는 컬러드 인종에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밥보티, 스누크를 기반으로 한 요리, 쿠에시스터, 브레디, 말레이식 로티, 그리고 개츠비는 컬러드 인종과 다른 남아프리카인들의 주식이다.[94]

6.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분포

컬러드로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케이프주에 거주하며, 이 지역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1] 2022년 남아프리카 인구 조사에 따른 주별 컬러드 인구 분포는 다음과 같다.[1]

인구컬러드 비율 (%)주 전체 인구 대비 비율 (%)
동케이프주54774110.847.58
프리 스테이트주781411.552.64
가우텡주4438578.792.94
콰줄루-나탈주1830193.621.47
림포포주184090.360.28
음푸말랑가주321000.640.62
노스웨스트주607201.201.60
노던케이프주56360511.1641.58
서케이프주312475761.8542.07
합계5052349100.08.15


7. 더불어민주당 및 한국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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