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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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컴퍼스 작전은 1940년 12월부터 1941년 2월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벌인 군사 작전이다. 이탈리아가 19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후, 이집트 침공을 시도했으나, 장비와 보급의 열세, 낮은 사기 등으로 인해 영국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영국군은 시디 바라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대파하고, 바르디아, 토브루크 등을 점령하며 리비아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독일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개입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컴퍼스 작전으로 이탈리아군은 13만 명 이상의 포로와 막대한 장비를 잃었으며, 영국군은 500명 사망, 1,373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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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스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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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컴퍼스 작전 |
로마자 표기 | Operation Compass |
이탈리아어 표기 | Battaglia della Marmarica (마르마리카 전투) |
기간 | 1940년 12월 9일 ~ 1941년 2월 9일 |
장소 | 이집트 시디바라니 ~ 리비아 엘아게일라 |
목표 | 이집트 서부 탈환 및 키레나이카 점령 |
결과 | 영국군 승리 |
교전 세력 | |
연합군 | 리비아 아랍군 |
추축군 | 이탈리아령 리비아 |
지휘관 | |
연합군 | 아치볼드 웨이벌 헨리 메이트랜드 윌슨 리처드 오코너 마이클 오무어 크레그 노엘 베레스포드페르세 이븐 맥케이 |
추축군 | 로돌포 그라치아니 주세페 텔레라 (전사) 세바스티아노 갈리나 (포로) 카를로 스파토코 안니발레 베르곤촐리 (포로) 엔리코 피타시 만넬라 (포로) |
병력 규모 | |
연합군 | 36,000명 전차 275대 포 120문 항공기 142기 |
추축군 | 150,000명 장갑차 600대 포 1,600문 항공기 331기 |
피해 규모 | |
연합군 | 500명 전사 1,373명 부상 55명 실종 항공기 26기 격추 |
추축군 | 5,500명 이상 전사 10,000명 부상 133,298명 포로 전차 420대 파괴 포 845문 파괴 항공기 564기 격추 |
작전 배경 | |
관련 전투 | 서부 사막 전역 |
전투 | 마르마리카 전투 |
기타 | |
관련 정보 | 36,000명의 병력으로 150,000명의 이탈리아군을 상대함 |
이탈리아군 포로 | 138,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 발생 |
영국군 사상자 | 1,900명의 영국군 사상자 발생 |
영국군 사상률 | 10%의 영국군 사상률 기록 |
지도 | |
2. 역사적 배경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몇 달 동안 리비아의 이탈리아군과 이집트의 영국 및 영연방 군대 사이에 습격과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무솔리니는 동아프리카 전선 지원과, 영국 본토 공격을 앞둔 독일로부터 영국군 공격 요청을 받고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리비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집트를 침공하여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전쟁 선포 당시, 제5군(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은 리비아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에, 제10군(마리오 베르티 장군)은 동부 키레나이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튀니지의 프랑스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제5군의 부대는 제10군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리비아 총독 이탈로 발보가 아군 오사로 사망하자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라치아니는 기동력이 뛰어난 영국군을 상대로 기계화되지 않은 대규모 이탈리아군이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제10군은 15만 명의 보병, 1,600문의 대포, 600대의 전차와 전차 및 331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4개 군단 규모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장비와 보급 면에서 열세였다.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군 부대의 대부분이 빈약한 화력만을 가진 콩알 전차・경전차밖에 없다는 점, 전차 외 장비도 구식화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군의 생명선인 보급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이집트 침공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수적으로는 영국군을 압도했지만, 대부분 도보 이동 부대였고 기계화율이 낮아 소수이면서도 기계화된 영국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영국군은 병사에게 12일 이상 전선 근무를 금지하고 정기적으로 후방에서 3일간의 완전 휴식을 부여했지만, 이탈리아군 병사는 대부분 2년 이상 연속으로 전선 근무를 계속하는 등 가혹한 상황에 놓여 사기 면에서도 불리했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이러한 군의 반대를 무시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치아노 외무 장관은 작전 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막을 향해 패배를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다."''
1940년 9월 13일, 이탈리아 제10군은 오페라치오네/Operazioneit E 작전으로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군이 진격하자 솔룸에 있던 소규모 영국군은 메르사 마트루 동쪽의 주요 방어 진지로 물러났다. 이탈리아군은 포트 카푸초를 탈환하고 3일 만에 약 95km를 진격하여, 9월 16일에는 시디 바라니를 넘어 16km 떨어진 막틸라에서 진격을 멈췄다. 이들은 참호를 파고 Litoranea Balboit(Via Balbiait)의 연장선인 Via della Vittoriait를 따라 증원군과 보급품을 기다렸다. 막틸라에서 동쪽으로 해안을 따라 24km 떨어진 투마르 이스트, 투마르 웨스트, 니베이와까지 시디 바라니 주변에 5개의 요새화된 야영지가 건설되었고, 다른 야영지는 남서쪽 절벽의 소파피에 건설되었다.
리비아 총군 사령관 그라치아니 원수는 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지휘하는 제10군 중 8만 명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제23군단을 진군시켰다. 영국군은 전선 배치 부대가 3만 명, 팔레스타인 등 후방 배치 부대를 포함해도 6만 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장비와 보급 면에서는 이탈리아군보다 유리했다. 영국군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이탈리아군의 보급선을 늘려 궁핍하게 만들 의도로 군대를 후퇴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초반에 순조롭게 진군했다. 그러나 장비와 보급 부족을 인지한 그라치아니는 시디 바라니에서 군을 멈추고 방어를 명령했다. 무솔리니는 이에 격노했지만, 바돌리오 원수의 동의로 명령은 유지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보급 상황 개선을 위해 인프라 정비와 진지 구축을 명령하고, 무솔리니에게 정예 부대 증원을 요청했다. 무솔리니는 전차 1000량 증원을 약속했지만, 그리스 침공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오코너의 요청으로 병력을 6만 명으로 증강하고, 마틸다 II 보병 전차 50량을 포함한 전차 275량을 증파했다. 또한, 이탈리아 공군이 장악했던 북아프리카 제공권도 탈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군은 시디 바라니 탈환을 위한 컴퍼스 작전을 계획했다.
영국군은 이탈리아의 진격 이후 전력을 증강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리처드 O'코너 중장이 지휘하는 서부 사막군(Western Desert Force, WDF)은 제4 인도 보병 사단과 제7 기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12월 14일부터는 제6 호주 보병 사단이 제4 인도 사단을 대체했다. 영국군은 오드넌스 QF 2파운더 포를 장착한 크루저 Mk I, 크루저 Mk II, 크루저 Mk III 전차와 마틸다 II 보병 전차 대대를 보유하여 이탈리아군 전차보다 우세했다. 특히 마틸다 II 전차의 장갑은 이탈리아 대전차포나 야포로는 관통할 수 없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중장에게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한 제한적인 작전인 컴퍼스 작전을 계획하도록 명령했다. 컴퍼스 작전은 원래 5일간의 기습 작전으로 계획되었지만, 성공적인 작전을 이어갈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졌다. 웨이벌은 11월 28일 윌슨에게 큰 기회가 온다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7지원군은 소파피 주변의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관찰하고, 제7기갑사단이 북쪽 측면을 보호하는 동안 인도 여단과 제7왕립 전차 연대 (제7 RTR)의 보병 전차는 서쪽에서 니베이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니베이와 점령 후, 두 번째 인도 여단과 제7 RTR이 투마르를 공격하고, 마트루 수비대의 셀비 부대는 해안의 막틸라에 있는 적 주둔지를 제압하며, 영국 해군은 막틸라와 시디 바라니를 포격할 계획이었다. 훈련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병사들은 12월 7일까지 작전이 실제 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영국 공군은 이탈리아 비행장을 공격하여 지상에서 29대의 항공기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는 등 북아프리카 제공권을 장악하여 이탈리아 공군을 압도했다.
2. 1. 이탈리아의 북아프리카 진출과 무솔리니의 야망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몇 달 동안 리비아의 이탈리아군과 이집트의 영국 및 영연방 군대 사이에 습격과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무솔리니는 동아프리카 전선 지원과, 영국 본토 공격을 앞둔 독일로부터 영국군 공격 요청을 받고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리비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집트를 침공하여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전쟁 선포 당시, 제5군(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은 리비아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에, 제10군(마리오 베르티 장군)은 동부 키레나이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튀니지의 프랑스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제5군의 부대는 제10군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리비아 총독 이탈로 발보가 아군 오사로 사망하자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라치아니는 기동력이 뛰어난 영국군을 상대로 기계화되지 않은 대규모 이탈리아군이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제10군은 15만 명의 보병, 1,600문의 대포, 600대의 전차와 전차 및 331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4개 군단 규모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장비와 보급 면에서 열세였다.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군 부대의 대부분이 빈약한 화력만을 가진 콩알 전차・경전차밖에 없다는 점, 전차 외 장비도 구식화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군의 생명선인 보급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이집트 침공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수적으로는 영국군을 압도했지만, 대부분 도보 이동 부대였고 기계화율이 낮아 소수이면서도 기계화된 영국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영국군은 병사에게 12일 이상 전선 근무를 금지하고 정기적으로 후방에서 3일간의 완전 휴식을 부여했지만, 이탈리아군 병사는 대부분 2년 이상 연속으로 전선 근무를 계속하는 등 가혹한 상황에 놓여 사기 면에서도 불리했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이러한 군의 반대를 무시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치아노 외무 장관은 작전 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막을 향해 패배를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다."''
2. 2. 이탈리아군의 이집트 침공과 시디바라니에서의 정지
1940년 9월 13일, 이탈리아 제10군은 오페라치오네/Operazioneit E 작전으로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군이 진격하자 솔룸에 있던 소규모 영국군은 메르사 마트루 동쪽의 주요 방어 진지로 물러났다. 이탈리아군은 포트 카푸초를 탈환하고 3일 만에 약 95km를 진격하여, 9월 16일에는 시디 바라니를 넘어 16km 떨어진 막틸라에서 진격을 멈췄다. 이들은 참호를 파고 Litoranea Balboit(Via Balbiait)의 연장선인 Via della Vittoriait를 따라 증원군과 보급품을 기다렸다. 막틸라에서 동쪽으로 해안을 따라 24km 떨어진 투마르 이스트, 투마르 웨스트, 니베이와까지 시디 바라니 주변에 5개의 요새화된 야영지가 건설되었고, 다른 야영지는 남서쪽 절벽의 소파피에 건설되었다.리비아 총군 사령관 그라치아니 원수는 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지휘하는 제10군 중 8만 명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제23군단을 진군시켰다. 영국군은 전선 배치 부대가 3만 명, 팔레스타인 등 후방 배치 부대를 포함해도 6만 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장비와 보급 면에서는 이탈리아군보다 유리했다. 영국군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이탈리아군의 보급선을 늘려 궁핍하게 만들 의도로 군대를 후퇴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초반에 순조롭게 진군했다. 그러나 장비와 보급 부족을 인지한 그라치아니는 시디 바라니에서 군을 멈추고 방어를 명령했다. 무솔리니는 이에 격노했지만, 바돌리오 원수의 동의로 명령은 유지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보급 상황 개선을 위해 인프라 정비와 진지 구축을 명령하고, 무솔리니에게 정예 부대 증원을 요청했다. 무솔리니는 전차 1000량 증원을 약속했지만, 그리스 침공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오코너의 요청으로 병력을 6만 명으로 증강하고, 마틸다 II 보병 전차 50량을 포함한 전차 275량을 증파했다. 또한, 이탈리아 공군이 장악했던 북아프리카 제공권도 탈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군은 시디 바라니 탈환을 위한 컴퍼스 작전을 계획했다.
2. 3. 영국군의 반격 준비
영국군은 이탈리아의 진격 이후 전력을 증강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리처드 O'코너 중장이 지휘하는 서부 사막군(Western Desert Force, WDF)은 제4 인도 보병 사단과 제7 기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12월 14일부터는 제6 호주 보병 사단이 제4 인도 사단을 대체했다. 영국군은 오드넌스 QF 2파운더 포를 장착한 크루저 Mk I, 크루저 Mk II, 크루저 Mk III 전차와 마틸다 II 보병 전차 대대를 보유하여 이탈리아군 전차보다 우세했다. 특히 마틸다 II 전차의 장갑은 이탈리아 대전차포나 야포로는 관통할 수 없었다.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중장에게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한 제한적인 작전인 컴퍼스 작전을 계획하도록 명령했다. 컴퍼스 작전은 원래 5일간의 기습 작전으로 계획되었지만, 성공적인 작전을 이어갈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졌다. 웨이벌은 11월 28일 윌슨에게 큰 기회가 온다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7지원군은 소파피 주변의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관찰하고, 제7기갑사단이 북쪽 측면을 보호하는 동안 인도 여단과 제7왕립 전차 연대 (제7 RTR)의 보병 전차는 서쪽에서 니베이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니베이와 점령 후, 두 번째 인도 여단과 제7 RTR이 투마르를 공격하고, 마트루 수비대의 셀비 부대는 해안의 막틸라에 있는 적 주둔지를 제압하며, 영국 해군은 막틸라와 시디 바라니를 포격할 계획이었다. 훈련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병사들은 12월 7일까지 작전이 실제 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영국 공군은 이탈리아 비행장을 공격하여 지상에서 29대의 항공기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는 등 북아프리카 제공권을 장악하여 이탈리아 공군을 압도했다.
3. 컴퍼스 작전의 전개
3. 1. 이집트 지역 전투
1940년 12월 9일, 영국군은 시디바라니와 주변 이탈리아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영국 해군의 에레버스급 모니터 "테러", 인섹트급 포함 "레이디버드", "에이피스"가 함포 사격으로 이탈리아군 진지를 공격했고, 오코너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기갑 부대를 앞세워 진지를 돌파했다.이탈리아군은 각 진지에서 저항했지만, 영국군의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에 밀려 각개격파당했다. 특히, 이탈리아군 전차 부대는 영국군의 마틸다 II 보병전차 앞에서 분쇄되었으며, 영국군 전차의 손실은 이탈리아 포병대에 의해 격파된 18량이었다. 제7 왕립 전차 연대의 마틸다 II 전차가 서부 사막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사진이 이를 뒷받침한다.

니베이와에서는 12월 9일 오전 8시 30분까지 전투가 종료되었고, 말레티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 2,000명의 이탈리아와 리비아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 투마르 서부에서는 12월 9일 오후 4시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함락되었고, 전차 부대는 투마르 동부로 이동하여 밤까지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제7 기병 연대의 경전차 부대가 시디 바라니에서 부크 부크로 가는 도로를 차단했고, 제11 기병 연대의 장갑차는 더 서쪽으로 이동했다.
결국, 시디바라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3만 8천 명의 포로를 내고 패퇴했다. 사령관 마리오 베르티 장군은 해임되었고, 후임 주세페 텔레라 장군 휘하의 잔여 부대 4만 명은 리비아 국경에서 전선 재건을 시도하게 되었다.
3. 2. 리비아 지역 전투
영국군은 당초 계획과 달리 추격을 계속하여 12월 17일 리비아 국경의 카푸초 요새를 점령했다. 이탈리아군은 의 사상자를 냈으며, 대부분 포로로 잡혔고, 와 를 잃었다. 영국군은 의 사상자를 냈다. 12월 7일, 몰타와 이집트에서 영국 폭격기들이 카스텔 베니토, 베니나, 엘 아뎀에 있는 이탈리아 공군 기지를 공습했다.
바르디아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바르디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지만, 1941년 1월 3일부터 1월 5일까지 아이번 매케이가 지휘하는 제6 호주 사단이 제23 이탈리아 군단(안니발레 베르곤촐리 중장)을 공격했다. 벵골로어 어뢰로 철조망에 틈을 만들고, 곡괭이와 삽으로 대전차호의 측면을 무너뜨린 뒤, 호주 보병과 제7 기갑 연대의 마틸다 II 전차 23대가 이탈리아 방어선을 넘었다. 결국 바르디아의 진지가 함락되어 이탈리아군 4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의 토브루크 점령에서, 1941년 1월 22일, 토브루크 요새는 함락되었다. 제13군단은 제22군단 (엔리코 만넬라)가 방어하는 토브루크를 포위했다. 1월 20일 밤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에 헥터 월러 선장의 지휘를 받는 영국 함선 ''테러''가 토브루크를 포격했다.[1]


벵가지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포위하고 궤멸시켰다. 이탈리아 제10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제벨 아크다르 산맥 동쪽 지역은 제20군단(안니발레 베르곤졸리 중장)이 제60 보병사단 "사브라타"와 바비니 집단을 주둔시켰다. 1월 23일, 제10군 사령관 주세페 텔레라 장군은 제20군단이 남쪽에서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영국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했다.
4. 작전의 결과 및 영향
장소 | 포로 | 전차 | 대포 |
---|---|---|---|
시디 바라니 | 38,289 | 73 | 297 |
시디 오마르 | 900 | 0 | 8 |
바르디아 | 42,000 | 130 | 275 |
토브룩 | 25,000 | 87 | 208 |
메킬리 | 100 | 13 | 0 |
데르나, 벵가지 | 2,000 | 10 | 24 |
벵가지, 아게다비아 | 25,000 | 107 | 93 |
총계 | 133,298 | 420 | 845 |
제7 기갑 사단의 성공은 왕립 전차 연대가 기동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고, 1월 24일에 있었던 바비니 그룹과의 교전은 기갑 사단에 더 많은 포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전차와 보병의 통합이나 대전차포의 공격적인 사용은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사막에는 엄폐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공습을 피하기 위해 분산 배치를 했지만,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보급품 부족과 수송 부족으로 인해, 소강 상태에서는 "조크 부대"(자동화 보병 중대, 야포 포대 및 여러 장갑차로 구성된 소규모 기동 부대)의 사용이 권장되었다.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한 이러한 부대의 성공은 과도한 기대를 낳았고, 독일 항공기와 더 잘 갖춰지고 무장한 병력이 리비아에 도착하면서 그러한 기대는 무너졌다. 제7 기갑 사단은 이탈리아군의 방어적인 사고방식이 영국군이 독일군을 상대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예외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정당화했다고 결론 내렸다.
일련의 전투에서 주둔 중이던 리비아 이탈리아군 23만 명 중 약 13만 명이 손실되었다. 포 845문과 전차 350대도 손실되었고, 영토도 리비아 동쪽으로 밀려나는 결과로 끝났다.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히틀러는 롬멜에게 2개 사단을 맡겨 편성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북아프리카에 파견, 이로 인해 영국 사막군은 일전하여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4. 1. 이탈리아군의 패배와 독일군의 개입
컴퍼스 작전으로 이탈리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시디바라니에서 38,289명, 시디 오마르에서 900명, 바르디아에서 42,000명, 토브룩에서 25,000명, 메킬리에서 100명, 데르나와 벵가지에서 2,000명, 벵가지와 아게다비아에서 25,000명 등 총 133,298명의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전차 420대와 대포 845문 등 수많은 장비를 잃고 리비아 동부에서 쫓겨났다.영국군은 500명 사망, 55명 실종, 1,373명 부상이라는 비교적 적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군사적으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지시 22호(1월 11일)에 따라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Generalleutnantde 에르빈 롬멜)을 파견했다. 1941년 3월 25일, 그라치아니는 가리볼디로 교체되었다. 독일군의 개입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4. 2. 한국의 관점
5. 세부 전투 및 작전
5. 1. 시디바라니 전투
1940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영국군은 지중해 함대의 에레버스급 모니터 "테러"와 인섹트급 포함 "레이디버드", "에이피스"의 함포 사격으로 이탈리아군 진지에 타격을 가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 오코너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6만 명은 기갑 부대를 선두로 시디 바라니를 공격했고, 이탈리아군 진지는 제대로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각개 격파되었다. 마틸다 II 보병전차를 앞세운 영국군에 맞서 이탈리아군 전차 부대는 분쇄되었으며, 영국군 전차 손실은 이탈리아 포병대에 의해 격파된 18량이었다.12월 9일 오전 5시, 포병 부대가 니베이와 요새 야영지에 동쪽에서 1시간 동안 기만 사격을 시작했고, 말레티 부대가 이를 점거하고 있었다. 오전 7시 15분, 사단 포병의 예비 포격이 시작되었다. 제11 인도 보병 여단은 제7 왕립 전차 연대를 예하에 두고, 정찰을 통해 취약한 지점으로 확인된 니베이와를 북서쪽에서 공격했고, 오전 8시 30분까지 니베이와는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말레티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 818명이 사망하고 1,33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0명의 이탈리아와 리비아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56명이었고, 대량의 물품이 노획되었다.
12월 10일, 제16 보병 여단은 제4 인도 사단 예비대에서 전진했고, 제11 인도 여단의 일부와 함께 시디 바라니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노출된 지형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안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포병과 제7 전차 연대의 지원을 받아 오후 1시 30분까지 시디 바라니의 남쪽과 남서쪽 출구를 막는 위치에 있었다. 영국군은 오후 4시에 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고, 밤이 되자 마을이 함락되었다. 제2 리비아 사단과 제4 CC.NN. "3 젠나이오" 사단의 잔존 병력은 제16 보병 여단과 셀비 부대 사이에 갇혔다.
12월 11일, 셀비 부대와 일부 전차는 제1 리비아 사단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저녁이 되자 제4 CC.NN 사단 "3 젠나이오"도 항복했다. 같은 날, 제7 기갑 여단은 부크 부크 지역에서 제4 기갑 여단을 구출하고, 다수의 병력과 대포를 소탕 및 포획하라는 명령을 받고 예비대에서 출동했다. 제7 지원 부대의 정찰대는 라비아에 진입하여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63 보병 사단 "치레네"는 하룻밤 사이에 라비아와 소파피에서 철수했다. 소파피 서쪽에서 이탈리아군을 차단하라는 제4 기갑 여단에 대한 명령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이탈리아군은 절벽을 따라 퇴각하여 할파야에서 이탈리아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결국 포위된 시디 바라니에서는 수비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리비아인 병사들의 조직적인 항복이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이탈리아군 부대 3만 8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는 사망자 2,184명, 부상자 2,287명, 포로 38,000명이었다. 사령관 마리오 베르티 장군은 해임되었고, 후임 주세페 텔레라 장군 휘하의 잔여 부대 4만 명은 리비아 국경에서 전선 재건을 시도하게 되었다.
5. 2. 바르디아 전투
제6 호주 사단(메이저 제너럴 아이번 매케이)은 1941년 1월 3일부터 1월 5일까지 바르디아에서 이탈리아 제23군단(중장 안니발레 베르곤촐리)을 공격했다. 공중 지원, 해군 함포 사격 및 포병 지원을 받으며, 제16 호주 보병 여단은 방어가 취약한 서쪽에서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다. 공병들은 벵골로어 어뢰로 철조망에 틈을 만들고, 곡괭이와 삽으로 대전차호의 측면을 무너뜨렸다. 호주 보병과 제7 기갑 연대의 마틸다 II 전차 23대가 이탈리아 방어선을 넘어 8,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제17 호주 보병 여단은 이 틈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여 2차 방어선까지 도달했다. 이틀째, 제16 호주 보병 여단은 바르디아를 점령하여 요새를 양분했고, 수천 명의 포로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탈리아 수비대 잔존 세력은 요새 북쪽과 최남단 부분만 점령하게 되었다.3일째, 제19 호주 보병 여단이 포병과 남은 6대의 마틸다 전차 지원을 받으며 남쪽으로 진격했다. 제17 호주 보병 여단도 공격에 가담하여 두 여단은 요새 남쪽 구역을 축소시켰다. 북쪽의 이탈리아 수비대는 요새 밖 제16 호주 보병 여단과 제7 지원 부대에 항복했다. 약 25,000명의 포로와 함께 400문의 대포, 130대의 경전차와 중형 전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노획되었다. 이탈리아 측 사상자는 1,703명 사망, 3,740명 부상이었다.
당초 단기 공세 예정이었던 영국군은 추가 진격을 결정하여 17일에는 리비아 국경의 카푸초 요새를 점령했다. 이탈리아군은 바르디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군을 맞이했지만, 이미 보병사단 등이 함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탈리아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군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전력이 약화되었다. 군사 지휘관 베르곤촐리 장군은 한 달 치 물밖에 준비할 수 없었다. 1월 4일, 바르디아 진지가 함락되어 4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었다.
5. 3. 영국의 토브루크 점령
1941년 1월 6일, 제13군단은 제22군단(엔리코 만넬라)이 방어하는 토브루크를 포위했다.[1] 2주 동안 요새를 봉쇄한 후, 1월 20일 밤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에 헥터 월러 선장의 지휘를 받는 영국 함선 ''테러''가 토브루크를 포격했다.[1] 1월 21일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에 영국 포병대가 도시를 포격했고, 7시에 제2/3 호주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이탈리아 방어선에 신속하게 돌파구를 만들었다.[1] 저녁 무렵에는 토브루크의 절반을 점령했다.[1] 1월 22일 해군 사령부가 항복했고, 오후 4시까지 주둔군 사령관 제네랄레 빈첸초 델라 무라도 항복했다.[1] 이탈리아군은 토브루크에서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패퇴했다.5. 4. 베다 폼 전투
1941년 1월 말,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벵가지에서 Via Balbiait를 따라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7기갑사단은 제벨 아크다르 남쪽을 통과하여 제10군 잔여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제6호주사단은 해안 도로를 따라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다. 지형으로 인해 전차 이동 속도가 느려지자, 존 콤베 중령이 이끄는 콤베 부대가 선두로 파견되어 2월 5일 벵가지 남쪽 Via Balbiait에 도착, 도로를 차단했다. 30분 후 이탈리아군 선두 부대가 도착했고, 다음 날부터 도로를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계속했다. 2월 7일, 영국군 증원과 호주군의 압박으로 제10군 잔여 부대가 항복했다. 벵가지에서 아제다비아까지 영국군은 25,000명의 포로, 107대의 전차, 93문의 야포를 노획했다.영국군은 2월 5일에 벵가지를 점령하여 5000명의 이탈리아군을 구속하고 제10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탈리아 제23군단은 포위 돌파를 시도했지만, 수일간의 전투 끝에 궤멸되었고, 지휘관 주세페 텔레라 장군도 전사했다. 이 전투로 컴퍼스 작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5. 5. 기타 작전
이탈리아 주둔군은 솔룸에서 남쪽으로 240km 떨어진 자라부브, 쿠프라 오아시스, 거대한 모래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잘로, 그리고 트리폴리에서 남쪽으로 800km 떨어진 무르주크를 점령하고 있었다. 자라부브 오아시스는 1941년 1월에 공격을 받아 6 기병 연대와 호주 보병 대대에 의해 3월에 점령되었다. 모래 사막의 반대편 남쪽에서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자유 프랑스군이 장거리 사막 그룹(LRDG) 순찰대와 협력하여 쿠프라 오아시스를 공격했다. 쿠프라는 1941년 3월 쿠프라 점령 이후 함락되었다. 더 서쪽인 차드와의 국경에서는 1월에 새로운 장거리 순찰대와 지역 셰이크가 카유기 근처에서 소규모 자유 프랑스군 분견대와 만나기 위해 2,100km를 이동하여 무르주크에 있는 이탈리아 기지를 급습했다. 이 부대는 무르주크를 공격하여 항공기 3대와 격납고 1개를 파괴했고, 프랑스 사령관이 사망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군은 항복했으며, 여러 명의 포로가 잡혔다. 습격자들은 이어서 세 개의 요새에 사격을 가하고 떠났다.
내륙 970km 지점에 이집트, 리비아, 수단의 교차점에 있는 1,800m 고원인 제벨 우웨이네트에는 이탈리아 수비대가 있는 착륙장이 있었다. 이 기지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it)에서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 전초 기지였으며, 우웨이네트에서 수단 와디 할파에 대한 이탈리아의 습격이 가능했다. 조선소와 철도 작업장을 파괴하고 나일강에서 선박을 침몰시키면 하르툼과 카이로 사이의 통신을 차단할 수 있었다. 영국 순찰대는 파야를 방문하여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과 함께 쿠프라 공격을 위한 또 다른 프랑스 분견대와 만났다. 영국군은 항공기에 의해 사격을 받았고 이탈리아 자동-사하라 회사(Auto-Avio-Saharianeit)의 장갑차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아 여러 대의 트럭이 파괴되었다. 르클레르는 쿠프라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남은 영국군은 6,900km의 45일 여정 끝에 카이로로 돌아갔다. 쿠프라는 3월 1일에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4월에는 새로운 LRDG 기지가 되었다.
6. 주요 참전 부대 및 지휘관
6. 1. 이탈리아군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의 제5군은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에, 마리오 베르티 장군의 제10군은 동부의 키레나이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튀니지의 프랑스가 트리폴리타니아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제5군의 부대는 제10군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리비아 총독인 이탈로 발보가 아군 오사로 사망하자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라치아니는 비록 수가 적더라도 기동력이 뛰어난 영국군을 상대로, 기계화되지 않은 대규모 이탈리아군이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제5군으로부터 증원된 후, 제10군은 15만 명의 보병, 1,600문의 대포, 600대의 전차와 전차 및 331대의 항공기로 4개 군단 규모의 전력을 통제했다. 제20군단은 제60 보병 사단 "사브라타"로, 제21군단은 제1 CC.NN. 사단 "23 마르조", 제2 CC.NN. 사단 "28 오토브레" 및 제63 보병 사단 "시렌"으로 구성되었다. 제22군단은 제61 보병 사단 "시르테"를, 제23군단은 제4 CC.NN. 사단 "3 제나이오"와 제64 보병 사단 "카탄차로"를 보유했다.
새로운 리비아 사단 그룹(Gruppo Divisioni Libicheit)은 부분적으로 기동화되고 경장갑을 갖춘 말레티 그룹(피에트로 말레티 장군), 제1 리비아 사단(루이지 시빌레 소장)과 제2 리비아 사단(아르만도 페스카토리 소장)을 포함했다. 말레티 그룹은 1940년 7월 8일 데르나에서 제10군의 주요 기동 부대로서 7개의 리비아 기동 보병 대대, 피아트 M11/39 전차 1개 중대, L3/33 전차 1개 중대, 기동 포병 및 보급 부대로 구성되었다. 8월 29일, 이탈리아에서 더 많은 전차가 도착함에 따라 (리비아 전차 사령부 [발렌티니 대령])가 1전차 그룹 (아레스카 대령) (I 전차 대대 "M"과 XXI, LXI, LXII 전차 대대 "L" ), 2전차 그룹(안토니오 트리비올리 대령) (II 전차 대대 "M" 1개 중대 제외, IX, XX, LXI 전차 대대 "L"), 말레티 그룹 (LX 전차 대대 "L" 1개 중대, II 전차 대대 "M" 1개 중대, 리비아 보병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Raggruppamento Malettiit는 제1 리비아 사단과 제2 리비아 사단과 함께 Regio Corpo Truppe Coloniali della Libiait(리비아 식민지 군단)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12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군 최고 사령관은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였으며, 제10군 사령관은 이탈로 가리볼디였고, 12월 23일부터는 주세페 텔레라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으나 1941년 2월 7일 전사했다.
6. 2. 영국군 및 영연방군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이 지휘하는 중동 사령부는 약 36,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포, 27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공군(RAF)은 2개 비행대대의 호커 허리케인, 1개 비행대대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3개 비행대대의 브리스톨 블렌하임, 3개 비행대대의 비커스 웰링턴, 1개 비행대대의 브리스톨 봄베이로 구성된 142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전투기는 약 46대, 폭격기는 약 116대였다.리처드 오코너 중장이 지휘하는 서부 사막군은 제4 인도 보병 사단(노엘 베레스포드-피어스 소장)과 제7 기갑 사단(마이클 오무어 크리 소장)으로 구성되었다. 12월 14일부터 제6 호주 보병 사단(아이번 매케이 소장)의 병력이 제4 인도 사단을 대체했으며, 제4 인도 사단은 여단 1개를 제외하고 동아프리카로 보내졌다. 영국군은 오드넌스 QF 2파운더 포를 장착한 크루저 Mk I, 크루저 Mk II 및 크루저 Mk III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피아트 M11/39 전차보다 우월했다. 또한, 2파운더 포를 장착한 마틸다 II 보병 전차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틸다의 장갑은 이탈리아 대전차포나 야포로는 관통할 수 없었다.
1940년 12월 9일 기준, 서부 사막군은 약 31,000명의 군인, 120문의 대포, 275대의 전차, 60대의 장갑차로 구성되었다.
1940년 12월 9일 서부 사막군 편성표
- 중동 사령부(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 서부 사막군(중장 리처드 오코너)
- 제1 왕립 서식스 연대 대대(제7 인도 보병 여단 대대)
- 제4 제11 시크 연대 대대(제7 인도 보병 여단 대대)
- 제7 왕립 전차 연대(12월 11일까지, 이후 제6 호주 사단)
- 제2 중형 대공포 연대 왕립 포병
- 제7 중형 야전 연대 왕립 포병
- 제104(에식스 요먼리) 연대 왕립 기마 포병
- 6 × 경 대공포 포대
- 제7 기갑 사단(소장 마이클 오무어 크리 )
- 제4 기갑 여단(여단장 J. A. L. 컨터)
- 제7 퀸즈 오운 후사르 (-1 분대)
- 제2 왕립 전차 연대
- 제6 왕립 전차 연대
- 제7 기갑 여단(여단장 휴 E. 러셀)
- 제3 킹스 오운 후사르
- 제8 킹스 로열 아일랜드 후사르
- 제1 왕립 전차 연대
- 지원 부대(보병 여단)(여단장 윌리엄 고트)
- 제1 대대 킹스 로열 소총 연대
- 제2 대대 소총 여단
- 제1 왕립 기마 포병 연대
- 제4 왕립 기마 포병 연대
- 제11 후사르(앨버트 왕자 직속)(정찰)
- 제3 왕립 기마 포병 연대
- 제106(랭커셔 요먼리) 연대, 왕립 기마 포병(2 × 대전차 포대, 2 × 대공포 포대)
- 제2(체셔) 야전 비행대 왕립 공병대
- 제141 야전 공원 왕립 공병대
- 2 × 왕립 공군 연대 장갑차 중대
- 제4 인도 사단(소장 노엘 베레스포드-피어스, 12월 11일까지)
- 제5 인도 보병 여단(여단장 윌프리드 루이스 로이드)
- 제1 대대, 왕립 퓨질리어 연대
- 제3 대대, 제1 펀자브 연대
- 제4 대대, 제6 라지푸타나 소총 연대
- 1× 대전차 중대
- 제11 인도 보병 여단(여단장 레지날드 세이버리)
- 제1 대대, 제6 라지푸타나 소총 연대
- 제2 대대, 퀸스 오운 캐머런 하이랜더
- 제4 대대, 제7 라지푸트 연대
- 1 × 대전차 중대
- 제16 영국 보병 여단(여단장 시릴 로맥스, 12월 11일까지)
- 제2 대대, 퀸즈 연대
- 제1 대대, 아길 앤 서덜랜드 하이랜더
- 제2 대대, 레스터셔 연대
- 중앙 인도 기병대(제21 킹 조지 5세 직속 기병대)(정찰)
- 제1 대대, 노섬벌랜드 퓨질리어 (기관총병, 1 × 중대)
- 제1 야전 연대 왕립 포병
- 제25 야전 연대 왕립 포병
- 제31 야전 연대 왕립 포병
- 제4 야전 비행대 왕립 공병대
- 제12 야전 비행대 왕립 공병대
- 제18 야전 비행대 왕립 공병대
- 제21 야전 비행대 왕립 공병대
- 제11 야전 공원 왕립 공병대
- 제7 인도 보병 여단(여단장 해럴드 브릭스, 메르사 마트루 주둔군, 2개 대대 분리, 12월 11일까지)
- 제2 대대, 제11 시크 연대(분리)
- 셀비 부대(여단장 아서 셀비)
- 제3 대대, 콜드스트림 근위대
- 1 × 중대 노섬벌랜드 퓨질리어 (기관총병)
- 1 × 중대, 제1 대대, 사우스 스태퍼드셔 연대
- 1 × 중대, 제1 대대, 체셔 연대
- 1 × 소대, 제1 대대 더럼 경보병 연대
- 1 × 분대, 제7 퀸즈 오운 후사르
- 1 × 구역, 제8 야전 연대 왕립 포병
- 1 × 구역, 제107(사우스 노팅엄셔 후사르) 연대, 왕립 기마 포병
- 제6 호주 사단(소장 아이븐 매케이, 12월 11일부터)
- 제16 호주 보병 여단(여단장 아서 앨런)
- 2/1 호주 대대
- 2/2 호주 대대
- 2/3 호주 대대
- 제17 호주 보병 여단(여단장 스탠리 새비지)
- 2/5 호주 대대
- 2/6 호주 대대
- 2/7 호주 대대
- 제19 호주 보병 여단(여단장 호레이스 로버트슨)
- 2/4 호주 대대
- 2/8 호주 대대
- 2/11 호주 대대
- 제6 사단 정찰 연대(정찰)
- 2/1 야전 연대
- 2/2 야전 연대
- 제2/3 야전 연대
- 2/1 야전 중대, 왕립 호주 공병대
- 2/2 야전 중대, 왕립 호주 공병대
- 2/3 야전 중대, 왕립 호주 공병대
제4 인도 사단은 컴퍼스 작전의 첫 번째 부분 이후 추격을 위해 제6 호주 사단과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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