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사막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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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부 사막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과 영국군 및 연합군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고,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면서 양측은 국경을 마주했다. 1940년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역은 컴파스 작전, 토브룩 공방전, 십자군 작전, 가잘라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 등 다양한 전투로 이어졌다.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복잡해졌고, 1943년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역의 결과로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상실했고, 연합군은 이탈리아 전역 및 유럽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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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사막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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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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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서부 사막 전역 |
전체 |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
장소 | 이집트 서부 사막 및 리비아 |
기간 | 1940년 6월 11일 ~ 1943년 2월 4일 |
결과 |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팔레스타인 폴란드 서부군 체코슬로바키아 |
교전국 2 | |
지휘관 | |
연합군 | 리처드 오코너 아치볼드 웨이벌 해럴드 알렉산더 앨런 커닝엄 클로드 오친렉 버나드 몽고메리 |
추축군 | 에르빈 롬멜 게오르그 슈투메 빌헬름 리터 토마 로돌포 그라지아니 이탈로 발보 에토레 바스티코 이탈리오 가리볼디 |
사상자 | |
연합군 (북아프리카) | 220,000명 |
연합군 사망자 (북아프리카) | 35,476명 |
추축군 (북아프리카) | 620,000명 |
추축군 사망자 (북아프리카) | 32,342명 |
2. 배경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으로 영국은 이집트 내 군사력을 수에즈 운하 주변으로 크게 줄였다.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는 영국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 통신하는 데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영국 및 영연방 군대가 이 지역을 수비했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가 된 이탈리아령 리비아는 서쪽으로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일부인 튀니지와, 동쪽으로는 영국령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탈로 발보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 제5군과 이탈리아 제10군을 통해 양쪽 국경을 방어하고자 했다.[1]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지중해 및 중동 전선을 관할하는 새로운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리비아에는 이탈리아 왕립군 약 215,000명이 있었고, 이집트에는 영국군 약 36,000명과 팔레스타인에서 훈련 중인 27,500명이 있었다.
전쟁은 주로 서부 사막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이 지역은 이집트의 메르사 마트루에서 리비아 해안의 가잘라까지 약 약 386.24km 폭이었고, 유일한 포장 도로는 Via Balbia|비아 발비아it였다. 사구는 내륙 약 241.4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지아라부브와 시와에서 가장 넓은 지점에서 사막의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1]
유럽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추축군의 보급품은 육로로 이동했으며, 컴파스 작전(1940년 12월 – 1941년 2월) 이후에는 트리폴리만이 entrepôt|창고프랑스어로 남았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Via Balbia|비아 발비아it를 따라 약 965.60km였으며, 알렉산드리아까지의 중간 지점이었다.
2. 1. 이탈리아령 리비아

키레나이카는 1911년부터 1912년까지 벌어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탈리아령 리비아는 서쪽으로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일부인 튀니지와, 동쪽으로는 영국령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인 이탈로 발보의 지휘 하에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통해 양쪽 국경을 방어하고자 했다.[1]
당시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는 이탈로 가리볼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제5군과 마리오 베르티가 이끄는 이탈리아 제10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0년대 중반, 이들 군단은 약 13,000명 규모의 본국 사단 9개, 3개의 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it (흑셔츠 사단), 그리고 각각 8,000명 규모의 2개 이탈리아 리비아 식민지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

이탈리아 육군 사단은 1930년대 후반에 각 3개 연대에서 2개 연대로 재편되었고, 1939년에는 예비군이 징집병과 함께 소집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높았고,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 합병 등 최근 군사 작전 경험도 있었다.[2]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은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빠르고 잘 건조되었으며 무장이 잘 된 함선과 잠수함 함대를 갖추기 위해 자금을 지원받아 발전했지만,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공군은 1936년에 전쟁 준비가 되었지만 1939년까지 정체되었으며, 영국은 이탈리아 공군이 높은 작전 수행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
8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은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에 주둔하여 튀니지를 방어했고, 6개 보병 사단으로 구성된 제10군은 동부의 키레나이카를 점령했다.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제10군은 제1 리비아 사단을 자그부브에서 시디 오마르까지 이집트 국경으로 보냈고, 제21군단은 시디 오마르에서 해안, 바르디아 및 토브룩까지 이동했다. 제22군단은 토브룩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반격 부대로 활동했다.[2]
2. 2. 영국령 이집트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에 따라 군사력을 크게 감축했다.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는 영국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 통신하는 데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영국 및 영연방 군대가 이 지역을 수비했다.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지중해 및 중동 전선을 관할하는 새로운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리비아에는 이탈리아 왕립군 약 215,000명이 있었고, 이집트에는 영국군 약 36,000명과 팔레스타인에서 훈련 중인 27,500명이 있었다.
영국군에는 퍼시 호바트 소장이 지휘하는 제7 기갑 사단 (이집트)이 포함되었는데, 이 부대는 1939년 중반에 기갑 사단 (이집트)로 개칭되었고, 1940년 2월 16일 제7 기갑 사단이 되었다. 이집트-리비아 국경은 이집트 국경 경비대가 방어했고, 1940년 6월 리처드 오코너 소장이 지휘하는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는 서부 사막에서 이탈리아군을 국경 초소에서 몰아내고 전쟁이 시작되면 배후지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7 기갑 사단은 메르사 마트루에 집결했으며, 제7 지원 그룹을 엄호 부대로 국경으로 전진 배치했고, RAF도 대부분의 폭격기를 이동시켰다.
완전하게 훈련된 부대가 부족했던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는 6월 17일에 서부 사막군으로 개칭되었다.
2. 3. 지형 및 보급
전쟁은 주로 서부 사막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이 지역은 이집트의 메르사 마트루에서 리비아 해안의 가잘라까지 약 약 386.24km 폭이었고, 유일한 포장 도로는 Litoranea Balboit (Via Balbiait)였다. 사구는 내륙 약 241.4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지아라부브와 시와에서 가장 넓은 지점에서 사막의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영국식 표현에서 "서부 사막"이라는 용어는 나일강 서쪽의 이집트 사막을 지칭했지만,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를 포함한 전체 분쟁 지역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해안에서부터 해발 약 약 152.40m의 돌이 많은 평평한 사막 평원이 내륙으로 뻗어 있으며, 해안에서 사구의 가장자리까지 200km에서 300km 뻗어 있다.[1] 전갈, 살무사, 파리가 이 지역에 풍부하며, 소수의 베두인 유목민이 거주했다.[2]베두인의 길은 우물과 더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땅을 연결했으며, 항해는 해, 별, 나침반 및 "사막 감각", 즉 경험을 통해 얻은 환경에 대한 뛰어난 인식으로 이루어졌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진격했을 때, 말레티 그룹은 시디 오마르를 떠나 길을 잃었고 사라져 항공기로 찾아야 했다. 봄과 여름에는 낮에는 매우 덥고 밤에는 매우 춥다. 시로코 (giblehar 또는 ghibliar), 즉 뜨거운 사막 바람은 고운 모래 구름을 불어 가시거리를 몇 미터로 줄이고 눈, 폐, 기계, 음식 및 장비를 덮는다. 자동차와 항공기는 특수 오일 필터가 필요하며, 척박한 지형은 군사 작전에 필요한 물품을 외부에서 운송해야 함을 의미한다. 독일 엔진은 과열되는 경향이 있었고 탱크 엔진의 수명은 약 2253.08km에서 약 2574.94km에서 약 482.80km에서 약 1448.41km으로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문제는 독일 및 이탈리아 모터 유형에 대한 표준화된 예비 부품 부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추축군의 보급품은 육로로 이동했으며, 컴파스 작전(1940년 12월 – 1941년 2월) 이후에는 트리폴리만이 창고프랑스어로 남았으며, 한 번에 최대 4척의 수송선 또는 5척의 화물선을 수용할 수 있었고, 월간 약 약 45722115.00kg의 하역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Via Balbiait를 따라 약 965.60km였으며, 알렉산드리아까지의 중간 지점이었다. 이 도로는 침수될 수 있었고, 사막 공군(DAF)에 취약했으며, 사막 트랙을 사용하면 차량 마모가 증가했다. 1941년 초 추축군이 약 482.80km를 전진하여 이집트 국경까지 도달하면서 육로 수송 거리가 약 1770.27km로 늘어났다. 벵가지는 4월에 점령되었으며, 그곳의 해안 운송 능력은 약 15240705.00kg에 불과했고, 항구는 DAF의 사정거리에 있었다. 토브루크에서는 하루 약 약 1524070.50kg의 보급품을 하역할 수 있었지만, 선박 부족으로 인해 토브루크 점령은 무의미했다.
3. 1940년
1940년 6월 11일,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은 리비아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다.[1] 양측은 장거리 사막 정찰대를 운용하여 사막을 횡단하며 상대방의 배치와 움직임을 감시하고 기습했다.[1] 이탈리아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지중해를 봉쇄하고 이집트의 지중해 함대가 수에즈 운하에 의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1]
영국군은 이집트 국영 철도, 도로 및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321.87km 지점에 위치한 메르사 마트루(마트루) 항구를 기지로 사용했다. 철도를 따라 수도관 건설이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물 공급원을 조사했으나 대부분의 우물은 바닷물로 채워졌다. 1939년 주요 담수원은 메르사 마트루의 로마 수도교와 마텐 바구쉬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물 배와 마트루의 증류 시설이 물 공급을 늘렸지만, 엄격한 배급이 시행되어야 했고 많은 물을 육로로 떨어진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1939년에는 충분한 차량이 확보되지 않아 장갑 사단에 더 나은 후방 연결을 제공하기 위해 트럭이 전환되었다. 사막에 적합한 차량만이 야외에서 운행될 수 있었고, 이는 탱크가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마트루에서 멀리 이동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국경에서 소룸까지, 그리고 소룸에서 동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시디 바라니까지는 물이 없었고, 도로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다.
3. 1. 국경 충돌
1940년 6월 11일,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은 리비아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군을 기습 공격했다.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요새를 점령하고 포로를 잡는 등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다.[1]
양측은 장거리 사막 정찰대를 운용하여 사막을 횡단하며 상대방의 배치와 움직임을 감시하고 기습했다.[1]
3. 2.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lang|it|Operazione}} E)
이탈리아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지중해를 봉쇄하고 이집트의 지중해 함대가 수에즈 운하에 의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1] 1940년 9월, 뉴질랜드 철도 대대와 인도인 노동자들이 해안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941년 10월에는 시디 바라니, 1942년 12월에는 토브루크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도는 엘 알라메인 서쪽 약 643.74km 지점까지 하루 약 4267397.40kg의 물을 수송했다.3. 3. 컴파스 작전 (Operation Compass)
1940년, 영국군은 이집트 국영 철도, 도로 및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321.87km 지점에 위치한 메르사 마트루(마트루) 항구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철도를 따라 수도관 건설이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물 공급원을 조사했으나, 대부분의 우물은 바닷물로 채워졌다. 1939년 주요 담수원은 메르사 마트루의 로마 수도교와 마텐 바구쉬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물 배와 마트루의 증류 시설이 물 공급을 늘렸지만, 엄격한 배급이 시행되어야 했고 많은 물을 육로로 떨어진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1939년에는 충분한 차량이 확보되지 않아 장갑 사단에 더 나은 후방 연결을 제공하기 위해 트럭이 전환되었다. 사막에 적합한 차량만이 야외에서 운행될 수 있었고, 이는 탱크가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마트루에서 멀리 이동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국경에서 소룸까지, 그리고 소룸에서 동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시디 바라니까지는 물이 없었고, 도로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다. 1940년 9월, 뉴질랜드 철도 대대와 인도인 노동자들이 해안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941년 10월 시디 바라니, 1942년 12월 토브루크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도는 엘 알라메인에서 서쪽으로 약 643.74km 떨어진 곳까지 하루 약 4267397.40kg의 물을 수송했다.4. 1941년
이탈리아는 리비아로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지나 서쪽으로 약 965.60km 정도 우회한 다음, 트리폴리로 향하기 전에 튀니지 해안에 접근했다. 이는 몰타에 주둔한 영국군의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도로를 통해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거나 소규모 위탁 화물로 연안 무역선을 이용해야 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약 약 1046.07km였고, 엘 알라메인까지는 약 2253.08km였다. 1940년 6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보급품 수송의 16%가 침몰했다.[1]
1940년, 영국군은 이집트 국영 철도, 도로 및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321.87km 지점에 위치한 메르사 마트루(마트루) 항구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철도를 따라 수도관 건설이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물 공급원을 조사했다. 1939년 주요 담수원은 메르사 마트루의 로마 수도교와 마텐 바구쉬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물 배와 마트루의 증류 시설이 공급을 늘렸지만, 많은 물을 육로로 떨어진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1939년에는 충분한 차량이 확보되지 않아 장갑 사단에 더 나은 후방 연결을 제공하기 위해 트럭이 전환되었다. 사막에 적합한 차량만이 야외에서 운행될 수 있었고, 이는 탱크가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마트루에서 멀리 이동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2] 국경에서 소룸까지, 그리고 소룸에서 동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시디 바라니까지는 물이 없었고, 도로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다. 1940년 9월, 뉴질랜드 철도 대대와 인도인 노동자들이 해안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941년 10월 시디 바라니, 1942년 12월 토브루크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도는 엘 알라메인에서 서쪽으로 약 643.74km 떨어진 곳까지 하루 약 4267397.40kg의 물을 수송했다.
1941년 초, 이탈리아군이 크게 패배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을 리비아로 파견했다.(Unternehmen Sonnenblumede, 해바라기 작전) 롬멜은 3월 말부터 공세를 시작하여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내고 토브룩을 포위했다.
롬멜이 지휘하는 DAK는 독일 공군(Luftwaffe)의 지원을 받으며, 더 우수한 전차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추축군은 3월 24일 엘 아게일라, 3월 31일 메르사 엘 브레가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빠르게 격파하고,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솔룸 국경까지 밀어냈다.
영국군은 토브룩 공방전을 해제하고 동부 키레나이카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1941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배틀액스 작전을 실시했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이로 인해 클로드 오친렉 장군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새로 취임했다.
1941년 11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 영국 제8군 (앨런 고든 커닝햄 중장)은 토브룩을 구원하고 동키레나이카를 점령하기 위한 십자군 작전을 개시했다.
4. 1.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참전 ({{lang|de|Unternehmen Sonnenblume}})
1941년 초, 이탈리아군이 크게 패배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을 리비아로 파견했다.(Unternehmen Sonnenblumede, 해바라기 작전) 이는 작전명 루스터에 따라 그리스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 주력 부대가 빠져나간 상황에서 이루어졌다.[1] 롬멜은 3월 말부터 공세를 시작하여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내고 토브룩을 포위했다.[1]
롬멜이 지휘하는 DAK는 더 우수한 전차와 장비, 독일 공군(Luftwaffe)의 지원을 받았다.[1] 추축군은 3월 24일 엘 아게일라, 3월 31일 메르사 엘 브레가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빠르게 격파하고,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솔룸 국경까지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토브룩이 포위되었고, 제2기갑사단의 기갑 여단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가 파괴되었다.[1]
유럽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추축군의 보급품은 육로로 이동했다. 컴파스 작전 이후 트리폴리만이 주요 창고로 남았으며, 월간 약 약 45722115.00kg의 하역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Via Balbiait를 따라 약 965.60km였으며, 1941년 초 추축군이 약 482.80km를 전진하면서 육로 수송 거리가 약 1770.27km로 늘어났다. 벵가지는 4월에 점령되었지만, 해안 운송 능력은 약 15240705.00kg에 불과했고, 항구는 사막 공군(DAF)의 사정거리에 있었다. 토브룩에서는 하루 약 약 1524070.50kg의 보급품을 하역할 수 있었지만, 선박 부족으로 인해 토브룩 점령은 큰 의미가 없었다.[2]
독일 기갑 사단은 하루 약 355616.45kg의 보급품이 필요했고, 보급품을 약 482.80km 이동하는 데 1,170대의 약 2032.09kg 트럭 적재량이 필요했다. 추축군 7개 사단, 공군 및 해군 부대가 있었고, 월 약 71123290.00kg의 보급품이 필요했다. 1941년 2월부터 5월까지 약 45722115.00kg의 잉여 물량이 배달되었고, 몰타의 공격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지만, 선박 손실이 가장 심했던 5월에는 실제로 보급품의 91%가 도착했다. 리비아의 운송 수단 부족으로 독일 보급품이 트리폴리에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군은 225,000명의 병력에게 물품을 배송하기 위해 7,000대의 트럭만 가지고 있었다. 6월에는 기록적인 양의 보급품이 도착했지만, 전선에서는 부족이 악화되었다.[2]
4. 2. 토브룩 포위전
토브룩 서쪽 지역은 1940년 6월 11일 적대 행위가 시작된 이후 영국군이 제10군을 장악하기 위해 순찰하던 곳이었다.[1] 1940년 8월 5일, 이탈리아 전차 30대가 제8 기병 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웨이벨은 이탈리아의 공세가 임박했을 때 차량 마모로 인해 작전을 계속하는 것이 비실용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모래는 장비를 빠르게 마모시켜 탱크의 트랙 수명을 단축시켰고, 예비 부품 부족으로 탱크 전력의 절반만 가동할 수 있었다.[2] 작전 모자와 해군 작전으로 지중해 함대가 강화되고 케이프를 통해 탱크와 승무원의 육군 호송대가 도착하면서 8월부터 9월 초까지 잠잠함이 찾아왔다.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 발발 시 리비아에서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기에 이집트 침공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제5군은 동쪽으로 증원 병력을 보낼 수 있었다. 8월 7일, 무솔리니는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와의 육상 연결을 확립하기 위해 침공을 명령했다. 같은 해 8월, 국경에는 소강 상태가 찾아왔고, 대부분의 영국 장갑 부대는 항구를 방어할 능력을 보존하기 위해 메르사 마트루로 물러났다. 제7 지원 부대가 솔룸에서 포트 마달레나까지 관측소를 설치하여 이탈리아의 공세를 지연시킬 준비를 했으며, 기병대는 리비아 내부로 더 멀리 정찰을 나갔다.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측면 기동을 취소하고 해안 도로에 집중했으며, 5개 사단과 말레티 그룹이 배치되었다. 제4 CC.NN. 사단 "3 지안나이"와 제64 보병 사단 "카탄차로" 사단은 토브루크에 예비대로 남았다.
4. 3. 브레비티 작전 (Operation Brevity) 및 배틀액스 작전 (Operation Battleaxe)
영국군은 토브룩 공방전을 해제하고 동부 키레나이카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1941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배틀액스 작전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제7기갑사단과 제4인도사단 사령부를 주축으로 한 혼성 보병 부대가 맡았다. 보병은 바르디아, 솔룸, 할파야, 카푸초 지역을 공격하고, 전차는 남쪽 측면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 작전은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할파야 고개 공격은 실패했고, 하피드 능선에 대한 세 번의 공격 중 단 한 번만 성공했다. 영국군은 많은 전차를 잃었고, 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웨이벌 장군, 제13군단 사령관 노엘 베레스포드-피어스 중장, 제7기갑사단 사령관 크라가 해임되었다. 클로드 오친렉 장군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새로 취임했다.
9월에는 서부 사막군이 제8군으로 개명되었다.
4. 4. 십자군 작전 (Operation Crusader)
1941년 11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 영국 제8군 (앨런 고든 커닝햄 중장)은 토브룩을 구원하고 동키레나이카를 점령하기 위한 십자군 작전을 개시했다.[1] 제8군은 보병 투입에 앞서 추축군 기갑 부대를 격파하려 했으나, 시디 레제흐에서 제7기갑사단이 아프리카 군단de에게 패배하는 등 여러 차례 고배를 마셨다.[1]
에르빈 롬멜은 기갑 사단에 이집트 국경의 추축군 진지 구원을 명령했지만, 연합군 보병 주력 부대는 요새를 우회하여 토브루크로 향하고 있었다.[1] 롬멜은 기갑 부대를 국경에서 토브루크 방향으로 철수시키며 여러 차례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클로드 오친레크는 커닝햄을 닐 리치 소장으로 교체했다.[1]
이후 추축군은 토브루크 서쪽 가잘라 선을 거쳐 엘 아게일라까지 철수했다. 바르디아와 솔룸에 주둔한 추축군 수비대는 고립되어 결국 항복했다.[1] 영국군은 17,7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추축군은 37,40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중 상당수는 하파야와 바르디아에서 항복한 포로였다.[1] 토브루크는 구원되었고, 키레나이카는 재탈환되었으며, 몰타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호송대를 지원하기 위해 비행장이 다시 점령되었다.[1]
5. 1942년
1942년,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추축군은 엘 아게일라에서 재보급을 받고 공세를 재개하여 영국군을 가잘라 선까지 밀어냈다. 롬멜은 트리폴리에서 약 1448.41km 떨어진 가잘라에서 보급을 기다리며 진격을 멈췄다.
5월 말, 롬멜은 가잘라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토브루크를 함락시켰다. 6월 21일에는 토브루크를 점령하고 3만 5천 명의 영국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로 롬멜은 이집트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급 문제는 여전했다. 토브룩에서 약 5080235.00kg의 보급품과 약 1422465.80kg의 연료를 노획했지만, 토브룩 항구는 한 달에 약 20320940.00kg의 보급품만 수용 가능했고, 사막 공군(DAF) 폭격기 사정권 안에 있었다.
헤라클레스 작전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몰타 침공 계획은 1942년 4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합의로 추진되었으나, 수에즈 운하 점령을 위한 이집트 침공이 우선시되면서 취소되었다.
롬멜은 메르사 마트루 전투에서 승리하고 6월 30일 엘 알라메인에 도달했지만, 보급 부족과 제8군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1월 보급 위기가 완화되면서 롬멜은 벵가지를 탈환하고 가잘라까지 진격했다. 5월에는 벵가지 항구가 개방되어 보급 상황이 개선되었고, 롬멜은 토브루크 공격에 집중했다.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은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실패했다.[1] 8월 말 알람 엘 할파 전투에서도 영국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버나드 몽고메리가 이끄는 제8군은 10월 23일 공세를 시작했다. 11월 4일, 제8군은 축선 방어선을 돌파했고, 롬멜은 철수를 명령했다. 토브루크는 11월 13일에, 벵가지는 11월 20일에 제8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5. 1. 가잘라 전투 ({{lang|de|Unternehmen Theseus}})
1942년 1월,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추축군은 엘 아게일라에서 재보급을 받은 후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이들은 1월 29일에 벵가지를 탈환하는 등 빠르게 진격하며 영국군을 가잘라 선까지 밀어냈다. 롬멜은 트리폴리에서 약 1448.41km 떨어진 가잘라에서 진격을 멈추고 보급 상황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5월 말, 롬멜은 가잘라 전투(Unternehmen Venezia|베네치아 작전de)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추축군은 영국군을 격파하고 토브루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5. 2. 토브룩 함락
1942년 5월 말, Unternehmen Veneziade(베네치아 작전), 즉 가잘라 전투가 시작되면서 추축군은 토브룩을 공격했다. 6월 21일, 독일-이탈리아군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3만 5천 명의 영국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로 에르빈 롬멜은 이집트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보급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토브룩 점령으로 약 5080235.00kg의 보급품 및 약 1422465.80kg의 연료를 노획하여 Panzerarmeede(기갑군)는 7월 4일까지 약 643.74km를 더 진격할 수 있었지만, 보급 부족, 피로, 제8군의 반격으로 진격이 끝났다.
토브룩은 한 달에 약 20320940.00kg의 보급품만 수용할 수 있었고, 사막 공군(DAF) 폭격기 사정권 내에 있었으며, 철도는 하루에 약 304814.10kg만 운송할 수 있었다. 소량의 배송품은 토브룩, 바르디아 및 메르사 마트루로 배송되거나 트리폴리 및 벵가지에서 하역할 수 있었는데, 거리가 각각 약 2092.14km와 약 1287.47km였다.
5. 3. 몰타 공방전과 헤라클레스 작전 ({{lang|de|Unternehmen Herkules}})
헤라클레스 작전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몰타 해상 침공 계획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1935년 10월 3일 ~ 1936년 5월) 중에 시작되었다.[1] 1941년 4월에 몰타를 점령할 기회가 있었지만, 머큐리 작전(1941년 5월 20일 ~ 6월 1일)이 먼저 수행되었고, 공수 부대와 수송기의 피해가 커서 1941년에는 두 번째 작전이 불가능했다. Fliegerkorps Xde를 제외한 루프트바페 부대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고, 1941년 6월까지 섬의 방공망이 회복되었다. 1942년 봄, 루프트바페 부대는 지중해로 돌아와 섬 주둔지의 공격 능력을 무력화시켰다.[2]1942년 4월,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독일 공수 및 해상 침공인 Unternehmen Herkulesde(헤라클레스 작전)을 감행하기로 합의했다. 이 작전을 위해 수백 대의 Junkers Ju 52 수송기, 24대의 Messerschmitt Me 321 Gigantsde를 포함한 글라이더, 약 200대의 Regia Aeronauticait 수송기를 갖춘 두 개의 Fliegerkorpsde가 소집되었다.
이탈리아 해군은 Marinefährprahmde(MFP), 개조된 민간 선박, 기뢰 부설함 및 74척의 소형 보트로 구성된 함대를 소집했다. 독일 해군은 독일 MFP, 지벨 페리, Pionierlandungsbootede, Sturmbootede, 대형 팽창식 뗏목 및 Seeschlangede(이동식 상륙 교량)을 제공했다.
롬멜은 리비아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후 제8군 공세를 막기 위해 공격을 원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8월에 몰타 침공을 위해 토브루크에서 진격을 멈추는 것을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Unternehmen Veneziade(베네치아 작전)의 성공과 6월 토브루크 점령 이후, Panzerarmeede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패배한 적을 추격하는 것이 몰타 작전의 위험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결국 헤라클레스 작전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기 위한 이집트 침공인 Unternehmen Aïdade(아이다 작전)을 우선시하여 취소되었다.
5. 4. 이집트로의 진격 ({{lang|de|Unternehmen Aïda}})
베니토 무솔리니는 프랑스 함락 이후,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와의 육상 연결을 확립하기 위해 1940년 8월 7일 침공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영국 장갑 부대는 메르사 마트루로 물러났고, 제7 지원 부대가 솔룸에서 포트 마달레나까지 관측소를 설치하여 이탈리아의 공세를 지연시킬 준비를 했다.[1]

1940년 9월 13~18일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은 메르사 마트루를 향한 제한적인 전술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무시아드는 새벽에 포격을 받은 후 점령되었고, 제1 리비아 사단은 솔룸과 비행장을 점령했다. 저녁이 되자 제2 리비아 사단, 제63 보병 사단 "키레네", 무사이드에서 온 말레티 그룹, 시디 오마에서 온 제62 보병 사단 "마르마리카"가 영국군의 방해 부대를 지나쳐 할파야 고개에서 합류했다.[2]
영국군은 9월 14일 부크 부크를 지나 후퇴했고,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계속 방해했다. 다음날 알람 하미드로 물러났고, 9월 16일에는 로 후퇴했다. 50대의 이탈리아 전차 부대가 측면 기동을 시도하자 영국 후위 부대는 시디 바라니 동쪽으로 물러났고, 그곳은 제1 CC.NN. 사단 "23 마르조"가 점령했으며, 그라치아니는 진격을 멈췄다. 무솔리니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시디 바라니와 소파피 주변에 참호를 구축했다.
장소 | 포로 | 전차 | 대포 |
---|---|---|---|
시디 바라니 | 38,289 | 73 | 297 |
시디 오마르 | 900 | 0 | 8 |
바르디아 | 42,000 | 130 | 275 |
토브루크 | 25,000 | 87 | 208 |
메킬리 | 100 | 13 | 0 |
데르나 벵가지 | 2,000 | 10 | 24 |
벵가지 아제다비아 | 25,000 | 107 | 93 |
총계 | 133,298 | 420 | 845 |
1941년 1월 말,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벵가지에서 ''비아 발비아''를 따라 키레나이카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이클 오무어 크레이그 소장 휘하의 제7 기갑 사단이 무스와 안텔라를 통과하여 제10군 잔존 병력을 가로막도록 파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제6사단은 해안 도로를 따라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다.
2월 5일 늦게, 콤베포스는 벵가지 남쪽 비아 발비아에 도착하여 도로를 차단했다. 제10군 선두 부대는 30분 후에 도착하여 비아 발비아가 차단된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 이탈리아군은 도로 차단을 뚫기 위해 공격을 가했고 7일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영국군 증원군이 도착하고 호주군이 벵가지에서 도로를 따라 압박해오자 제10군은 항복했다. 벵가지-아제다비아에서 영국군은 25,000명의 포로를 잡고 107대의 전차와 93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2월 9일, 윈스턴 처칠은 진격을 중단하고 그리스에 군대를 파견하여 마리타 작전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은 차량 고장, 피로, 이집트 기지에서 훨씬 더 긴 보급선의 영향 때문에 엘 아게일라 너머로 진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독일 증원군은 1월 11일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아프리카 군단de의 첫 번째 부대가 리비아로 보내졌다.
1941년 초, 키레나이카에서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대승 이후, 군사적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재앙에 대응하여 지침 22호(1월 11일)를 통해 Unternehmen Sonnenblumede(해바라기 작전)을 명령했고, 새로운 아프리카 군단de(DAK)을 리비아에 배치했다. DAK는 더 나은 전차, 장비, 공군 지원을 갖춘 신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에르빈 롬멜 장군이 지휘했다. 추축군 부대는 3월 24일 엘 아게일라에서, 3월 31일 메르사 엘 브레가에서 영국군을 급습하여 빠르게 격파했고, 이 성공을 이용하여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솔룸 국경까지 밀어냈으며 토브루크를 포위했다. 추축군의 여러 차례 토브루크 점령 시도는 실패했고, 전선은 이집트 국경에 고착되었다.
유럽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추축군의 보급품은 육로로 이동했으며, 컴파스 작전(1940년 12월 – 1941년 2월) 이후에는 트리폴리만이 창고프랑스어로 남았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Via Balbiait를 따라 약 965.60km였다.
독일 기갑 사단은 하루 약 355616.45kg의 보급품이 필요했고, 보급품을 약 482.80km 이동하는 데 1,170대의 약 2032.09kg 트럭 적재량이 필요했다. 추축군 7개 사단, 공군 및 해군 부대가 있었고, 월 약 71123290.00kg의 보급품이 필요했다. 비시 프랑스는 추축군이 튀니지의 비제르타를 사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것은 1942년 말에나 시작되었다. 1941년 2월부터 5월까지 약 45722115.00kg의 잉여 물량이 배달되었다.
6월부터 몰타에 대한 추축군의 공격이 줄어들었고, 선박 손실은 증가했다. 7월부터 10월까지 평균 약 73155384.00kg의 물량이 매달 배달되었지만, 육로 수송으로 연료 배달량의 30~50%가 소비되고 트럭의 35%가 고장나면서 전선에 대한 배달량이 감소했다. 11월에는 5척의 호송대가 십자군 작전 중에 침몰했고, 도로 호송대에 대한 지상 공격으로 낮 시간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배달 부족과 제8군 공세가 12월 4일부터 엘 아게일라로의 후퇴를 강요했다.
메르사 마트루 전투
Panzerarmee Afrikade(아프리카 기갑군)은 가잘라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제8군을 추격하며 이집트로 진격했고, 제8군은 메르사 마트루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제13군단은 6월 27일 저녁에 철수했지만, 통신 불량으로 인해 제10군단은 메르사 마트루 요새에 고립되었다. 제10군단은 다음 날 밤 탈출했지만 6,000명의 병력과 많은 장비, 물자를 남겨두었다. 제8군은 계속 동쪽으로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추축군과 충돌했다. 푸카에서 재정비하려는 시도는 취소되었고, 오친레크는 엘 알라메인까지 160km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6월 25일까지 Afrika Korpsde(아프리카 군단)는 60대의 전차만 남았고, 이탈리아 제20군단은 단 14대의 작전 가능한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 변경선인 토브루크와 메르사 마트루에서 노획한 물자를 사용하여 Panzerarmeede(기갑군)는 6월 30일 엘 알라메인에 도달했다.
1942년 1월, 보급 위기가 완화되었고, Panzerarmeede(기갑군)은 기동할 공간이 있었고, 현재 과도하게 확장된 보급선을 가진 적을 상대로 훨씬 짧은 보급선을 가지고 있었다. 1월 29일, Panzerarmeede는 벵가지(Benghazi)를 탈환했고, 다음 날 최전선으로의 탄약 보급이 중단되었다. 2월 13일까지 롬멜은 트리폴리에서 약 1448.41km 떨어진 가잘라(Gazala)에서 멈추는 데 동의했다.
5월까지 월별 배송량은 평균 약 60962820.00kg으로, 공세를 펼치기에는 충분했다. 벵가지가 개방되어 Panzerarmeede의 보급품의 약 33%를 약 450.62km로 수송 거리를 줄였기 때문에 가잘라까지 약 1448.41km 진격에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롬멜을 제지하기 위해 몰타 점령을 옹호하여 아프리카에서의 또 다른 공세를 가을까지 연기했지만 5월 말에 토브룩(Tobruk) 공격에 동의했다. 진격은 동쪽으로 약 241.40km 떨어진 이집트 국경에서 멈출 것이고, 루프트바페는 Operation Herkules(헤라클레스 작전)을 위해 재배치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점령하면 몰타는 무의미해지겠지만, 벵가지가 확장되고, 보급품이 축적되며, 상당한 증원이 리비아(Libya)로 투입되는 동안에는 방어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5월 26일, Unternehmen Veneziade(베네치아 작전), 즉 가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토브룩은 6월 22일에 온전하게 점령되었고, 선박 손실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 작전은 연기되었다. 토브룩에서 2,000대의 차량, 약 5080235.00kg의 보급품 및 약 1422465.80kg의 연료 점령으로 인해 Panzerarmeede는 7월 4일까지 약 643.74km를 더 진격할 수 있었지만, 보급 부족, 피로, 제8군의 반격으로 진격이 끝났다.
토브룩은 한 달에 약 20320940.00kg의 보급품만 수용할 수 있었고, DAF 폭격기 사정권 내에 있었다. 8월 선박 손실은 400% 증가했고, 배송량은 절반으로 줄어 약 51818397.00kg이 되었다. 보급품은 다시 트리폴리로 전환되었고, 알라메인 전투에서 약 10160470.00kg의 연료가 소비되었다. 히틀러는 엘 알라메인(El Alamein)에서 후퇴하는 것을 금지했고, 이탈리아에서 보낸 선박 수가 훨씬 적어지면서 배송량이 감소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직전, 토브룩에서 철도가 침수되어 약 10160470.00kg의 보급품이 좌초되어 Panzerarmeede는 필요한 연료의 10%만 남게 되었다.
5. 5.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1942년 7월 1일~27일)에서 롬멜은 제8군을 알라메인 진지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실패했다. 7월 5일까지 가동 가능한 독일 전차 수는 약 30대로 감소했다.[1]
롬멜은 약 50대의 독일 전차, 2,100명의 독일 보병, 54대의 이탈리아 전차, 1,600명의 이탈리아 병력으로 다시 공격을 계획했지만, 제8군이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텔 엘 에이사에서 먼저 공격하여 양측 모두 지쳤다.[2] 제8군은 울트라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루웨이사트 능선(7월 14일~17일),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그리고 7월 22일 텔 엘 에이사와 미테이르야 능선(7월 22일, 26일)에서 이탈리아 부대를 공격했다.
독일군은 약 10,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7,000명의 추축군 포로가 잡혔다. 제8군은 13,250명의 사상자를 냈다.
5. 6. 알람 엘 할파 전투
1942년 8월 말, 에르빈 롬멜은 다시 한번 공세를 시도했지만, 알람 엘 할파에서 영국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울트라 정보를 활용하여 롬멜의 공격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은 8월 중순에 제8군 사령관이 되었다. 롬멜은 연합군의 증원이 9월에 도착하기 전에 영국군을 격파하고 카이로에 도달하려 했다. 증원이 이루어지면 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국 승리는 불가능해질 터였다. 아프리카 기갑군de은 상태가 좋지 않았고, 많은 독일군의 체력은 기후와 전투 피로로 인해 저하되었다. 1941년 3월부터 19,000명의 독일군이 아프리카에 주둔해 있었다. 증원으로 4개의 독일 사단은 90,000명으로 늘어났지만, 정원보다 17,000명이 부족했고, 차량도 12,600대나 부족했다. 이들 중 전투 병력은 34,000명에 불과했다. 기갑군de은 약 200대의 독일군 전차와 243대의 이탈리아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영국군은 7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알라메인 전투(Unternehmen Brandungde, 8월 30일 – 9월 5일)에서 추축국 부대는 제8군의 남쪽 측면을 우회하여 포위하려 했다.[1]
영국군은 울트라(해독된 독일군 무선 메시지)에 의해 미리 경고를 받았고, 남쪽에는 순찰대만 남겨 두었다. 영국군 전차와 포병의 주력은 알람 엘 할파 능선에 집중되었고, 이곳은 전선 뒤 약 32.19km에서 추축국의 진격을 막았다. 전차는 능선에 머물며 기동전이 아닌 정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연합군 항공기는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추축국 병력을 지속적으로 폭격하고 기관총으로 공격했는데, 전차를 거의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을 묶어 놓고 기갑군de의 빠른 기동과 집중을 막았다. 능선에 대한 추축국의 공격은 실패했고,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롬멜은 9월 2일에 철수를 명령했다.[2] 9월 3일 늦게, 뉴질랜드 여단과 영국 여단이 반격을 가해 추축국의 퇴각을 차단하려 했지만, 베레스포드 작전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실패했고, 9월 5일까지 추축국의 퇴각은 완료되었다. 제8군은 1,750명의 병력과 68대의 전차를 잃었다. 추축국은 2,900명의 병력, 49대의 전차, 36대의 항공기, 60문의 포와 400대의 트럭을 잃었다.
5. 7.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은 1942년 8월 중순에 제8군 사령관이 되었다. 10월 23일, 제8군은 공세를 시작했다. 당시 판저군de은 104,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50,000명은 독일군이었고, 최전선 병력은 24,173명에 불과했다. 축선군은 496대의 전차(그중 290대는 이탈리아 전차), 500문의 야포, 850문의 대전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제8군은 195,000명의 병력과 1,029대의 전차(추가로 수리 중인 1,000대), 908문의 야포, 1,451문의 대전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연합군 병사들은 영양 상태가 좋았지만, 축선군은 영양 부족으로 질병에 취약했다. 판저군de은 차량당 약 289.68km의 연료밖에 없었다.
10월 27일까지 판저군de은 114대의 독일 전차로 줄었고, 11월 2일에는 탄약 대부분을 소모하여 32대의 독일 전차와 120대의 이탈리아 전차만 남았다. 롬멜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판저군de에게 버틸 것을 명령했다. 11월 4일, 제8군은 축선 방어선을 돌파했고, 롬멜은 철수를 명령하여 비기동 부대(특히 이탈리아 부대)를 중앙과 남부에 버렸다.
아프리카 기갑군de은 37,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병력의 30%가 손실되었고, 450대의 전차와 1,000문의 야포를 잃었다. 제8군은 13,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병력의 훨씬 적은 비율을 차지했고, 500대의 전차(그중 150대만 파괴됨)와 약 110문의 야포(주로 대전차포)를 잃었다. 판저군de은 약 5,000명, 20대의 전차, 20문의 대전차포, 50문의 야포로 줄어들었다. 메르사 마트루 전투에서 축선군을 포위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아프리카 군단de 대부분은 11월 7일까지 탈출했다. 축선군은 해안 도로를 따라 후퇴했지만, 전차 부족과 남쪽 측면을 방어할 연료 부족으로 하파야 고개나 다른 어떤 위치에서도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다. 토브루크는 11월 13일에 제8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축선군의 후퇴는 계속되었다. 벵가지는 11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점령된 항구는 영국의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수리되었다.
6. 1943년
1941년 1월 말,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벵가지에서 ''비아 발비아''를 따라 키레나이카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이클 오무어 크레이그 소장 휘하의 제7 기갑 사단은 제벨 아크다르 남쪽 사막을 거쳐 무스와 안텔라를 통과하여 제10군 잔존 병력을 가로막도록 파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제6사단은 제벨 아크다르 북쪽 해안 도로를 따라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다. 지형은 영국군 전차에게 고된 여정이었고, 콤베포스(존 콤 중령)는 바퀴 달린 차량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가 선두에 파견되었다.[1]
2월 5일 늦게, 콤베포스는 벵가지 남쪽 비아 발비아에 도착하여 시디 살레 인근, 아제다비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과 안텔라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도로를 차단했다. 제10군 선두 부대는 30분 후에 도착하여 비아 발비아가 차단된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부터 7일까지 이탈리아군은 도로 차단을 뚫기 위해 공격을 계속했다. 영국군 증원군이 도착하고 호주군이 벵가지에서 도로를 따라 압박해오자 제10군은 항복했다. 벵가지-아제다비아에서 영국군은 컴파스 작전 전체에서 25,000명의 포로를 잡고 107대의 전차와 93문의 대포를 노획했다.[1]
2월 9일, 윈스턴 처칠은 진격을 중단하고 마케도니아를 통한 독일의 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그리스에 군대를 파견하여 마리타 작전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은 차량 고장, 피로, 이집트 기지에서 훨씬 더 긴 보급선의 영향으로 엘 아게일라 너머로 진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제10군에서 몇 천 명이 키레나이카의 재앙에서 탈출했지만 트리폴리타니아의 제5군에는 4개 사단이 있었다. 시르테, 트메드 하산, 부에라트 요새는 이탈리아에서 증강되었고, 제10군과 제5군은 약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독일 증원군은 1월 11일 지시 22에 따라 차단 부대(Sperrverbandde)를 형성하기 위해 리비아로 보내졌다. 이들은 에르빈 롬멜 중장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de의 첫 번째 부대였다.[1]
1941년 초, 키레나이카에서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대승 이후, 군사적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XIII 군단의 가장 장비가 잘 갖춰진 부대들은 그리스 전투의 일환으로 작전명 루스터에 투입되어 그리스로 향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재앙에 대응하여 지침 22호(1월 11일)를 통해 Unternehmen Sonnenblumede(해바라기 작전)을 명령했고, 새로운 아프리카 군단de(DAK)을 리비아에 Sperrverbandde(방벽 부대)으로 배치했다. DAK는 더 나은 전차, 장비, 공군 지원을 갖춘 신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에르빈 롬멜 장군이 지휘했다.[2] 추축군 부대는 3월 24일 엘 아게일라에서, 3월 31일 메르사 엘 브레가에서 영국군을 급습하여 빠르게 격파했고,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솔룸 국경까지 밀어냈으며 토브루크를 포위했다. XIII 군단(현재 키레나이카 사령부)의 새로운 사령관 필립 니엄 중장, 오코너, 제2기갑사단 사령관 마이클 갬비어-패리 소장이 포로로 잡혔다. 서부 사막 군단 사령부는 동아프리카에서 소환된 노엘 베르스포드-피어스 중장이 인수했다. 그리스 전역을 위해 철수했던 제2기갑사단의 기갑 여단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은 파괴되었다. 추축군의 여러 차례 토브루크 점령 시도는 실패했고, 전선은 이집트 국경에 고착되었다.
배틀액스 작전(1941년 6월 15~17일)은 토브룩 공방전을 해제하고 동부 키레나이카를 재탈환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제7기갑사단과 제4인도사단 사령부를 기반으로 한 혼성 보병 부대가 2개 여단과 함께 공격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보병은 바르디아, 솔룸, 할파야, 카푸초 지역을 공격하고, 전차는 남쪽 측면을 방어할 예정이었다. 전쟁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독일군 부대가 방어전에 나섰다. 할파야 고개 공격은 실패했고, 206고지는 점령되었으며, 하피드 능선에 대한 3번의 공격 중 단 한 번만 성공했다. 6월 15일 말, 48대의 영국 전차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6월 16일, 독일군의 반격으로 서쪽 측면의 영국군이 후퇴했지만 중앙에서는 격퇴되었다. 영국군은 운용 가능한 순항 전차 21대와 보병 전차 17대로 줄어들었다.
6월 17일, 영국군은 2개 기갑 연대의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나 작전을 종료했다. 영국의 과도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방어적 성공을 전멸적인 승리로 바꾸는 데 실패했다. 정보는 영국군의 이동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했지만, 영국 공군은 독일군의 반격 움직임을 파악하여 지상군이 탈출할 수 있도록 충분히 늦췄다. 영국군은 96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순항 전차 27대와 I형 전차 64대가 파괴되거나 고장나 회수되지 못했다. 영국 공군은 36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독일군의 손실은 678명이었고, 이탈리아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추가적으로 전차 12대와 항공기 10대를 잃었다. 영국의 실패로 웨이벌, 제13군단 사령관 노엘 베레스포드-피어스 중장, 제7기갑사단 사령관 크라가 해임되었다. 클로드 오친렉 장군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9월에 서부 사막군은 제8군으로 개명되었다.
6. 1. 엘 아게일라 전투 및 튀니지로의 후퇴

판처아르메 아프리카de는 엘 아게일라 방어선(메르사 브레가 방어선)으로 후퇴했지만, 추축군의 보급 및 증원 우선 순위는 횃불 작전에 맞서는 병력에 주어졌고, 이탈리아-독일군에게는 반격 능력이 없었다.[1] 히틀러는 메르사 브레가 방어선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롬멜은 튀니지의 가베스 갭까지 후퇴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는 제8군의 보급 거리를 늘릴 수 있었다.[1] 11월 24일, 우고 카발레로는 판처아르메de가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을 경우, 시르테에서 80km 떨어진 부에라트까지 320km 서쪽으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1] 제8군은 12월 15일 엘 아게일라에 도달했고, 제51 (하이랜드) 사단이 정면 공격을 가하고 제7 기갑 사단이 비르 엘 아우에라 내륙을 공격하는 동안, 뉴질랜드 사단은 메르사 브레가 방어선을 측면에서 우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2] 측면 우회 작전은 전차 18대를 잃고 실패했으며, 판처아르메de는 깊은 지뢰밭과 부비트랩으로 이루어진 장애물 뒤로 후퇴하여 추격을 늦추었다.[2]
엘 아게일라는 트리폴리에서 이집트 국경보다 약 740.30km 더 가깝다. 1942년 1월 6일 두 번째 이탈리아 전함 호송대의 도착과 트리폴리에서 약 13208611.00kg의 연료 발견으로 1월에 약 50802350.00kg의 물자만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 위기가 완화되었다. Panzerarmeede(기갑군)은 기동할 공간이 있었고, 현재 과도하게 확장된 보급선을 가진 적을 상대로 훨씬 짧은 보급선을 가지고 있었다. Luftflotte IIde(제2항공함대)가 시칠리아에 도착한 것도 이 지역에서 추축국의 제해권을 회복시켰다. 롬멜은 대의 트럭을 더 요청했지만 이 유토피아적인 요구는 거부되었고 롬멜은 진격이 또 다른 보급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1월 29일, Panzerarmeede는 벵가지를 탈환했고, 다음 날 최전선으로의 탄약 보급이 중단되었다. 2월 13일까지 롬멜은 트리폴리에서 약 1448.41km 떨어진 가잘라에서 멈추는 데 동의했다.
주요 영국군의 공격은 제51(하이랜드) 사단과 기갑 여단이 해안 도로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제7 기갑 사단은 타르후나, 카스텔 베니토 및 트리폴리를 통해 진격했다. 제90경보병사단은 도로를 따라 지연 작전을 펼쳤고, 이는 연합군의 수송 어려움을 악화시켰다. 1월 20일부터 21일까지 제90경보병사단은 코라디니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며, 부에라트에서 호므스까지의 도로에 109개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제7 기갑 사단의 선봉대는 1월 21일 아지자 근처에 도달했고, 다음 날 제51(하이랜드) 사단은 카스텔 베르데에 도달했다. 경쟁이 벌어졌고, 독일군은 밤새 트리폴리에서 철수했다. 제11 후사르 연대는 1월 23일 아침, 벵가지에서 서쪽으로 약 1086.30km 떨어진 트리폴리에 가장 먼저 진입했다. 5시간 후 해군 기지대가 도착하여 항구의 잔해를 조사했다. 1월 26일, 5척의 배가 항구 밖에 정박하여 소형 선박을 통해 하역을 시작했고, 1월 30일에는 약 3048141.00kg의 물품이 상륙했다. 3월에 제8군은 튀니지로 진입했고, 3월 9일 롬멜은 히틀러에게 북아프리카 상황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독일에 돌아갔다. 롬멜은 히틀러를 설득하여 추축군이 철수하도록 허용하는 데 실패했고, 표면상 건강상의 이유로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7. 결과
마이클 오무어 크레이그 소장 휘하의 영국군 제7기갑사단은 이탈리아군이 벵가지에서 ''비아 발비아''를 따라 키레나이카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제벨 아크다르 남쪽 사막을 거쳐 제10군 잔존 병력을 가로막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제6사단은 제벨 아크다르 북쪽 해안 도로를 따라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다.[1] 지형은 영국군 전차에게 어려웠고, 콤베포스(존 콤 중령)는 바퀴 달린 차량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이끌고 먼저 파견되었다.[1]
2월 5일 늦게, 콤베포스는 벵가지 남쪽 비아 발비아에 도착하여 도로를 차단했다. 제10군 선두 부대는 30분 후에 도착하여 비아 발비아가 막힌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부터 이탈리아군은 도로 차단을 뚫기 위해 7일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영국군 증원군이 도착하고 호주군이 벵가지에서 도로를 따라 압박해오자, 제10군은 항복했다. 벵가지-아제다비아에서 영국군은 25,000명의 포로를 잡고 107대의 전차와 93문의 대포를 노획했다.[1]
장소 | 포로 | 전차 | 대포 |
---|---|---|---|
시디 바라니 | 38,289 | 73 | 297 |
시디 오마르 | 900 | 0 | 8 |
바르디아 | 42,000 | 130 | 275 |
토브루크 | 25,000 | 87 | 208 |
메킬리 | 100 | 13 | 0 |
데르나 벵가지 | 2,000 | 10 | 24 |
벵가지 아제다비아 | 25,000 | 107 | 93 |
총계 | 133,298 | 420 | 845 |
십자군 작전에서 영국군은 17,7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추축군은 37,4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토브루크는 구원되었고, 키레나이카는 재탈환되었으며, 몰타에 보급품을 수송하는 호송대를 지원하기 위해 비행장이 재점령되었다.
1941년 2월부터 5월까지 추축군은 약 45722115.00kg의 잉여 물량을 배달받았고, 몰타 공격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지만, 선박 손실이 가장 심했던 5월에는 실제로 보급품의 91%가 도착했다. 리비아의 운송 수단 부족으로 독일 보급품은 트리폴리에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군은 225,000명의 병력에게 물품을 배송하기 위해 7,000대의 트럭만 가지고 있었다. 6월에는 기록적인 양의 보급품이 도착했지만, 전선에서는 부족이 악화되었다.
6월부터 몰타에 대한 추축군의 공격이 줄어들었고, 선박 손실은 증가했다. 7월부터 10월까지 평균 약 73155384.00kg의 물량이 매달 배달되었지만, 육로 수송으로 연료 배달량의 30~50%가 소비되고 트럭의 35%가 고장나면서 전선에 대한 배달량이 감소했다.
메르사 마트루 전투 이후, 독일어: Panzerarmee Afrikade(아프리카 기갑군)은 이집트로 진격했고, 제8군은 메르사 마트루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추축군은 영국군의 탈출을 막기에는 너무 약했다. 제10군단은 메르사 마트루 요새에 고립되었으나 다음 날 밤 탈출했지만 6,000명의 병력과 많은 장비, 물자를 남겨두었다. 제8군은 계속 동쪽으로 후퇴했고, 엘 알라메인까지 160km 후퇴했다. 이 후퇴로 제8군은 기지 근처로 이동하여 보급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고, 남쪽의 카타라 저지대로 인해 추축군의 측면 공격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제8군 공세가 10월 23일에 시작되었을 때, 판저군de은 104,000명(독일군 50,000명)을 보유하고 있었고, 최전선 병력은 24,173명에 불과했다. 496대의 축선 전차(이탈리아 전차 290대)와 500문의 야포, 850문의 대전차포가 있었다. 제8군은 195,000명, 1,029대의 전차(수리 중인 1,000대), 908문의 야포, 1,451문의 대전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1월 4일, 제8군은 축선 방어선을 돌파했고, 롬멜은 철수를 명령하여 비기동 부대, 특히 이탈리아 부대를 중앙과 남부에 버렸다. 아프리카 판저군de은 37,000명이 발생하여 병력의 30%가 손실되었고, 450대의 전차와 1,000문의 야포를 잃었다. 제8군은 13,500명이 발생하여 병력의 훨씬 적은 비율을 차지했고, 500대의 전차(그중 150대만 파괴됨)와 약 110문의 야포(주로 대전차포)를 잃었다. 판저군de은 약 5,000명, 20대의 전차, 20문의 대전차포, 50문의 야포로 줄어들었다.
판처아르메 아프리카de는 엘 아게일라 방어선(메르사 브레가 방어선)으로 물러났지만, 추축군의 보급 및 증원 우선 순위는 횃불 작전에 맞서는 병력에 주어졌고, 이탈리아-독일군에게는 반격 능력이 없었다. 히틀러는 메르사 브레가 방어선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롬멜은 튀니지의 가베스 갭까지 전투 후퇴하는 것을 선호했다.
1977년, 마틴 반 크레펠트는 롬멜이 1942년 말과 1943년 초에 튀니지로 보내진 물자와 장비가 더 일찍 보내졌다면 추축국이 사막전을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기록했다. 크레펠트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직 횃불 작전 이후 독일이 남부 프랑스를 점령한 후에야 프랑스 상선과 툴롱을 파견에 사용할 수 있었고, 비제르타를 수령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1941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비제르타에서 이집트 국경까지의 추가 거리는 더 큰 항구를 사용하는 것의 이점을 상쇄했을 것이다.
추축군의 보급은 항상 리비아 항구의 작은 크기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는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이었고, 추축국 선박에 대한 공격은 만성적인 보급 문제를 악화시켰다. 독일군이 소련에 발이 묶이면서 다른 전선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규모의 수송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군단de과 기갑군de에 충분한 도로 수송이 제공되지 않았다.
1942년 여름에 취소된 몰타 공격은 토브루크 항구의 작은 크기와 공습에 대한 취약성보다 사건에 덜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이 건설한 것과 유사한 철도만이 추축국의 보급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었지만,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이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축군은 리비아를 거쳐 튀니지로 후퇴하여 튀니지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서쪽의 제1군인 영미 연합군과 동쪽의 제8군 사이에 갇히게 되었다.
8. 주요 인물
-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침공을 계획하지 않았으나,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와의 육상 연결을 확립하기 위해 침공을 명령했다.
-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로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지휘했다. 예하 부대로는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의 제5군과 마리오 베르티 장군의 제10군이 있었다.
-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측면 기동을 취소하고 해안 도로에 집중하여 이집트 침공을 명령했다. 1940년 9월 이집트 침공은 제한적인 전술 작전으로 시작되었고, 시디바라니 점령 후 진격을 멈추고 참호 구축, 도로 수리, 물 공급관 건설을 시작했다.
- '''에르빈 롬멜''' 중장은 1941년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하여 리비아에 배치되었다. 그는 영국군을 급습하여 빠르게 격파하고,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냈으며 토브루크를 포위했다. 롬멜은 가잘라 전투에서 자유 프랑스군과 연합군을 격파하고 토브루크를 점령했다.
-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은 지중해 및 중동 전선을 관할하는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GOC-in-C)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컴파스 작전을 지휘하여 이탈리아군을 격파했지만, 그리스 전투의 실패로 해임되었다.
- '''클로드 오킨렉''' 장군은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GOC-in-C)으로 취임하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을 지휘했으나, 이후 해임되었다.
-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은 1942년 8월 제8군 사령관이 되어,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롬멜을 튀니지까지 몰아냈다.
- '''알프레드 리드 고드윈-오스틴''' 중장은 제13군단 사령관으로, 제8군 사령관 닐 리치와의 의견 불일치로 사임했다.
- '''헨드릭 클로퍼''' 소장은 토브루크 방어를 위해 제2 남아프리카 보병 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201 근위(기동) 여단, 제11 인도 보병 여단, 제32 육군 전차 여단, 제4 대공포병 여단이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
8. 1. 연합군
클로드 오킨렉 장군은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GOC-in-C)으로 취임하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을 지휘했으나, 이후 해임되었다.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은 1942년 8월 중순에 제8군 사령관이 되어,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롬멜을 튀니지까지 몰아냈다. 아치볼드 웨이벌(Archibald Wavell)] 중장은 지중해 및 중동 전선을 관할하는 새로운 중동 사령부의 총사령관(GOC-in-C)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컴파스 작전을 지휘하여 이탈리아군을 격파했지만, 이후 그리스 전투의 실패로 해임되었다.8. 2. 추축국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로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지휘했다. 최고 사령부에는 제5군(이탈로 가리볼디 장군)과 제10군(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있었다. 이탈리아 육군 사단은 1930년대 후반에 재편되었으며, 예비군은 1939년에 소집되었다.전쟁 선포 당시, 제10군은 제1 리비아 사단을 자그부브(Giarabub)에서 시디 오마르까지 이집트 국경으로 보냈고, 제21군단은 시디 오마르에서 해안, 바르디아 및 토브루크까지 이동했다. 제22군단은 토브루크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반격 부대로 활동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집트 침공 계획이 없었으나,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8월 7일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와의 육상 연결을 확립하기 위해 침공을 명령했다. 리비아 사단은 작전에 필요한 수송 수단을 갖추지 못했지만,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측면 기동을 취소하고 해안 도로에 집중했다. 5개 사단과 말레티 그룹이 배치되었고, 제5 Squadrait는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했다.
1940년 9월 13~18일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은 제한적인 전술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무시아드는 포격을 받은 후 점령되었고, 제1 리비아 사단은 솔룸과 비행장을 점령했다. 제2 리비아 사단, 제63 보병 사단 "키레네", 말레티 그룹, 제62 보병 사단 "마르마리카"가 할파야 고개에서 합류했다.
영국군은 후퇴하며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방해했고, 제1 CC.NN. 사단 "23 마르조"가 시디바라니를 점령하자 그라치아니는 진격을 멈췄다. 이탈리아군은 참호를 구축하고 도로를 수리하며 물 공급관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이탈리아 항공기는 10월 19일 카이로를 폭격했다.
컴파스 작전은 이탈리아군을 파괴할 계획이었고, 영국군은 기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 제10군은 시디 바라니에서 투마르, 막틸라에 이르는 요새화된 야영지에 배치되었다. 말레티 그룹은 니베이와에, 제63 보병 사단 치레네는 라비아와 소파피에, 제62 보병 사단 마르마리카는 소파피에서 할파야 고개에, 제64 보병 사단 "카탄자로"는 부크 부크 동쪽에 배치되었다. 영국 공군은 12월 7일 비행장을 공격하여 지상에서 39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컴파스 작전은 12월 9일 시작되었고, 니베이와와 투마르가 함락되었다.
바르디아는 1940년 12월 14일부터 1941년 1월 5일 사이에 함락되었다.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탈리아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1월 21일, 호주 보병은 토브루크로 돌입하여 방어선의 절반을 점령했다. 호주군은 많은 포로와 장비를 획득했지만, 사상자도 발생했다. 제7 기갑사단은 데르나로 진격했고, 바비니 부대는 메킬리에 있었다. BCS는 빠져나갔고, 영국 전차는 폭우로 인해 진흙탕에 빠졌다. 다음 날 데르나는 버려졌다. 제7 기갑사단은 콤베포스를 베다 폼으로 보내 제10군을 차단했다.
1941년 1월 말,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키레나이카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7 기갑 사단은 제10군 잔존 병력을 가로막도록 파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제6사단은 이탈리아군을 추격했다. 콤베포스는 2월 5일 비아 발비아에 도착하여 도로를 차단했다. 제10군은 도로 차단을 뚫기 위해 공격을 계속했지만, 영국군 증원군이 도착하고 호주군이 압박해오자 항복했다. 영국군은 컴파스 작전 전체에서 많은 포로와 장비를 노획했다.
장소 | 포로 | 전차 | 대포 |
---|---|---|---|
시디 바라니 | 38,289 | 73 | 297 |
시디 오마르 | 900 | 0 | 8 |
바르디아 | 42,000 | 130 | 275 |
토브루크 | 25,000 | 87 | 208 |
메킬리 | 100 | 13 | 0 |
데르나 벵가지 | 2,000 | 10 | 24 |
벵가지 아제다비아 | 25,000 | 107 | 93 |
총계 | 133,298 | 420 | 845 |
2월 9일, 윈스턴 처칠은 진격을 중단하고 그리스에 군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독일 증원군은 에르빈 롬멜 중장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de의 첫 번째 부대였다.
1941년 초, 아돌프 히틀러는 Unternehmen Sonnenblumede(해바라기 작전)을 명령했고, 새로운 아프리카 군단de(DAK)을 리비아에 배치했다. DAK는 에르빈 롬멜 장군이 지휘했다. 추축군 부대는 3월 24일 엘 아게일라에서, 3월 31일 메르사 엘 브레가에서 영국군을 급습하여 빠르게 격파했고,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솔룸 국경까지 밀어냈으며 토브루크를 포위했다. XIII 군단의 새로운 사령관 필립 니엄 중장, 오코너, 제2기갑사단 사령관 마이클 갬비어-패리 소장이 포로로 잡혔다. 추축군의 여러 차례 토브루크 점령 시도는 실패했고, 전선은 이집트 국경에 고착되었다.
토브룩은 레슬리 모스헤드(Leslie Morshead) 장군 휘하의 제9 호주 사단이 단호하게 항구를 방어했다. 이탈리아군은 항구의 요새화 설계도를 제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여러 차례의 공격이 격퇴되었다. 3주 후, 롬멜은 공격을 중단하고 포위를 재개했다. 이탈리아 보병 사단은 요새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아프리카 군단은 항구 남쪽과 동쪽에 기동 가능한 위치를 유지했다.
유럽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추축군의 보급품은 육로로 이동했으며, 트리폴리만이 창고프랑스어로 남았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는 Via Balbiait를 따라 약 965.60km였다. 이 도로는 침수될 수 있었고, 사막 공군(DAF)에 취약했으며, 사막 트랙을 사용하면 차량 마모가 증가했다. 1941년 초 추축군이 약 482.80km를 전진하여 이집트 국경까지 도달하면서 육로 수송 거리가 약 1770.27km로 늘어났다. 벵가지는 4월에 점령되었으며, 그곳의 해안 운송 능력은 약 15240705.00kg에 불과했고, 항구는 DAF의 사정거리에 있었다. 토브루크에서는 하루 약 약 1524070.50kg의 보급품을 하역할 수 있었지만, 선박 부족으로 인해 토브루크 점령은 무의미했다.
독일 기갑 사단은 하루 약 355616.45kg의 보급품이 필요했고, 보급품을 약 482.80km 이동하는 데 1,170대의 약 2032.09kg 트럭 적재량이 필요했다. 추축군 7개 사단, 공군 및 해군 부대가 있었고, 월 약 71123290.00kg의 보급품이 필요했다. 비시 프랑스는 추축군이 튀니지의 비제르타를 사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것은 1942년 말에나 시작되었다. 1941년 2월부터 5월까지 약 45722115.00kg의 잉여 물량이 배달되었고, 몰타의 공격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지만, 선박 손실이 가장 심했던 5월에는 실제로 보급품의 91%가 도착했다. 리비아의 운송 수단 부족으로 독일 보급품이 트리폴리에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군은 225,000명의 병력에게 물품을 배송하기 위해 7,000대의 트럭만 가지고 있었다. 6월에는 기록적인 양의 보급품이 도착했지만, 전선에서는 부족이 악화되었다.
6월부터 몰타에 대한 추축군의 공격이 줄어들었고, 선박 손실은 증가했으며, 벵가지는 폭격을 받았고 선박은 트리폴리로 우회되었고, 공중 보급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배달 부족과 제8군 공세가 12월 4일부터 엘 아게일라로의 후퇴를 강요했고, Via Balbiait가 혼잡해졌으며, 그곳에서 영국군의 매복으로 남은 추축군 수송 차량의 약 절반이 파괴되었다.
트리폴리로의 호송이 재개되었고 손실이 증가했지만, 12월 16일까지 연료 부족을 제외하고 보급 상황이 완화되었다. 12월에는 Luftwaffe|독일 공군de이 하루에 한 번의 출격으로 제한되었다. 비시는 추축군에게 약 3657769.20kg의 연료를 판매했고, U보트가 지중해로 투입되었으며, 12월에 러시아에서 공중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이탈리아 해군은 군함을 사용하여 데르나와 벵가지로 연료를 수송했고, 12월 16일부터 17일까지 최대 노력을 기울였다. 전함 4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0척이 4척의 선박을 리비아로 호위했다. 약 20320940.00kg의 화물선에 함대를 사용하는 것은 해군 연료 비축량을 고갈시켰고, 전함 호송은 한 번 더 가능했다. 비제르타는 창고프랑스어로 검토되었지만, 몰타에서 출격하는 RAF 항공기의 사정거리에 있었고,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약 804.67km 더 떨어져 있었다.
제8군은 엘 아게일라까지 에 달하는 전진으로,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의 부담을 영국군에게 넘겼다. 1942년 1월, 영국군은 보급 부담을 줄이고 작전 아크로바트를 준비하기 위해 전선에서 철수했다. 영국군은 십자군 작전 동안 추축군의 손실을 과대평가하여 실제 8만 명 대신 3만 5천 명의 병력과 마주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유럽으로부터의 추축군 증원 속도를 잘못 판단했다. 제8군은 추축군의 공격 전에 2월까지 준비를 마칠 것으로 예상했다. 제1기갑사단은 엘 아게일라 주변 지역을 방어했고, 12월 28일부터 29일까지 아제다비아 근처에서 교전을 벌여 90대의 전차 중 61대를 잃었으며, 독일군은 7대의 전차를 잃었다.
판처 아프리카 군de은 1월 21일에 운터네멘 테세우스de(작전 테세우스)를 시작하여 제2기갑여단을 세부 분산 격파했다. 1월 23일까지 여단은 150대에서 75대로 전차가 줄어들었고, 독일군은 100대 중 29대의 전차를 잃었다. 벵가지가 1월 28일에 함락되었고, 티미미는 2월 3일에 함락되었다. 2월 6일까지 영국군은 토브루크에서 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가잘라선으로 돌아갔는데, 판처 아프리카 군de은 7주 전에 이 선에서 후퇴했었다. 영국군은 1월 21일부터 1,309명의 사상자를 냈고, 42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다른 30대가 손상되거나 고장났고 야포 40문을 잃었다. 제13군단 사령관 알프레드 리드 고드윈-오스틴 중장은 제8군 사령관 닐 리치와의 의견 불일치로 사임했다.
2월까지 전선은 토브루크 서쪽 가잘라 선에 이르렀다. 봄에 양측은 또 다른 전투를 준비했다. 영국군은 6월에 Panzerarmeede를 파괴하고 키레나이카를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인 버크샷 작전을 계획했지만, 5월 초에 추축군의 공격이 임박해지면서 이집트 국경에서의 방어 조치가 우선시되었다. 1942년 5월 26일부터 6월 21일까지의 Unternehmen Veneziade (가잘라 전투)는 Afrika Korpsde와 이탈리아 전차들이 가잘라 선의 측면을 돌아 남쪽으로 진격하고, 자유 프랑스군과 다른 연합군이 비르 하케이에서 추축군 보급 호송대를 가로막으면서 시작되었다.
롬멜은 영국군 지뢰밭에 인접한 지점으로 후퇴했고, 리치 장군은 6월 5일에 반격 작전인 애버딘 작전을 명령했다. 북쪽에서 제32군 전차 여단은 전차 70대 중 50대를 잃었다. 동쪽 측면의 제7기갑사단과 제5인도 보병사단은 오전 2시 50분에 공격을 시작했으나, 영국군 포격이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막에 미치지 못하면서 재앙을 맞이했다. 제22기갑여단은 전차 156대 중 60대를 잃고 후퇴하여 제9인도 여단을 고립시켰다. Arieteit 사단과 제21기갑 사단 및 제15기갑사단이 나이츠브리지 박스에 대한 오후의 반격으로 두 영국 사단과 제9인도 사단의 전술 사령부를 휩쓸었다. 제10인도 보병 여단과 소규모 부대가 흩어졌고 지휘 체계가 붕괴되었다. 제9인도 여단, 정찰 연대 1개, 포병 연대 4개가 손실되었고, 영국군은 6월 13일 가잘라 선에서 도주했으며, 작전 가능한 전차는 70대뿐이었다.
당시 중장 겸 제13군단 사령관인 고트는 토브루크 방어를 위해 헨드릭 클로퍼 소장을 제2 남아프리카 보병 사단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제201 근위(기동) 여단, 제11 인도 보병 여단, 제32 육군 전차 여단, 제4 대공포병 여단이 있었다. 토브루크는 1941년 9개월 동안 포위되었지만, 이번에는 영국 해군이 수비대의 보급을 보장할 수 없었고, 오킨렉은 토브루크를 소모품으로 여겼지만 두 달 동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6월 21일, 제8군 35,000명의 병력이 제21군단 사령관인 에네아 나바리니 중장에게 항복했다. 오킨렉은 리치를 해임하고 제8군을 인수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112.65km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서 추축국의 진격을 막았다.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오킨렉도 해임되었다.
참조
[1]
서적
1954
[2]
서적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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