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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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티아 공국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부르는 명칭으로, 9세기 초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슬라브 공국이다. 852년에 "크로아트인들의 땅"으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보르나 대공은 "달마티아 대공"으로 불렸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확장되었으며,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다. 9세기 후반에는 브라니미르 치하에서 교황의 인정을 받았고, 문치미르를 거쳐 토미슬라프 시기에 왕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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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아티아 공국 | |
|---|---|
| 기본 정보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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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 주요 사건 | 프랑크족의 봉신국화 (790년대) 교황의 승인 (879년 7월 7일) |
| 정치 | |
| 통치자 직함 | 공작 |
| 주요 통치자 | 포르가의 아버지와 포르가 (최초의 아르콘) (7세기 초) 보르나 (최초의 공작) (810년 ~ 821년) 토미슬라브 (마지막 공작) (910년 ~ 925년) |
| 이전 국가 | |
| 이전 | 비잔티움 제국 |
| 이전 | 아바르 카간국 |
| 이후 국가 | |
| 이후 | 크로아티아 왕국 |
2. 명칭
"달마티아 크로아티아"(''Dalmatinska Hrvatska'')와 "해안 크로아티아"(''Primorska Hrvatska'')는 현대 역사학자들이 크로아티아 공국을 부르는 명칭이다.[46] "크로아티아 후국"처럼 이 나라를 "후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록된 첫 명칭은 852년의 "크로아트인들의 땅"(regnum Croatorumla)이었다.[47] 당시 크로아티아는 아직 왕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regnum"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48] 비잔틴 제국의 자료에서는 이 나라를 그냥 "크로아티아"(Χρωβατίαgr)라고 불렀다.[49]
크로아티아 공국은 옛 달마티아 속주에 위치했으며, 비잔틴 제국은 이 지역의 다양한 부족 집단을 스클라베니라고 불렀다.[54] 이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정착했다. 초기 중세 시대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 동부 내륙 지역과 서부 헤르체고비나 일부, 서부 및 중앙 보스니아로 확장되었으며, 해안 크로아티아 지역의 비노돌, 리카, 각카강, 크라바바 지역을 포함했다.[54] 스플리트, 자다르, 코토르, 두브로브니크 등 일부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과 흐바르섬, 크르크섬은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55]
7세기 초,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달마티아 속주의 수도 살로나를 파괴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초청으로 백크로아티아에서 온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는 설과, 스스로 사바 강을 건너 달마티아에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10] 이들은 5명의 형제와 2명의 자매의 নেতৃত্বে 아바르족을 몰아내고 정착했으며, 포르가 통치 시기에 초기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10]
보르나는 프랑크인 열왕편년사에서 "달마티아 대공"(Dux Dalmatiaela)[50], 그리고 후에는 "달마티아 및 리부르니아 대공"(Dux Dalmatiae atque Liburniaela)으로 불렸다.[51] 9세기 후반 크로아티아 대공들은 당대 크로아티아 이름으로 불렸다. 852년 트르피미르 1세는 라틴 문자로 "크로아트인들의 대공"(Dux Chroatorumla)이라고 표기되었고,[52] 브라니미르는 벤코바츠 인근 소포트에 보존된 비문에 "크로아트인들의 대공" (Dux Cruatorvmla)이라고 불렸다.[53]
3. 지리
크로아티아 공국 남쪽에는 세치나강에서 네레트바강까지 뻗어있고 흐바르, 브라치섬, 코르출라섬, 믈레트섬, 비스, 라스토보섬을 보유한 나렌틴이 있었다.[56] 달마티아 남부에는 오늘날 몬테네그로인 자츠루미아, 트라부니아, 디오클레아가 있었다. 북쪽에는 슬라브인이 건국한 판노니아 공국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영구적인 수도가 없었고, 크로아티아 대공은 여러 지역에 거주했다. 최초의 요충지는 트리피미르 1세가 거주했던 클리스 요새였다. 다른 대공들은 솔린, 크닌, 비야치, 닌 등에서 통치했다.[57][58][59]
4. 역사

그러나 이 기록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는데, 크로아티아인들이 이미 달마티아에 정착한 후 아바르족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6년) 이후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 또는 8세기 말 프랑크-아바르 전쟁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11][12][13] 크로아티아인의 기독교화는 달마티아 도착 직후 시작되었지만, 9세기 초까지 일부는 여전히 이교도였다.
7세기 슬라브족(크로아티아인)의 유입은 프라하 문화 도자기 등 고고학적 증거로 뒷받침된다.[14][15][16][17][18][19][20] 초기 크로아티아인들은 나무나 돌로 매장실을 만들어 매장하는 등 북쪽의 원 고향에서 가져온 전통을 따랐다. 기독교화는 8세기에 시작되었으며, 9세기 중반까지 이교도 매장 관습이 점차 사라지고 기독교 매장 관습이 도입되었다.
8세기 후반과 9세기 크로아티아인들은 카롤링거-바이킹 검을 비롯한 다양한 전쟁 장비를 소지했는데, 이는 프랑크-아바르 전쟁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14][15][16][17][18][19][20] 보르나 공작 (c. 810–821) 통치 시기부터 중앙 유럽과 카롤링거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권에 속했다.
790년대와 9세기 초, 프랑크족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지배했다.[5] 799년 트르사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803년부터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에서 프랑크족의 지배가 인정되었다.[5] 812년 팍스 니케포리 조약으로 비잔틴 제국은 해안 도시와 섬, 프랑크족은 내륙에 대한 지배권을 각각 인정받았다.[5]
810년경부터 닌에 거주하던 보르나는 카롤링거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을 통치했다.[5] 그의 통치는 류데비트 포사브스키의 반란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류데비트는 819년경 쿠파 강 근처에서 보르나를 물리쳤지만 결국 퇴각했다.[5] 821년 보르나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블라디슬라프가 그 뒤를 이었다.[6]
크로아티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영향을 받았다.[22] 9세기 2분기에 크로아티아인들은 해군을 만들기 시작했고, 네렌타인족과 함께 아드리아해에서 활동하며 해상 운송을 위협했다. 83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해적 행위는 계속되었다.[23][24]
트르피미르 1세는 845년경 크로아티아의 공작이 되어 프랑크 왕 로타르 1세의 봉신이었지만, 자신의 통치를 강화했다. 846년과 848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해안 도시를 공격했고, 854년에서 860년 사이에는 불가리아의 침략을 막아내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5] 852년 라틴 헌장에서 트르피미르 1세는 자신을 "크로아티아인의 지도자", 자신의 땅을 "크로아티아인의 왕국"으로 칭했다.[28] 그는 클리스 요새를 통치 중심지로 삼고, 리지니체에 크로아티아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설했다.[29]
브라니미르는 즈데슬라브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로마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879년 교황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았다.[33] 9세기 후반은 동남유럽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한 시기였다.
문치미르는 브라니미르 사후 왕위에 올라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권력을 회복시켰다. 892년 헌장에서 문치미르는 자신을 "크로아티아인의 공작"이라고 명시했다.[34]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인들이 카르파티아 분지에 들어와 크로아티아를 위협했다.[35]
문치미르의 뒤를 이어 토미슬라프가 즉위하여 크로아티아의 마지막 공작이자 첫 번째 왕이 되었다. 926년, 보스니아 고원 전투에서 토미슬라프는 불가리아의 침공을 막아냈고,[39] 927년 교황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했다.
이 시기에 크로아티아는 왕국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토미슬라프는 925년에 왕으로 즉위했다고 여겨지지만, 정확한 시기와 장소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토미슬라프는 교황청이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최초의 크로아티아 통치자였다.[40]
4. 1. 배경
로마 제국의 로마 속주였던 달마티아 속주를 포함한 동남유럽의 원주민들은 훈족과 고트족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했으며, 이후 동고트족은 동고트 왕국(493–553)을 형성했다.[10][11][12]
비잔틴 제국이 영토를 재정복했지만, 6세기 중반부터 초기 슬라브족의 이동이 이어졌다. 7세기까지 대부분의 로마 속주는 아바르 카간국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는 판노니아 아바르족이 이끄는 유목 연맹이었다. 대략 614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달마티아 속주의 수도인 살로나를 약탈하여 파괴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했다.
4. 2. 크로아티아인의 정착
제국 경영론에 따르면, 백크로아티아는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 (재위 610–641)에 의해 달마티아 속주로 초청되어 아바르족을 물리친 후 정착했다. 혹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오랫동안 아바르족과 전쟁을 벌인 끝에 판노니아 사비아에서 사바강을 건너 달마티아에 자력으로 정착했다고도 한다.[10]
크로아티아인들은 클루카스, 로벨로스, 코센치스, 무클로, 크로바토스 등 5명의 형제와 투가, 부가 등 2명의 자매에 의해 이끌렸다. 아바르 전쟁과 정착 시대의 첫 번째 ''archon''은 포르가의 익명의 아버지였다. 첫 번째 기독교화는 포르가 통치 기간에 일어났는데, 제국 경영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헤라클리우스의 동시대 인물이었다.[10]
그러나 이 기록은 역사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크로아티아가 아바르족과의 전쟁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이미 달마티아에 정착한 후 반란일 가능성이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6년) 실패 이후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았거나, 8세기 말과 9세기 초 프랑크-아바르 전쟁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11][12][13] 크로아티아인의 기독교화는 달마티아 도착 직후 시작되었지만, 9세기 초에는 크로아티아인의 일부가 여전히 이교도였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제국 경영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4. 3. 고고학적 증거
7세기에 슬라브족(크로아티아인)이 유입되었다는 증거는 화장 매장, 프라하 문화 도자기, 섬유 및 그 근처에서 발견된 유물 등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로마 및 기독교 인구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다.[14][15][16][17][18][19][20] 또한 거주지와 교회의 파괴, 원주민의 생활 방식 변화도 그러한 증거이다. 초기 크로아티아인의 경우, 나무나 돌 구조로 매장실을 만들어 매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북쪽의 크로아티아 원 고향에서 가져온 전통으로, 원주민 지역 문화에는 유사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물질 문화가 슬라브인의 이주를 증명하지만, 초기 슬라브 물질 문화로는 슬라브 부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일반 슬라브 무리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독교화는 아마도 8세기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8세기 초 화장 매장 이후, 9세기 중반까지 이교도 매장 관습이 있는 열 무덤, 이후에는 이교도와 기독교 매장 관습이 혼합된 열 무덤, 11세기 후반까지 기독교 매장 관습만 있는 열 무덤이 나타났다. 9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교회 옆에 묘지가 있었고, 11세기 2/3세기부터는 교회 옆 매장이 의무화되었다.
8세기 후반과 9세기의 크로아티아인은 카롤링거-바이킹 검의 농도가 높았으며(24개 이상, 주로 K형이지만 1형과 H형도 있음, 후기 카롤링거 시대에는 R형과 X형이 나타남), 다른 전쟁 장비(긴 칼, 긴 창, 화살, 박차가 달린 부츠, 벨트 장식 등 카롤링거의 영향)도 소지했는데, 이는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 프랑크-아바르 전쟁에 크로아티아가 참여했다는 증거로 간주되기도 한다(프랑크 자료에는 7세기 초와 9세기 후반 사이에 크로아티아 민족명이 언급되지 않지만). 최소한 공작 보르나 (c. 810–821)부터 중앙 유럽과 카롤링거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권에 속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K형 검의 분포와 집중도는 프랑크 군대의 공식 무기였다는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8세기 후반-9세기 초 크로아티아인의 이주 증거도 아니고, 충성의 프랑크 선물이였으며, 당시 크로아티아 엘리트 정체성과 민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견된 후기 카롤링거 시대의 무기와 기병 장비는 옛길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종종 콘스탄티누스 5세 (741–775)의 금화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고 크로아티아 공국 및 크로아티아 왕국과 관련된 국경 및 역사적 사건 내에 있다.
크로아티아의 판노니아 지역에서는 초기 아바르 유물과 후기 아바르 유물이 모두 발견되었지만, 크로아티아의 리토럴 지역에서는 아바르 기원의 유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3개), 후기 아바르 시대에만 해당한다. 달마티아에서는 아마도 프랑크-아바르 전쟁(788–803)이나 쿠파 전투 (819)의 전리품일 것이다.
최근 글리나 근처 보이나에서 발견된 부유한 매장 유물(마운팅 세트가 있는 금색 박차, 록 크리스탈 펜던트, 콘스탄티누스 5세의 금화, 금실로 짠 옷)은 크닌 근처 비스쿠피야와 스탄코브치 근처 모르폴라차에서 매우 유사한 점을 보이며, 시사크 주변 지역으로 통제권을 확대한 크로아티아인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성용 드레스 귀걸이(귀금속으로 만든 포도 모양) 등에는 "비잔틴 금세공인의 장인 정신의 예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비잔틴 통치하에 있던 달마티아의 도시 중 하나를 통해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서부 판노니아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과 청동으로 된 더 단순한 장신구는 S형(스클라베니에 전형적인)과 유사 S형 귀걸이, 비잔틴 기원의 오메가형과 별 모양 펜던트, 많은 반지와 목걸이가 있다. 사슴 뿔로 만들어진 희귀한 용기에는 아이콘(두 개의 뿔 달린 동물이 그들 사이에 생명의 나무를 마주보고 있음)이 새겨져 있으며 서부 판노니아(쇼프론과 잘라바르, 헝가리)에서도 발견되었다. 뼈로 만든 유물은 9세기 중반부터 기독교 매장이 도입되면서 다른 언급된 유물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으며, 이교도 묘지 역시 버려졌지만(그 근처에 기독교 의식의 묘지가 나타남) 파괴는 없었는데, 이는 "크로아티아인의 기독교 채택이 큰 사회적 격변 없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초기 중세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8세기 후반과 9세기 전반에 걸쳐 발견된 몇몇 고고학적 발견물과 비문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선교 활동을 보여준다.
발견물 중 일부는 "크로아티아 생산의 특징"이다. 9세기 중반부터 독특한 크로아티아형 장신구 생산이 번성했는데(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동시대 유럽에는 유사점이 없는" 큰 구슬 모양 귀걸이였으며, 통계적으로 귀걸이, 펜던트, 반지, 단추, 목걸이 순임), 작업장은 아마도 달마티아의 솔린과 크닌, 그리고 대륙부의 시사크에 위치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구 크로아티아" 고고학 시대(7/9-11세기)의 두 가지 문화적 변종, 즉 고유한 크로아티아-달마티아/리토럴 문화와 판노니아-비젤로 브르도 문화(10세기 중반부터)를 인식하고 구별하는데, 이는 서쪽의 케른텐-쾨틀라흐 문화와 동시대적이었다.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변종의 발견물은 이스트리아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네레트바강, 르바스강, 보스나강 근처 내륙, 남서부 판노니아에서 발견되었으며, 두 번째 변종은 대부분 크로아티아의 사바–드라바 지역과 북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드리아 해안과 내륙에서도 일부 발견되었다.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문화의 고고학적 발견물은 하부 판노니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서부, 이스트리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영향력과 무역, 그리고 초기 중세 크로아티아의 확산에 기인할 수 있다.
4. 4. 프랑크족의 지배
790년대와 9세기 초, 프랑크족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지배했다.[5] 788년, 샤를마뉴는 롬바르디아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이스트리아를 정복했다. 790년대에 판노니아 공작 보이노미르는 프랑크족의 종주권을 수용했고, 프랑크족은 프리울리 변경백령을 통해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 했다. 799년, 프리울리의 에리크가 이끄는 프랑크족은 리부르니아의 트르사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803년부터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에서 프랑크족의 지배가 인정되었다.[5] 프랑크족은 팍스 니케포리로 알려진 평화 조약이 812년에 체결될 때까지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조약에 따라 비잔틴 제국은 달마티아의 해안 도시와 섬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내륙에 대한 프랑크족의 지배를 인정했다.[5]
810년경부터 닌에 거주하던 보르나는 카롤링거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을 통치했다.[5] 보르나는 달마티아 북부 브리비르 인근의 구두차 강을 따라 살았던 크로아티아 부족인 구두스카니의 공작이었으며, 이곳은 나중에 크로아티아 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류데비트 포사브스키의 프랑크족에 대한 반란으로 특징지어졌는데, 류데비트는 819년경 쿠파 강 근처에서 보르나를 물리치고 달마티아를 유린하기 시작했지만, 혹독한 환경과 보르나 부하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5] 821년 보르나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블라디슬라프가 그 뒤를 이었다.[6]
4. 5. 동서 세력 사이에서
크로아티아 공국은 중세 시대에 동쪽의 동로마 제국과 서쪽의 프랑크 왕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했다.[22] 동로마 제국은 달마티아의 도시와 섬들을 지배하고 옛 로마 달마티아 속주 전체로 지배를 확장하려 했고, 프랑크 왕국은 북부와 북서부 지역을 통제하려 했다.[22] 크로아티아는 이러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크로아티아의 법률 제정과 비잔틴 해안 도시와의 무역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볼 수 있다.[22]
9세기 2분기에 크로아티아인들은 해군을 만들기 시작했다. 네렌타인족과 함께 아드리아해에서 활동하며 해상 운송과 여행을 위협했다. 83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피에트로 트라도니코는 크로아티아를 공격했지만, 미슬라브 공작(principe Muisclavola)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해적 행위는 계속되었다.[23][24]
4. 6. 독립 왕국의 기틀 마련
트르피미르 1세는 미슬라브의 뒤를 이어 845년경 크로아티아의 공작이 되었다. 그는 프랑크 왕 로타르 1세 (840–855)의 봉신이었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자신의 통치를 강화했다. 당시 아랍인의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가 약화된 틈을 타 846년과 848년에 동로마 제국의 해안 도시를 공격하기도 했다.[25] 854년에서 860년 사이에는 불가리아의 크냐즈 보리스 1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보스니아 북동부 어딘가에서 보리스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선물을 교환했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그 시대까지 평화롭게 공존했던 불가리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전통적인 우정을 언급했다.[25][26]
852년 3월 4일, 또는 최근 연구에 따르면 840년경에 작성된 라틴 헌장에서[27] 트르피미르 1세는 자신을 "신의 도움을 받는 크로아티아인의 지도자"( )라고 칭했으며, 자신의 땅을 "크로아티아인의 왕국"()으로 불렀다.[28] 이는 트르피미르 1세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히 "크로아티아인의 왕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regnum''이라는 용어는 당시 다른 공작들도 그들의 독립을 나타내는 표시로 사용했다.[28] 이 헌장은 또한 트르피미르 1세의 통치 중심지였던 클리스 요새에 대한 소유권을 문서화하고 있으며, 스플리트 대주교에게 미슬라브가 기증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클리스 법정 근처인 리지니체에서 트르피미르 1세는 교회를 건설했고, 크로아티아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설했다. 트르피미르의 이름은 리지니체 수도원 교회의 제단 화면에서 가져온 돌 조각에 새겨져 있다.[29] 그는 845년부터 1091년까지 크로아티아를 통치한 트르피미로비치 가문의 창시자로 기억된다.[29]
4. 7. 독립 왕국으로 나아가다
즈데슬라브 공작의 통치는 짧았고, 879년 도마고예비치 가문의 브라니미르가 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끝났다.[32] 브라니미르는 즈데슬라브와 달리 로마를 옹호했고, 나라를 로마의 품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교황 요한 8세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했으며, 교황에게 자신의 백성과 나라를 사도좌에 위탁하려는 의도를 밝히는 편지를 보냈다. 교황은 그의 요청에 답하여 그의 계획을 칭찬했고, 879년 브라니미르 치하의 공국은 프랑크족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교황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았다.[33]
9세기 후반은 동남유럽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한 시기였다. 교황 요한 8세는 불가리아에 대한 관할권을 거부하고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한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의 완고함에 대해 도마고이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교황은 또한 즈데슬라브와 브라니미르 공작에게 크로아티아를 거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으로 가는 사절을 돕고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공국의 정확한 지리적 범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러한 요청은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 사이의 지리적 인접성을 확인하며, 이는 아마도 보스니아의 어딘가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33]
문치미르(무티미르라고도 함)는 트르피미르의 막내아들로, 브라니미르가 사망한 후 (892년경) 왕위에 올랐으며, 이는 트르피미로비치 가문의 권력 복귀를 의미했다. 892년 9월 28일자로 트로기르 근처 비아치에서 작성된 라틴어 헌장에는 문치미르를 "크로아티아인의 공작" (Croatorum duxla)이라고 명시했다.[34] 그의 통치 기간 동안, 9세기 말에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카르파티아 분지에 헝가리인들이 들어섰다.[35]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판노니아 공국의 브라슬라프 공작을 물리쳐 크로아티아를 위협했다.
문치미르는 약 910년까지 통치했으며, 그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마지막 공작이자 첫 번째 왕인 토미슬라프가 즉위했다.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존 데이컨은 912년에 불가리아에서 돌아온 베네치아 대사가 자훔례 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크로아티아 영토를 통과했다고 기록했는데,[36] 이는 당시 크로아티아가 시메온 1세의 통치를 받던 불가리아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스플리트의 토마스 대주교가 쓴 13세기 연대기인 살로나 역사서에는 토미슬라프가 914년에 크로아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어 있다.[37] ''제국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당시 크로아티아는 보병 10만 명, 기병 6만 명, 대형 선박 80척, 소형 선박 100척을 보유했지만,[25] 이러한 숫자는 크로아티아 군대의 과장과 과도한 강조로 간주된다. 크로아티아는 또한 10세기 초에 마자르족과 전투를 벌였다. 중세 크로아티아의 예상 인구는 44만 명에서 88만 명 사이였고, 프랑크족과 비잔틴 군대의 군사력은 2만 명에서 10만 명의 보병과 60개의 알라기온에 조직된 3,000명에서 24,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38]
비잔티움과 불가리아 사이의 전쟁 동안, 923년경, 비잔틴은 크로아티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 전에 불가리아는 비잔틴을 상대로 여러 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924년, 시메온 1세는 세르비아에서 자하리야를 폐위시켰고, 자하리야는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926년, 시메온의 군대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보스니아 고원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39] 927년 교황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크로아티아는 왕국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일반적으로 토미슬라프 공작이 925년에 왕으로 즉위했다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즉위했는지, 아예 즉위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토미슬라프는 교황청이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최초의 크로아티아 통치자였다.[40] 토미슬라프는 ''살로나 역사서''와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게재된 두 개의 보존된 문서에서 왕으로 언급되었으며, 토미슬라프의 통치는 13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925년 스플리트에서 열린 공의회 결론의 텍스트에 앞서 토미슬라프가 "크로아티아 지역과 달마티아 지역의 왕" (''in prouintia Croatorum et Dalmatiarum finibus Tamisclao rege'')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925년 공의회 결론의 12번째 조항에서 크로아티아의 통치자는 "왕" (''rex et proceres Chroatorum'')으로 불리며,[41] 교황 요한 10세가 보낸 편지에서 토미슬라프는 "크로아티아의 왕" (''Tamisclao, regi Crouatorum'')으로 불린다.[42] 토미슬라프의 칭호를 확증하는 비문은 없지만, 이후의 비문과 헌장은 그의 10세기 후계자들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했음을 확인한다.
4. 8. 독립된 왕국
문치미르(무티미르라고도 함)는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권력을 회복시킨 인물이다. 9세기 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인들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카르파티아 분지에 들어섰다.[35] 이들은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판노니아 공국의 브라슬라프 공작을 물리쳐 크로아티아를 위협했다.
문치미르는 약 910년까지 통치했으며, 그 뒤를 이어 토미슬라프가 즉위했다. 토미슬라프는 크로아티아의 마지막 공작이자 첫 번째 왕으로 여겨진다.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존 데이컨은 912년에 불가리아에서 돌아온 베네치아 대사가 자훔례 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크로아티아 영토를 통과했다고 기록했는데,[36] 이는 당시 크로아티아가 시메온 1세의 통치를 받던 불가리아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스플리트의 토마스 대주교가 쓴 13세기 연대기인 살로나 역사서에는 토미슬라프가 914년에 크로아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어 있다.[37] 일반적으로 925년에 토미슬라프 공작이 왕으로 즉위했다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즉위했는지, 아예 즉위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토미슬라프는 교황청이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최초의 크로아티아 통치자였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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