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버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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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티안 버나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외과 의사로, 1967년 12월 3일 케이프타운 그루트 스키어 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인간 심장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심장 외과를 연구했으며, 1983년 은퇴 전까지 49건의 심장 이식 수술을 집도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은퇴 후에는 심장 질환을 앓는 아이들을 위한 기금을 설립했다. 2001년 키프로스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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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버나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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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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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크리스티안 네틀링 바너드 |
출생일 | 1922년 11월 8일 |
출생지 | 남아프리카 연방케이프 주보퍼트웨스트 |
사망일 | 2001년 9월 2일 |
사망지 | 키프로스 파포스 |
국적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직업 | |
직업 | 외과 의사 |
전문 분야 | 흉부외과 심장 이식 |
활동 기간 | 1950년–2001년 |
학력 | |
교육 | 케이프타운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
경력 | |
근무 기관 | 그루트 스휘르 병원 미네소타 대학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
자녀 | 6명 |
친척 | 마리우스 바너드(형제) |
업적 | |
알려진 업적 | 최초의 성공적인 인간 대 인간 심장 이식 |
2. 생애
케이프 주 뷰포트 웨스트 출신으로, 케이프타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로 유학하여 심장 외과의 선구자 중 한 명인 클래런스 월튼 릴리헤이(C. Walton Lillehei) 아래에서 연구했다.
195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심장 외과 분야 발전에 기여하며 동물 실험을 통해 심장 이식 연구를 진행했다. 1967년 12월 3일 케이프타운의 그루트 스키어 병원에서 루이스 와슈칸스키(Louis Washkansky)에게 세계 최초의 인간 심장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비록 와슈칸스키는 수술 18일 후 폐렴으로 사망했지만, 이 수술은 의학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68년 1월 2일에는 두 번째 환자인 필립 블레이버그(Philip Blaiberg)에게 심장 이식을 시행하여 19개월 생존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83년 은퇴하기 전까지 총 49건의 심장 이식 수술을 집도했다.
심장 이식 과정에서 기증자와 수혜자의 인종 문제로 인해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관련하여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버나드 자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 후에는 심장 질환을 앓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설립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갔다. 2001년 9월 2일, 휴가차 머물던 키프로스의 한 호텔에서 심부전으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케이프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크리스티안 바너드 기념 병원이 세워졌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크리스티안 버나드는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 지방의 보퍼트 웨스트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아담 버나드는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개혁 교회 목사였으며, 혼혈인을 위한 선교 활동을 했다.[2][68]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스 데 스와르트는 살아남은 자녀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심어주었다.[68] 버나드에게는 4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형 아브라함은 세 살 때 심장 문제(팔로 사징으로 추정)로 사망했고, 이란성 쌍둥이 누이는 사산되었다.[1]버나드의 학력 및 초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40년 | 보퍼트 웨스트 고등학교 졸업 |
1945년 | 케이프타운 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MBChB 학위 취득) |
이후 | 케이프타운 그루트 슈어 병원에서 인턴 및 레지던트 수료 |
1951년 | 케이프타운 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
1953년 | 케이프타운 대학교 의학 박사 학위 취득 (논문: 결핵성 수막염 치료) |
1956년 |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유학, 심장 외과의 선구자였던 C. Walton Lillehei|클래런스 월튼 릴리헤이eng 아래에서 연구 시작 |
2. 2. 경력
케이프타운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그루트 쉬어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이후 케이프주의 시골 마을인 세레스에서 일반의로 잠시 근무하다가[2] 1951년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와 시립 병원에서 수석 레지던트 의사로, 그루트 쉬어 병원 의학과에서 레지스트라로 일했다.[2] 1951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53년에는 "결핵성 수막염 치료"에 관한 논문으로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 259건의 결핵성 수막염 사례를 분석하기도 했다.[3]의사 자격을 얻은 직후, 바너드는 태아의 장으로 가는 혈류 공급 부족이 선천성 장 폐쇄증의 원인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9개월간 43번의 시도 끝에, 그는 태아 상태의 강아지 장으로 가는 혈액 공급을 일부 차단하여 장 폐쇄증을 인위적으로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혈액 공급이 부족한 장의 일부(약 15cm~20cm)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 질환을 치료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방법은 임상에 적용되어 케이프타운에서 10명의 아기의 생명을 구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외과 의사들에게도 채택되었다.[3]
1955년 12월, 미네소타 대학교의 오웬 하딩 웽스틴 교수의 초청과 그루트 쉬어 병원 의학과장 존 브록의 추천으로 미국 미네아폴리스로 유학을 떠나 2년간 연구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4][5] 처음에는 웽스틴 교수 아래서 장 연구를 계속했지만, 곧 심장 절개 수술의 선구자인 클래런스 월튼 릴리헤이(C. Walton Lillehei) 교수 연구실로 옮겨 심장 수술 연구에 참여했다.[6] 이 시기에 그는 미래의 심장 이식 분야 권위자인 노먼 샴웨이와 교류했으며,[7] 개 폐를 이용해 심장 수술 중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는 기술을 개발한 길 캠벨과도 친분을 쌓았다.[8] 바너드는 미국에서의 2년을 "내 인생에서 가장 매혹적인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1958년, 그는 "대동맥판막 - 인공 판막의 제작 및 테스트 문제"라는 논문으로 외과 과학 석사 학위를,[2] "선천성 장 폐쇄증의 병인"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5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온 바너드는 그루트 쉬어 병원 실험 외과 과장으로 임명되었고,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도 직책을 맡았다.[9][10] 이후 케이프타운 대학교 전임 강사 및 외과 연구소장으로 승진했다. 1960년에는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장기 이식 분야의 선구자인 블라디미르 데미코프를 만났으며, 그의 업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1][12] 1961년에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부속 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962년에는 같은 대학 외과 부교수로 승진했다. 그의 남동생인 마리우스 바너드 역시 의사가 되어 형의 심장 외과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 바너드는 팔로 증후군, 엡스타인 기형 등 여러 심장 질환 치료법 개발에 기여하며 명성을 쌓았고, 1972년 케이프타운 대학교 외과 교수로 승진했으며, 1984년에는 명예 교수가 되었다. 1981년에는 세계 문화 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다.[13]
바너드는 동물 실험을 통해 심장 이식 기술을 연구했으며, 1967년 12월 3일 케이프타운의 그루트 쉬어 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인간 심장 이식 수술을 성공시켰다. 이 수술은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가 된 24세 여성 데니스 대럴(Denise Darvall)의 심장을 55세 남성 루이스 와슈칸스키(Louis Washkansky)에게 이식한 것이었다. 와슈칸스키는 수술 후 18일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지만, 이 수술은 의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68년 1월 2일에는 두 번째 심장 이식 수술을 필립 블레이버그(Philip Blaiberg)에게 시행하여 19개월(593일) 생존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83년 은퇴할 때까지 총 49건의 심장 이식 수술을 집도했다.
특히 두 번째 심장 이식 수술에서 유색인 기증자의 심장을 백인에게 이식한 것을 두고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하여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바너드 자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은퇴 후에는 심장 질환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수술 기회를 제공하는 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갔다. 2001년 9월 2일, 휴가차 머물던 키프로스의 한 호텔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케이프타운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크리스티안 바너드 기념 병원"이 있다.
2. 3. 세계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
1967년 12월 3일, 크리스천 버나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그루테 쉬어 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인간 대 인간 심장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32][68][33]이 수술 이전에도 심장 이식에 대한 연구와 시도가 있었다. 1964년 제임스 하디는 미국에서 침팬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하는 최초의 심장 이식이자 이종 이식 수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17][18][19][20][21] 버나드 자신도 개를 대상으로 48번의 심장 이식 실험을 했으며, 이는 당시 다른 선구자들(애드리언 칸트로위츠, 노먼 슘웨이)의 실험 횟수보다는 적었다.[22][23][24]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리처드 로워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이 개발한 새로운 기술 덕분에 여러 수술팀이 인간 심장 이식 수술을 준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2][25] 버나드 역시 수술을 받을 환자와 함께 적합한 기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2][24]
수술 환자는 당뇨병과 치료 불가능한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던 54세의 루이스 워시칸스키였다.[34][35] 심장 기증자는 1967년 12월 2일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젊은 여성 데니스 다바르였다.[2] 그로테 쉬어 병원에서 다바르의 뇌 활동이 없음을 확인한 후,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심장 기증 동의를 얻었다.[42][43]
버나드는 수술 전날, 기존의 이식 기술(슘웨이와 로워의 방식)을 일부 수정하여 적용하기로 결정했다.[44] 수술에는 그의 형제인 마리우스 버나드를 포함한 30명의 의료진이 참여했으며, 약 5시간이 소요되었다.[24][35][36][37] 이식 과정에서 마리우스 버나드의 제안으로, 기증자의 심장이 자연적으로 멈추기를 기다리는 대신 칼륨을 주입하여 심장을 마비시킨 후 적출했다.[2]
버나드는 워시칸스키와 그의 아내에게 이식 성공 확률이 80%라고 설명했으나,[38][39][40] 이 발언은 후에 윤리학자 피터 싱어와 헬가 쿠스로부터 근거가 부족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41] 워시칸스키는 수술 후 18일간 생존했지만, 면역 거부 반응을 억제하기 위해 투여된 면역 억제제로 인해 발생한 폐렴으로 사망했다.[45]
이 수술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이루어졌다. 버나드의 연구팀에는 정식 외과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뛰어난 기술을 가졌던 흑인 해밀턴 나키가 있었으며, 버나드는 나키의 봉합술 등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주로 신뢰성을 잃은 것으로 평가받는 다큐멘터리 영화 ''숨겨진 심장''(Hidden Heart)[27][28][29][30]과 일부 언론 보도[26]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나키가 워시칸스키의 첫 이식 수술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이 있다.[26][31] 버나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2. 4. 추가적인 심장 이식
1968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약 100건의 심장 이식이 다양한 의사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환자 중 3분의 1만이 3개월 이상 생존하는 등 낮은 성공률을 보였다.[49] 이로 인해 많은 의료 센터가 이식 수술을 중단하게 되었다.[25]그러나 버나드는 이식 수술을 계속 진행했다. 그의 두 번째 심장 이식 수술은 1968년 1월 2일에 시행되었으며, 환자 필립 블레이버그(Philip Blaiberg)는 이식 후 19개월 동안 생존했다.[68][50] 이 수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뇌졸중으로 사망한 24세의 흑인 남성 클라이브 하우프(Clive Haupt)의 심장이 백인인 블레이버그에게 기증되었기 때문이다.[51] 버나드 자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나드의 환자 중에는 장기 생존 사례도 나왔다. 1971년에 심장을 이식받은 디르크 반 질(Dirk van Zyl)은 23년 이상 생존하여 가장 오래 산 환자로 기록되었다.[52] 1967년 12월부터 1974년 11월까지 케이프타운의 그루테 쉬어 병원에서 이루어진 10건의 심장 이식(및 1건의 심장-폐 이식) 중 4명의 환자가 18개월 이상 생존했으며, 그중 도로시 피셔(Dorothy Fischer)는 13년 이상, 다른 한 명은 24년 이상 생존했다.[53]
버나드는 기증자 심장의 기능 회복 지연 문제나 환자의 기존 질환(예: 폐고혈압)으로 인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환자 본인의 병든 심장을 그대로 두고 기증자 심장을 추가하는 방식의 이종 심장 이식(heterotopic heart transplant, 일명 '피기 백' 이식)을 고안했다. 그는 1974년에 첫 이종 심장 이식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53][54] 1974년 11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그루테 쉬어 병원에서 43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49건의 이종 심장 이식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표준 이식보다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1년 생존율은 60% 이상(표준 이식 40% 미만), 5년 생존율은 36% 이상(표준 이식 20% 미만)이었다.[53]
많은 외과 의사들이 환자의 면역 체계에 의한 이식된 심장의 거부 반응 문제로 심장 이식을 포기했지만, 버나드는 효과적인 면역 억제제인 사이클로스포린이 개발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며 심장 이식 수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사이클로스포린의 등장은 전 세계적으로 심장 이식 수술이 다시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개코원숭이와 침팬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하는 이종 이식(xenotransplantation)을 두 차례 시도하기도 했다.[55]
2. 5.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입장

버나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해외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국제적인 명성을 이용하여 아파르트헤이트 법 개정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그의 동생인 마리우스 버나드 역시 정치에 참여하여 진보 연방당 소속으로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버나드는 자신이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이 "백인 남아프리카인"이기 때문일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56]
1978년 케냐 방문 직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아프리카인들의 정치 참여는 지지하지만 완전한 1인 1표제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57]
같은 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비로운 독재자'라면 인종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냐는 가상의 질문에 답하는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견해를 드러냈다.[58]
- 사회적 차별은 폐지하겠지만 정치적 차별은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58]
- 인종 경계에 따라 국가를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두 개의 동등한 구역으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유색 인종의 거취에 대해서는 "백인 남아프리카에 포함시키겠다"고 답했다.[58]
- 유색 인종은 백인들 사이에서 "항상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했다.[58]
- 흑인들이 자신의 보편적 선거권 반대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58]
- 스포츠 분야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참가가 금지된 상황을 비판했다.[58]
- 소웨토 봉기에 대해서는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외부의 자극이 많았다"고 주장했다.[58]
- 스티브 비코 사망 사건으로 인한 흑인 사회의 분노에 대해, "장례식에서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외부에서 약 5만달러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58]
- 국민당 구성원들도 비코의 죽음에 대해 흑인들만큼이나 분노했다며, "백인 사회는 철저히 화가 났고,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매우 화가 났다"고 주장했다.[58]
인터뷰 말미에 그는 "나는 종종 리어왕처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죄를 짓기보다는 죄를 받는 나라라고 말합니다"라고 덧붙였다.[58]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 당시 기증자가 흑인이고 이식 수혜자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관련하여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버나드 자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2. 6. 사생활
안드레 (1951년생–1984년 사망)크리스티안 주니어 (1974년생)
라라 (1997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