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로스 (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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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릴로스(9세기)는 9세기의 비잔틴 신학자이자 슬라브족 선교사로, 본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이다. 그는 형 메토디우스와 함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글라골 문자를 창제하여 슬라브어 성경을 번역하는 등 슬라브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동로마 제국의 요청으로 모라바 왕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로마로 초청받아 슬라브어 전례 사용을 승인받았으나, 869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키릴로스는 슬라브의 사도로 불리며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슬라브 문화권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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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9세기에 슬라브족의 기독교화에 기여하고 글라골 문자를 창제하여 슬라브어 성경 번역에 힘쓴 비잔틴 제국 출신 형제이다. - 869년 사망 - 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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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는 4세기 초 로마 제국에서 순교한 초기 기독교 성녀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정결을 서약하고 순교하여 순결, 정원사 등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으며, 매년 축일에는 교황이 축복한 어린 양털로 팔리움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
키릴로스 (9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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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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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슬라브의 아사도 |
다른 언어 표기 | 그리스어: 불가리아어: 러시아어: 체코어: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테살로니키 |
출생년 | 827년 |
사망지 | 로마 |
사망년 | 869년 2월 14일 |
숭배 교파 | 정교회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
기념일 | 2월 14일 (가톨릭 교회) 5월 11일 (정교회) 7월 5일 (체코) |
관련 항목 | |
참고 자료 |
2. 생애
키릴로스는 테살로니키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콘스탄티노스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철학을 배우고 수도사가 되어 "키릴로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에 정통한 문헌학자이자,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이해하고 반박서를 저술하는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9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이 모라바 왕 라스티슬라프로부터 기독교 선교사 요청을 받자, 형 메토디우스와 함께 모라바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라스티슬라프를 비롯한 모라바 왕족들에게 세례를 주고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며, 글라골 문자를 사용하여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등 슬라브 세계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힘썼다.
867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는 교황니콜라오스 1세로부터 로마로 초청받았다. 이는 모라바 관할권 문제와 슬라브어 성경 사용의 타당성을 놓고 잘츠부르크 주교와 벌어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868년, 로마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지지를 받았고, 슬라브어 전례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키릴로스는 이 해 말에 병에 걸려 869년 2월 14일에 사망했다.
키릴로스 사후, 모라바 전도와 슬라브어 전례 정비는 형 메토디우스와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동로마 제국 해군 제독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릴로스의 본명은 콘스탄티노스였으며, 14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이후 궁정 신하였던 환관 테옥티스투스에게 발탁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키릴로스는 일찍부터 학식과 덕망을 인정받아 당대 대학자인 포티우스의 휘하에서 사서로 일했다. 수사학, 신학, 천문학 등을 배웠으며, 특히 언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라틴어, 아랍어, 슬라브어, 그리스어 등 거의 모든 언어에 능통했으며, 황제 미카일 3세는 "모든 테살로니키인들은 슬라브어를 완벽히 구사하는가…" 라며 칭찬했다고 전해진다.졸업 후에는 수도사가 되어 "키릴로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히브리어에도 정통한 문헌학자이자,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이해하고 반박서를 저술하는 철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2. 2. 하자르족 선교
키릴로스는 하자르족에 대한 선교에 나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하자르족 군주의 호의를 얻어 그리스도인 포로 2,000명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1] 그는 다른 유일신교인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한편 유대교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하자르족의 전도를 위해서였을 것이다.[1]2. 3. 슬라브족 선교와 문자 창제
862년 대모라바 왕국의 군주 라스티슬라프가 황제 미카일 3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사실 라스티슬라프의 요청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북서부의 국경에서 프랑크족의 압박을 받았는데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가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와 동맹을 맺자 자신도 동맹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항상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바라는 황제와 포티우스에게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언어에 뛰어난 키릴로스가 선정되었고 864년 초여름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는 모라비아로 떠나 그곳에서 슬라브족의 선교에 헌신했다.[2]일설에 따르면 키릴로스는 그 때까지 문자가 없었던 슬라브어를 표현하기 위해 새 문자를 발명해서 성서와 일부 기도문을 번역했는데 그가 사용한 언어는 마케도니아식 슬라브어였다고 한다. 모라비아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달랐기 때문에 모라비아 선교는 실패했지만 나중에 이 문자들은 슬라브족의 언어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예전에는 키릴로스가 고안한 문자는 현대의 키릴 문자가 아니라 더 조악하고 오래전에 사멸한 글라골 문자라고 생각했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 부정되었다.[2]
테살로니키 출신의 키릴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철학을 배우고 졸업 후 수도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한 문헌학자이자,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이해하고 반박서를 저술하는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9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이 모라바 왕 라스티슬라프로부터 기독교 선교사 요청을 받자, 포교를 위해 형인 메토디우스와 함께 모라바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라스티슬라프를 비롯한 모라바 왕족들에게 세례를 주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새롭게 고안한 글라골 문자를 사용하여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등 슬라브 세계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힘썼다. 그 때문에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는 함께 "슬라브의 (아)사도"로 불리며, 슬라브권의 기독교 교회에서 존경받는다.
2. 4. 로마 방문과 죽음
867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를 로마로 초청했다. 이는 슬라브 지방의 관할권 문제와 라틴 전례만을 고집하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테오트마르와 파사우 주교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11월 13일에 갑작스럽게 선종하였고, 이듬해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는 로마에 도착하여 새로운 교황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하드리아노 2세는 형제의 입장에 동조하여 슬라브식 전례 사용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키릴로스는 868년 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요양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고, 869년 2월 14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일설에는 죽기 직전 주교 자리에 봉해졌다고 하나 증거는 희박하다.키릴로스는 슬라브 선교의 공을 인정받아 동방 정교회에서 즉각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1880년에 형인 메토디우스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98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들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3. 영향과 숭배
키릴로스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양쪽에서 슬라브어권에 깊이 숭배받고 있다. 정교회에서는 슬라브의 아사도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가톨릭 교회에서는 1880년에 형 메토디오스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1]
3. 1. 기념
키릴로스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양쪽에서 슬라브어권에 깊이 숭배받고 있다. 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 전문에는 "키릴과 메토디오스가 전한 정신...을 잊지 않고"라는 구절이 있다.[1]정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슬라브의 아사도라는 칭호로 불린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880년에 형 메토디오스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기념일(축일)은 가톨릭에서는 2월 14일, 정교회에서는 5월 11일이다. 형 메토디오스와 공통의 기념일도 있다. 7월 5일은 체코의 공휴일이다. 슬로바키아에서는 1993년부터 2009년의 유로 도입까지 유통되었던 50코루나 지폐에 메토디오스와 함께 초상이 사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에는 성 키릴-메토디우스 정교 대성당이 있어,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를 기념하고 있다. 이 대성당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실행자들의 마지막 장소가 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スロバキア共和国憲法 前文
http://www.e-law-int[...]
[2]
서적
비잔티움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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