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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라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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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모라바 왕국은 9세기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존재했던 서슬라브족 국가이다. 현재의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일부 지역을 포괄했으며, '메갈레 모라비아'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모라바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모이미르 1세, 라스티슬라프, 스바토플루크 1세 등의 군주가 통치했다. 870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최대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894년 이후 쇠퇴하여 907년경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대모라바는 슬라브족의 정착과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화와 키릴로스-메토디오스 형제의 선교 활동을 통해 슬라브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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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라바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대모라비아 지도
대모라비아 전체 영토 (짙은 녹색). 옅은 녹색은 대모라비아가 주장했지만 통제하지 못했던 지역.
스바토플루크 1세 시대의 대모라비아 제국 지도
스바토플루크 1세 치하에서 최대 강역에 도달한 대모라비아 왕국
기본 정보
토착어 이름(고대 교회 슬라브어)
일반 명칭대모라비아
다른 이름, , , , , ,
수도벨리그라드 (추정)
9세기 그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깃발
9세기 이미지에 기반한 재구성된 깃발 (vexillum). 붉은 보라색이 가장 유력한 색상.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공국)
통치자 칭호크네즈 (kъnendzь) 또는 블라디카 (vladyka)
초대 통치자모이미르 1세
마지막 통치자모이미르 2세
초대 통치자 재임 기간기원후 820년대/830년대
라스티슬라프 재임 기간846년
스바토플루크 1세 재임 기간870년
마지막 통치자 재임 기간894년
역사
건국833년
멸망기원후 907년경, 쇠퇴 및 멸망
이전 국가사모의 제국, 니트라 공국(논쟁 중), 비스툴란, 백크로아티아
계승 국가보헤미아 공국, 헝가리 공국, 치비타스 스키네스게, 루티치, 동프랑크 왕국
언어 및 종교
공용어고대 슬라브어, 고대 교회 슬라브어, 라틴어(종교)
종교슬라브 기독교, 라틴 기독교, 슬라브 토속종교
기타
현재 국가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2. 국호

'대모라바'라는 명칭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89] 이 명칭은 10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저술한 《제국의 행정(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메갈레 모라비아(Μεγάλη Μοραβίαel)'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몰락 이후의 사건을 언급할 때 '메갈레'라는 형용사를 사용했는데, 최근에는 '대(大)/커다란/위대한' 대신에 '옛(古)/오래된'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동로마 제국 국경 너머의 지역을 칭할 때 쓰인다고도 한다. 역사학자 루보미르 E. 하블리크는 대불가리아처럼 동로마인들이 유목 민족의 영역이나 고향을 의미할 때 '메갈레'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작품은 당대에 모라바를 형용사를 붙여 표현한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9세기와 10세기 사료에서는 "모라바 왕국", "모라바인의 영역", "모라바", "슬라브인의 왕국(regnum Sclavorumla)", "라스티슬라프의 왕국(regnum Rastizila)", "스뱌토플루크의 왕국(regnum Zuentibaldila)" 등으로 불렀다.

2. 1. 어원

'대모라바'라는 명칭은 950년경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쓴 「제국의 행정(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메갈레 모라비아(Μεγάλη Μοραβίαel)'로 처음 등장했다.[89] 현대에는 '대(大)/커다란/위대한' 대신 '옛(古)/오래된'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동로마 제국 국경 너머의 지역을 가리킬 때 쓰인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학자 루보미르 E. 하블리크는 동로마인들이 유목 민족의 영역이나 고향을 의미할 때 '메갈레'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작품은 당대에 모라바를 형용사를 붙여 표현한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모라바 멸망 이후 9세기와 10세기 사료에서는 "모라바 왕국", "모라바인의 영역", "모라바", "슬라브인의 왕국", "라스티슬라프의 왕국", "스뱌토플루크의 왕국" 등으로 불렀다.

"모라바"는 체코어슬로바키아어로 강(모라바 강) 이름 및 나라 이름 모두를 의미하는데, 강 이름이 먼저 생겨나고 나라 이름은 강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미 '-ava'는 게르만어 '-ahwa'가 슬라브화된 것으로, 라틴어 '아쿠아(aqua, 물)'와 관련이 있다. 어근 'mor-'는 슬라브어 'more(바다)', 라틴어 'mare(바다)' 등 물, 호수, 바다와 관련된 인도유럽어족 단어들과 유사하다.[91]

3. 영토

대모라바 왕국의 정확한 위치와 경계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대모라바 멸망 이후, 그 영토는 보헤미아 공국과 헝가리 공국으로 나뉘어졌고, 초기 국경은 모라바강이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체코 군주들이 동쪽 강변의 지역을 점점 더 많이 확보하면서, 체코 지역의 최종적인 동부 국경은 '우헤르스케흐라디슈테(Uherské Hradiště)' 하부에서 '스트라주니체(Strážnice)'까지, 백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의 동쪽 영토 전체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모라바의 핵심 영토


대모라바의 원래 핵심 영토는 오늘날 모라바 지역 동부에 해당하며, 백카르파티아 산맥과 Chřiby 산맥 사이에 위치한다. 이웃한 슬로바키아에서는 이 지역을 포함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슬로바키아 본토의 자호리에, 그리고 체코의 '잘루지(Záluží)' 지역을 포함하여 '슬로바코'라고 부르는데, 이는 과거 대모라바 시대에 생겨난 명칭이다. 여기서 체코를 제외한 다른 서슬라브인들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830년대 초 모지미르 1세가 이웃한 니트라 공국(오늘날 슬로바키아 서부)을 정복하면서 대모라바의 핵심 영토가 늘어났으며, 그 지역은 왕위 계승자의 영지, 즉 '지역 공국(údelné kniežatstvo)'으로서 여겨졌다.

대모라바 내의 공국 및 행정 구역


대모라바의 정확한 영토 경계와 위치, 심지어 본래 모라바인들이 스스로를 불렀던 명칭조차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왕국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10] 대모라바의 국경은 사료 부족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11][12] 9세기 연대기를 작성한 사제들은 중부 유럽보다 먼 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부족했을 것이다.[7] 게다가, 모라바 군주들이 830년대부터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구하면서 대모라바의 영토가 확장되었던 것도 한몫했다.[13]

대모라바는 스뱌토플루크 1세 치하에서 최대 영토에 도달했다.[13]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치세에 마워폴스카(소폴란드)와 판노니아 및 여러 지역들이 잠시동안이지만 대모라바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12][14] 그렇지만 모라바, 마워폴스카, 실레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지들은 대모라바의 북부 국경이 이 지역에 위치했었음을 입증하지 못했다.[15] 고고학자 벨러 미클로스 스조케(Béla Miklós Szőke)는 모라바는 판노니아 지역으로 확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 증거로 고고학 발견물이나 기록된 사료들이 모두 스뱌토플루크의 통치 기간 동안 거대한 영토를 영구적으로 병합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13] 또한 다른 학자들은 모라바가 그렇게 많은 지역을 정복할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핵심 영토 이상의 국경을 설정하는 것은 실수라고 말하기도 한다.[15]

3. 1. 전통적인 견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대모라바 왕국의 핵심 영토가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위치한 모라바 강 계곡에 있었다고 본다.[92] 9세기에 대규모 중세 초기의 요새와 그 주변에 성장한 상당한 정착지 집단의 고고학적 발견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권력의 중심지가 등장했음을 시사한다. 알프레드 대왕의 오로시우스의 ''세계사'' 번역본, ''키릴의 생애''에 기록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가 모라비아에서 판노니아를 거쳐 베네치아로 여행한 내용과 같은 초기 자료들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를 뒷받침한다.

정확한 동시대 자료가 부족하여 모라비아의 국경은 정확하게 결정될 수 없다. 예를 들어, 9세기에 ''풀다 연대기''를 작성한 수도사들은 중앙 유럽의 먼 지역의 지리에 대해 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모라비아의 군주들은 830년대에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그들의 영토 경계는 자주 바뀌었다.

모라비아는 스뱌토플루크 1세(870–894) 치세에 영토 확장의 정점에 도달했다. 소 폴란드, 판노니아 및 기타 지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 그리고 종종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종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반면에 모라비아, 소 폴란드, 실레지아 사이에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공유된 문화 지역의 존재는 모라비아의 북쪽 경계가 이 영토 위에 위치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고고학자 벨라 미클로스 쇠케에 따르면, 판노니아의 모사부르크 백작령은 결코 모라비아의 일부가 아니었다. 고고학적 발견이나 기록 자료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거대한 영토를 영구적으로 합병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다른 학자들은 모라비아가 그 정도의 발전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핵심 영토의 경계를 그리는 것은 실수라고 경고한다.

3. 2. 다른 이론

1784년, 슬로바키아의 역사학자 유라이 스클레나르는 대모라바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핵심 지역을 시르미아 인근에 위치시킨 후 왕국이 그 지역에서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모라바, 보헤미아 지역으로 팽창했다고 주장했다.[4] 1970년대까지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4] 임레 보바가 대모라바의 핵심 영토가 세르비아의 벨리카모라바강 인근의 시르미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5][6][7] 페테르 푸스포키-나기는 대모라바가 오늘날 세르비아 남모라바강에 있었으며, 체코 및 슬로바키아의 북모라바강에는 나중에 '모라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8] 토루 센가도 이와 비슷한 이론을 발표했다.[9] 1990년대에 찰스 볼루스는 대모라바가 드라바강, 사바강, 드리나강, 티샤강, 남모라바강과 다뉴브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랑크족의 변경백령이나 기타 속주 조직이 남동쪽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을 대모라바의 원래 위치로 제시했다.[10] 마르틴 에거스는 대모라바가 티샤강과 무레슈강이 합류하는 오늘날의 바나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나중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까지 확장되었다고 제안했다.[5][6]

4. 역사

아바르 칸국이 7세기 말 안정된 통치를 하면서 이 지역은 슬라브족 정착지와 요새가 건설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다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아바르 칸국이 붕괴하면서 정세가 급변, 멸망한 아바르족 유민과 카롤링거 왕조의 지식, 세공 기술을 흡수하며 '블라트니카-미쿨치체 범위'라는 새로운 문화 유형이 출현했다.

모이미르 1세는 니트라 공국의 프리비나를 몰아내고 주변 부족을 통일, 대모라바를 성립했다. 프랑크 왕국의 위협 속에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 보헤미아, 실레시아, 니트라 일대를 장악하고 서슬라브족 최초의 거대 국가를 형성, 스스로 공작을 칭했다.

모이미르 1세의 뒤를 이은 라스티슬라프는 동프랑크 왕국에 비해 약한 국력을 보완하고자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 862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슬라브어로 기독교를 전파하며 글라골 문자를 고안했다. 그러나 라스티슬라프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살해당하고, 동로마 선교사들은 탄압받아 키릴 문자를 발전시킨 불가리아 등지로 흩어졌다.[77][81]

스바토플루크 1세 시대에 대모라비아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빌헬미너 전쟁을 틈타 판노니아를 공격하고, 마자르족 침입으로 판노니아 동부가 파괴되었다. 결국 동프랑크 왕국은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영토 일부를 넘겨주고 봉신으로 삼았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대모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81]

스바토플루크 1세 사후, 대모라비아는 급격히 몰락했다. 894년 모이미르 2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예속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보헤미아동프랑크에 투항했다. 스바토플루크 2세의 반란과 바이에른의 공격으로 대패, 이후 마자르족 침입으로 907년경 멸망했다.[22] 다만, 지역 신민과 귀족은 남아 지위를 유지, 헝가리 왕국에 흡수되며 모라비아의 정치, 행정 제도는 대부분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74]

4. 1. 초기 발전 (800년 이전)

이 지역은 아바르 칸국의 통치가 안정된 7세기 말부터 점점 슬라브족의 정착지와 요새가 건설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74]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아바르 칸국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이 지역의 정세도 급변하게 되었다.[75] 멸망한 아바르족의 유민들을 흡수하고, 인접하게 된 카롤링거 왕조의 지식과 세공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그 결과 블라트니카-미쿨치체 범위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화적 유형이 출현했다.

7세기와 8세기에는 지역 슬라브족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최초의 슬라브족 요새는 7세기 마지막 수십 년에 현재의 모라비아에 건설되었다. 7세기 말부터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보헤미아에서 새로운 사회 엘리트인 전사 기병의 등장을 기록할 수 있다. 8세기 동안 지역 슬라브족의 사회 조직은 계속 성장했으며, 이는 요새의 추가 건설 및 개발을 통해 문서화할 수 있다. 모라비아에서는 모라바 강 주변에 명확하게 집중되어 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8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가장 오래된 슬라브족 요새가 문서화되었다. 도자기의 변이는 9세기 초 북부 모라바 강 유역에 거주하는 최소 세 개의 부족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의 정착지 유적은 예를 들어 현대 브라티슬라바, 브르노, 올로모우츠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800년경 브라티슬라바, 라지흐라드, 스타레 메스토 및 기타 지역에 건설된 요새는 같은 지역에서 지역 권력 중심지의 발전을 증명한다.

아바르 카간국의 붕괴 이후, 칼과 기타 프랑크 군사 장비가 중부 도나우 강 북쪽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슬로바키아 블라트니차의 무덤에서 발견된 칼은 825년에서 850년 사이의 시기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자 플로린 쿠르타에 따르면, 그 칼은 카롤링거 제국의 프랑크 장인이 제작했다.

4. 2. 모라비아 왕국의 성립과 발전 (800년 ~ 846년)

모라비아 지역은 7세기 말 아바르 칸국의 통치가 안정되면서 슬라브족의 정착지와 요새가 건설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아가다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아바르 칸국이 붕괴하면서 정세가 급변했다. 멸망한 아바르족 유민을 흡수하고, 카롤링거 왕조의 지식과 세공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블라트니카-미쿨치체 범위'라는 새로운 문화 유형이 출현했다.[74]

모이미르 1세는 이웃한 니트라 공국의 군주 프리비나를 몰아내고 주변 부족들을 통일하면서 대모라바 왕국을 성립시켰다.[75] 프랑크 왕국의 세력 팽창에 맞물려 국경선이 맞닿게 되었고, 프랑크의 위협 속에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해나갔다. 보헤미아, 실레시아, 니트라 일대를 장악하여 서슬라브족 최초의 거대 국가를 형성하고 스스로 공작을 칭했다.[75]

모라비아와 니트라 지도
830년대 이전에 두 개의 공국 (모라비아와 니트라)의 공존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는 지도


프랑크 왕국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수용하고, 가톨릭 교회의 잘츠부르크 대주교좌에 의한 포교를 인정했다.[76] 829년에는 프랑크 왕국 남동부 도시 파사우의 주교가 모라비아 교회를 관할하게 되는 등 프랑크 왕국에 종속되어 있었다.[77] 831년에는 파사우의 레긴하르 주교가 "모든 모라비아인"을 세례했다는 기록이 있다.[9]

그러나 도나우강 하류에 위치한 불가리아 왕국의 존재는 모이미르 1세에게 경계심을 주었고, 프랑크 왕국에 종속되면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846년 동프랑크 왕국의 왕 루트비히 2세는 "배반을 계획하고 있던 모라비아 슬라브족"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고, 이 원정 중에 모이미르 1세는 폐위되고[78] 그의 조카인 라스티슬라프가 모라비아의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되었다.[12]

4. 3. 라스티슬라프의 통치와 독립 투쟁 (846년 ~ 870년)

모이미르 1세의 뒤를 이은 라스티슬라프는 처음에는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모라비아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국경을 확장해 나갔다.[77] 예를 들어, 현재 슬로바키아 동부의 슬란스케 언덕 지역을 합병했다.[77]

Rostislav
모라비아의 라스티슬라프를 동방 정교회 성인으로 묘사한 현대 그림


라스티슬라프는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에 비해 약한 국력을 보완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79] 동로마 제국에서는 862년 모라비아에 선교사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를 보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슬라브어로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글라골 문자가 고안되었다.[79]

라스티슬라프는 동프랑크 왕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프랑크 사제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861년에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를 모라비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로마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에 라스티슬라프는 같은 요청으로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에게 의존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그는 프랑크족과 불가리아인 사이에 체결된 반모라비아 동맹에 대항하고자 했다.[79]

863년, 비잔틴 황제의 요청에 따라 테살로니키 지역의 슬라브 방언을 구사하는 두 형제인 성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모라비아로 파견되었다. 콘스탄티누스(키릴로스)는 글라골 문자를 개발하고 복음서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번역했다.[79]

Constantine and Methodius in Rome
성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로마에 있는 모습


867년, 비잔틴 형제 콘스탄티누스(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로마를 방문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그들의 전례 텍스트 번역을 승인하고 그들의 제자 6명을 사제로 서임했다. 교황은 869년의 서한에서 라스티슬라프, 그의 조카 스바토플루크, 코첼에게 전례에서 토착 언어 사용을 승인했음을 알렸다.[80]

그러나 라스티슬라프가 동프랑크의 지지를 등에 업은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870년에 살해당한 후, 동로마에서 온 선교사들(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의 제자들)은 탄압받았다.[77][81] 결국 선교사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지로 흩어졌는데, 이 중 불가리아로 간 선교사들이 보리스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슬라브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글라골 문자를 개조 및 변형하여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

4. 4. 스바토플루크 1세의 통치와 전성기 (870년 ~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870년 라스티슬라프를 제거하는데 일조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후 카를로만은 라스티슬라프의 왕국을 합병하고 프랑크족 귀족 빌헬름과 엥겔샬크 1세를 임명하여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는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871년 루이 2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다. 이에 모라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스바토플루크의 친족인 슬라보미르를 공작으로 선출했고, 스바토플루크는 모라비아로 돌아와 반란군을 지휘하여 프랑크족을 몰아냈다. 체코 역사학자 두샨 트르제슈티크는 871년의 이 반란이 최초의 슬라브 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79]

872년 루이 2세는 모라비아를 공격했지만, 스바토플루크는 "매우 잘 요새화된 요새"로 피신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라비아 군대는 황제 군대를 여러 번 격파하여 프랑크족을 철수시켰다. 이후 스바토플루크는 루이 2세와 협상을 시작하여 874년 5월 포르히하임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스바토플루크는 루이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했다.[77]

독일왕 루트비히 2세 사후, 876년 비만왕 카를 3세가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이후 빌헬미너 전쟁이 발발했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이 틈을 타 판노니아 일대로 진격하여 엥겔샤크 2세의 둘째 아들을 불구로 만들었다. 또한 마자르족도 판노니아 및 빈 일대에 침입하여 판노니아 동부 일대가 크게 파괴되었다.[81]

결국 카를 3세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영토 일부를 넘겨주고 그를 봉신으로 받아들였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대모라바 왕국을 선포했다. 884년, 스바토플루크는 황제 카를 3세와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왕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동프랑크의 아르눌프가 대모라비아를 공격했지만,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4년 사망하면서 전쟁이 끝났다.[82]

브라티슬라바 성의 스바토플루크 1세 동상, 슬로바키아

4. 5. 쇠퇴와 멸망 (894년 ~ 907년경)

스바토플루크 1세의 치세 이후 대모라비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894년 아들 모이미르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예속된 부족들이 대모라비아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29] 보헤미아 공작은 아예 아르눌프의 수하로 들어가버릴 정도로 전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22][30] 또한, 스바토플루크 1세의 둘째 아들인 스바토플루크 2세 또한 형인 모이미르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내전 끝에 찾아온 바이에른의 공격으로 대모라비아는 대패하여 완전히 몰락하였다.

뒤이어 대모라비아에 마자르족이 대규모로 침입하자 대모라비아는 어떻게 멸망했다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망국의 길을 걷고 말았다.[22] 현재 대모라비아가 멸망한 시기를 907년 전후로 추정한다. 907년에 동프랑크와 마자르가 브라티슬라바에서 벌인 브레잘라우스푸르크 전투의 기록에서 모이미르 2세나 그의 후계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을 정도이다.[31]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지역에 살던 신민들과 귀족들은 그대로 그 지역에 남아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의 언어학적 증거나 고고학적 증거, 또는 초기 헝가리 왕국의 이 지역 출신 귀족 가문들의 존재로 미루어볼 때 헝가리 왕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도 모라비아의 정치적 제도나 행정은 대부분 계승된 것으로 보이며, 기존 사회 엘리트들 역시 무리없이 계승되어 혼트-파즈마니 가문[74]과 같이 봉건 귀족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5. 사회와 문화

대모라바의 사회는 모이미르 왕조의 군주가 통치했으며, 왕위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계승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1세만이 유일하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33] 군주는 '공작(ducis)', '왕(regis)', 'malik'('왕')[34] 등으로 불렸으며, 중요한 결정은 모라바 "공작"으로 구성된 회의에서 논의되었다.[4][5]

대모라바 군사력의 핵심은 군주의 호위대(''družina'')와 자유 시민으로 구성된 ''pohotovosť''였다.[22] 호위대는 전문 전사들로 구성되었고,[22] 기병대가 중심이었다.[43]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많은 기병을 보유했다고 기록했다.[43] ''pohotovosť''는 주로 영토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3] 군대는 군주나 보예보다가 지휘했으며,[44] 강력한 요새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44]

행정 구역은 "주판(zhupans)"이라 불리는 귀족들이 다스리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여러 슬라브 부족을 통합했지만,[29] 복속된 부족들은 자치권을 유지하여 제국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9]

대모라바는 초기에는 조상 숭배와 다신교를 믿었지만,[51] 모라비아의 기독교화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22][52] 성 키릴로와 메토디우스는 글라골 문자를 발명하고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기독교 세계의 네 번째 전례 언어로 만들었다.[55] 이들은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수백 명의 슬라브 성직자를 배출했지만,[52] 메토디우스 사후 그의 제자들이 추방되면서 슬라브 전례는 중단되었다.[55] 그러나 이들의 문화 유산은 불가리아 제1제국,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등 다른 슬라브 국가에 전파되었고, 키예프 루스기독교화에 영향을 미쳤다.

5. 1. 정착 구조

대모라바 정착촌의 중심지는 방어 시설을 갖춘 요새화된 정착촌이었다. 대부분의 성은 나무 울타리, 석조 벽, 해자를 갖춘 큰 구릉 요새였다. 전형적인 대모라바 성벽은 외부의 드라이스톤 벽과 흙으로 채워진 내부 목조 구조를 결합했다. 요새는 대개 여러 개의 인접한 구획을 형성했으며, 엘리트 건물이 중앙에 집중되고 공예품이 외부 구획에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목재로 만들어졌지만, 교회 건물과 주거용 건물은 돌로 만들어졌다. 많은 경우 선사 시대 요새도 통합되었다. 대모라바의 도시, 특히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저지대에서는 석재 채굴 장소와 재료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대모라바 정착촌은 네 가지 주요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쿨치체-발리, 스타레 메스토 – 우헤르스케 흐라디슈테 및 니트라와 같이 여러 성과 정착촌이 거대한 요새화된 (사전) 도시 집합체를 형성하는 중앙 기능을 가진 지역이었다. 주요 중심지와 함께 요새화된 정착촌 시스템에는 요새화된 지역 행정 허브, 방어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요새, 위험한 경우에 사용되었지만 영구적으로 거주하지 않은 피난 요새가 포함되었다. 가장 큰 요새는 대개 더 작은 요새의 사슬로 보호되었다. 작은 요새는 또한 무역로를 보호하고 공격 시 농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두체와 다른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귀족 법원의 존재도 기록되어 있다. 그 형태는 아마도 ''curtis''라고 불리는 카롤링거 영지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9세기 미쿨치체에서 중앙 요새 지역, 즉 '아크로폴리스'는 모라바 강에 있는 섬에 자리 잡고 있었고 6헥타르의 면적을 둘러싼 석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200헥타르의 광대한 성 밖 정착촌은 요새화되지 않았다). 대모라바 수도인 "벨리그라드"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궁전과 12개의 교회가 있는 미쿨치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후보이다.[32][33] 중요한 정착촌은 브르제츨라프 근처 포한스코의 대규모 집합체였다. 니트라는 제국의 동부 지역의 중심지로, 왕조의 상속자가 분봉령으로 자치적으로 통치했다.[22] 니트라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개의 대규모 요새 정착촌과 약 20개의 전문 장인의 마을로 구성되어 당시의 진정한 대도시가 되었다. 공예품에는 보석, 유리와 같은 고급 상품의 생산이 포함되었다. 집합체는 수많은 작은 요새로 둘러싸여 있었다.

두체에 있는 대모라바 법원에서 발견된 프리 로마네스크 로툰다의 기초


브라티슬라바 성에는 9세기 중반에 지어진 석조 2층 궁전과 넓은 3랑 바실리카가 있었다. 바실리카 옆에 위치한 묘지의 발굴로 미쿨치체에서 발견된 것과 스타일과 품질이 유사한 대모라바 보석의 예가 발견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907년 대모라바가 멸망할 때 "Brezalauspurc"로 처음 기록되었다.[34] 이 이름은 문자 그대로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에 언급된 스바토플루크 1세의 아들인 "프레드슬라프의 성"을 의미하거나, 동 프랑크의 아르눌프 왕이 임명한 백작인 "판노니아의 브라슬라프의 성"을 의미한다.[22] 슬로바키아 보이나에서 여러 요새 정착촌의 집합체가 발굴되었으며, 이 지역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흐와 니트라 계곡 주변의 언덕과 다른 지역(예: 데트바, 제플린, 칭고프)에도 수많은 성이 건설되었지만, 슬로바키아 남동부에는 건설되지 않았다.

브라티슬라바 인근의 튼튼한 데빈 성은 서쪽의 공격으로부터 대모라바를 지켰다. 일부 저자는 헝가리 왕국의 요새로 나중에 건설되었다고 주장하지만,[35][36] 발굴 조사에서 8세기에 세워진 더 오래된 슬라브족 요새 정착촌이 발견되었다. 대모라바 시대에 데빈 성은 현지 영주의 거주지였으며, 그 부하들은 석조 기독교 교회 주변에 묻혔다. 이 두 성은 데빈스카 노바 베스, 스바티 유르 등에서 더 작은 요새로 강화되었다. 또 다른 예는 오스트리아 캄프 강을 내려다보는 가르 암 캄프 근처의 투나우 암 캄프 요새이다. 이곳의 방어 시설은 청동기 시대의 제방 방어를 재사용했으며, 당시 프랑크 제국 황제의 수도인 레겐스부르크의 면적보다 약간 작았다(50에이커).

발견된 요새의 수는 출처에 기록된 수(모라바인 11개 중심지, "다른 모라바인" 또는 ''메레하노스'' 30개 중심지)를 초과한다. 문헌에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성은 ''니트라와''(828; 니트라와 동일), ''도위나''(864; 때로는 데빈 성과 동일) 및 아마도 ''브레잘라우스푸르크''(907; 때로는 브라티슬라바 성과 동일)이지만,[37][38][39][40] 일부 출처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우즈호로드 (903)도 모라비아 요새였다고 주장한다. 데빈 성은 때때로 ''풀다 연대기''에 언급된 "라스티슬라프 공작의 요새"와 동일시된다.[41][42]

5. 2. 군주

대모라바는 모이미르 왕조의 군주들에 의해 통치되었다.[32] 왕위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는 경우가 드물었다.[33] 스바토플루크 1세만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유일한 군주였다.[33] 라스티슬라프는 동프랑크 왕국의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고,[33] 871년 프랑크족이 스바토플루크를 사로잡자 슬라보미르가 공작으로 선출되었다.[34] 슬라보미르는 선출 당시 이미 사제였기 때문에, 이 사례는 모이미르 왕조가 왕위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가졌음을 보여준다.[34]

9세기 기록에서 대모라바 군주들은 주로 '공작'(ducis)으로 불렸지만, 때로는 '왕'(regis) 또는 'malik'('왕')으로 불리기도 했다.[34] 미쿨치체에서만 교회 내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왕족이 이러한 명망 있는 장소에 묻힐 독점적인 권한을 가졌음을 의미한다.[35]

5. 3. 행정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대모라바 군주는 국가 통치자가 아닌 백성의 수장, 즉 "모라비아인의 공작"(''dux Maravorum'')이었다.[12] 모라비아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 지역은 "주판(zhupans)"이라 불리는 귀족이 다스렸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보헤미아인과 비슬라인 등 여러 슬라브 부족을 자신의 제국에 통합했다.[29] 복속된 부족들은 봉신 공작이나 총독이 통치했지만 자치권을 유지했는데, 이는 스바토플루크 1세 사후 대모라비아가 빠르게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29]

5. 4. 군사

대모라바 군대의 핵심은 군주의 호위대(''družina'')였다.[22] 이들은 전문 전사들로, 공물 징수와 범법자 처벌을 담당했다.[22] 호위대는 귀족 출신("구 호위대")과 군주 군사 집단 출신("신 호위대")으로 구성되었다.[43] 이들은 군주를 위한 상시 무장 경비대 역할을 하거나 요새 등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했으며, 불만이나 봉기 기록이 없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다.[43]

군대의 상시 부대는 기병대 중심이었다.[43] 대모라바 중기병은 당시 프랑크 족 기사를 모방했는데, 최고 사회 계층만이 감당할 수 있는 값비싼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43] 아랍 여행가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많은 기병을 보유했다고 기록했다.[43] 호위대의 전체 규모는 3,000~5,000명으로 추정된다.[43] 대규모 동원 시에는 기병대가 지역 유력자들의 호위대와 전통 공동체(''občina'')에서 모집된 소규모 부대로 보강되었다.

군대의 두 번째 요소는 ''pohotovosť''로, 대부분 전문 전사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구성되었다.[43] 이들은 수적으로 많고 무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주로 대모라바 영토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팽창 전쟁 참여는 드물었다.[43]

군대는 군주가 직접 지휘하거나, 군주 부재 시에는 보예보다가 지휘했다.[44] 군대 최대 규모는 20,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43] 외부 침략 시에는 일반 백성들도 방어 및 교란 작전에 참여했다. 대모라바 방어의 중요 요소는 강력한 요새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군사 조직으로는 포위하기 어려웠다. 프랑크 족 연대기 작가는 라스티슬라프 요새의 규모에 대해 ''firmissimum, ut feritur, vallum''(매우 견고한 성벽)이라고 기록하며 경외심을 표현했다.[44]

서슬라브 족 보병의 대표적인 무기는 ''브라다티카''라고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도끼였다. 창은 보병과 기병 모두 사용했다. 사브르, 반사궁 등 유목 문화(아바르)와 관련된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군사 장비는 서방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날검 같은 새로운 유형의 무기가 9세기 이전에는 드물었지만 점차 인기를 얻었다. 궁수는 이전 시대와 달리 보병의 일부로 편입되었다.[43]

5. 5. 귀족

지방 귀족의 존재는 잘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 자료에서는 "지도자"(''optimates'' 또는 ''primates'')[1], 그리고 ''nobiles viri'' 또는 ''principes''를 언급한다.[2] 그러나 이 문서들은 모라바 족장의 권력 기반을 밝히지 않는다.[2] 명품의 도심 집중은 "중심지를 오갔을 것이 분명한 군주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최상위 엘리트에게 최고의 승리 전략이었음"을 보여준다.[3] 반면에, ''optimates''는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주는 모라바 "공작"으로 구성된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고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4][5]

5. 6. 종교

대모라바 슬라브족은 원래 조상 숭배와 다신교를 믿었다.[51] 모라비아의 기독교화 이전에 사용된 여러 숭배 장소가 모라비아(미쿨치체 및 포한스코)에서 발견되었다.[51] 미쿨치체에 있는 숭배 물건은 9세기 중반 모라비아 엘리트의 복음화까지 사용되었고, 포한스코의 우상들은 10세기 이교도 반동 동안 철거된 교회 부지에 세워졌다.[22] 현대 슬로바키아에서 발견된 유일한 슬라브 이교 신전은 전쟁과 천둥의 신인 페룬에게 바쳐진 브라티슬라바 근처 모스트에 있는 것이다. 이 신전은 9세기 중반에 버려졌다.

기독교 전파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22][52] 대모라비아 영토는 원래 8세기 초부터 프랑크 제국 또는 이탈리아와 달마티아의 비잔틴 월경지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되었으며, 그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22][52] 특히 8세기 말 아바르 카간국의 패배 이후, 프랑크 선교사들이 조직적인 선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영토 대부분은 9세기 중반까지 기독교화되었다. 엘리트들의 공식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모라비아 기독교는 852년까지도 많은 이교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대모라비아의 교회 조직은 863년 비잔틴 선교사 성 키릴로와 메토디우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감독을 받았다.[53]

대모라바 왕국의 성당 건축은 프랑크, 달마티아-이스트리아, 비잔틴, 고전 건축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1960년대부터 슬로바키아에서도 석조 교회가 발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대모라바 왕국의 핵심 영토(모라비아와 서부 슬로바키아)에서 25개 이상의 성당 건물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880년, 교황은 신설된 니트라 교구("sancta ecclesia Nitriensis")의 주교로 스와비아 수도승 비칭을 임명했다.

5. 7. 문학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의 선교는 종교적, 정치적 영역을 넘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기독교 세계의 네 번째 전례 언어가 되었다. 키릴은 슬라브어에 적합한 글라골 문자를 발명했으며, 메토디우스와 함께 최초로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는데, 메토디우스는 나중에 이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그러나 메토디우스 사후(885년)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대모라비아에서 추방되면서 슬라브 전례의 사용은 약 22년 동안만 지속되었다.[55] 이후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마케도니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폴란드 정교회의 전례 언어로 남게 되었다.



메토디우스는 최초의 슬라브 법전을 저술했는데, 이는 지역의 관습법과 진보된 비잔틴 법을 결합한 것이었다. 대모라비아 형법은 단순히 라틴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이전 슬라브 관습에서는 용인되었지만 기독교에 의해 금지된 (주로 성적 행위와 관련된) 여러 범죄를 처벌했다.[56] 교회법은 단순히 비잔틴 자료에서 채택되었다.

대모라비아에서 원래 작성되었다고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은 많지 않다. 그 중 하나는 키릴이 슬라브 전례를 옹호하는 세련된 시인 ''프로글라스''이다. ''키릴의 생애''(오흐리드의 클레멘트의 작품으로 추정)와 ''메토디우스의 생애''(아마도 메토디우스의 후계자 고라즈드가 작성)는 라스티슬라프와 스바토플루크 1세 치하의 대모라비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은 전기이다.

두 형제는 메토디우스가 처음 이끈 아카데미를 설립했으며, 수백 명의 슬라브 성직자를 배출했다. 잘 교육받은 계층은 모든 초기 봉건 국가의 행정에 필수적이었고, 대모라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토디우스의 생애''는 니트라의 주교가 스바토플루크 1세의 재무관으로 활동했으며, 심지어 발라톤 공국의 코첼 공작도 글라골 문자를 익혔다고 언급하고 있다.[52] 대모라비아 아카데미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능한 장소로는 미쿨치체(일부 스타일러스가 교회 건물에서 발견됨), 데빈 성(학교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음), 니트라(주교 대성당과 수도원) 등이 있다.

885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을 대모라비아에서 추방했을 때, 그들은 불가리아 제1제국,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등 다른 슬라브 국가에 자신들의 지식(글라골 문자 포함)을 전파했다. 키릴 문자는 프레슬라프 문학 학교에서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졌으며, 불가리아 제국과 이후 키예프 루스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에서 표준 알파벳이 되었다. 대모라비아 문화 유산은 불가리아 신학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의 길을 열었다. 키릴-메토디우스 문화 선교는 대부분의 슬라브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9세기에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불가리아 제자들(프레슬라프의 나움, 오흐리드의 클레멘트 등)에 의해 불가리아 제1제국에서 만들어진 현대 키릴 문자초기 키릴 문자였다.[57][58]

6. 경제

9세기에 미쿨치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대규모 요새들은 모라바 강과 다뉴브 강이 합류하는 넓은 지역에 있었다.[22] 이 시기에는 다뉴브 강과 호박길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강가 정착지들은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22]

대규모 요새들은 현지인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여러 작은 마을로 둘러싸여 있었다.[22] 이들은 , 보리, 기장 등 여러 곡물을 재배하고 소, 돼지, 양, 말을 길렀다.[22] 이들이 기르던 동물들은 비교적 작았는데, 예를 들어 말은 현대의 프르제발스키 말보다 크지 않았다.[22]

모라비아에서는 일반적인 교환 수단이 증명되지 않았다.[22] 지역 주화나 외국 동전도 희소했다.[22] 비알레코바(Bialeková)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요새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도끼 모양 잉곳(그리브나)은 "사전 통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물건들이 "추가 처리를 위한 중간 제품"으로도 해석되었기 때문에 이 이론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마하체크(Macháček)는 동전이 없었기 때문에 모라비아 군주들이 "세금, 관세, 벌금을 효과적으로 징수"할 수 없었고, 이는 그들의 국제적 지위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22]

철 야금술과 대장간 기술은 지역 산업의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22] 고도로 발달된 도구 생산의 예로는 비대칭 쟁기날이 있다.[22] 모라비아에는 은, 금, 구리, 납 광산은 없었지만, 보석과 무기는 지역에서 생산되었다.[22] 이들의 주요 재료는 전리품이나 선물로 획득하거나 상인들이 모라비아로 운반했다.[22]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비단, 브로케이드, 유리 그릇을 포함한 명품이 수입되었다.[22]

슈테판(Štefan)[22]과 마하체크(Macháček)[22]에 따르면, 모라비아인들은 주로 인근 지역을 습격하여 포로로 잡은 노예를 이러한 사치품과 교환했다. 예를 들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티트마르(Thietmar)는 판노니아(Pannonia)에서의 작전 중에 모라비아인들이 "귀족과 정직한 여성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22] 노예 무역은 잘 기록되어 있는데, ''나움의 첫 번째 전설''은 885년 이후 많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돈을 받고 유대인에게 팔렸다"고 전하며, ''라펠슈테텐 관세 규정''은 모라비아에서 서쪽으로 보내진 노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2]

9세기 전반기에 대모라바 장인들은 동시대의 카롤링거 왕조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22] 9세기 후반에 대모라바 보석은 비잔틴 제국, 동지중해, 아드리아 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22] 그러나 체코 고고학자 요세프 풀리크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와 기술은 수동적으로 모방된 것이 아니라, 지역적 언어로 변형되어 독특한 대모라바 보석 양식의 뿌리를 확립했다."라고 설명했다.[22] 전형적인 대모라바 보석에는 섬세한 세립[필리그리]로 장식된 은색과 금색 귀걸이, 잎사귀 장식으로 덮인 은색과 금박을 입힌 청동 단추 등이 포함되었다.[22]

미쿨치체에서 발견된 은제 십자가

7. 유산

대모라바는 19세기 체코와 슬로바키아 낭만주의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주제였다.[61]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가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비잔틴 이중 십자가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상징 중 일부이며, 슬로바키아 헌법은 전문에서 대모라바를 언급한다. 19세기 민족 부흥의 결과로 그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대모라바의 역사는 중앙 유럽의 여러 슬라브 민족의 문화적 뿌리로 여겨졌으며, 20세기에는 단일 체코슬로바키아 정체성을 만들려는 시도에 활용되었다.[61]

고고학 연구와 지명은 내부 서 카르파티아 산맥의 강 계곡에서 슬라브 인구의 연속성을 보여준다.[69][70] 대모라바 핵심 영토의 동부는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공국의 북서쪽 국경은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거나 드문드문 거주하는 땅이 되었고, 13세기 중반까지 변경 주로 유지되었다.[72] 나머지는 지역 슬라브 귀족이 통치했으며,[62] 14세기에 헝가리 왕국으로 점차 통합되었다.[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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